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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①일본에 관해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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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1,862회 작성일 14-09-16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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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①일본에 관해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김갑수 | 2014-9-11 12:54


나는 근·현대사를 제제로 한 장편소설을 다섯 권 탈고했다. 이 중 세 권(압록강을 넘어서, 중경의 편지, 전쟁과 운명)은 출간했지만 8·15 이후를 다룬 두 권은 아직 남아 있다. 마침 평화연대 주관으로 7회에 걸쳐 근·현대사 강연 일정이 잡혔다. 그런데 내가 읽은 근·현대사라는 것이 좀 지나간 것, 즉 5~15년 전 것들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이 가을에 다시 역사를 읽기로 했다. 여러분과 내가 공부한 것을 공유하기로 한다.<필자 주> 


일본에 관해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와 한국과의 관계는 신대(神代) 무렵부터 시작되었는데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삼한을 정벌함에 따라 여기를 복종시켰고 히데요시가 출병하여 일본의 강함을 보여 주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국교를 맺었으며, 나아가 보호국으로 삼았는데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 황제는 국토를 메이지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께서는 동양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것을 받아들이셨고, 한국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싸우지 않고 영토를 넓힌 것은 천황의 인덕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것은 일본 쿄토 인근 미야케하치만 신사 경내에 있는 한국병합봉고제비 비문의 주요 내용이다. 1910년 일본인들은 한국을 병합한 것을 자축하는 행사를 벌이고 이것을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이를 천황에게 아뢰는 제사를 올린 것이다.
 
일본인들은 고대의 진구황후 전설에 근거하여 삼한병합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1910년의 일한병합을 조선인의 자원에 의한 것으로 기술함으로써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문장을 만든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 모두 당시 일본에서 상당한 권위를 지니고 있던 역사학자와 정치인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터무니없이 왜곡, 조작된 역사를 아직도 일본인 다수가 사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일본 정치인들일수록 더 심하게 표출된다. 그런데 일본 정치인들이 무뇌아가 아닌 이상 자기 나라의 침략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일본 지도자의 발언 가운데 가장 진일보한 것으로 꼽히는 것이 종전 50주년인 1995년에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다.

“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책을 그르쳐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하여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의심할 바 없이 이런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다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으로부터 사죄하는 감정을 표명합니다.”

1995년 당시 한국의 신문들에 의해 일본 수상이 ‘통석의 염(痛惜의 念)’을 표명했다고 대서특필된 이 담화에서 무라야마는 제 나름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인정, 사과했지만. 정작 1910년 일한병합의 불법성 여부를 묻는 구체적인 질문에는 끝내 말문을 흐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일본이 조선을 빼앗은 것이 부도덕한 침략 행위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한합병조약의 불법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한 술 더 떠 요즘 일본 정치인들은 무라야마 담화조차도 재론하기를 주저하면서 아예 침략 사실 자체도 시인하지 않는 쪽으로 바뀌고 있으니 이것은 또 뭔 일이라는 말인가?

일본인들의 망언이 있을 때마다 한국인들은 총궐기(?)한다. 침략 부인이건 위안부건 독도건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들은 외친다. ‘망언을 규탄한다’고. 한국에서 국론이 일거에 일치되는 것은 오직 이때뿐이다.

종편에서 조중동 한경오 민중의 소리에 이르기까지, 새누리에서 민주당 통합진보당에 이르기까지, 할배 일베 시국회의 민권연대 심지어 여성단체에 이르기까지 허구 헌 날 똑같은 것을 부르짖는다. ‘일본군국주의 책동을 저지하자’
 
이 단순함, 이 일시성, 이 피상성 그리고 이 동어반복성을 반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본을 극복하지 못한다. 아니 식민지 청산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또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왜 일본이 저러는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은 채, 고작 한다는 말이 독일은 반성하는데 일본은 안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프랑스는 청산했는데 대한민국은 안 한다고도 말한다. 어느 누구도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연구하지 않는다. 연구하지 않으므로 말하지도 못한다.
 
설익은 대로 나는 말하여 한다. 조선은 왜 망했는가? 일본은 왜 조선 침략을 부인하는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은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면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 침략을 시인케 하고 군국주의 부활을 염두에도 두지 못하게 할 방법은 없는가? 그것을 한다면 누가(어느 나라) 적임자일까? 일본이 앞으로도 동아시아의 중심국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지금까지 중심국가이기는 했는가도 말할 것이다. 이전에 일본은 정상국가인지를 논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조선이 망한 이유를 조작하지 말라!
 일본은 서양 패도의 앞잡이에 불과”

오늘날 중국의 국부로 추앙 받는 쑨원(孫文)은 1924년 고베에서 행한 강연 ‘대아세아주의’에서 “일본은 서양 패도의 앞잡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동양 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가?”라고 물었다. 3·1항쟁 때의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조선의 독립(토록 하는 일)은 일본이 사악한 길로부터 나와 동양을 지탱하는 나라로서의 중책을 다하게 하는 일’이라는 언명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 패도의 앞잡이 역을 포기하지 않았고 특히 조선을 결코 놓치려 하지 않았다. 대미전쟁에서 일본 군부가 마지막까지 항복을 거부한 것은 기실 조선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와 군부가 패전의 막바지까지 골몰했던 것은 조선반도를 영토로 확보하는 일이었다.

일본이 소련에 평화교섭 중재를 요청했을 때의 조건도 이것이었으며, 만주국 주둔 관동군의 최종 배치 역시 조선반도 확보를 목표로 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일본의 조선 욕망이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새삼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일본은 드넓은 만주와 대만과 동남아시아를 포기하면서도 왜 조선만은 포기하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바로 이 의문을 푸는 것은 조선이 왜 망했는가를 규명하는 일과도 맞물려 있다.
 
나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크게 왜곡된 역사는 근·현대사가 아니라 조선사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조선이 못나서 망했다고들 한다. 좀 유식하게 말해서 ‘조선은 자체 모순으로 망했다’라고도 한다. 아니면 ‘일본이 잘 나서 조선을 먹었다’고들 한다. 좀 더 유식하게 말해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조선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단언하자면 이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정확한 역사 인식이 아니다.
 
조선은 동학과 의병전쟁에서 5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냈다. 조선의 관리 학자들 중에서 자결로 항일한 사람의 숫자는 부지기수로 많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은 일한병합을 고시한 조칙에 끝내 서명을 하지 않았다.(일본인들은 강탈한 국새만을 찍었을 뿐이다.) 속된 말로 해서 조선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한 예로 신분사회라는 이유로 조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신분’이란 말 자체가 조선에는 없던 말이다. 우리는 이 말이 일본에서 수입된 어휘라는 점으로 신분사회를 가지고 조선을 비난하는 논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암시 받을 수가 있다. 세상에 신분사회 아닌 나라가 어디 있었나?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근대적 법 제도를 이식시키기 위해 우메 겐지로를 시켜 민법 등을 제정하는 사전조치로서 구관조사(舊慣調査)를 실시토록 했다. 그 의도는 근대법인 일본 민법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근대법에 적합하지 않은 구관을 조사한 다음 조선 독자의 민법을 만들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조사를 진행해 보니 이러한 예상은 빗나가 근대적 소유권과 매우 유사한 토지 소유권이 이미 조선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미야지마 히로시 논문, <일본사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다음은 우메 겐지로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낸 보고서의 일부이다.
 
“현재로서는 일반적으로 토지 소유권을 인민에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어 보이며 (중략) 요컨대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조선의 인민에게는 적어도 수백 년 전부터 인정되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부르스 커밍스가 조선을 ‘농업관료사회’라고 규정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더 이상 조선을 봉건사회라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학사관임과 동시에 식민사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이 ‘잘난 조선’은 망한 것일까? 지면상 다음 회에 논의하기로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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