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益烈장군 실록유고 - 4‧3의 진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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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귀순‧화평 회담 ①
그때의 판단으로는 폭도의 조직이 여럿인지 단일 조직인지, 지휘자가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간 두목으로 지목된 수많은 이름이 명단에 올랐고 또 자칭 우두머리라는 자도 많았다. 나는 우리의 회담당사자는 ①전도의 폭도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실력과 권한을 가진 자라야 된다 ②본인이 직접 나와야지 대리인은 안된다 ③회담에서 결정한 사항은 즉석에서 결정되고 실행되어야지 타인(다른 실력자)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자는 만나지 않겠다는 등 이상과 같은 조건을 내세웠다.
한편 폭도측에서는 ①연대장이 직접 회담에 나와야 한다 ②연대장 혼자서 와야지 수행인이 2인 이상이면 안된다 ③장소와 시일은 자기들이 결정하되 장소는 폭도진영이라야 한다고 못박았다. 즉 동등한 입장에서 연대장과 자기네 본부에서 1대 1로 그것도 폭도들의 본부에서의 회담이고 보니 나는 자존심이 상했고 다구나 군대의 권위를 얕잡는 것 같아 불쾌했다.
그러나 나는 유혈을 최소화하고 이 폭동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벙법이라면 물불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결심하였다. 그래도 문제는 남아있었다. 적의 본부에 연대장이 단신으로 갔다가 폭도들이 배신해 내가 살해될 경우 군이 받을 타격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물론 군지휘관의 전사는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지휘관이라면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 군문(軍門)의 상도(常道)이다. 그러나 당시 연대장인 내가 죽는다면 9연대는 후임 연대장이 부임하여도 당분간은 전투가 거의 불가능한 형편에 있었다. 나만큼 부대실정에 밝고 실제 지휘경험이 있고 제주도의 지형과 실정을 잘 아는 지휘관은 전군을 통틀어 없었다.
참모들은 폭도들이 바로 이런 사실을 알고 연대장을 유인 살해하기 위해 기만술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나도 그 점을 부인 못했다. 그러나 폭도들은 그들대로 지휘자의 피살 위협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므로 사정은 양측이 마찬가지였다. 나의 참모들은 회담장소를 쌍방이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중간지점에서 1대 1로 회담하자는 등 여러가지 안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폭도측은 우리가 파놓을 지도 모를 함정을 우려하여 자기들 진영에서의 회담을 고집하였다.
드디어 나는 폭도들의 요구조건을 전부 수락하고 홀로 적지에서 회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연대장과 폭도두목과의 평화회담의 날짜가 4월 말로 결정되었다. 장소는 경비대의 기습을 우려하여 폭도들이 회담 2시간 전에 통지하여 자기네 사람이 비밀장소로 안내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맨스필드 대령에게 보고하고 상세한 지시를 요청했다. 당시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경찰의 패전과 무능력에 실망하고 있었고 장차 자기에게 떨어질 상부의 문책을 염려하던 중이었으므로 희망과 용기를 되찾아 회담에 임하는 요령 등을 즉시 나에게 알려왔다.
그의 지시 내용은 ①제9연대장 김익렬은 폭도와의 평화회담에 필요한 일체의 권한행사에서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을 대리한다. 폭도들의 살인 방화 등 범법자에 대한 재판에서 극형을 면할 수 있는 사면의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며 기타 범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서면으로 조인된 모든 약속의 이행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이 책임진다 ②우리측의 요구조건은 △즉시 전투중지 △무장해제 △범법자의 자수와 범법행위의 장소‧일자‧범행자 명단의 작성 제출이었다(이 명단의 작성은 여기에 등재된 자 이외에는 모든 폭도들을 불문에 부쳐 수사‧심문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자유로이 귀가하여 생업에 종사토록 보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과 군사고문 드루스 대위로부터 지침을 지시받고 오래간만에 모슬포에 있는 연대본부의 숙소로 돌아왔다. 최후가 될 지 모르는 저녁을 가족들과 같이 지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가족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므로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폭도와의 이 회담이 성공해서 연대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반반으로 보았다. 폭도의 두목이 과연 약속을 이행할 만한 인격자인지, 연대장을 유인 살해하고 자기명성을 올리기 위한 기만행위는 아닌지 -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살인‧방화를 저지르고 경찰의 생명마저 빼앗은 반란자의 소굴에 홀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일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정상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참모들이 극력 반대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고집할 이유와 확고한 신념과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①성공하면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 ②만일 폭도들이 평화를 희구하는 나를 살해한다면 제주도민들이 폭도들을 원망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최소한 폭도들을 제주도민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다는 것 ③당시 9연대 장병들은 폭동발생의 원인을 알고 있었으므로 폭도에 대한 적개심이 덜했다. 그러나 만일 동족간의 유혈을 막으려던 내가 살해되면 폭도들의 본색이 드러나고 전 장병의 정의감과 적개심에 불을 당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명분있는 모험은 후배장병들의 교훈을 위하여서도 청년장교로서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저녁이 끝나고 가족이 모두 잠든 것을 보고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생후 6개월된 장남 성우(聖宇)의 잠자는 모습을 들여다 보며 내일 회담에서 해야할 일을 숙고하고 만일을 위하여 상관‧친구‧처자‧형제에게 남기는 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만일 내가 죽고 못돌아올 경우 대처할 부대의 작전행동 등을 기록해 두었다. 유서를 쓰다보니 생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약한 마음과 공포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 마당에 명예를 생명으로 하는 군인으로서 일체의 잡념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을 고쳐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아침에는 평소와 같이 출근을 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내는 평소와 같이 나를 전송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르는 출근이고 보니 몇번씩이나 처자를 뒤돌아보게 되었지만 기색은 나타내지 않고 태연히 부대로 출근하여 폭도들로부터 연락오기를 기다렸다.
오전 11시께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가 폭도들의 연락을 가지고 왔다. 시간은 오후 1시이며 장소는 폭도들이 안내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연대의 전장교와 하사관을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처음으로 오늘 회담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나는 전장병에게 동요치 말고 군무에 전념하라고 당부를 하고, 만일 폭도들이 공산주의를 앞세워 우리들의 애국애족하는 충성심을 외면하고 연대장인 나를 살해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민족반역자이니 남은 장병들은 철저히 공산폭도를 타도하고 전멸시켜 나의 원한을 갚고 나의 영혼을 위로하여 달라고 훈시하였다. 장병들은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맹세하였다. 그리고 나서 내가 죽을 경우 나를 대행할 지휘관을 결정했다. 그리고 내가 오후 5시까지 귀대하지 않으면 살해된 것으로 판단하고 전투작전을 개시하라고 지시하였다. 12시 정각 나는 장병들이 도열한 사이를 걸어서 정문을 나섰다.
13. 귀순‧평화 회담 ②
수행자는 지프운전병과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 이렇게 3명이었다(이윤락씨는 박경훈씨도 동행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 편집자). 날씨는 청명하고 산야는 완전히 녹색으로 물든 가운데 군데군데 철쭉꽃이 만발하였다. 제주도의 자연은 평화스럽기만 하였으나 사람들은 원한과 증오로 들끓고 있었다.
부대를 나온 우리는 대정면 면사무소를 지나 곧장 산길도로를 따라 한라산을 향했다. 부대에서 직선거리 약 15Km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곳은 연대본부가 내려다 보일 정도로 높은 고지 부락이었다. 소를 몰던 목동이 돌연 소로 지프를 가로막아 제지한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연대장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황색기를 흔들며 신호를 하고는 국민학교로 가라고 안내했다. 이 학교는 제주도에서 제일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는 산간부락 국민학교였다(九億국민학교 - 편집자). 학교의 위치는 한라산의 밀림지대가 동북으로 지척지간에 있으며 동남으로 중문면 일대에서 해안선까지, 서남으로는 대정면 일대와 모슬포까지 특히 9연대의 영내가 육안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이렇게 조감할 수 있는 지점이었으므로 폭도들은 내가 부대를 출발할 때의 전후 광경을 일일이 관측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지프를 학교쪽으로 몰았다. 학교 정문에는 2명의 보초가 입초하고 10여명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다. 보초는 구 일본군식으로 나에게 거총의 예를 하며 통과시켰다. 그들의 복장은 구 일본군복‧일반농민복‧작업복, 여자는 치마저고리 등 가지각색이다. 정문의 보초들은 일본군복이었다. 학교는 1백명 내지 2백명을 교육하던 곳으로 조그마했다. 내가 학교 안에 들어서자 교정과 학교 주변에 있던 5백~6백명으로 보이는 폭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집중했다. 나는 차에서 일어서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그들에게 인사의 표시를 했다. 그러나 폭도들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굳은 얼굴이었다. 나의 손짓인사에 당황한 듯 어떤 사람은 손을 흔들다 그만둔다. 대부분은 굳은 자세 그대로였다. 나는 현관 앞에서 차를 내려 안내자의 인도로 어느 실내로 들어섰다. 7~8평 되는 햇볕이 잘 드는 일본식 ‘다다미’ 방이었다. 아마 교장의 내실인 듯 싶었다. 가구도 다 있었는데 이외에도 이런 산간에서는 보기 드문 꽤 훌륭한 실내장치고 가구들이었다. 다다미방 중앙에는 예쁘장한 탁자가 놓여져 있었다.
방에 들어서니 5~6명의 폭도들이 나를 맞았다. 그 중에서도 미목(眉目)이 수려하고 작지않은 체격(1백70cm)을 한 나와 동년배 쯤 되어 보이는 미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앉기를 권한 후 자기가 대표자이며 이름은 김달삼(金達三)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방문에 감사했다. 유창한 서울 표준어를 사용해 나는 이 자가 서울사람이 아닌가했다. 서로 좌석이 정해지고 인사가 끝나자 담배와 차를 나에게 권한다. 담배는 미제 ‘럭키’였고, 차는 일본녹차였다(이윤락씨 증언은 ‘미제 담배’를 부인하고 있다 - 편집자). 나는 김달삼의 인물을 살펴보았다. 안색은 하얗고 홍조를 띤 것이 여자가 옅은 화장을 한 것 같았다. 눈썹은 검고 뚜렷했고 눈‧코‧귀 한군데 빠짐없는 미남형이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만한 청년이었다. 또 대단히 겸손했고 침착하게 보였다. 그밖의 인물들은 거의 나이가 사오십을 넘긴 자들이었다. 햇빛에 탄 검은 얼굴들에 주름살이 드문드문했고 한결같이 무식하고 교활하여 보였다. 그들은 줄곧 눈을 내리깔고 곁눈으로만 나를 흘끔흘끔 노려 보았다. 대조적으로 김달삼은 ‘군계일학’이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연소한 이 김달삼이 사오십이 넘은 중년괴한들을 지배하는 자로는 믿기 어려웠다. 이자가 서울 표준어에 능하고 달변인 점을 이용해 로봇으로 내놓은 것이고 실권자는 이 중에 따로 있겠지 -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들의 동태를 탐색하고 있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김달삼을 보고 “당신이 진짜 김달삼이고 실권자냐”고 물었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하느냐”하고 반문했다. 나는 “하도 미남이고 영화배우같아 내가 상상하던 살인을 하는 무지무지한 사람같지 않다”고 하였다. 김달삼은 미소만 지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김달삼은 곧 나에게 당신의 질문의 요지를 알겠다며 사람은 애국심과 정신이 중요하지 나이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 자기가 확실한 실권자라는 것을 암시했다.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탐색을 계속하고 있는데, 인상이 험하게 생긴 자 하나가 돌연 성난 목소리로 나의 허리에 찬 권총을 가리키며 “약속이 비무장인데 어찌하여 무장을 하고 왔느냐”며 회의 중에는 권총을 자기들이 보관할테니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당신들은 왜 그리 겁이 많으냐. 당신들 수백명이 이 권총 한자루가 그리 무서우냐. 이 권총은 군인들이 비겁한 자에게 배신을 당했을때 자기의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한 자살용이니 그리 염려말라”고 했다. 김달삼은 즉시 그 자를 제지하면서 무례를 나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김달삼은 이제 회담에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여기까지 찾아오면서 피곤도 하고 여기가 하도 경치가 좋으니 잠시 구경을 하고나서 회의를 하여도 시간이 충분하겠다”는 말로써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회의할 기분이 안난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그 방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밖에는 수십명의 폭도들이 무장을 하고 2~3m 간격으로 순찰을 하고 학교 운동장에는 5백~6백명의 폭도들이 밀집하여 있었다. 순찰하는 자들은 실내에서의 우리들의 행동을 들여다 보곤 하였다. 나를 위압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미소를 지으며 순찰자들에 손을 흔들며 수고한다는 뜻을 표했다. 교정에 모인 폭도들은 대부분이 농민 청년 남녀이며 여자가 과반수는 될 것 같았다. 무기는 미제 카빈이 많았고 일부는 구 일본군 99식 소총이었다. 전부 합하여 2백명 정도가 무기를 가졌고 그밖에는 비무장 맨손이었다. 실내에 있는 우리는 약 1시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회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잡담을 하고 있었다. 잡담을 하다가 보니까 창밖에서 순찰위협을 하던 폭도들은 어느 새 간 곳이 없다. 아마 김달삼이 중지시킨 모양이었다. 잡담중 나는 교정과 창밖에 있는 폭도들에도 내 말이 들리도록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였다. 잡담의 내용들은 산에서의 의식주가 불편하지 않으냐, 서로의 통신은 어떻게 하길래 연락이 그토록 정확하고 신속하냐, 보급은 충분하냐 등등이었다. 겉으로는 잡담하듯 했지만 의중은 상대방의 진의를 탐색하는 불꽃튀는 이야기들이었다. 김달삼은 ‘만사가 OK’라고 허세를 부리며 고정(苦情)은 일절 말하지 않았다.
14. 귀순‧평화회담 ③
나도 허세를 부려 경비대 제9연대가 지금까지 전투를 개시하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김달삼은 그것은 군대가 자기들이 궐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을 알고 있으므로 장병들이 자기들에게 동정과 호의를 갖고 있고 그래서 상부에서도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나는 “군대는 개인의 뜻에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한다”고 말하고 만일 오늘 회담이 결렬되면 다음 번에는 당신과 나는 전투장에서 상봉하게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내가 경찰과 당신들의 교전상황을 관전하여 보았더니 석다(石多)의 제주도에서 돌담을 방책으로 하는 사격전은 피해가 많고 효력이 없는 것을 알았소. 나는 돌담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박격포가 제일 좋은 무기인 줄 깨달았소. 그래서 상부에 신청을 하였더니 박격포 부대를 파견하여 주겠다기에 그 부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하고 엄포를 놓았다. 그 당시 9연대는 물론 전경비대를 통틀어 박격포는 단 1문도 없었다. 그것은 허세를 부려 위압을 하여 본 것이었다. 김달삼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하였다. 이런 허세의 잡담은 서로가 반신반의하며 주고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 긴장된 분위기가 풀리기를 기다려 회담을 시작하였다.
김달삼은 먼저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하여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연대장이 개인자격으로는 이런 회담에 참가할 권한이 없는 법이다, 1차서부터 4차까지의 회담(김익렬‧김달삼 회담에 앞서 시도됐던 4차례의 회담. 이 회담의 실패과정은 앞에 이야기된 바 있다 - 편집자) 제의 때와 같이 미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라고 설명하여 주었다. 김달삼은 “그러면 회담이 된다”며 자기 역시 마찬가지로 폭도(김달삼은 ‘제주도 도민의거자’라고 불렀다)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말하고 미리 준비했던 노트의 메모를 보면서 공산당들이 흔히 사용하는 연설조의 어조로 약 30분간 열변을 토했다.
그는 앉은 채 연설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민족자주독립을 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민족반역자인 경찰과 일제의 고관을 지낸 자들이 자기들의 죄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미국 제국주의의 주구가 되어 해방된 조국의 제주도에서도 일제시대의 몇 배되는 압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경찰은 무고한 도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살인 강간 고문치사 등을 일삼고 있다며, 폭동전에 있었던 사건들을 일일이 열거하였다. 또 만주와 이북에서 일제시대에 악질경찰이나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던 놈들이 월남하여 반공애국자 노릇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여 수백명이 제주도에 와서 경찰과 합세하여 도민의 재산약탈을 자행한다고 성토했다. 그래서 선량한 도민들은 견디다 못해 친일파와 일제시대의 악질 경찰들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무장의거’를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미군정은 이 ‘의거’를 수습하기 위하여서는 제주도내에 있는 일제경찰과 민족반역자 관리들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된 경찰과 관리를 채용하여 제주도민을 위한 행정과 치안을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일반이니 최후의 1인까지 사투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결의를 표한다.
연설 내용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거의 없고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와 일제경찰 서북청년단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하여주면 순종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나는 폭도들의 요구조건이 대단히 단순하고 까다로운 조건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십중팔구 폭도들이 내놓으리라고 예측하였던, 경찰이나 서북청년들 중 살인‧고문‧강간‧약탈한 자를 인도하거나 처형하라는 요구조건은 한마디도 없었다. 나는 이 요구조건이 상당히 정당하고, 폭동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한 대가치고는 과히 비싸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폭도들의 진정한 의도를 알기 위하여서는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김달삼에게 “해방이 되고 3년동안 나는 미군정하에서 군인 노릇을 하면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배웠는데도 아직까지 민주주의가 무엇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당신도 마찬가지일게다. 3년동안에 공산주의 사상을 연구했었다고 한들 얼마나 알겠느냐. 똑똑히 알지도 못하는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면서 아까운 청춘과 생명을 버리는 일은 죄악이다. 우리가 현재 확실히 알고 믿을 수 있는 단 한가지 사실은 민족을 위한 자주독립이니 어서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여 나와 합심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자”고 했다.
그러자 김달삼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목에 핏대를 세워 화를 벌컥냈다. 그는 언성을 잔뜩 높여 “나는 연대장은 정의감이 강하고 선과 악을 식별할 줄 아는 분별있는 자인 줄 알았는데, 민족반역자나 일제 악질경찰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아무나 공산주의자라고 덮어 씌우듯이 당신도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덮어 씌우기냐”고 떠들어 댄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놈들도 덩달아 나에게 일제히 욕설을 퍼부었다. 김달삼은 분을 참지못해 하면서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 이상 회담을 진행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이고, 이제는 더 믿을 곳이 없으니 이북에 연락하여 최후로 소련군에나 지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다”고 자포자기적인 언행을 마구 해대었다. 내가 소련군에 연락할 방법이 있느냐고 되묻자 그는 “있고 말고”하면서 허세를 부린다.
나는 김달삼을 진정시키기 위해 “당신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어찌하여 이 어마어마한 유혈폭동을 일으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며 도민을 구출하기 위한 의거자라고 했다. 그리고 최초에는 경찰에 구금되어 고문치사를 당하는 도민들을 구출하는 것만이 목적이었으나 경찰을 습격하고 보니까 경찰이 의외에도 무력하고 경찰에 대한 도민의 악감이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격렬하여 이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는 바가 있었다. 나는 “당신들이 진정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회의를 진행하자”고 제의했다. 김달삼은 “누가 폭동을 일으키고 싶어 일으켰겠느냐, 할 수 없이 살기 위하여 일으켰지, 지금이라도 우리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자유스럽게 살 수만 있다면 오늘이라도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회담이 속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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