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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72> 횡설수설 위증을 일삼는 암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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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1,970회 작성일 11-02-1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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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72.횡설수설 위증을 일삼는 암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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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 (1881~1928)

이해명의 재판은 암살사건이 일어난 후 20일 만인 1928년 11월 7일 제1차 예심이 열렸다.

 

재판관 심문 : 총을 몇 번 쏘아서 박을 죽였는가?

이해명 답변 : 두 번 쏘니 죽었소.

 

문 : 후에 당신은 또 두 번 쏘지 않았소?

답 : 한 번 뿐이었소.

 

문 : 박이 이미 당신에게 맞아 죽었는데 왜 총을 또 쏘았나?

답 : 이때 김(김문팔을 뜻함)이 내 머리칼을 잡으려 달려들었기에 또 한 번 쏘았소.

 

문 : 당신은 도합 네 번을 쏘지 않았소?

답 : 정말 세 번만 쏘았소.

 

문 : 당신이 휴대했던 권총은 총알 여섯 개가 있었던 것이 아니오?

답 : 그렇소.

 

문 : 당신은 세 방 놓았다고 말하니 마땅히 총알 세 개가 남을 터인데 어찌하여 두 개만 남았는가?

답 : 모르겠소.

 

문 : 당신은 박용만과 원한관계가 있었던가?

답 : 개인 간에는 원한관계가 없었소.

 

문 : 원한관계가 없는데 왜 죽여야 했나?

답 : 그가 공(公)에 충성하지 않은 까닭에 내가 명령을 받고 죽이려 왔소.

 

문 : 그가 어떻게 공에 충성하지 않았는가?

답 : 그가 비밀을 외인에게 7천 원에 판 까닭이었소.

 

문 : 박용만이 벌써 공(公)에 충(忠)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현재에 이르러서야 죽이게 되나?

답 : 7, 8년 전에 벌써 죽였어야 옳았으나 기회가 없었소.

 

문 : 당신이 북평에 온 것은 박용만을 죽이려고 해서 온 것인가?

답 : 아니오. 공부하러 왔소.

 

이해명은 1896년 생으로 박용만을 암살한 것은 32세 때였다.

그동안 유랑하다가 3년 전에 북경으로 돌아왔는데 그 나이에 공부하러 왔다고 위증하고 있다.

7, 8년 전에 죽였어야 했다고 하는데 그때는 박용만이 중국에 갓 건너왔기 때문에 죽여야 할 과오를 미처 지을 수도 없었다.

비밀을 외인에게 7천 원에 판 까닭에 죽이려 했다고 하는데, 제2차 상고심에서는 길림에서 총살된 7인 때문이라고 번복한다.

사건의 내막이나 그 진위를 파악하지도 못 하고 동포사회에서 떠돌던 유언비어를 생각나는 대로 옮기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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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이 참살당한 걸 보도한 동아일보 1928.10.27일자 기사

1928년 10월 27일자 동아일보의 <사살당(射殺當)한 박용만씨> 기사에는 '군자천원거절관계(軍資千圓拒絶關係)'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 옆 기사에는 <몽매(夢寐)에 그리는 고토(故土)도 못밟고>라는 당시 기독총무 신흥우의 인터뷰기사다.

 

"--- 그에게서 내가 찾아낸 것은 스스로 조선의 양계초(梁啓超) 돼 역사적 큰 사업을 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문사라기보다는 의협심이 많은 무관의 기풍이 있었고 --- "

 

양계초는 중국 근세의 선각자로 1902년 중국 역사상 처음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신흥우는 독립협회 회원 가운데 가장 먼저 미국 유학을 떠난 사람이다.

1903년 LA로 건너가 남가주대학에서 의학과 인문학을 공부, 귀국 후 배재학당 제4대 교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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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LA로 신흥우를 찾아간 박용만(오른쪽)

 

다음 날인 11월 8일 제2차 예심이 열렸다.

 

문 : 당신은 그날 박을 죽일 때 몇 방 놓았소?

답 : 세 방이요.

 

문 : 김이 당신의 권총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에 김에게 한 방 놓고 그의 손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당신은 네 번 쏜 것이요.

답 : 나는 세 번만 쏘았소. 나는 김을 쏘려는 마음이 없었소.

 

문 : 당신이 박가에 갔던 것은 김을 쏘려고 갔던 것이 아니라 해도 김이 당신의 권총을 빼앗으려 했던 까닭에 김에게 한 방

      쏘았다. 맞지 않은가?

답 : 맞지 않소. 나는 김에게 발사하지 않았소.

 

문 : 당신이 세 번만 쏘았다면 어찌 박가의 응접실에서 네 개의 탄피가 나왔는가?

답 : 모르겠소. 혹시는 박씨의 권총에서 발사된 것이 남을 가능성이 있소.

 

문 : 당신이 박가에 가서 박용만을 만났을 때 당신은 박과 무슨 얘기를 했는가?

답 : 많은 말 하지 않았소. 나는 단지 명령을 받들어 죽이려 왔다고 말했소.

 

그 전날 자기 입으로 김이 내 머리칼을 잡으려 달려들었기에 또 한 번 쏘았소 했던 이해명이 김에게 발사하지 않았다고 멀쩡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씨의 권총에서 발사된 것이 남을 가능성이 있소' 한 것도 횡설수설의 극치다.

찾아온 손님을 응대하러 간 박용만이 권총을 들고 갔겠는가. 단지 명령을 받들어 죽이려고 했다면 점심을 대접 받을 정도로 오래 있을 게 아니라 박용만을 보자마자 사살했어야 하지 않는가.

 

11월 16일 재심이 열렸다.

 

문 : 네가 박씨 집에 간 후에 어떻게 박을 죽였나?

답 : 저는 박을 만난 후에 사실대로 말했소. 그가 매당(賣黨) 행위를 했고 이왕의 일은 용서할 것이니 뉘우치라고.

      그렇지 않으면 단에서 너를 처벌할 것이라 했소. 그러나 박은 일어나 자기 알 바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저는 권총을

      꺼내어 박용만에게 일 발을 발사했소.

 

문 : 몇 번 발사했다고?

답 : 제가 일 발만 발사하니 박은 곧 쓰러졌소.

 

문 : 너는 박에게 세 번 발사하고 또 김문팔에게 일 발 발사한 것이 아닌가?

답 : 저는 단지 한 번만 쏘았소. 그리고 김문팔은 쏘지 않았소.

 

문 : 네가 일 발만 발사했다면 어찌하여 박씨 집에서 네 개의 빈 탄피가 나왔나?

답 : 그것은 혹시 박의 권총에서 나온 것일 수 있소.

 

문 : 박씨가 권총을 가졌다면 맞아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이른다. 법정에서 거짓말할 수 없어!

답 : 저는 거짓말할 줄 모르오. 저는 오로지 일 발만 발사하였소.

 

8일 전 예심에서 박을 죽일 때 3 방을 놓았다고 했는데, 재심에선 1발을 발사했다고 번복하고 있다.

자기가 한 말을 뒤집고도 거짓말할 줄 모른다고 우기는 걸 보면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 아닌가.

김문팔을 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변호사가 사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쩐 영문인지 이해명을 위해 변호사가 셋이나 붙여졌다.

갑자기 돈 많은 후원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아니면 이해명을 자객으로 내보내면서 뒷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한 배후세력이 있었다는 얘기인가.

어쨌든 북경의 동포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던 터인지라 박용만을 적대시 했던 타 지역 단체의

자금지원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방법원은 이해명에게 5년 2개월 징역형을 언도했다.

 

해가 바뀌어 1929년 2월 21일 하북(河北) 고등법원에서 제1차 상고심이 열렸다.

 

문 : 당신은 언제 북평에 왔는가?

답 : 작년입니다.

 

문 : 당신이 북평에 온 것은 공부 때문인가?

답 : 아닙니다.

 

문 : 당신은 북평의 모 중학에서 공부하고 있지 않았소?

답 : 않았습니다.

 

문 : 그러면 당신은 북평에 와서 무엇하였나?

답 : 저는 본국 독립당의 명령으로 혁명공작하러 왔소.

 

문 : 당신 모두 몇 발 발사했는가?

답 : 3 발입니다.

 

문 : 당신은 또 김문팔에게 일 발 발사하지 않았소?

답 : 그렇습니다.

 

제1차 예심에선 공부하러 왔다고 대답했는데 여기선 본국 독립당의 명령으로 혁명공작하러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다음 제2차 상고심에서는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청천의 명령을 받들어 쏘아 죽이려고 했다고 둘러댄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암살 사건이 일어날 경우 배후에 대한 관심과 추적이 먼저다. 북경의 한인 밀정 김달하가 피살됐을 때 그와 접촉이 있었던 김창숙은 '다물단원'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인 백천 대장 등을 폭사시킨 윤봉길 의사의 경우 김구가 그를 한인애국단에 입단시켰음을 밝히고 의거 직전 주위 동지들에게 피신할 것을 미리 알렸다.

 

그러나 이해명의 경우 스스로 배후나 연관을 밝히는 개인이나 단체가 나서지 않았다. 대개 떳떳치 못한 정치적인 암살인 경우 배후는 영원히 미궁 속에 숨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해명 개인의 우발적인 소행임을 의심케 하는 증거도 된다.

 

같은 달 27일 하북 고등법원에서 제2차 상고심이 열렸다.

 

문 : 당신과 박은 무슨 얘기를 했는가?

답 : 저는 박이 당을 팔았다고 얘기했소.

 

문 : 당신이 박을 욕했는데 박이 오히려 점심을 먹자고 청했나?

답 : 박이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얘기하자고 해 저희들과 박은 점심을 먹었소.

 

문 : 그 후에 당신은 어떻게 그를 죽였는가?

답 : 저는 그에게 당신은 왜 매당(賣黨)행위를 했습니까? 지금 나는 당의 명령을 받들어 당신을 죽이려 하오.

      만일 당신이 회개하여 우리와 같이 혁명공작을 같이 하면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했소.

      그는 제 말을 듣고 곧 제 머리를 움켜쥐어 저는 할 수 없이 그를 쏘아 죽였소.

 

문 : 당신은 당의 수령 이청천(李靑天)의 명령을 받들어 쏘아 죽이려 했나?

답 : 그렇소

 

문 : 그렇다면 당신이 먼저 그를 권면하고 죽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령위반이 아닌가?

답 : 만약 그가 회개하고 다시 혁명공작을 하겠다면 하필 쏘아죽여야만 됩니까?

 

문 : 당신이 명령을 받아 그를 죽이려던 것은 길림에서 총살된 7인 때문인가?

답 : 그렇소.

 

전 해 11월 16일 재심에선 일 발만 발사하니 박은 곧 쓰러졌소 했는데 상고심에선 다시 3 발을 발사했다고 말을 바꿨다.

그때의 표정이 궁금하다. 물증이 뻔한데도 김문팔을 쏘지 않았다고 그는 한결같이 주장했다.

아마 변호사의 권고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에서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호사는 말을 바꿨다. 김문팔이 이해명의 팔을 잡고 권총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면 이는 김을 다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당방위로 다친 것은 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외려 저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권총을 빼앗는 것이야말로 정당방어가 아니겠는가?

 

이청천의 명령이라고 했는데, 암살 당시의 해인 1928년 이청천은 만주에서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분립돼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고 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해 일 년 내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옛 동지였던 박용만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만큼 한가한 사정이 아니었다.

 

회개하면 하필 쏘아죽여야만 됩니까 하고 이해명은 반문했다.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온 사람이 아니라 돈만 쥐어준다면 사살을 안 했을 것이라고 암시한 것이다. 처단이 우선적인 목적이었다면 대낮이 아니라 밤 시간에 결행하고 잠적하는 게 상식 아닌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김도훈 저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조규태 -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배경식 -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집필에 도움 주신 분들-

한애라, 서정자, 신원호, 박도, 유민철, 정대화, 오은택, 이정묵, 이지운, 이미경(존칭 생략)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3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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