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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⑫ 덕수궁, 비극적인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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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3,398회 작성일 14-10-0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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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⑫ 덕수궁, 비극적인 왕궁
김갑수 | 2014-9-27 09:56


조선 문화 파괴에 혈안이 된 총독 데라우치

1915년 9월, 조선 총독부는 시정 5주년을 기념하는 자축연을 경회루에서 벌였다.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게와 경무총장 겸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는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 테이프를 끊었다. 그들은 대대적으로 시정 선전을 획책하고 그 방편으로 물산공진회를 연 것이었다.

그들은 물산 진열관의 장소로 경복궁 근정전을 고시했다. 조선의 문화재도 일부 진열되었다. 데라우치는 근정전 옥좌에서 축사를 했다. 그는 전시된 조선 유물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것 몇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수행하는 비서가 지적된 문화재를 메모하고 있었다.

데라우치는 어려서 외가에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외가의 양부는 그에게 자기의 성을 쓰라고 했다. 그래서 바꾼 성이 데라우치였다. 양부는 학자풍이었고 골동품에 취미가 있었다. 그의 영향으로 데라우치는 교육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다른 민족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일단 조선의 정신적인 문화를 억압하고 말살하는 일이 최우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질경이는 밟아도 뿌리가 있으면 다시 고개를 든다는 일본 속담이 있다. 데라우치는 조선의 관습과 제도를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헌병을 동원하여 조선의 민족 정서와 관련되는 책들을 압수하고 출판을 금지시켰다. 그는 서울 광통교 일대의 서점은 물론이고 지방 곳곳의 향교 서원 사찰 양반집까지 수색시켰다. 결과 압수한 책이 51종, 20여만 권을 넘었다. 그는 조선 병사 만 명을 죽이는 것보다 조선의 얼이 담긴 책 한 권을 없애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데라우치는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해 일본으로 보냈다. 신라의 김생과 고려의 신품사현이 쓴 글씨, 고려 말 이색, 정몽주의 서신, 추사 김정희의 완당범첩조눌인정서, 김홍도·윤두서·정선의 그림을 묶은 흥운당첩, 조선의 왕세자가 세자 교육기관인 시강원에 입학하는 장면을 그린 정축입학도첩, 영조가 시인 24명과 함께 시를 짓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그들이 지은 시를 함께 묶은 제신제진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화유산들이 일본의 대학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데라우치는 조선의 사고(史庫)가 있던 오대산 월정사에 오께구찌를 비롯한 학자와 헌병을 보내 인근 주민을 동원하여 8일 간이나 뒤져 조선왕조실록 한 벌을 비롯한 수많은 서책을 압수하여 동경대학에 보냈다. 동해안 법문진을 통해 빼돌린 이 책들은 짐짝으로 150덩이나 되었는데,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모두 불에 타 사라지게 된다.

물산공진회는 경복궁을 왕궁이 아닌 유희장으로 바꾼 행사였다. 그들은 근정전 행각의 사무실과 활자, 서적고를 부숴버렸다. 그 결과 볼품없이 휑뎅그렁한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조선의 건축물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나머지 기회만 되면 가리고 부수었다. 그들은 경복궁 북쪽 행각의 아름다운 서적고와 활자고도 헐어 버렸다. 심지어는 창덕궁 화재가 났을 때, 보수 공사를 명분으로 경복궁 교태전을 해체하여 자재로 사용했다.


덕수궁, 비극적인 왕궁

“아관파천은 조선왕조 500년 중 가장 기이한 사건”

덕수궁이야말로 가장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거처로 시작한 이름이 덕수궁이었다. 그랬다가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폐위된 인목대비가 머무를 때는 서궁으로 격하되었다. 경운궁의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고종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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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사진 출처 <두산백과>

1896년 을미사변에서 일본인에게 왕비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아관 (러시아 공사관) 으로 파천 (임금이 피난함) 했다고 해서 아관파천이라고 불렀다.

고종은 1년 간 친러파를 기용하여 친일 내각을 와해시킨다. 아직 러시아와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사태를 관망하면서 을미사변으로 인한 나쁜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 러시아는 일본과의 비밀 협상 끝에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 등을 얻어냈다.

구미 열강은 아관파천에는 불간섭 입장을 표명하면서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 균등을 요구하여 광산채굴권, 전차·철도 부설권 같은 것을 필두로 한 근대 시설과 자원 개발에 관한 총체적인 이권을 탈취해 갔다. 이 시기에 조선은 경제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터전을 외국에 거의 넘겨 버린 것이었다.

사실 조선의 국운이 결정적으로 휘청한 것은 바로 아관파천 1년의 기간이었다. 아관파천은 옹졸하게 말해서, 나름대로는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전략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이제이(以夷制夷)는 그런 경우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이이제이는 국토 밖에서 적과 적을 이간질시켜 싸우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왕이 주권의 핵심부인 도성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일을 이이제이 전략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였다. 결국 이것은 오랑캐끼리 싸움을 붙이기는커녕 오랑캐끼리 야합하도록 만든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은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 공사관에 장기 체류하고 있는 군왕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립협회가 앞서서 고종의 환궁 여론을 주도했다. 독립협회는 대부분 일본 편을 들었다. 얻을 것을 얻어낸 러시아도 고종에게 그만 나가 달라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고종은 경복궁이 못내 두려웠다.

전국 유림의 환궁 상소가 쇄도했고 장안의 시전들이 철수 스트라이크를 벌이려 하자 마지못해 환궁을 결심한 고종은 경복궁 대신 덕수궁을 선택하여 파천 만 1년 만에 궁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환궁은 환궁이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해 10월 12일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라고 하는 대한제국의 탄생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물론 이것은 일본 편을 들어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려는 독립협회의 저의가 개입된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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