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시대 71>돈이 없다고 하자 박용만을 죽인 이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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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 1928년 10월 27일자 동아일보
71. 돈이 없다고 하자 박용만을 죽인 이해명
숭문문외(崇文門外) 상2조(上二條)에 소재한 대본농간공사 사옥에 두 사람의 사내가 들어섰다.
1928년 10월 17일 이른 아침이었다. 응접실에 있던 김문팔은 인기척을 듣자 약간 의아했다. 응당 자기가 문을 열어줘야 들어오는 건데 누군가가 잠그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본농간공사의 논농사를 돕기 위해 하와이에서 북경에 와 있는 김문팔은 중국어를 하지 못했다.
"어디서 오셨는지?"
김문팔이 한국말로 묻자 깡마른 얼굴의 사내가 "용만 선생을 뵈러 왔오"라고 대답했다.
깡마른 얼굴의 사내는 이해명(이구연의 가명)이었다.
두 사내는 전일 두 번이나 박용만을 만나려 했으나 면담을 못하고 돌아갔다. 돈을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어서 박용만은 생면부지의 그들을 만나주지 않은 것이다. 김문팔은 두 사내를 응접실 안에 들이고 한담을 나눴다.
박용만이 응접실에 나타난 건 거의 점심 때였다. "점심때가 됐으니 우선 요기라도 먼저 할까요? " 하면서 중국인 고용인 왕서(王書)를 불렀다. 호떡을 사오라고 동전 30 개를 꺼내 건넸다.
▲ 박용만이 피살된 가옥의 출입문
"무슨 일로 오셨는지?"
점심이 끝나자 박용만이 물었다. 같이 온 백(白)가가 대답했다.
"우리가 연해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 하는데 노비가 없습니다. 1천 원의 노비를 부탁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이 말에 박용만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가 중국에 온 후로 재정의 곤란이 막심하오. 그래서 우리의 운동하는 일에도 장애됨이 적지 아니하오. 일신의 곤궁도 심한 판이니 내 수중에 무슨 돈이 있겠소? 내 수중에 돈 없는 것은 일반 조선사람 사회가 다 아는 일이요. 만일 돈이 있으면 드리겠지만 돈이 없어 청을 못 들어드리니 섭섭할 뿐이요. "
박용만이 완강하게 말하자 이해명이 자리에서 불쑥 일어섰다. 그리고 언성을 높여 말했다.
"우리는 독립단에서 왔소. 이렇게 박대하면 안 되오."
▲ 이해명(1896-1950)
그러나 박용만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독립단이니 혁명단이니 사칭하는 나부랭이들을 한 두 번 겪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 자들과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박용만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이해명이 소리쳤다.
"당신은 왜 당을 배반하였소? 당의 명령을 받들어 당신을 죽이려 하오."
그 소리에 박용만은 멈칫 돌아섰다. 그리고 노기 띤 눈으로 이해명을 쏘아봤다.
"당을 배반했다고? 무슨 당을 말하는 거야? 무슨 당의 명령을 받았다는 거야?"
박용만이 소리를 높이자 이해명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무슨 당에 속하는지도 모르는 자였다. 아니면 어떤 당에도 소속하지 않은 자였다.
"당신이 군자금을 내고 우리와 같이 혁명공작을 하겠다면 나는 용서하겠소."
이해명은 가슴 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박용만은 일각의 지체도 없이 이해명에게 달려들었다. 왼손으로는 권총을 든 이해명의 팔목을 붙잡았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머리털을 잡았다. 그동안 크고 작은 테러를 직접 몸으로 당한 경험이 있는 그였는지라 겁없이 행동에 나선 거였다. 백가도 가만 있지 않았다. 자리에 벌떡 일어선 그는 박용만의 왼손 팔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놀란 사람은 이해명이었다.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불시의 반격을 받자 순식간에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 총알은 박용만의 왼쪽 어깨 밑을 뚫었다.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는데도 박용만은 이해명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박용만의 왼쪽 팔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때 그의 팔목에 찼던 금시계도 바닥에 떨어졌다.
백가는 얼른 그걸 집어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해명은 총구를 돌려 박용만의 가슴에 대고 두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김문팔이 이해명에게 달려들었다. 권총을 빼앗으려 하자 이해명은 그의 손목에 대고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총소리를 듣고 내실에서 두 사람이 뛰쳐 나왔다. 박용만의 처 웅소청과 이만수였다.
그와 동시에 백가는 응접실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저 놈 잡아라." 박용만이 소리쳤다.
"저 놈이 내 시계를 훔쳐간다." 이 소리를 들은 웅소청은 백가를 잡겠다고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응접실에 뛰어든 이만수는 두 팔로 이해명의 두 발을 틀어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용만은 이해명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서 있었다.
이만수도 김문팔처럼 조선독립단 단원이었다. 대륙농간공사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두 달 전에 하와이에서 북경으로 와 박용만의 집에서 같이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백가를 놓친 웅소청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박용만은 아직도 이해명의 머리털을 붙들고 있었다.
"이 놈이 나를 죽이겠다고 권총을 쐈소. 경찰을 불러요. 어서."
박용만이 소리치자 웅소청은 다시 집을 뛰쳐나갔다.
그녀가 두 사람의 경찰관을 데리고 왔을 때 이해명은 이미 요리사 조영왕에 의해 결박돼 있었다.
그 곁에는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박용만과 김문팔이었다. 박용만의 가슴 양쪽의 총알구멍에서는 피가 계속 솟고 있었다. 그는 오른팔을 베개 삼아 베고 총알 맞은 왼손으로 가슴의 총알 구멍을 막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넘쳐 흐른 피가 흥건히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 박용만이 피살됐던 대본농간공사 사옥. 왼쪽에서 3번째
"여보, 이게 무슨 일이다요? 세상에 이 무슨 날벼락이요? 어머, 이 피 좀 봐."
웅소청은 박용만의 손을 그의 가슴에서 떼어내고 대신 손수건으로 덮어 눌렀다.
"내가 48세 되도록... 오직 이 아들... 하나만 두었으니... 내가 죽은 뒤... 부디 애들을 잘 양육하여 주오..."
박용만은 곁에 바짝 다가선 웅소청에게 띄엄띄엄 말했다. 그리고 '푸...후...' 하는 긴 한숨소리를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김도훈 저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조규태 -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배경식 -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집필에 도움 주신 분들-
한애라, 서정자, 신원호, 박도, 유민철, 정대화, 오은택, 이정묵, 이지운, 이미경(존칭 생략)
출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원문보기▶ 글쓴이 : 한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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