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만과 그의 시대 70 >한글만 지키면 독립은 언젠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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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70. 한글만 지키면 독립은 언젠가 찾아온다
▲ 영정하(永定河). 북경 서쪽에 흐르는 하천
박용만이 북경으로 돌아간 약 1년 후인 1927년 5월 22일 조선총독부가 파견한 밀정 목등극기는 '북경재류 조선인의 개황' 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5백여 명 한인 인구 중에 직업을 가진 자는 22명에 지나지 않고(기녀 妓女 제외) 그 생활 상태를 표현하려면 오로지 '비참'의 한 단어로 다 할 수 있다. 연례 북경에 재주하는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영수 박용만이 작년 하와이에 가서 동지를 규합해 얻은 자금 만여 원을 가지고 귀래해 영정하(永定河) 부근에서 수전(水田) 경영을 기도하는 한편 숭외문(崇外門) 밖에서 소규모의 정미소를 창설하고 북경 부근의 수전에서 나오는 벼를 사들여 수만 석의 정미를 만들었으나 중국인 측 미상(米商)과의 연락이 원만치 않아 그 판로에 궁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라고 한다."
약 3년 반 전 목등극기는 박용만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때 일본 영사관의 지원을 얻어주고 북경에서 상해, 나가사키, 서울, 신의주까지 동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일본을 배척하는 두목 급 '배일선인'이라고 지칭함은 무엇을 뜻함인가.
그러면서 밀착감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봐 그 이후 다른 거래가 없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몇 명을 빼놓고는 거의 모든 한인들이 직업도 없고 그날그날의 생계마저 잇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1만여 불을 가지고 와서 수만 석의 정미를 싸놓고 있으니 그에게 부아가 날 만도 하리라. 그때의 1만 불은 요즘 돈으로 무려 1백만 불이 넘는 거액. 자연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와서 손을 벌리는 사람이 부지기수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엔 생계가 어려운 사람도 있었지만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겠다며 거액을 요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박용만은 그런 요구들을 다 들어줄 형편이 아니었다. 계획했던 사업들이 번번이 성사가 안 되고 실패만 거듭했기 때문이다. 일본측의 방해공작도 있었을 수 있다. 중국인 미상(米商)들이 담합을 하거나 농간을 부리면 하루아침에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돈을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는 끈질겼다. 가만 두지 않겠다고 대놓고 협박하는 자도 있었다. 재산가에게 독립운동의 군자금을 요구했다가 듣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총살을 해도 좋다는 게 당시 일부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의 강령이기도 했다.
1926년 3월에 작성된 일제의 비밀문서 '북미와 하와이 지방 불령 조선인의 상황'에 의하면 박용만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전략) 또 박용만은 하와이에 가자마자 동지 조선인을 소집해 말하기를 '이번에 나는 큰 각오로서 민족적 단결을 굳히고 경제적 발전을 시도하게 됐다'면서 중국 북부지역에서의 농업경영이 유리한 점을 설득했다. 그곳에 조선인을 이민시켜 한편으로는 사교육을 실시하며 대조선 독립의 제1보를 걸어 나갈 것이라고 하면서 금융기관으로서 우선 저축회사를 설립할 필요성을 권장하며 '대조선독립단'의 강령 및 단원 서약서를 제시했고 동지의 손에 의해 일반 조선인에게도 배포돼 농업자금으로 출금을 승낙 받은 것이 3만여 불에 달했다고 한다.(후략) "
박용만이 하와이에 1년 머물면서 3만여 불의 약정금을 받았으나 북경으로 귀환했을 때는 1만여 불을 가져간 듯하다. 하와이로 떠나기 전 그는 노모와 본처를 북경 시내로 이주시켰다. 하와이에서 제2부인 웅소청에게 1백 불을 송금하면서 본처와 나눠 쓰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박용만은 북경에 돌아와 대본농간공사(大本農墾公司)를 설립했다. 논농사 경험이 있는 단원 몇이 일부러 하와이에서 북경으로 건너가 그를 도왔다. 그해 가을이나 겨울 쯤 그들은 작은 정미소를 사서 정미사업을 벌였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27년 봄서부터 일 년여 기간에는 영정하에 인접한 논을 사서 경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28년 여름 하와이로부터 논농사 경험이 있는 동포 몇이 박용만과 합류했다.
▲ 북경 전통가옥의 출입문
1928년 8월 2일자 <신한민보>에는 "북경에 체재하는 박용만씨가 조직한 대본공사와 영정하 토지 개척을 시찰차로 거 4월경 중국 북경에 전왕했던 조선독립단 단장 이복기씨는 7월 19일 프레지던트 태프트 호를 타고 회환하였더라"라는 기사가 실렸다.
미루어 보건대 대본농간공사는 내몽고에 크게 벌이려던 둔전의 꿈이 어려워지자 중간 단계인 자체 농사를 시작한 게 아닐까. 대조선독립단 단장이 시찰차 방문할 정도였으면 사업이 착착 진행되는 단계가 아니었을까. 그 기사가 난 후 약 2개월 반 만에 박용만은 흉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는데 암살 직전까지 그가 주로 했던 일은 대본공사의 운영이었던 것 같다.
암살되기 1년 전 박용만은 아주 특별한 업적을 이뤄냈다. 그 기간 동안 총이 아닌 펜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원래 그는 펜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던가. <신한민보>와 <국민보>의 주필로서 독립운동의 로드맵을 그려 보이지 않었던가.
박용만은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세 가지 혁명이 있는데, 첫째가 문화혁명이요, 둘째가 정치혁명이요, 셋째가 경제혁명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정치적으로 타민족에게 먹혔을지라도 민족문화(글과 말)을 보존하고 있으면 독립의 기회는 언제고 찾아온다는 것을 믿었다.
1927년 6월 그는 하와이 청소년들을 위한 국어 교재 2권과 역사서 합본 1권을 '대조선독립단' 북경지부 실업부 인쇄국 이름으로 출판했다. 역사서 합본은 구한말에 나왔던 3편의 논문 '대한북여요선', '부간조선문화', '대동고대사론'을 한데 묶은 것이다.
국어교재는 초등학교 수준에 맞게 지은 '됴선말 독본 첫 책'과 '됴선말 교과셔 둘재 책'이다. 두 권 다 재미있는 얘기들과 천진스러운 삽화들을 넣어 친밀감을 갖게 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병합되자 한글로 된 교과서의 발행도 차츰 줄어 하와이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언제 붙잡혀갈지 언제 눈먼 총알이 날아들지 모르는 게 독립운동가의 살벌한 일상이 아닌가. 자라나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가 지어낸 2권의 국어책은 전혀 다른 동심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책갈피 마다 묻어나는 그의 다정다감함은 산등성이에 핀 찔레꽃처럼 진한 향기를 내뿜는다.
역사서나 국어교재나 둘 다 민족의 장래를 깊이 염려한 지사정신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저작물들이다. 총탄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게 위대한 독립운동이라면 민족의 다음 세대에게 국어 교과서를 만들어주는 것은 이 또한 아름다운 독립운동이 아닌가. 1924년 두 번이나 조선을 드나듦으로써 변절을 했다면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는 그 순수한 마음이 그처럼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그해 8월 3일 호놀룰루의 팔라마 지역 한인 자제들을 위한 초등학교는 박용만을 기려 그의 아호를 딴 '우성학교'로 명명됐다.
▲ 박용만이 지어낸 '됴션말 독본' 첫 책
▲ 박용만이 지어낸 '됴션말 교과셔' 둘재 책
박용만이 펴낸 두 권의 됴션말 책들 표지를 보면 맨 위의 한글은 가로쓰기와 풀어쓰기를 한 게 특이하다. 그의 주장은 한글을 가로쓰기함으로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글은 초서체(草書體)가 없으니 자음과 모음에 그가 창안한 초서체 알파벳을 대치하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영어의 F, G, R, V, Z, Sh, Th 등의 발음이 한글로는 불가능하므로 그에 맞는 자음들이 필요하므로 새로 12자를 창안했다. 그 시안을 '됴션말 독본' 첫 책과 '됴션말 교과셔' 둘재 책에 실었다.
▲ '됴션말 독본' 첫 책에 실린 박용만이 창안한 새 자음들
▲ '됴션말 독본' 첫 책에 실린 박용만이 창안한 새 자음들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모다 열 살이 차지 못하야 외국말만 배호기 시작하면 결단코 됴선 국혼이 그 머리 가운대 업슬지라, 백셩이 되어 그 나라 문학을 모르고 그 나라 말을 모르고 그 나라 력사를 모르면 그 나라 사랑할 마음이 어대로 좃차 나리오 나는 이것을 근심함이 깊고 또한 큰고로 이다음 론문붓터는 우리 됴선말과 문학의 다쇼간 연구한 바를 차례로 시험코져 하노라."
이것은 박용만이 190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기독교 월간잡지 <대도> 5월호에 실린 글이다. 여기서 이승만의 의견은 엇갈린다. 조선말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한인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조선말은 자연히 배우기 마련이고 영어야말로 주인 나라에 충성을 보이기 위해 의무적으로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거였다.
조선말 교육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영어를 제대로 배우는 데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이것은 지배자인 일본의 식민정책과 동화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조선말과 조선 이름을 버리고 일본말을 열심히 배워야 하며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는 친일파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이중 언어 습득이 두뇌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오늘날의 교육이론으로 볼 때도 이승만의 주장은 편견의 산물이었다.
▲ 주시경(1876-1914)
박용만은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한글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출옥 후 서울의 상동교회에서 우연히 주시경(周時經, 한글학자)을 만나 한글을 논하게 됐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글을 그렇게 깊이 연구한 것에 주시경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박용만은 미국 체류 중에도 성대학, 주요 언어의 어원 연구 등 한글에 관련된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한글에 관한 글을 '신한민보'에 여럿 발표했는데, 1909년 4월 '국문자음모음약해(國文子音母音略解)'라는 논문과 1911년 '국문교정에 대하여'라는 글을 다섯 번에 걸쳐 발표했다.
한성감옥에서 시작해서 북경에서 암살되기 전까지 20년 이상 한글 사랑이 곧 나라 사랑임을 확신했다는 것은 당대에 드문 지사(志士)정신이 아닌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민족의 장래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김도훈 저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조규태 -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배경식 -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집필에 도움 주신 분들-
한애라, 서정자, 신원호, 박도, 유민철, 정대화, 오은택, 이정묵, 이지운, 이미경(존칭 생략)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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