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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20년 독립신문 보도, "조선임시정부의 수령 범재 김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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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871회 작성일 11-07-1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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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독립신문 보도, "조선임시정부의 수령 범재 김규흥" (6부)
상해무관학교 설립과 한.중연합 민병으로 광복을 쟁취코자 한 김규흥

 

역사복원신문 2011.07.08 김상구

 

 

5. 신해혁명 이전, 김규흥의 사상과 행적

범재의 업적이나 활동기간에 비해 그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신해혁명 참여 이전 초기 망명시기 그리고 망명 이전 조국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단편적인 자료를 통하여 그가 대한자강회 회원이었으며<대한자강회월보 제2호(1906년 8월 25일) 회원 명단에 박은식 등과 함께 실려 있다.>

고향에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는 사실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황성신문》 1905-08-18 참조, 그리고 30세이던 1901-10-17 무렵, 중교의숙의 강원이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범재 김규흥의 이종사촌이자 독립지사인 김현구가 남긴 자서전에 망명이전 김규흥의 교유관계, 활동범위 특히 고종의 비자금을 이용한 상해 무관학교 설립에 대한 전말이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향후 범재의 사상을 조명하는데 많은 참조가 되리라 본다.<서대숙 번역, 1987『 The Writings of Henry Cu Kim』,하와이대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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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구(1889-1967)

김규흥의 이종사촌동생이며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및 신한민보 주필 등을 역임했다.

박용만과 더불어 이승만의 평생 정적이었다.  

 

 

범재의 교유관계 중 특이한 것은 원영의, 정안립 등 동년배 학자들과도 친분이 있었으나, 민영환, 김택영 등 자신보다 연상의 당대 문사, 정객들과 교분이 두터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망명 이후에도 창강 김택영, 백암 박은식, 취당 전병훈 등 10년 이상 연배의 선배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특히 창강 김택영은 김규흥의 사혼에 반하였었다고 했으며<김규흥 사건, 1951-05-23 《국민보》>

「향강잡지」의 창간호에 매천 황현의 자결을 애도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滄江 「遙祭黃梅泉文」1913『香江雜誌』p145>

전병훈은 항일독립운동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1910년 3월, 김규흥이 광동성 부근 나부산을 탐방할때 동행했고 <김상철‧김상구 2010『범재와 3.1혁명』p52~56 참조, 한국학술정보>

1916년 <조선인과 독일인의 음모> 건으로 작성된 일제 기밀문서에도 김규흥과 함께 등장하며, 북경 요시찰 인물 대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항일독립운동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朝鮮人과 독일인 음모사건」1916-12-18 『北京在留 朝鮮人 狀況 報告의 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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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혁명 발생 전해인 1910년 3월, 광동부근 라부산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

좌로 부터 환재 왕영은, 취당 전병훈, 범재 김규흥  

 

 

 

망명 이전 이력 중 김규흥에게 가장 큰 사건은 을사늑약 이후 추진했던 상해무관학교 설립이었다. 인삼과 종이장사 등 상인으로 변장하여 중국을 넘나들며 미국, 영국, 중국 등의 군사교육 전문가들을 섭외하고 30여명의 학생들도 미리 상해로 보냈지만, 고종의 조칙을 들고 출발하는 중 인천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다. 100일 간의 투옥이후에도 가택 연금을 당했는데, 당시 조선의 외채 두 배 정도의 엄청난 금액에 눈독들인 통감부의 의도 때문이었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종사촌인 김현구와 이교성을 동원하여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이교성이 암살당한 이후, 고종의 비자금 획득을 포기하고 1908년 초 상해로 망명하게 된 것이 범재 김규흥의 망명 전후의 사정이다. 비자금이 은닉되어 있던 아청은행은 러시아와 청나라의 합작은행이었는데, 러시아 혁명 와중에 은행이 파산되어 그 돈은 모두 허공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 이 사건에 대해서는 서대숙 교수가 번역한 『 The Writings of Henry Cu Kim』중 「My Education」부분과 1951년 《국민보》기사 중「김규흥 사건」과 「한국일사」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아무튼 무관학교 설립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진행 과정을 통하여 쌓게 된 중국 개화 인사들과의 인연 특히 진형명, 당소의 등은 일생을 통하여 동지의 연을 맺는 사이가 되었다. 이 외에도 김현구 자서전에서는 범재 김규흥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종사촌이라지만 17세 연하의 김현구는 범재에게 조카 같은 동생이었을 터이다. 김현구가 근대 개화사상을 알게 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범재와의 만남 그리고 그가 추천하고 선물해 준 각종 도서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특히 상해무관학교 설립 건 때문에 김규흥이 분주해지자 그를 대신하여 출석한 대한자강회 모임에서 김현구는 박은식, 양기탁, 장지연 등 개화 인사들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음은 행운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김현구의 자서전에는 무관학교 설립에 관여했던 중국의 조진사라는 지식인과 범재와의 토론도 소개하고 있는데, 입헌군주론을 제청했던 강유위, 양계초 보다 더욱 급진, 개혁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하는 조진사에 비해 단 한 번의 혁명을 주장하는 범재의 주장이 이채롭다.

범재는 특별히 계급차별의 타파와 빈부격차의 해소를 중요시했으며 독재적인 권력은 결단코 거부해야한다고도 했다. 이 토론을 통해 알 수 있는 범재의 사상은 요즘으로 치면 사민주의에 가깝다. 즉 범재는 망명 이전부터 공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의 개화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던 광동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혁명 시에는 자연스레 그들과 합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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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합작 언론기관 발기인 명단,

1913년 3월 김규흥이 샌프란시스코 대한국민회에 보낸 편지에 수록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범재의 망명지 선택이다. 을사늑약 이후 많은 우국지사들이 선택한 곳은 간도, 연해주 지역 혹은 미주 방면이었다. 그러나 김규흥은 광동으로 망명을 떠났다. 광동(廣東)은 중국이 외래문화와 가장 먼저 접촉한 곳으로 변법자강파이자 무술유신의 주인공이었던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의 고향이었을 뿐 아니라, 혁명파의 핵심이었던 손문, 호한민, 진형명, 추노, 당소의 등의 출신 지역이었으며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대만출신의 정치가 구봉갑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김규흥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창강 김택영, 취당 전병훈 등 한국의 개화파 학자, 사상가들이 망명지로 선택한 곳도 광동이었다. 앞서 인용한 범재의 편지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광동은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등 개화사상과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신지식인들의 요람이었다. 김규흥의 독립운동 그리고 혁명에 대한 방략과 중국인과의 연대는 모두 광동에서 출발했음이 분명하다.

 
6. 맺음말 - 임시정부 총리직을 거절하다.

제1차 신해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한국인은 범재 김규흥이 유일하다. 그러나 그 이후 신한민보의 보도를 보듯 많은 한국인들이 모금 등을 통하여 혁명을 지원했고 특히 1913년 7월, 강서도독 이열균의 거병을 시작으로 토원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제2차 혁명 시기에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참여했음이 확실하다.

자세한 검토는 이 글에선 생략하겠다. 중요한 것은 제1차 신해혁명을 통하여 공화주의 민족국가를 성립하고자하는 소망이 넓게 확산되었고, 실제 많은 근왕주의적 독립지사들이 공화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혁명지사들과의 인연 내지 연대를 원하고자 했다. 신해혁명 지사들과 한인독립지사들간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있어서, 범재 김규흥이 일정 역할을 했음도 분명하다.
<배경한, 2007「신해혁명 시기 한인 망명자들과 쑨원‧혁명파 인사들과의 교류」『쑨원과 한국』p40~67참조, 한울아카데미>

 

 


김규흥이 1911년 3월 7일 미주의 <대한국민회>에 보낸 편지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울러 대충 짐작컨대 왜놈들의 조급한 망동은 몇 해 지나지 않아 미국 혹은 중국과 전쟁을 발발하게 할 것입니다. 이때에 중국과 한국의 민병이 크게 연합하여 극히 짧은 시간에 奮起 하여 (불의의 一擊을 가한다면 ) 우리 한국은 광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중국은 자기방위를 할 수 있을 것이니 그 성과는 一擧에 (兩得이 아니라) 그 외에 더 좋은 일이 많을 것입니다. 좋은 계책을 준비함에 있어 이보다 더 완벽하고 나은 것이 없을 것이며 이는 특히 弟한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여러 동지들과 熟議하고 協하여 결정한 것 입니다.” <1911.3.17 김규흥이 대한국민회에 보낸 편지 중에서 발췌>

김규흥은 신해혁명 이전에 이미, 중일전쟁과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을 예견한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한국독립의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한국과 중국의 혁명적 인사들이 연대하여 민병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중국의 혁명동지들과는 협의가 끝났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중호혜론에 대한 그의 신념은 아래의 시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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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흥이 그의 삼종숙의 회갑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 담배갑 뚜껑 위에 친필로 쓴 점이 특이하다.

 


한편, 김규흥은
“小弟의 목적은 後線에서 광복사업에 스스로 호응하여 반드시 이런 기회를 잃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함으로서 조국의 독립운동에는 표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지원할 것임을 약속했으며 평생 그것을 지켰다.

<1911.3.17 김규흥이 대한국민회에 보낸 편지 중에서 발췌>
그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고 활동한 적은 없다. 하지만 독립신문에 ‘朝鮮假政府의 首領 金凡濟’로 보도되기도 했으며,<盛히 流布되는 韓中俄關係의 種種說(朝鮮假政府의 首領 金凡濟)」 1920-05-22 『獨立新聞』>

도산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총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獨立運動家의 狀況」1919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임정편Ⅲ)』>

이러한 사례는 그가 비록 음지에서 활동했지만 독립운동사에 얼마나 주요한 역할을 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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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은 공화주의를 선포한 국내 최초의 선언문이다.

동제사는 국내외 독립지사 명망가들에게 이 선언서의 찬성 여부를 질의하는 통지서를 송부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인독립지사들에게 공화주의에 대한 전도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대 초기, 보황주의에 가까웠던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 공화주의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범재와의 만남 그리고 그를 통해 접촉할 수 있었던 혁명동맹회 지사들과의 교유가 크게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특히 「향강잡지」는 한국 독립 운동가들의 공화주의에 대한 학습의 도구로서 큰 역할을 했으리라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절이 자연스레 등장할 수 있었을 터이다. 같은 독립투쟁을 했어도 양반과 쌍놈의 차별이 있던 조선봉건왕조로 되돌아가자는 운동과 국민이 주권을 가진 공화주의로 독립을 하자는 운동은 엄연히 구분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신해혁명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를 연계시켜 검토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다. 이 소고가 그러한 출발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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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과부(진기미의 조카), 송미령, 장개석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의 건국훈장 1등급 30명에는 5명의 중국인이 포함되어 있다. 손문, 진기미, 장개석, 송미령, 진과부 등이 그들인데, 중국 정부 역시 김규흥을 포함하여 신해혁명에 참여했던 한국인의 공로에 대해서도 마땅히 검토해야만 할 것이다.

 

※김규흥과 신해혁명은 이번 회로 마감합니다. 다음은 3.1운동, 임시정부수립, 파리강화회의에 신규식과 동제사 그리고 김규흥의 역할에 대한 고찰을 다룰 예정입니다.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414&section=sc12&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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