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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을 지워라!"…'가짜 사진' 조작의 진실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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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447회 작성일 11-03-0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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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진위 논란 재점화] 정부·학계가 답해야 할 5대 의혹


최근 SBS가 지난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체포 사진([사진 1])이 일제에 의해서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해당 사진의 진위 논란이 다시 불붙었다.

그러나 지난 1999년 이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강효백 경희대학교 교수(국제법무대학원)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SBS의 보도에 호응하는데도 정작 국가보훈처 등은 침묵하는 상황이다.

강 교수 등은 국가보훈처의 이런 침묵을 놓고 "납득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2008년 10월 국가보훈처가 해당 사진의 인물을 윤봉길 의사라고 판단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 충남대학교 김상기 교수(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의 연구가 SBS 보도로 조목조목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상기 교수가 사진 진위 논란을 염두에 두고 지난 2009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내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32집(2009년 4월))에 기고한 논문 '윤봉길의 상해 의거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의 주요 내용은 SBS 보도와 정면충돌하고 있어서 제3의 연구자에 의한 검증이 불가피해 보인다.

▲ [사진 1] 일본 <아사히신문> 5월 1일자 호외 전면에 실린 사진. 국가보훈처,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 사업회, 김상기 충남대학교 교수 등은 "이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 의사가 맞다"고 주장한다. ⓒ프레시안

질문 1 : 윤봉길 의사는 코트를 입었는가?

김상기 교수는 앞의 논문에서 조작 의혹이 제기된 <아사히신문> 1932년 5월 1일자 호외 전면에 실린 [사진 1] 속 인물을 윤봉길 의사로 보는 근거로 일본 내무성 보안과가 같은 해 7월 작성한 보고서를 들었다. 보고서는 "(윤 의사가 거사 당시) 코트를 입었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SBS는 이런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우선 거사 당시를 기록한 많은 언론은 윤봉길 의사가 "양복만을 입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또 이런 현지 언론의 거사 직후 보도 내용을 거부하고 사건이 일어난 지 수개월이 지나고 나서 작성된 일제 측 보고서를 더 신뢰할 만한 이유도 없다. 심지어 김상기 교수가 인용한 당시 윤봉길 의사를 체포한 호위병도 윤 의사를 "양복 입은 남자"라고 증언했다.

"순간 뒤에서 나를 밀치고 앞의 연단 쪽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자가 있어 무의식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왼편으로 돌아보니 짙은 다색의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달아나려고 해서 순간 잡아서 내동댕이치고 팔을 비틀어 엎어누른 순간 얼굴을 드니…." (<아사히신문> 1932년 4월 30일자, 논문 172쪽에서 재인용)

질문 2 : 저게 집단 구타 후의 모습인가?

▲ <상하이타임스> 1932년 4월 30일자. ⓒ프레시안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당시 화둥 지방 최고의 권위지였던 <상하이타임스>를 비롯한 현지 언론이 윤봉길 의사의 연행 장면을 묘사한 부분은 <아사히신문>의 사진 속 정황과는 전혀 다르다. 윤 의사의 거사를 다음 날 보도한 미국계 언론 <상하이타임스> 1932년 4월 30일자 보도는 이렇게 되어 있다.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를 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김상기 교수도 "(윤봉길 의사가) 일시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음은 사실"이라고 이런 <상하이타임스>의 보도를 일부 인정했다(174쪽). 그러나 김 교수가 진짜라고 단정하는 사진 속의 인물은 집단 구타를 당한 윤봉길 의사라고 보기에는 얼굴과 옷이 깨끗하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김상기 교수의 해명을 들어보자.

"(윤봉길 의사가) 일시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음은 사실이다. (…) 그런데,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나 얼굴이나 옷이 깨끗하다. 그래서 이 사진의 인물이 윤봉길 의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사진의 모습이 깨끗하다고 하여 윤봉길 의사가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윤봉길 의사의 사진은 <아사히신문> 같은 날 호외 2면에도 게재되었다." (174쪽)

"혹시 <아사히신문>에서 1면에 사진을 확대해 내면서 핏자국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사진의 원판에 손을 댄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호외의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나가는 사진에 핏자국이 선명한 범인의 얼굴을 그냥 싣는 것은 상해사변 이후 격화된 반일 감정을 더욱 부추길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가 한다." (176쪽)

김상기 교수가 이렇게 해당 사진의 '일부' 조작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도, 굳이 이 사진 속 인물을 윤봉길 의사라고 꼽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 교수는 <아사히신문> 같은 날 호외 2면에 실린 또 다른 사진(아래 [사진 2])과 <더 차이나 위클리 리뷰> 1932년 4월 30일자에 실린 사진([사진 3], 이렇게 두 장의 연행 사진을 근거로 제시했다.

다른 두 사진 속 인물은 "얼굴에 상처가 났으며 핏자국도 보이고" "코트에 진흙 같은 것도 묻어 있기 때문에" "(윤봉길 의사가) 집단 구타를 당한 후 연행돼가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175~176쪽). 그러나 이런 반박은 근거가 미약하다. 다른 두 사진 속 인물이 과연 윤 의사인지도 의문일뿐더러, 세 사진 속 인물이 동일인인지도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 [사진 2] <아사히신문> 1932년 5월 1일자 호외 2면에 실린 사진. 경일대학교 김호권 교수(사진영상학과)는 "1면과 2면에 실린 사진 속 인물이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프레시안

▲ [사진 3] <더 차이나 위클리 리뷰> 1932년 4월 30일자에 실린 사진. 이 사진은 일본 <교도통신>의 전신인 <니혼뎀포>가 제공한 사진이다. 이 사진 속 인물도 [사진 1]과 [사진 2]의 인물과 비교해보자. ⓒ프레시안

질문 3 : 사진의 주인공은 윤봉길 의사인가?

일단 김상기 교수 본인도 사진 속 인물이 과연 동일인인지 의심하는 상황이다. 그는 <아사히신문>의 1면과 2면에 실린 두 사진을 보고서 "언뜻 보아 다른 인물인 것처럼 보이나, '범인'의 양팔을 끼고 연행하는 헌병 2명이 동일인임은 알 수 있다. 중절모를 들고 있는 것도 분명히 보인다"고 강조한다(175쪽).

그러나 SBS가 자문을 구한 경일대학교 김호권 교수(사진영상학과)의 의견은 다르다. 김호권 교수는 이 두 사진 속 인물은 "([사진 1]과 [사진 2]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며 "사진 속의 모자도 하나는 중절모지만 다른 하나는 납작모자(헌팅캡)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즉, 이 세 사진 속 인물이 동일인인지도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윤봉길 의사는 거사 2일 전인 1932년 4월 27일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김호권 교수는 이 사진을 SBS의 의뢰를 받아 3차원 영상으로 복원해 <아사히신문>의 사진([사진 1])의 인물은 윤 의사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호권 교수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머리를 숙여도 턱 부분의 각도가 살아나야 하는데 (<아사히신문>의 연행 사진에 실린) 이 분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무턱, 상당히 턱이 뒤로 후퇴해 있다"고 말했다. 이런 김 교수의 지적은 대다수 시민이 육안으로 비교한 결과와도 부합한다.

질문 4 : 일제가 사진을 조작했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김상기 교수가 내놓은 사진 석 장은 모두 출처가 <아사히신문>, <교도통신>의 전신인 <니혼뎀포(Nihon Dempo)> 등 일본 언론이다. 그래서 그간 강효백 교수 등은 일본 언론의 사진 조작 의혹을 제기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SBS는 새로운 사실을 밝힘으로써 일본 군부가 직접 사진을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SBS의 취재 결과, 당시 윤봉길 의사의 거사 현장에 일본 언론의 사진 기자는 단 1명뿐이었다. <니혼뎀포> 소속의 이 기자는 폭발 후 사진을 한 장 찍고 곧바로 현장에서 철수했다. 즉, <아사히신문>, <니혼뎀포> 등 일본 언론에 실린 사진은 모두 다른 기관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사진을 찍어 언론에 배포할 수 있는 기관은 일본 군부뿐이었다.

일본 군부가 사진을 조작한 이유는 앞에서 소개한 김상기 교수의 지적대로다. 일본 군부는 "(구타를 당해 만신창이가 된 윤봉길 의사의 사진이 그대로 언론에 실릴 경우) 상해사변 이후 격화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을 더욱 부추길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176쪽). 만약 사진이 실제로 조작된 것이라면, 일본 군부의 시도는 성공한 셈이다.

질문 5 : 왜 진짜 윤봉길 의사의 얼굴을 두려워하는가?

지난 2010년 4월 30일 중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상하이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찾아가 방명록에 "나라와 겨레에 바치신 뜨거운 사랑, 부강한 조국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006년 4월부터 대통령 당선 직전까지 매헌 윤봉길 기념 사업회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물론 이 대통령이 머리를 조아린 앞에는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이 큰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앞서 윤봉길 의사의 한 방계 유족은 사진 조작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강효백 교수를 고소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유족이 나서 가짜 사진을 옹호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오죽하면 담당 검사가 '윤 의사가 거사를 치르고 나서 일제의 폭행에 의해서 만신창이가 된 사실을 새롭게 발굴해냈는데 유족이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고소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역시 윤봉길 의사의 방계 유족 중 한 사람인 윤주 윤봉길 의사 기념 사업회 매헌연구원 연구위원은 8일 <동아일보> 기고를 통해서 "정부는 하루 빨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연행 사진의 판독을 의뢰해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이제 정부, 학계가 강효백 교수와 언론의 문제 제기에 답할 때다.
 

/강양구 기자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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