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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69> 미국정부에 계책을 제시하려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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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608회 작성일 11-02-0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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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69. 미국정부에 계책을 제시하려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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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이 하와이로 타고 간 프레지던트 호(1926.01.01 회사 잡지 게재)

"부- 부- 부-"

뱃고동을 길게 뽑으며 프레지던트호는 거대한 선체를 부두로 밀고 들어왔다.

선착장에는 수십 명의 한인들이 나와 있었다. 대조선독립단 단원들이었다. 그 중에는 머리가 허연 박종수도 있었다.

박용만이 대조선국민군단의 군단장이었을 때 그는 대대장이었다. 군단을 꾸려낼 때 농장이며 심지어 집에서 쓰던 숟가락까지 내놓았던 박종수. 한 말로 지사 중의 지사가 아닌가.

 

대조선독립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김윤배와 서기 이상호, 그리고 박용만의 측근 정두옥도 출영객들 속에 섞여 있었다.

마침내 박용만이 갑판에서 브리지를 넘어오자 일제히 박수가 터졌다.

1925년 7월 8일 박용만은 그 달에 있을 범태평양청년회대회에 참석하기도 할 겸 하와이에 도착했다. 6년만의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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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에 하와이로 이민왔던  젊은 시절의 정두옥

 

호놀룰루에 있는 팔라마 극장에 3백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들었다.

박용만을 환영하기 위해서였다.

도착한지 나흘 만에 환영회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하와이의 모든 동포들이 그를 환영한 건 아니었다. 태평양을 넘어오는 중이었는데 미군 당국에 밀고한 자가 있었다.

박용만이 6~7년 동안 원동에 가 있으면서 과격한 공산주의자가 됐다는 거였다.

1925년 6월 25일자 <신한민보>에는 "박용만씨를 뿔스빅(볼셰빅)이라고"라는 기사와 "안창호씨도 쏘비엗주의자라고"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박용만 반대파의 이런 무고 때문에 그는 도착한 뒤 바로 입국할 수 없었다.

 

중국 여권에 이름이 '한시량(Shih Liang Roy Hanhn)'으로 돼 있는 것도 문제가 됐다.

본명은 박용만이고, 일본을 경유할 때 체포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했다고 설명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이민국 관리는 허위 기재를 이유로 입국을 거부했다. 조선독립단 측에서는 바로 워싱턴에 있는 노동부에 전보를 쳤다.

3개월짜리 상륙허가가 나왔다. 헌데 어떻게 된 건지 박용만은 3개월을 넘겨 1년 가까이 머물렀다.

 

하와이로 떠나기 전인 그 해 봄 박용만은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약 450리 떨어진 장가구(張家口) 부근에서 안창호와 문창범을 만났다. 박용만이 장가구를 더러 왕래한 것은 내몽고와 그리 멀지 않아 거길 지나 내몽고의 땅을 보러 다녔기 때문이다.

풍옥상이 이회영과 김창숙에게 빌려 주겠다는 3만여 정보의 땅도 장가구에서 서쪽으로 더 간 내몽고 내 포두(包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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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가구와 내몽고 내 포두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셋은 중국에서 무장투쟁이 어렵게 된 현실을 한탄했다.

그렇다고 무장력을 양성할 영구기지 건설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가구에서 만난 것도 내몽고의 입지조건을 같이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박용만은 3인 공동투자의 저축 회사 설립을 제안했다.

안창호가 10만 엔, 박용만이 20만 엔, 문창범이 30만 엔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박용만은 이 저축회사 설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하와이 행을 결심했다.

마침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청년대회가 열리게 돼 참석한다는 명목도 좋았다.

 

박용만이 아직 하와이에 머물고 있을 때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그의 동정에 관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박용만이 북경의 부하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도대체 편지들을 어떻게 가로채서 볼 수 있었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우체국에까지 일본 밀정의 손이 뻗쳤다는 말인가. 1926년 1월 25일자 경무국장의 보고서 일부를 옮긴다.

 

" (전략) 제2신은 작년 11월 말경에 도착한 것으로 거기에는 박(박용만을 가리킴)이 하와이에서 활동한 상황 등을 보고하고 자금 등이 순조롭게 진척돼 이 해 2월까지 2, 3만 원의 자금과 부하 몇 명, 인쇄기, 자동차(트럭)을 주어 귀연(歸燕. 북경으로 귀환)하는데 있어 열하(熱河)와 포두(包頭)의 상당한 토지를 조사할 것을 청하고 ---(하략) "

 

이 보고서를 보면 박용만이 안창호와 문창범을 장가구에서 만난 것은 일차적으로 내몽고의 포두에서 공동으로 농지 개간을 시도하기로 합의했을 공산이 크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 갈 것이 있다. 박용만은 그 전 해 2월 일본 영사관의 비밀 지원을 받고 조선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그것이 탈궤적(脫軌的) 행동이라고 도저히 용허할 수 없다며 국민위원회는 그를 제명했다. 그로부터 4년 후 박용만을 암살한 이해명은 어디서 그 사실을 들었는지 뭘 알지도 못하면서 박용만을 변절자니 뭐니 재판장에서 떠들었다.

 

그런데 1924년 6월 15일 국민위원회의 제명이 있었고, 그 다음 해 봄 안창호와 문창범이 박용만을 찾아와 장가구에서 만났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안창호와 문창범은 영수급 독립운동가들이 아닌가. 그들이 제명 사실을 못 들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또 그들은 하루 이틀 만난 사이도 아니어서 박용만은 그 전 해 풍옥상의 밀사로 서울에 갔는데 총독부와의 협상이 깨졌다는 얘기도 미리 털어놓았을 것 아닌가.

 

결국 자체적인 모금으로 내몽고의 농지 개간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절감하고 자리를 같이 하게 된 게 아니었을까.

분담금을 모금하기 위해 하와이 행을 결단한 것도 세 사람 사이의 신뢰가 굳건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것들 말고 박용만의 임무는 또 있었다. 그가 분석한 동북아 정세를 놓고 미국 정부와 협의할 수 있는 통로를 모색하는 일이었다. 연해주와 북경에서 미군을 위해 첩보활동을 한 건 언젠가 국제정세가 변할 경우 미국과의 유대를 그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시키려는 장기계획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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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놀룰루 교외에 있는 코코 분화구

 

12월 초 박용만은 하와이 지구 주둔군 사령부에 보고서 '리포트 No.1'을 제출했다. 제목은

'일본과 러시아에 의해 중국 영토에서 준비되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대전'.

 

제1장 '러시아의 중국 정책'에서는 러시아의 정권과 주의는 바뀌었지만 남진정책은 계속되고 있으며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불안과 혼란을 야기하며 만주를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볼셰비즘은 가장된 제국주의이며 세계문명의 적이고 이 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20~30년 후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현실화됨으로서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다음 제2장 '중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활동'에서는 일본과 소련이 미국과 영국과 대항하기 위해 동맹관계를 생각하고 있으며 일본도 중국의 혼란을 원하고 있고,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장작림을 지지하려하며 만주를 점령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과 조선반도는 일본인이 식민하고 2천만 한인을 만주로 내쫓으려 한다는 것과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일본은 비밀리 진해만을 요새화하고 있는데 박용만이 몇 번 정탐하려 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잘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을 기술했다.

 

제3장 '중국의 현황'에서는 군벌 활거하의 중국 현황을 기술하고 국립북경대학은 좌익교수와 좌익학생들의 소굴로 노동자들을 선동해 중국을 파멸로 몰고 있으며, 또한 중국을 파괴의 길로 몰고 가는 3대 인물로 손문, 장작림, 풍옥상을 꼽고 특히 풍옥상을 가장 심하게 매도하고 있다.

 

이것은 풍옥상이 공산주의의 전염병에 감염되기 시작해, '자유시참변' 이후 공산주의에 적개심을 갖게 된 박용만의 심사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추천하는 지도자는 오패부로 그야말로 중국의 희망이라고 칭찬하고 중국의 파멸은 세계경제의 파탄을 의미하기 때문에 미국은 마땅히 유의해야 한다고 결론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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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패부(1874-1939)

 

그해가 저물기 전 12월 24일 하와이의 '대조선독립단' 단장 김윤배와 서기 이상호는 하와이 지구 미군 사령관 앞으로 진정서를 제출했다. 내용인즉 하와이 2천 명의 회원과 만주 및 러시아령의 5만 명 독립군을 대표해 청원컨대 우리의 지도자 박용만으로 하여금 워싱턴에 가서 미국 국무성이나 육군부의 고위 인사와의 회담을 성사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상해 임정의 외무총장직을 역임했고 만주의 한국독립군 사령관인 박용만은 중국에 있어서의 소련과 일본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미국정부와 협력관계를 갖고 싶어 하며 그가 갖고 있는 비밀을 토론할 용의가 있으며 자비로 만나러 갈 것임을 덧붙였다.

 

이 진정서에 대해 미군 소령 커크우드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답신을 보내왔다.

 

다음 해 4월 '대조선독립단'은 재차 편지를 보냈다. 박씨가 워싱턴에 가서 고위층과 만나려 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이 된다고 믿는 까닭이며 만일 면담이 이뤄진다면 다음 사항들을 협의할 것이라고 알렸다.

첫째 만주 군벌 장작림을 봉천에서 몰아내고 만주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직예파 군벌과 한인 지도자들 간의 조약체결 가능성에 대한 건과

둘째 모 국적(某 國籍)의 강력한 조직이 현재 추진 중인 아시아 열강들의 완충국으로서 만주에 새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비밀계획에 대한 건과

셋째 볼셰빅 선전자들에 대한 반격운동을 전개함으로서 중국에서의 러시아의 활동을 막는다는 가능성에 대한 건과

넷째 한인 혁명기관과 미국 육군이나 해군의 정보기관의 합작 필요성에 관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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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놀룰루에 있는 진주만

 

편지에는 다음의 내용도 추가돼 있었다.

" 이 만주의 군벌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의 가능성은 중국에 귀화한 만주 거주 2백만 한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들은 한국 독립군으로나 한인으로 거사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시민으로서 그리고 직예파와 동맹관계를 맺은 세력으로서 거사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직예파와 한인 지도자들 간에는 이미 양해가 돼 있습니다.

작년 비밀조약이 맺어졌으며 조만간 실행 예정입니다. 이 의무를 어깨에 메고 한인 지도자들은 장차 다가올 과업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패부가 예전 권력을 회복한다면 한인은 저들의 약속을 이행할 기회를 가지겠고 저들의 책임을 완수할 것입니다."

 

손문이나 풍옥상이 공산주의에 기울기 시작한 것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것은 반공주의를 앞세우는 미국의 주목을 끌기 위함이었다. 풍옥상의 배신으로 산해관에서 고립되고 이어 봉천군의 공격에 의해 중국의 서북부로 쫓겨 간 오패부에게 미국의 후원을 얻어줌으로 재기의 기회를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그게 성사되면 만주의 한인들이 오패부와 동맹을 맺고 봉천군의 배후에서 공격을 가함으로서 봉천군을 궤멸시키고 그 대가로 한인들의 자치주나 아니면 별개의 독립국을 수립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이건 황당한 잠꼬대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학을 전공한 박용만 다운 발상이 아닌가. 국제정치의 역학 변화를 통해 그러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그의 기발한 발상이 경이롭지 않은가.

 

편지 끝부분에는 박용만이 한 달쯤 있다가 다시 북경으로 가려고 하므로 속히 조치를 취해 줄 것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워싱턴의 육군 참모본부는 편지의 내용은 흥미롭지만 워싱턴까지 오게 할 수는 없고 하와이 군 당국에서 자세히 들어보도록 할 것이며 일본 측이 눈치 채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박용만은 1926년 6월 26일 여객선을 타고 하와이를 떠난다. 이민국으로부터 추방령이 내린 것이다. 그러나 하와이 군 당국은 이민국에 압력을 넣어 박용만의 신변이 안전하고 또 비밀리에 내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동안 미군을 위해 지속적으로 첩보활동을 했고 앞으로도 그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군 정보부서의 은밀한 배려 때문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김도훈 저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조규태 -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배경식 -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집필에 도움 주신 분들-

한애라, 서정자, 신원호, 박도, 정대화, 오은택, 이정묵, 이지운, 이미경(존칭 생략)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19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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