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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④일본 군국주의 부활 책동을 규탄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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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718회 작성일 14-09-16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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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④일본 군국주의 부활 책동을 규탄하지 말라
김갑수 | 2014-9-16 10:47


일본 군국주의 부활 책동을 규탄하지 말라
- 미시마 유키오와 후쿠자와 유키치를 떠올리며

“1993년 미국 의회는 하와이 병합의 기원이 되었던 1893년 하와이 왕국 전복의 불법성을 인정하여 사죄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러한 선례를 배워 일본에서도 한국 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국회 의결이든지, 각의 결정에 기초한 총리 담화로든지 새로운 역사 인식을 보여 주기 바란다.”(와다 하루키, 「한국 병합 100년과 일본인」 중에서, 이 글을 쓴 와다 하루키 교수는 한국·조선의 현대사 연구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인상 깊은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은 특히 유명하다.)

아마도 한국인 같으면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본인 학자로서 하기 힘든 양심적인 발언을 했다’고 칭찬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최근 아베 정권은 일본의 침략 사실을 부인하는 발언을 해서 주변국의 지탄을 받았다. 아베가 아니더라도 일본의 정치인들은 툭하면 침략 사실을 부인하는 망언을 해대곤 한다. 그런데 왜 그들은 침략 사실을 부인하는 것일까? 그들이 정말 침략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1995년 당시 일본 수상 무라야마는 일본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침략 사실을 시인하면서 주변국에 사과의 뜻을 표한 바가 있다.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로 불리는 이것은 위에 제시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 우리가 괘씸하게 여기는 아베의 침략 부인 발언은 참의원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1995년의 수상 무라야마와 지금 수상 아베의 역사관은 조금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아베 부류의 일본인들을 무조건 규탄하지만 무라야마 부류의 일본인들에게는 거의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정말 한국인들의 반응대로 무조건 아베는 틀리고 무라야마는 맞는 것일까? 같은 맥락으로 위에 제시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주장은 합리적인 것일까?

와다 하루키는, 미국은 하와이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했지만 일본은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와다 하루키 식의 역사관을 수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이 하와이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인 것이지 미국이 양심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와이는 미국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이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할 경우 배상 문제가 불거진다. 특히 조선(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일본 정치인이라면 옳건 그르건 간에 배상 문제를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한다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요구할 것임이 틀림없는 조선(북한)은 아베의 발언도 규탄했지만,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도 반대의 뜻을 명백히 한 바가 있다. 사실 1995년의 무라야마까지도 비록 침략 사실은 사과했지만 조선병합의 불법성을 묻는 질문에는 끝내 답변을 흐렸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먼저 일본에는 명백히 두 부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미시마 유키오와 후쿠자와 유키치를 불러낼 필요가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1925~1970)는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자였다.(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소설 <금각사>와 <사랑의 목마름> 등을 날카로운 감명과 함께 읽는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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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마 유키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이후 망각되어 버렸다. 그는 1970년 ‘자위대의 혁명’을 외치며 할복자살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그를 ‘극우 또라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을 감행하면서 외친 핵심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군국주의의 부활’이 아니라 일미동맹의 해체였고 평화헌법의 개정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미국에 노예처럼 종속되어 있는 ‘조국의 현실’에 가장 섬뜩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조국의 ‘자주’를 절규하며 죽어간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미시마 유키오가 한갓 ‘불온한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아가 우리는 미시마 유키오의 선배 격으로 1936년 소화쿠데타를 주모하면서 대 서양 결전론을 펼친 기타 이키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추앙받는 지식인이자 언론인이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을 비롯한 친일 개화파가 주동이 된 갑신정변(1884년 12월4일)이 ‘3일천하’로 막을 내린 지 꼭 100일째가 되던 1885년 3월16일 그는 일본 「지지신보」(時事新報)에 논설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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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자와 유키치

이 논설에서 후쿠자와는 “조야(朝野) 가릴 것 없이 모두 서양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오로지 일본의 낡은 틀을 벗는 것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주의(主義)로 내세워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탈아'(脫亞)라는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그가 주장한 서구문명화와 탈아론은 기실 “중국과 조선을 접수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와 침략주의의 방편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행 일본 지폐 중에서도 가장 고액인 1만 엔 권에 초상이 박힌 그에게는 국민국가론의 창시자, 민권론자, 국권론자, 자유주의 경제학자, 절대주의 사상가, 국민의 교사와 같은 온갖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는 한국의 ‘개화 선각자’로 오인되고 있는 김옥균, 윤치호, 이광수 등이 가련하게도 하나같이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나아가 우리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주장을 실현시킨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실을 더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이토 히로부미-무라야마가 있다. 기타 이키-미시마 유키오-아베가 있다. 전자는 선하고 후자는 악한가? 전자는 안전하고 후자는 위험한가? 전자는 우리에게 유익하고 후자는 우리에게 해로운가?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 두 부류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어느 것이 더 우리가 대처하기 어려운가의 문제를 따진다면 미국을 등에 업고 합리적, 이성적, 문명적인 척하는 전자가 더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일본의 망언이 나올 때마다 군국주의 부활을 획책한다고 규탄한다. 기이하게도 이것은 조중동에서 한경오 자주민보에 이르기까지, 새누리당에서 민주당 통합진보당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일치하는 현상이다.

일본군국주의는 부활할 수 있는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일부에서 군국주의 부활의 책동은 있을 수가 있겠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할 수가 없다. 중국과 조선(북한)의 미사일은 태평양 연안 도처에 산재한 일본의 핵발전소들을 마음만 먹으면 타격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미국을 등에 업고 있는 세력이라면? 그들은 여간해서 망언도 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그들과 미국의 잇속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라면?

그러니 군국주의 부활을 말하지 말라. 대신 일미동맹의 해체를 외쳐야 한다. 한미동맹은 일미동맹과 맞물려 있는 사안이다. 싫건 좋건 일본과 한국은 이 사슬을 풀기 위해 공조해야 한다. 그리하여 일본과 미국 사이도 풀어지고 한국과 미국 사이도 풀어지며 조선(북한)과 중국 사이도 풀어져서(중조동맹도 해체) 아시아 각국이 정상적인 자주국가로 부활하게 될 때, 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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