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식의 '핵과 인간'] 한국전쟁, 두 예방 전쟁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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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예방 전쟁은 적이 더욱 강해져서 나를 위협하는 상황을 사전에 막기 위해 벌이는 전쟁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공격이 확실히 임박했을 때 자위적 차원에서 적을 먼저 공격"하는 선제공격과는 다른 개념이다. 북진통일을 공언했던 이승만에 맞서 먼저 남침을 강행한 김일성의 판단도 예방 전쟁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김일성-마오쩌둥-스탈린은 미국 주도하에 일본-한국-대만을 잇는 동아시아 반공 블록이 구축될 경우 전쟁은 시간 문제가 될 것으로 보고, 선제 남침을 통해 미래의 큰 전쟁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소련이 주도할 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간주하고, 한국전쟁 개입을 3차 대전의 예방 전쟁으로 간주했다.
'일본 위협론'과 북-중-소의 남침 결정
먼저 공산 진영의 예방 전쟁론을 살펴보자. 토마스 크리스텐센은 미국의 일본 점령기에 "미일 안보동맹을 추진했던 것이 공산 진영에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동북아의 불안정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1949-50년에 싹트기 시작한 미일동맹의 맹아가 한반도와 관련해 소련과 중국의 계산에 영향을 미쳐 (김일성의 남침 승인이라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미군이 일본, 한국, 대만 등에 주둔하고 일본마저 재무장을 할 것이라는 공산 진영의 판단은 북한-중국-소련의 공산 동맹의 결속을 야기했고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게 대규모의 군사 원조를 제공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1949년까지 소련과 중국의 북한 군사 원조는 일본의 재무장 및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반공 동맹 출현 가능성에 대비한 "방어적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1950년에 들어 "국제적인 환경"이 공산권에 유리하게 전개하자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예방 전쟁'의 맥락에서 김일성의 남침 요구를 수용ㆍ지원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공산 진영이 1949년 주한미군의 철수를 한반도 통일의 기회이자 또 다른 위협의 시작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북진통일을 공공연히 주창했던 이승만이 일본의 지원을 업고 북한을 공격할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실제로 1949년 초여름, 남한의 북한 공격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공산 진영에 팽배했다. 비밀 해제된 소련 문서에 따르면, 북한의 지도자들은 소련과 중국에게 미군 철수 이후 남한과 일본의 공격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스탈린 역시 "미국의 지원하에 일본이 재무장하고 장차 한국을 군사기지로 삼는다면, 소련의 극동 지역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오쩌둥 역시 이러한 우려를 공유하고 있었다. 평양발 소련 외교 전문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1949년 5월 15일 북한 특사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반도 전쟁은 빨리 끝날 수도 있고 장기화될 수도 있습니다. 장기전이 될 경우 일본이 개입해 남조선을 도울 것이기 때문에 북조선에게 이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에게는 소련이 있고 또 만주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우리는 은밀히 우리의 군대를 보낼 것입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우려를 군사 원조 확대 및 남침 동의를 받아내는 데 지렛대로 활용했다. 1949년 초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에는 약 1천명의 군사고문단 잔류와 함께 대규모의 군사 원조를 받아냈다. 곧이어 중국에게는 국공 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인 군대의 송환을 요구했고 마오쩌둥은 1949년 2개 사단을, 그리고 이듬해 1월에는 추가적으로 1개 사단을 북한에 보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엇박자가 존재했다. 마오쩌둥은 북한의 '방어' 태세 강화를 위해 그들을 보냈지만, 김일성의 머릿속에는 이들을 앞세워 '남침'을 감행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돌아온 이들 3개 사단은 남침의 선봉에 섰다.
스탈린에게 보고된 남한 정세 정보도 김일성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남침 승인 결정을 내리기 직전이었던 1950년 1월 하순, 스탈린은 이승만이 미국의 안보 공약이 약해지는 상황에 대한 대비책으로 일본과 더욱 긴밀한 협의를 모색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는 스탈린의 전략적 우려를 더욱 자극한 내용이었다. 한국-미국, 미국-일본의 양자 관계에 이어 한국-일본 협력구조까지 탄생하면 한-미-일 반공 동맹의 형성될 것으로 봤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스탠리(Elizabeth Stanley)에 따르면, 소련의 강경파들도 김일성과 유사한 판단을 갖고는 스탈린에게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스탠리는 "소련 강경파들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소련과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을 겨냥한 '군사적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 아시아에서 소련의 이익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공산 진영이 생각했던 만큼, 일본의 재무장 수준도, 한-미-일 간의 군사적 결속도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발판 삼아 아시아 공산국가들을 공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감행한 남침은 공산권이 방지하려고 했던 목표, 즉 일본의 재무장 강화와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동맹 체제의 강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미국 정부는 북한의 남침을 일본 안보의 치명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일본 재무장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도 예방 전쟁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트루먼 행정부가 북한의 남침 직후 한국전쟁 개입과 함께 대만 해협에 7함대를 파견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국의 대미 인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미국이 한국전쟁 이전에는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대만 해협에 7함대를 파견한 것을 목도하고는 미국의 의도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강하게 가졌다. 미국이 대만 문제에서처럼 한반도에서도 언제든 정책을 선회할 수 있다고 간주한 것이다. 둘째는 미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좌시할 경우, 중국은 장차 대만과 한반도라는 2개의 전선에서 미국을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맥아더가 1950년 7월 3개 전투 편대와 함께 대만을 방문해 미국 내 온건파들을 유화주의자, 패배주의자로 비난하면서 "만약 우리가 대만을 방어한다면, 우리는 중국 본토를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중국의 이와 같은 전략적 불안을 자극했다. 이에 따라 마오쩌둥은 언젠가 미국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면, 한반도를 전쟁터로 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한국전쟁 당시 국제뉴스서비스(INS) 소속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당시 상황을 컬러 사진으로 촬영해 보관하다 지난 2008년 워싱턴 주미대사관 문화원 코러스하우스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 존 리치(90) 전 NBC 방송사 부사장이 촬영한 사진. 불에 타고 있는 한 공장의 모습을 미군들이 지켜보고 있다. ⓒ뉴시스 |
미국 "한국전쟁은 3차 세계대전 예방 전쟁"
한편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을 통해 한국을 극동방어선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미국은 그 해 6월 25일 북한이 기습적이고도 전면적인 남침을 가하자 신속한 개입을 선택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즉각 유엔 안보리를 소집해 북한의 남침을 "평화의 파괴"로 규정했고 6월 27일에는 대통령 담화를 통해 남한 방어를 위해서 미군을 투입하고, 중국의 대만 공격을 억제하겠다는 이유로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직전까지 남한의 전략적 가치 및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낮게 봤고 양안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뜻일 내비친 것에 비춰볼 때, 전격적이고도 신속한 결정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소련이 북한에게 남침을 지시하는 것은 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인데 소련은 그럴 준비가 안 돼 있었다고 간주했었다. 이러한 미국의 판단은 북한의 외교술 및 남침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근거로 작용했다. 그런데 동시에 '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판단은 북한의 남침 직후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이유가 되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이 벌일 '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천명한 데에는 트루먼이 밝힌 공식적인 이유, 즉 "공산군의 침공은 유엔 헌장의 위반이자 국제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도발"이라는 이유 외에도 미국 내부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 공화당은 애치슨 라인 발표를 전후해 트루먼 행정부가 중국의 공산화를 방치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 나약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이러한 공화당의 안보 공세는 매카시즘 광풍과 맞물려 트루먼 행정부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트루먼에게 북한의 남침은 이러한 정치 공세를 무마할 수 있는 기회였고, "트루먼은 그 기회를 잡았다." 이를 반증하듯, 트루먼이 신속한 개입 의지를 발표하자 그의 지지율도 크게 올라갔다.
애치슨이 아시아 방어선에 한국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 미국의 보수파들은 북한의 남침에 "청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반발했지만, 정작 맥아더조차도 1949년 3월 인터뷰에서 미국의 방어선은 필리핀-오키나와-일본 열도-알류산 열도-알래스카로 이어진다고 말했었다. 당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본 것은 군부를 포함한 미국 행정부 전체의 분위기였고, 공화당계 인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것은 "그들 자신의 정책을 무시한 것"이었다는 키신저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전략적 배경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지도부가 이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간주했던 이유가 자리잡고 있다. 트루먼은 "우리 세대에 강자가 약자를 공격한 것은 한국전쟁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만주, 에티오피아, 오스트리아 등 이전의 몇 가지 사례를 떠올렸다. 공산주의자들은 10년, 15년, 20년 전에 히틀러, 무솔리니,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에서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의 반격 없이 한국에서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것을 좌시할 경우, 어떤 작은 나라들도 공산국가들의 위협과 도발에 저항할 용기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한국전쟁을 방치할 경우 "2차 대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애치슨 국무장관도 "우리는 진짜 적인 소련이 뒤에 숨어 있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했고,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한국전쟁은 3차 세계대전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한 예방적 제한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당시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배경에는 "자유 진영"의 강력한 반격이 없으면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강하게 깔려 있었다.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을 결정한 것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강렬한 트라우마"가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 워싱턴의 정책결정자와 맥아더의 눈에는 북한의 남침이 소련의 양동작전(陽動作戰)으로 비춰졌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부추겨 남한을 공격하는 한편, 유럽이나 중동에서 또 다른 침공 계획을 갖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스탈린의 무력을 앞세운 공산화 시도의 기를 꺾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할 강력한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유럽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 스탈린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반영하듯 북한의 남침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전지구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한반도 참전은 물론이고 대만 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했다. 또한 필리핀의 게릴라 소탕 작전을 지원하는 한편, 인도차이나에서 민족공산주의 집단인 베트민과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했다. 북한이 남침한 지 4일 후에 C-47 수송기가 태평양을 건너 인도차이나로 향했는데, 이를 두고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훗날 깊어만 갈 미국의 우울한 모험을 알리는 서곡"이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2차 대전 당시 동맹국이었고 대일전에도 참여했던 소련을 제외시키고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로 했는데, 이는 일본을 대소 봉쇄의 동아시아 교두보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소련을 제외한 48개국의 연합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년 9월 8일 조인, 52년 4월 8일 발효)을 체결했다.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이 있고 이를 스탈린이 벌일 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확신한 트루먼은 나토 강화와 독일 재무장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 직전 나토 회원국들 전체의 군사비는 GDP 대비 5.5%였지만, 전쟁 직후에는 12%까지 치솟았다. 스탈린이 그토록 우려한 서독의 재무장에 미국이 박차를 가한 결정적 계기도 한국전쟁이었다. 무엇보다도 트루먼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에 행정부 내 강경파들이 작성·권고한 NSC-68를 승인했다. NSC-68은 전세계의 공산주의 봉쇄와 소련과의 일전을 겨냥한 대규모의 군비증강 프로그램이었다. <AP> 통신의 지적처럼,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지속적인 위기를 가져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영원히 지구적 군사 패권 국가를 지향하게 만든 전쟁"이었던 것이다.
<주요 참고문헌>
Tomas J. Christensen, Worse Than A Monolith(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1).
Henry Kissinger, On China (Penguin Press, 2011).
Trent A. Pickering, A Nuclear Dilemma--Korean War Deja Vu, USAWC STRATEGY RESEARCH PROJECT(2006).
Shen Zhihua, "Sino-Soviet Relations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Stalin's Strategic Goals in the Far east," Journal of Cold War Studies(Spring 2000).
윌리엄 스툭 지음, 김남균 외 옮김, 『한국전쟁의 국제사』 (푸른역사, 2001년).
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
우드로 윌슨센터 냉전사 기록실: http://www.wilson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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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역사님의 댓글
역사 작성일
이후의 자료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소련이나 중국이 북한을 사주하여
남한을 공격하게 된 것이 아니고 북한 자체로 소련/중국의 힘을 빌려
한반도를 일찌기 통일하려 의도한 공격이었음이 근래에 알려졌습니다.
여러 시각이 있으니 과연 어느것이 당시의 진실인지 알기가 어렵지만
지금까지의 경과로 보면 중국이나 소련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북한의 통일의지를 이용했다는 시각은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후에 모택동과 김일성의 교류관계를 보면 이를 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대규모 공격은 해방후 갈라지려는 나라를 통일하고자 한 의도라고 보는 것이 좋겠으며
만약 북한이 공격하지 않았다면 남한이 결국 북쪽으로 전면적 공격을 해나갔을 것인가는
이승만 등이 써놓은 일기를 보기전에는 알 수가 없겠습니다.
애치슨 라인까지 그었던 미국이고보면 미국은 한반도의 남쪽에 자신들의 꼭둑각시
이승만 정권을 세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후의 경과로 미루어 개인적 시각으로 판단해 보기에는, 만약 북의 공격이 없었다면
이승만은 별다른 통일의지 없이 정권유지를 위한 국지적인 전투만을 지속하면서
당시 이미 어렴푸시 갈라져 있는 남한 국경내에서의 정권 정립에만 주력해 나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과 비슷한 상황에서 갈라진 월남 등 다른 나라들의 예에서 이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패권국가에 빌붙지않은 같은 민족주의 세력이지만 월남의 호치민은 그 의지를 이루었고
조선의 김일성은 불행히도 당시 통일에 실패한 것이라 보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