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해혁명은 대한독립운동세력이 공화주의로 전환한 결정적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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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운동가들이 공화제로 전환한 이유는? (2부)
신해혁명은 대한독립운동세력이 공화주의로 전환한 결정적 원인
김상구 2011.06.16 역사복원신문
2. 신해혁명과 대한독립운동의 상관관계
2-1) 혁명 당시 한국언론의 보도 (신한민보를 중심으로)
합병 초창기 일제의 언론통제 때문으로 볼 수 있겠지만, 혁명의 중요성에 비해 당시 한국의 언론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주 거주 한인들이 발간한 신한민보는 신해혁명의 전개 과정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신한민보는 1911년 10월 18일 “청국의 혁명에 대하여, 각국의 동정과 본기자의 언론"이라는 제목으로 제1신을 보도한 이후 “만주의 혁명풍운” “혁명인물지” “혁명당선언서” “일영 양국 입헌 원조, 원세개의 군주 입헌안, 혁명당 외국인을 위협, 혁명군 북경 공격” “민영익 거금 피탈, 혁명군은 민영익을 유인, 민영익은 위협에 연조함” “도와라 중국혁명군을” “혁명당 三년 한인” “중국혁명군 향배에 대하여 힘껏 도울 일” “중국혁명군 향연조”등의 제목으로 1912년 2월까지 거의 매호 제1면을 할애하였다. <《신한민보》 1911-10-18에서 1912-02-12까지 참조>
▲ 신한민보 1911년 10월 18일 자 사설,
‘청국혁명에 대하여, 각국의 동정과 본기자의 언론’ 제목으로 신해혁명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신해혁명이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보도한 내용도 있다. 한 예로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서 고위직을 두루 거쳤으나 친청·보수파로서의 정치노선 등이 문제가 되어 반대파에 몰려 중국 망명생활을 하던 민영익이 혁명군의 계교 혹은 위협에 굴복하여 거금이 피탈당한 사실에 대하여 아주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인 보도도 있는데, <민영익 거금 피탈, 혁명군은 민영익을 유인, 민영익은 위협에 연조함, 《신한민보》, 1912-01-01>
이러한 기사의 논조는 그가 평소 독립지사 혹은 한인들의 어려운 생활을 외면한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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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양신군의 사열 장면
2-2) 신해혁명과 한국의 공화주의
제1차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1912년 성립된 중화민국은 임시약법에서 정치제도의 변혁이라는 신해혁명의 의의를 잘 말해주고 있다. 임시 약법은 제1장 제1조에서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고 규정하여 군주 전제지배 대신 주권재민의 원칙을 선언했다. 제2장에서는 “중화민국의 인민은 모두 평등하여 종족․계급․종교의 차별이 없다.”고 인간의 평등권을 약속하고 있다.<姬田光義 外, 1984『中國 近現代史』 p164 참조, 일월서각>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된 상해임시정부의 임시헌장 제1조와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男女)·귀천(貴賤) 및 빈부(貧富)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유광렬 역음, 『抗日宣言·倡義文集』, 1975, 서문당> 라고 규정된 제3조는 중화민국의 임시약법과 너무나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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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19년 4월에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장에 표명된 주권재민의 사상과 평등권 주장에 대한 고찰은 신해혁명 이전 특히 1910년 이전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당시로는 대단히 파격적인 사상이었다. 비록 일제의 침략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 해도 엄연히 군주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는 논의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개항 무렵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 앞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력들은 낡은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출발을 꾀하기보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충군(忠君)을 내세우며 근왕주의(勤王主義)적 태도를 보였다. 1894년 농민혁명 당시의 전봉준도 근왕주의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또 그랬으며, 갑신개혁의 당사자인 김옥균, 박영효 등도 이러한 주류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자유나 민권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민권을 주어 하원을 설치하는 것은 위태하다”면서 “무식한 나라에서는 군주국이 민주국보다 견고”하다고 하여 민중들의 국정참여에 반대한 서재필 등 독립협회의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문화계몽운동에 참여한 신지식인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복벽주의의 대표자는 척사론의 맥을 이은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이었다. 그는 이상설(李相卨) 등과 더불어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운동을 일으킨 임병찬(林炳瓚)이 주도한 대한독립의군부 역시 입헌공화론은 내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황제를 복위시키고, 황제의 명에 의해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적 질서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915년에 결성된 신한혁명당 역시 고종을 국외로 탈출시켜 당수로 옹립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이 당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이상설 이외에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유동렬(柳東說) 등 뒤에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시 보황주의와의 갈등은 거의 없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합의하였다.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어떻게 이런 역사적 사건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 답은 신해혁명과 그 이후의 혁명 전개과정에 있다고 본다.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한족에 의한 공화혁명을 이루려는 운동은 당시 중국 민족주의의 요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었다. 중국에는 공화제와 민족주의가 쉽게 결합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조선 왕조의 왕실, 또는 대한제국의 황실은 민족주의적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무능이 비판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정통성을 쉽게 부인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에서의 공화주의운동은 입헌군주론을 포함한 조선의 보황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특히 이 운동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한국인들에겐 신천지를 보는 느낌이었을 터이다.
▲ 예관 신규식과 청사 조성환,
1910년대 상해와 북경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끈 거두다.
신해혁명이 진행 중이던 1911년 12월 경 북경에 도착한 신규식이「연경에서 청사를 찾아」란 시에서 “중화 땅 그 소식 실로 정말이던가?”(中華消息倘其眞)라고 한 부분은 당시의 한인 독립지사들의 심정을 대변해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조성환은 제1차 혁명이 진행되던 1911년 년 말에서 1912년 초까지 10여 통의 편지를 안창호에게 보냈는데 그는 “청국내란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실로 큰 희망이 보이는데,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날이 있겠는가…”라고 한국독립 혹은 혁명에 대한 희망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물론 신해혁명 이전에도 한인독립지사들이 공화주의에 대한 신념을 표현한 주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상 하기자료 참조
<배경한, 2007『쑨원과한국』p43, 한울아카데미> <김동훈 외 편역, 1999「연경에서 청사를 찾아」『신규식시문집』p70, 한국문학사> <「曺成煥이 安昌浩에게 보낸 편지」 2000,『도산안창호전집 제2권, 서한 Ⅱ』p584~659> <배경한, 2007『쑨원과 한국』p45 재인용, 한울아카데미>
예를 들면 박용만은 1911년 4월 신한민보를 통하여「조선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무형한 국가를 먼저 설립할 일」이란 제목의 논설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제도의 변혁을 주장한 바 있으나, 혁명에 대한 구체적 방법론이나 이념면의 고찰이 다소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박용만, 1911.4.5『조선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무형한 국가를 먼저 설립할 일』신한민보>
아무튼 신해혁명은 의병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임을 자처하던 복벽주의류에서 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이 공화주의자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 요인을 제공했음이 틀림없다.
1917년 발표된「대동단결 선언」과 1919년을 전후하여 발표된「대한독립선언서」등 각종 독립선언서에서 표명된 공화주의 독립선언이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표된「성명회선언서」나 1919년 발표된 유림계의「독립청원서」에서 표명된 근왕주의적 독립운동 경향보다 양적 질적으로 압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임시정부 헌장의 내용이 신해혁명의 임시약법과 손문이 제창한 삼민주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음이 보다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370§ion=sc12§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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