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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74> `조선의 양계초`라 할 수 있는 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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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123회 작성일 11-02-2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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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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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74.흉한에 어이없이 암살당한 '강인한' 투사

 

 

1980년 이해명은 독립운동 유공자로 '국민장'을 받았다. 공훈기록은 이렇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1927년 11월 황포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하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중략) 그는 의열단의 명령으로 1928년 10월 17일 동지와 함께 북경에서 박용만을 사살했으며 이로 인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됐으나, 중국 법정에서는 애국자라 하여 정치범으로 인정, 징역 5년 1월에 처했다가 만기 전에 출옥하도록 했다."

 

드러난 자료에 의하면 박용만을 살해하기 전 이해명의 이력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암살을 저지를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거나 무슨 교육을 받았다거나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이전 기록이 없다. 독립만세를 불렀다든가 무슨 단체에 소속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사람이 갑자기 정의감이 끓어올라 박용만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암살로 인해 특히 임시정부 고수파들에게는 영웅으로 부각됐으나 그들과 합류한 후의 이력은 서무주임 등의 미미한 직책이었다. 부서의 장이 됐거나 아무리 작은 단위 부대의 지휘관마저 되지 못했다. 이처럼 주위의 낮은 신망은 대개의 암살범들이 그렇듯 사주를 받았거나 아니면 맹목적인 흉한의 소행이었음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공훈자료에 의열단 단원이라고 돼 있지만 신빙성이 없는 얘기다.

1919년 말에 결성된 의열단은 1925년까지 테러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단원들만 희생되고 성과가 적자 투쟁노선을 바꾸고 1926년서부터는 테러행위를 중지했다. 또 의열단의 명령에 의해 사살했다는 기록이나 전언도 따지고 보면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당시의 모호한 자료에 의해 작성된 것들이었다. 이해명 자신도 이청천의 명령을 받았다고 하기도 하고 본국 독립당의 명령을 받았다고 했으며 재판 중 한 번도 의열단 단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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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명(1896-1950)

이해명이 1927년 11월 황포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했다는 기록도 사실에 어긋난다. 황포군관학교는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사관학교로 1924년 개교했고 3년 동안 약 7천 명의 장교들을 배출한 다음 1927년 폐교했다. '황포군관학교동학록'에 의하면 6기로 졸업한 조선인은 모두 9명인데 이해명의 이름은 기록에 없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였던 민석린이 작성한 '임시의정원 각 당파 명단'에 의하면 이해명의 학력이

'중앙군교특훈반필업(中央軍校特訓班畢業)'으로 기록돼 있다.

중앙군교특훈반은 1937년 12월 1일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 훈련반 6기를 뜻한다.

그때 이해명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런데도 "--- 1927년 11월 황포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하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중략) 그는 의열단의 명령으로 1928년 10월 17일 동지와 함께 북경에서 박용만을 사살했으며---"

라는 공훈자료는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는데도 수정이 되지 않고 있다.

국가기관의 공신력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 아닌가.

 

허위 경력은 본인이 아니고는 누가 일부러 지어서 작성해 줄 수 없는 법이다. 암살자로서 재판정에 섰을 때 횡설수설 거짓말을 둘러대던 이해명. 세상이 바뀌자 고국에 돌아와 그럴듯하게 자신의 경력을 변조하지는 않았을까.

 

박용만에 대한 평가 작업은 최근에 들어서야 심도 있게 이뤄지고 있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그에 대한 저술은 다른 운동가들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무엇보다 이승만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그에 대한 접근이 금기시 됐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초기의 저작물이나 증언에서 박용만은 심히 음해되고 터무니없이 왜곡됐다.

 

가장 큰 이유가 그때까지만 해도 주로 유비('카더라'하는 유언비어) 통신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테면 오늘날처럼 일본 총독부 경무청에서 작성한 기밀서류를 열람한다든가 하는 진실에 접근하기가 불가능했다.

이젠 1백 년 전의 모든 기록들이 소상히 공개되고 있는 마당이니 그간의 오류를 수정하고 굽은 역사를 바로 펴는 것은 이 시대에 주어진 책무가 아닐까.

 

박용만이 암살됐다는 비보에 접하자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 한 신흥우는 "--- 그에게서 내가 찾아낸 것은 스스로 조선의 양계초(梁啓超) 돼 역사적 큰 사업을 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회고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세기가 바뀔 무렵 극동의 세 나라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생존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먼저 국민의 의식을 근대화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 세 나라에는 세 사람의 선각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세 사람은 한때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물론 동경에 있었다.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온 박용만도 동경에 와 있었고, 중국 근대화의 선각자 양계초는 동경에서 멀지 않은 요꼬하마에 망명해 와 있었다.

 

세 사람은 자기 민족의 당면 과제를 고민하고 그 진로를 위해 각기 이정표를 제시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이 하루 빨리 아시아를 벗어나 구라파의 일원이 돼야 한다든 '입구탈아론(入歐脫亞論)'을 주창했다. 양계초는 1902년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는 민족 개념을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제시하면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박용만은 조선이 망하자 망국민들이 나아갈 길로 누구보다 먼저 '무형국가론'을 제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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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계초(1873-1929)

 

양계초는 침몰하는 배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조선의 지사들에게 '밧줄'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외친 '중국이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자강(自强)하여 유럽의 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조선에도 메아리쳤다. 그의 '애국론'은 1899년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에 실렸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그는 초인적인 집필과 언론활동을 통해 근대화를 위한 정신적인 소양들을 제공했다.

 

그런 저작물들은 바로 조선에서 번역되고 출판됐다. <이태리건국3걸전>은 신채호가 번역했고 교육개혁의 지침서인 <학교총론>은 박은식이 번역했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에서 국가의 미래를 논하는 그의 논설문들은 <중국혼>이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박용만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895년. 그의 나이 14세 때였다.

거기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후쿠자와가 세운 게이오 의숙으로 들어가 2년간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 즈음 후쿠자와는 벌써 65세의 노인이었고, 1901년 박용만이 귀국하던 해 세상을 떴다. 양계초는 박용만 보다 8살 더 많았는데 박용만보다 3년 늦은 1898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박용만이 두 큰 선각자들을 얼마나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은 스스로 실토하고 있다. 우선 세 나라가 다 한자(漢字)문화권에 속해 있다 보니 문자의 문제점에 대한 세 사람의 인식이 같았다.

 

후쿠자와와 양계초는 자국어의 문법 연구는 물론 한자 수를 줄이고 표기를 표준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근대화를 위해 국민을 계몽하려면 배우기 쉬운 글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말과 글이 같아야 한다는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주장했다. 박용만이 일생 동안 한글에 깊은 애정과 연구심을 갖게 된 건 두 선각자들로부터 받은 언문일치 사상 때문이었다.

 

양계초는 14년 동안 주로 일본에 체류했다. 1902년 2월 요코하마에서 <신민총보(新民叢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 언론의 선구자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였다. 사실 보도나 하는 기사작성 위주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그리고 국민의 주권의식을 일깨우는 명쾌한 논설들을 많이 썼다.

 

양계초 못지 않게 수준 높은 논설을 많이 쓴 사람이 박용만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주필과 호놀룰루의 <국민보> 주필을 맡아 망국민의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독립운동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쾌한 논설로서 제시하지 않았던가. 두 사람 다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박용만에 대한 평가는 바로 그의 선지자적인 구상과 실천을 먼저 읽어냄으로써 출발해야 할 것이다. 망국의 어둠 속에서 그는 누구보다 먼저 횃불을 들어 앞길을 밝혔으며 먼저 착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실천에 나선 사람이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상 최초로 해외의 한인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애국동지대표대회'를 1908년 7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개최했다.독립운동사상 최초로 해외에 설립된 한인무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그는 1909년 6월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에 세웠다.그리고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마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무형정부론'을 들고 나와 우왕좌왕하는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이 세 가지 뚜렷한 행적만 가지고도 그의 위상은 재평가돼야 마땅하지 않을까. 사실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세 사람 중 박용만은 유일하게 묻히고 잊힌 존재였다. 그러나 보석은 오래 묻힘과 상관없이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 늦게나마 그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그에 합당한 자리매김을 이뤄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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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헤이스팅스대학교 도서관 입구에 세워진 '소년병학교' 기념비

 

1909년 2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가 창설됐으나 표류하는 연체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결성 선포문과 정강을 작성함으로써 단체의 골격과 근육을 제공했던 사람이 박용만이었다. 그로 인해 대한인국민회는 비로소 정치단체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미주와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구서구석에 116개의 지방총회를 일궈낼 수 있었다.

 

그가 유명한 '가정부(무형정부론)'을 처음 제기한 것은 1910년 10월 5일자 <신한민보>에 발표한 '대한인(大韓人)의 자치기관(自治機關)'이라는 논설문에서였다. 조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에 쌓이거나 좌절해 있을 때 한 달도 안 돼 구국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사람이 바로 박용만이었다.

 

"이제 형질상의 '구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의 '신한국'은 바야흐로 울흉하기를 시작하니 어찌 희망이 깊지 아니함이요? "라면서 "그것은 단지 이씨조선의 통치권이 끝난 것뿐이다"라고 그는 담대하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 조선민족으로 말하면 이미 국가를 성립하여 4천여 년을 지켜왔거니와 4천 년 후에 나라가 한 번 망하고 4천 년 후에 우리 백성이 비로소 바다 밖에 나온 것은 이는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한 새 나라를 만들게 함이라."

 

이것은 상해에 임시정부가 들어선 1919년 4월보다 무려 8년 6개월이나 앞서 가정부의 설립을 주장한 기념비적인 선언이 아니었던가. '영토'와 '주권'을 잃었으므로 '유형국가'는 소멸됐으나 '국민'이 단결하여 '무형국가' 곧 '망명정부'를 세우자는 그의 유명한 '무형국가론'은 누구도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선각자의 외침이 아닌가.

 

양계초는 강유위와 함께 1899년 캐나다의 빅토리아에서 보황회(保皇會)를 조직했다. 보황회는 1904년 11월 주정부의 허가를 받아 LA에 '간성학교'라는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부패무능한 청(淸)조를 개혁하려면 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군사학교를 세운 것이다. 주중에는 오후 8시 이후, 주말에는 교외의 은밀한 곳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나 주민들의 항의로 1년도 안돼 중단해야 했다.

 

박용만 역시 누구보다 먼저 무관학교 설립에 뜻을 두었다. 1909년 네브래스카 주의 커니 시에 세운 '소년병학교'는 1914년까지 6년 동안 유지됐다. 이 '소년병학교'는 그 이후 만주와 미주에 설립된 한인들의 모든 무관학교의 운영에 선도 역할을 했다.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해서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해 낸 것 역시 아무나 이뤄낼 수 없는 그의 빛나는 업적이다. 비록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더라도 독립운동의 동력을 이어나가게 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신흥우가 지적한 대로 박용만은 '조선의 양계초'처럼 활동했고 유사한 업적들을 남겼다.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출신들이나 양계초의 '간성학교' 출신들은 군사훈련을 실전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거기서 배태된 씨앗들은 전장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열매로 나타났다.

 

'소년병학교' 출신들은 졸업 후 많은 분야의 지도자들이 됐다. 이희경은 상해로 가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이 됐고 정한경은 비록 '위임통치 청원서' 제출로 곤욕을 치렀으나 이승만과 함께 대미외교와 여론조성에 기여가 컸다. 유일한은 공정한 기업경영이 어떤 것인가를 한국에서 보여주었다.

백일규는 <신한민보> 주필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 됐으며 김현구는 국민보 주필로 활동했다. 구영숙은 고국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초대 보건사회부 장관이 됐다. 홍승국, 이노익, 박처후 등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섰다가 박해를 받거나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난 사람도 많았다. 이들 모두가 한 때 박용만의 구령에 따라 행군도 하고 사격훈련도 받으며 조국독립의 열의를 불태웠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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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병학교' 기념비 비문. 박용만 선생이 설립했다고 쓰여 있다.

 

중국으로 건너간 박용만은 그쪽 사회상이 미주와 달라 고전했다. 성공보다 실패의 기록을 더 많이 남겼다. 하지만 다른 독립운동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어느 누구도 궁극적인 목표였던 조국의 독립을 스스로 쟁취하지 못했다. 따라서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두는 것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소신에 따라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 독립운동을 추구했는가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독립운동가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 자질을 들라면 '지사정신'과 '투사정신'이다. 그 두 가지 자질 때문에 박용만은 더 큰 업적을 남길 인물이었다. 그의 올곧은 '지사정신'은 독립운동의 노정에서 꺾이는 일이 없었을 것이며, 그의 강인한 '투사정신'은 기어코 중국에 둔전기지 건설을 이룩해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흉한에게 어이없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단지 박용만 한 개인의 비극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독립운동 사에도 큰 공백을 남기고 말았으니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김도훈 저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조규태 -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배경식 -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집필에 도움 주신 분들-

한애라, 서정자, 신원호, 박도, 유민철, 정대화, 오은택, 이정묵, 이지운, 이미경(존칭 생략)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5340&PAGE_CD=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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