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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益烈장군 실록유고 - 4‧3의 진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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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260회 작성일 11-04-0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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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가  겪은 4월 3일

 

4월에 들어서자 제주도는 완연한 봄이 되었다. 변덕스럽던 기후도 미풍으로 바뀌어 평화스러운 봄날씨가 계속되었다.

나는 약 1개월간이나 나가본 일이 없던 제주읍 나들이 기회가 생겼다. 나의 상관이었던 백선엽(白善燁) 대령이 제5여단장에서 총사령부 정보국장으로 전보발령을 받고 과거 그가 5연대장 재임시 연대 군사고문인 동시에 개인적으로 절친했던 맨스필드 대령을 만나기 위하여 휴가를 얻어 제주도 군정장관 사령부에 유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4월 1일 군정청을 방문하고 백대령과 맨스필드 대령과 어울려 즐거운 하루를 지냈다. 다음날 낮 12시 서울행 C-46 비행기 편으로 백대령을 비행장에서 송별하고 모슬포 연대본부로 향하였다(백선엽은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은 4월 3일 제주읍의 한 여관에서 모슬포의 김익렬 연대장으로부터 사건발생 소식을 들었으나 제주읍내는 평온했고 9연대도 직접 폭도들과 교전이 없었으므로 예정대로 서울로 올라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 나의 승용차는 1과 1/2 트럭이었다. 동승자는 연대 부관 심흥선(沈興善‧훗날 대장으로 예편) 대위, 연대 군수참모를 하고 있는 유근창(柳根昌‧중장으로 예편) 대위를 면회오는 그의 형님, 모슬포중학교 교장, 운전병을 합하여 병사 5명 등 모두 9명이었고 군 보급품을 일부 싣고 있었다. 부대를 향하는 길에 우리는 도로주변 돌담 위에 앉아있는 꿩을 사냥하기도 했다. 99식 소총으로 꿩을 쏘는 것이었다. 탄환은 구 일본군이 바닷속에 버리고 간 탄환을 해녀를 시켜서 건져낸 것이었으나 사용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밭돌담 위에 앉은 꿩을 발견하면 심대위와 나는 총 1정을 가지고 번갈아 가며 내기를 하면서 쏘았다. 명중하면 차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함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나는 당시 명사수로 전군에 명성을 떨쳤었다. 거의가 백발백중이었다. 물론 심대위도 훌륭한 사수였다. 우리 두 사람이 1백~2백m 거리에 있는 꿩을 백발백중시키는 솜씨에 동승한 유대위의 형님을 비롯한 일행은 박수를 치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차에서 뛰어내려 밭돌담을 넘고 잡목을 헤치면서 꿩을 주워왔다. 우리 일행은 휴대한 음식을 먹으면서 화창한 날씨를 즐겼다. 피로한 것도 잊었고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피크닉하는 기분으로 4월 2일의 오후를 사냥에 열중하다 보니까 날이 어두워져서 도착한 곳이 겨우 한림(翰林)이었다. 당시 한림 거리는 여관과 요리점도 있는 제법 큰 가로(街路)였다.

 

날이 어두워졌는데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 차 조명등이 고장이 난 것이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한림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한림여관에 연대장 일행이 유숙한다는 것을 부대에 연락했다. 다행히 한림여관은 운전병의 친가여서 우리 일행을 가족처럼 맞았다. 사냥하여온 꿩을 요리하여 배불리 먹고 나니 주간의 피로가 일시에 닥쳐왔다. 일행은 한방에서 일찍 잠에 들었다. 여관의 1층은 우리 일행이 쓰고 2층은 경찰관을 순회위문하러 서울에서 내려온 총경이 인솔하는 약 20명의 위문단이 유숙하고 있었다.

 

시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새벽 3시 전후해서였을 것이다. 고막을 찢을 듯한 다이너마이트의 폭음소리에 나는 잠을 깨고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을 깨고 보니 여기저기서 총성이 콩볶듯이 나고 유탄이 난무했다. 마치 전쟁터처럼 함성이 나고 총성이 교환되고 그 때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격전지에서와 같은 돌격소리도 들렸다. 처음에는 꿈인줄 알았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실이었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심대위가 내 귀에 입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것과 창밖에 적이 있는 듯하며, 우리 일행을 보고 던진 폭발물이 창문에 맞고 창밖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우리는 구사일생했다는 것 등을 일러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하였다. 방안에서 군화를 신고 소리를 죽이며 총에 탄환을 장전하고 침입하는 적을 쏠 태세를 갖췄다. 그 다음은 무엇보다 방안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했다. 부서져 열려있는 창문으로 제2탄의 폭탄이 들어오면 우리는 끝장이다. 나는 어두움 속에서 일행에게 나를 따르라고 손짓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 밖을 살핀 후 총을 겨눈 채 해안가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우리가 여관을 나서자마자 우리의 침실 쪽에서 폭음이 났다. 제2탄이 투척된 것이다. 나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약 50m를 달려나가 우리는 바다를 등지고 큰 바위 뒤에서 방어태세를 취하였다. 무기는 99식 1정과 32구경 권총 한자루가 전부였지만 탄환은 충분하였다. 유리한 지점까지 확보했으므로 20~30명은 사살할 수 있었지만, 우리 위치가 발각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소리없이 엎드려서 적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투경험이 없는 민간인과 병사들은 총마저 없고보니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었다. 9명의 생명이 나 한사람의 손에 달린만큼 그들은 나의 일거일동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겁이 나지 않는 척해야 했다. 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를 보여 그들을 안심시켰다. 살기 위해서는 침착해야 된다. 판단은 정확해야 한다. 마음 속으로 수없이 이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폭도들은 떼를 지어 총을 쏘고 고함을 지르며 시가를 뛰어 다녔다. 뭐라고 하는 소리인지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상하게 여긴 것은 폭도들이 카빈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빈총은 미군과 경찰만이 보유하고 있었을 뿐 다른 데는 없었다. 폭도들의 정체가 누구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최초의 총소리는 지서주변에서 났었다. 그리고 총성은 시가 밖으로 멀어져 간다. 폭도수는 1백명은 넘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지서에서 사이렌 소리(이날 경찰은 전혀 대응을 못했다. 사이렌도 집에서 습격을 받은 국민회 한림면위원장 玄周善의 딸이 지서에 달려와 울린 것이었다 - 편집자)가 들리고 카빈 총성도 났다. 아직 경찰이 지서를 사수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지서로 가서 합세하기로 결심하였다. 날이 밝아서 폭도들이 우리의 위치를 발견하기 전에 야음을 이용해 지서에 합세, 폭도와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지서를 향하여 약진을 하였다. 그러나 지서 안에서는 적인 줄 알고 우리를 향하여 난사해 왔다. 나는 고함을 질러 총격을 멈추게 한 뒤 전령을 보냈다. 서로 연락이 되어서 지서에 들어가 보니 지서 안은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중상자들이 있었으나 지서장은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건발생 당시 지서장은 운좋게 출타 중이었으나 총성을 듣고 지서로 뛰어온 모양 같았다. 폭도들이 철수한 뒤였다.

 

폭도들의 총성은 점점 멀어지고 시가는 평정을 회복하였다. 이곳 저곳에서 공격을 당한 부상자들이 지서로 들어왔다. 시가에서도 통곡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지서 안에 피신해온 15~16명의 경관과 서북청년단원들 가운데 일부가 빈사상태의 중상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총탄에 의한 환자는 없고 대부분의 환자가 곤봉 등에 의한 타박상이었다. 상황을 보니 경찰들은 방심하고 무경비 상태에 있다가 각자 숙소에서 폭도들의 급습을 받고 교전도 해보지 못한 채 당한 듯했다. 폭도들은 지서를 습격, 유치중이던 피의자를 풀어주고 거기서 빼앗은 무기를 가지고 시가를 행진하면서 총을 난사하고 평소에 원한을 가졌던 자, 경찰과 서북청년들을 하숙시켰던 자, 또는 그 동조자를 찾아다니며 폭행을 한 뒤 날이 새자 산쪽으로 도주한 듯했다. 날이 밝아오자 더 많은 부상자가 지서에 운반되어 왔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상황을 판단하여 보고 나는 밀수 피의자들과 그 가족들이 경찰에 구치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감행한 실력행동인 동시에 원한에 대한 보복이라고 직감했다. 그러나 나는 사건 발생시부터 그 때까지 몸은 한림에 있었지만 마음은 모슬포 연대본부에 가 있었다.

 

 

7. 사건 초기의 상황

 

연대장 부재시 아무런 경계태세도 갖추지 않고 있는, 탄환 한발없는 9연대가 무장된 폭도들의 기습을 당한다면 결과는 한림의 경우와 대동소이할 것이다. 나는 책임감에 짓눌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날이 밝자 나는 지서장에게 지원군과 응급구호를 약속하고 서둘러 귀대하였다. 한림에서 모슬포까지 오는 도중에 살펴보니 전주와 전선들이 대부분 절단되어 제주도내의 통신은 완전 마비가 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오전 8시경 부대본부에 도착하여 보니 부대는 무사했다. 모슬포 지서와 부대에는 폭도의 기습이 없었다. 나는 전부대에 전투편성토록 비상명령을 내리고, 바다에서 건져 비밀히 보관돼 왔던 소량의 탄환이나마 분배했다. 이렇게 응전태세를 취하고 부대주변 일대에는 척후를 파견하여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부대상황과 내가 경험한 일체의 정보를 미군정장관에게 보고하였다. 장병의 전가족이 부대내에 수용 보호되자 전투준비는 끝났다.

 

오후까지 연대장에게 보고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폭도들은 4월 3일 미명을 기해 제주도내 지서를 기습하여 제주읍과 2~3개소의 지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일시 점령당하였으며, 경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무기와 탄약을 상당량 탈취당했다는 것이다. 현재 제주읍만이 경찰과 미군이 방어태세에 있으며 기타지역은 치안부재 상태이다. 폭도 수는 수 백에서 수 천까지 추측이 구구하다. 폭동의 목적과 성격도 정확히 파악을 못한 채 혼미한 상태이다. 군정과 경찰은 자체방어만 급급할 뿐 상황판단과 어떤 결심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상태이다.

 

군정과 경찰이 이 지경이었으므로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폭도들이 신식 카빈총으로 무장했다면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무기없는 지서, 탄환없는 경비대는 그것도 서울에서 수 천리 떨어진 고도 제주도이고 보니 증원군과 탄환이 도착할 때까지 현상태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고만 것이다. 즉 폭도들이 주도권을 쥐고 공세에 있고 경찰과 경비대는 수세에 들어서고 만 것이다. 아군은 상호간의 연락도 여의치 못했다.

 

폭도들은 4월 3일 야간에 들어서자 재차 각 지서와 부근 촌락의 관공서를 습격해 왔다. 4월 4~5일 사이에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습격을 감행하여 완전히 폭도의 천하가 된 듯했다. 그러나 공격목표는 경찰과 그 동조자들로서 경비대와 경비대의 소재지인 모슬포 지서에는 얼씬도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당시 폭도라고 하면 으레 공산폭도일텐데도 이놈의 폭도들은 미군정과 경찰을 타도하자고 소리지를 뿐 공산주의 사상을 담은 구호는 없었다. 그리고 연대척후가 알아온 정보에 의하면 폭도들은 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부근 촌락에 민간인과 같이 있는 것이었다. 민간폭동인 것 같았다. 폭도의 지휘자나 숫자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폭동이 발생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만심(慢心)하고 있다가 불의의 기습을 받고 일시에 무기와 인원의 손실을 당한 경찰은 당황한 나머지 사건의 진상마저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통신이 전도에 걸쳐 두절되고 정보를 수집하여야할 인원도 없는 상황이었다. 도민들도 폭도들이 사건 첫날 경찰과 군정에 협조한 자에 대한 보복폭행이 철저하였으므로 폭도들에 의한 후환이 두려워 경찰에 협조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진상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도민출신 사병들을 민간복으로 갈아입혀 휴가명목으로 귀가시켰다. 그들이 각 부락에서 얻어온 정보는 이러하였다. 폭동발생의 주원인은 밀수혐의 등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아 도민과 그 가족에게 가해진 경찰과 서북청년들의 횡포와 고문치사 강간 등에 대한 보복에서 비롯되었다. 폭도들의 최초의 목적은 경찰에 구치되어 매일같이 고문당하는 피의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도들의 성분은 주로 그들 가족들이다. 해방직후 ‘제주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던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편승하여 이들을 선동하고 조직‧지휘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폭도의 대부분은 그들을 따르면 가족을 구출하게 될 것으로 믿어 가담하게 됐다.

 

폭도의 수는 전도를 통틀어 3백명을 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최초에는 20~30명이 일단이 되어 무기도 해녀들이 바닷속에서 건져낸 구 일본군의 99식 소총에다 그것도 1개 편대에 많아야 4~5정 정도였고 그밖에는 곤봉 따위였다. 그런데 지서를 기습하고 보니 경찰은 폭도들이 생각하던 의외로 무력하였다. 폭도들은 거의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서에서 약탈한 최신식 무기(카빈총)를 가지고 경찰을 재차 습격하게 되니 경찰은 문제도 안 될 정도로 허약했다.

 

원한에 찬 대중이 무기를 손에 잡으면 상상할 수 없는 만용과 잔인성을 발휘하게 된다. 격분한 군중이 유혈을 보면 휘발유에 불을 지른 격으로 일시에 폭발하여 자제할 수 없는 폭동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사태가 일단 터지고나자 제주도 폭도들이 바로 그랬다. 기세가 충천하게 되자 예의 만행과 잔인성이 나타났다. 경찰에 협조한 자에 대한 처형은 특히 잔인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락 입구나 마을 복판에서 나무에 결박한 후 부락민들을 집합시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폭사시키는 만행도 벌어졌다.

 

군정과 경찰은 육지에서 증원군을 청하여 우선 각 지서의 기능을 회복하고 치안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특별 경찰토벌대를 편성하여 폭도의 주력을 수색격멸시키는 작전으로 나아갔다. 미군이나 경비대에 병력 요청없이 자력으로 폭동진압전에 나선 것이다. 당시 정세로 보아 군정하에서 세력이 당당하던 조병옥 경무부장으로서는 당연한 처사였다. 우선 폭동발생의 주된 원인이 경찰의 실정에 있었다는 것이 알려질까봐 두려웠을 것이고 또 전국의 치안책임자로서 일국지(一局地)에 불과한 외딴 섬 제주도의 소수민란을 단시일내에 진압못하면 자기 위신이 크게 깎임은 물론 정치적인 진퇴문제에까지 관계된다고 여겼을 터이다. 그는 호언장담으로 미군과 경비대의 지원이나 개입을 배제하고 공안국장 김정호(金正浩)씨를 제주도 폭도토벌사령관으로 임명, 경찰의 대병력을 투입했다. 그리하여 제주읍내 경찰청 본부에 사령부가 설치되고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었다.

 

폭도들의 작전은 경찰을 도민들과 고립시키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경비대 제9연대를 자극하는 일체의 행동을 조심하였다. 4월 3일 한림에서 연대장을 습격한 것은 같은 여관에 들었던 경찰관과 혼동 오인했기 때문이었는 듯하다. 폭도들은 9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모슬포 부근 대정면(大靜面)과 중문(中文) 일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북제주 조천면(朝天面)서 한림 항까지의 그 사이 지역에서 출몰하였다. 기타 지역에서의 출몰은 경찰병력의 분산을 목적으로 하는 양동작전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나는 폭도들이 군대와 충돌을 회피하는 이유를 첫째 폭동발생 이유가 군대하고 무관하며, 둘째 전투력에서 상대가 안되는 훈련된 군대를 적대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며, 셋째 경찰과 군대를 동시에 치는 양면작전이 불가능하였고, 넷째 설사 군대가 경찰의 증원군으로 개입하더라도 그 시기를 될 수 있는대로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 군 내부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8. 경찰의 초토작전

 

육지에서 경찰의 증원군이 도착하여 지서의 병력이 보강되고 대병력의 경찰토벌대가 도착하자 지서습격도 없어지고 치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나는 며칠 내에 폭도가 진압되고 평화가 회복되리라 확신하였다. 경찰은 폭도의 수가 수백 내지 수천명이라고 과장하여 보도하였으나 그것은 자기들의 책임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고 연대의 정보분석은 고작 2백~3백명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또 폭도가 증가할 근거도 없었다(육지같으면 타도에서 증원이 가능하겠지만).반면 경찰토벌대는 당당한 병력과 최신식 무기와 기동력을 가졌으므로 토벌이 시작되면 2~3일이면 대세가 결정되고 그 후는 분산도피자들만 수색하면 되는 것이었다. 제주도 군정장관이나 경찰지휘관들도 그렇게 판단하였다.

 

그러나 토벌작전이 시작되고 보니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토벌대는 초전부터 도처에서 패전의 연속이었다. 사상자가 속출하고 무기마저 빼앗기기 일쑤였다. 이렇게 되니까 폭도들의 사기는 충천해지고 백주의 지서습격이 재개됐다. 교통과 통신의 두절도 빈번해졌다.

 

나는 폭도들의 작전과 교전법을 관찰하기 위하여 중요간부 장교들을 대동하고 수차에 걸쳐 경찰토벌대를 따라가 보았다. 실전을 관전하다 보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경찰토벌대가 폭도와 조우하면 원거리 사격만 할 뿐 전진하는 자가 없었다. 2백~3백m의 거리를 두고 돌담 뒤에 숨어서 몇시간씩이나 사격만 하고 전진할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폭도들은 지원사격을 받으며 용감하게 토벌대를 향하여 돌격을 하여온다. 그러면 토벌대는 전의(戰意)를 잃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친다. 이것이 매일같이 계속되는 토벌대의 실황이었다.

 

토벌대의 전력은 날로 약화되고 토벌대가 폭도들에게 무기와 보급품을 공급하여 주는 꼴이 되어 버렸다. 폭도는 날이 갈수록 무장이 강해지고 있었다. 경찰이 이렇게 가다가는 토벌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나는 판단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토벌사령관 이하 간부들이 공명심과 허세, 권위만 과시할 뿐 실전에 대한 준비도 없고 폭도에 대한 아무런 전투정보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기습당하기가 십상이었다. 또 토벌대가 육지의 각지 경찰서에서 차출되어온 경관들로 편성되어 있었으므로 조직적인 편성이나 전투훈련이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토벌사령부가 폭도를 얕잡아 보고 성급히 작전한 것이 패인이었다. 토벌이 시작되고 1주일이 못되어 폭도의 세력은 강해지고 경찰은 읍내를 수비하는데 급해졌다.

 

이렇게 토벌이 실패하자 호언장담하고 내려온 김정호 사령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수립된 작전계획이 ‘초토작전’이다. 이 작전이야말로 제주도를 대폭동사건으로 확대시킨 근본원인이 된다. 초토작전에도 전략적으로 여러가지 유형이 있으나 근대사에선 2차대전 때 일본군이 북지(北支)‧만주 등지에서 적의 유격군을 토벌할 때에 행한 작전으로 그 잔인성에서 특히 악명이 높다.

일본군은 점령지역내의 적 유격대의 활동과 인적‧물적 지원의 근원을 봉쇄하기 위하여 점령지 주민들로 하여금 부락단위로 유격대의 침입을 자치적으로 방어하거나 토벌군에 보고케 하도록 했다. 만일 유격대가 부락에 침입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은닉하거나 비밀히 지원하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부락의 전주민을 깡그리 죽이고 가옥과 가재를 소각하여 전부락을 문자 그대로 초토화하는 작전을 폈다. 주민들은 목숨의 보존을 위하여 유격대 침입을 거부하게 되므로 유격대의 활동이 제한을 받게 되고 유격대에 협력한 부락과 주민은 초토화되므로 유격대는 활동근거지를 잃게 된다. 반면 토벌군은 병력을 절약할 수 있게 된다. 이 작전은 근대전에서 국제법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비전투원 학살의 죄목으로 이 작전을 명령한 사령관은 전범(戰犯)으로 규정, 처벌을 받게 된다. 경찰 책임자와 김정호 사령관은 적국 아닌 국내에서 동족에게 이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초토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최초의 작전은 극비밀리에 조천면(朝天面)과 애월면(涯月面) 일대의 산간부락에서 행해졌다. 그 초토작전은 철저하게 이루어져 비밀의 누설을 방지하였으므로 당사자들 이외는 아무도 몰랐다. 제주도 미군정장관이나 9연대 정보부에서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인접부락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산간부락 주민들은 치안부재 상태에서 생명보전을 위하여서는 할 수 없이 폭도들에 조금이라도 협력 안한 부락이 전무할 정도였다. 따라서 초토작전의 대상이 되지 않는 부락은 거의 없었다. 산간부락의 주민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서는 폭도에게 가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주읍이나 일주도로 주변의 치안이 확보된 해변부락으로 피난하든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부분은 폭도에 가담하였다. 해안부락으로 하산한 주민들에 대하여 또 경찰들이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초토작전의 비밀이 누설되고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안 미군정은 강력히 이를 제지하고 수차 현상조사도 하였다. 경찰사령관은 초토작전은 폭도들의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며 주민피해와 부락의 파괴는 폭도들의 소행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럴 듯한 주장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폭도들이 발악적인 최후수단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보았다.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자라면 경찰이 이같은 초토작전을 감행하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실은 경찰 소행이었던 것이다. 각종 정보기관에 이를 경찰소행으로 확인해 주는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초토작전중인 경찰의 현장사진, 그리고 토벌사령부에 산적된 산간부락에서 약탈한 금품 등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현재까지도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당시 산간부락의 주민들이 많은 현금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 군사고문관이 나에게 제공한 사진에는 6부대나 되는 몰수현금이 경찰사령부에 쌓여 있었다).

 

미군정은 처음엔 강력히 초토작전을 반대하였으나 다음부터는 어찌된 셈인지 묵인하는 태도로 나오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장려하는 태도로 변하였다. 미군정에서도 양론이 있었다. 치안책임 관계관은 찬성하고 군대에 배치된 군사고문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 기술하겠다.

 

아무튼 미군정이 초토작전을 묵인하게 되자 경찰은 공공연하게 한마을 한마을을 초토화시켜 나아갔다. 이렇게 되자 일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돌변하였다. 대부분의 산간부락 주민들이 산으로 도주하여 폭도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폭도의 수는 기하급수로 증가하여 갑자기 수백이 수천이 되어 그 수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그들은 결사적으로 경찰에 대항하여 왔다. 경찰은 다시 중과부적이 되어 산에서 쫓겨 내려오고 제주도 산간부락은 대부분이 폭도에 가담한 형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남한의 경찰병력을 전부 투입하더라도 토벌이 어렵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미군정장관인 ‘딘’장군은 경비대를 투입하여 토벌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 책임이 바로 나에게 부여됐다. 즉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제주도 폭도진압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나는 경찰의 최고책임자인 조병옥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작전의 만행을 민족적 양심에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이 기록이 세상에 발표될 때는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죽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러 이 글이 빛을 보게될 지 모르지마는, 이 국토에 여하한 형태의 정부가 서든지 여하한 정당이 영도하는 정권하에서든지 한국민족의 정부라면 이들로 하여금 역사의 비판을 받게 하여 이 국토에 다시는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후손들에게 유언한다. 악인들도 무리가 많으면 역사에 행세하는 수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소행을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정의라는 미명으로 위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는 항상 고독한 것이며 깊은 신념을 가진 용감한 자만이 실행할 수 있다. 신념을 가졌더라도 비겁한 자는 입으로만 주장한다. 그들은 위선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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