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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68> 풍옥상의 밀사로 조선에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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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504회 작성일 11-02-0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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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68. 풍옥상의 밀사로 조선에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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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초 압록강 철교를 건너가는 기차

 

세 사람의 밀사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24년 10월. 박용만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꼭 밀사라기보다는 수행원 자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장은 어디까지나 중국 사람이었다.

중국 이름 한상량(韓相良)으로 발부된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중국인처럼 행동했다.

 

중국인 밀사들이 중국옷을 입을 때는 그도 마고자와 중국식 스커트를 꺼내 입었다. 중국어가 짧은 그는 다른 밀사들이 회담을 하는 동안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양쪽의 통역이 있었지만 박용만은 일본어를 잘하기 때문에 언제나 회담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밀사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조선총독부 총무부 외사국을 찾아가 외사국장을 만나는 일이었다. 외사국장은 이미 북경 주재 일본영사관의 연락을 받고 있었다. 그에게 풍옥상의 밀서를 건넸다. 밀서는 박용만이 풍옥상에게 청원했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외사국장은 총무부장을 통해 총독에게 상신한 다음 그 결과를 알려줄 때까지 숙소에서 기다려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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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박용만의 잠입 시 남산에 있었을 조선총독부

세 밀사는 조선호텔에서 묵었다. 총독부를 상대로 하는 외교적인 임무의 격에 맞게 하기 위함이었다. 조선호텔은 일제의 조선철도국이 건축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 중국인 밀사들은 외교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라 행동거지가 서툴렀다. 당시 군벌들의 판도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국가의 체계가 엉망이었다. 풍옥상 역시 여기저기 전장을 누비다 보니 주위에서 세련된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오래 동안 서양문물에 익숙했던 박용만이 사소하게 발생하는 상황들을 기민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에서 사흘 밤을 지내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박용만을 유심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시선을 느끼자 박용만도 얼굴을 가만히 돌려 그 자를 살폈다. 얼핏 보니 안면이 있는 얼굴이 아닌가. 그런데 박용만이 보는 순간 그 자는 목을 돌려 딴 데를 보는 것 아닌가. 이주현이었다. 10여 년 전 하와이에서 약 1 년 동안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지낸 적이 있던 바로 이주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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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건축된 조선호텔

 

문제는 이주현이 일본의 밀정이라는 데 있었다. 박용만은 그 사실을 김현구로부터 자세히 들은 적이 있었다. 이주현은 하와이에서 본토로 건너갔는데 1918년 여름 디트로이트로 김현구를 찾아왔다고 한다. 시카고로 가 9월 학기에 시카고대학에 등록한다기에 김홍기를 소개시켜줬다고 한다.

 

김홍기는 김현구, 홍승국, 전명운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을 때 여비가 없어 뒤에 쳐진 사람이었다. 4년이 지나 그가 미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김현구와 홍승국이 여비를 보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홍기를 만난 이주현은 은근히 엉뚱한 소리를 하더라는 거였다. 일본 영사관을 통해 학자금을 지원 받을 수 있으니 신청을 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네놈이 왜놈의 밀정이 아닌가? 이 사실을 미국 방방곳곳에 알리고 말테니 언제 어디서 맞아 죽을지 각오하라."

김홍기의 호통이 있은 후 이주현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 후 들으니 바로 귀국해버렸다는 거였다.

 

박용만은 식당에서 나오자 급박한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중국인 밀사에게 알렸다.

그들은 야음을 타 호텔에서 멀지 않은 차이나타운으로 그를 도피시켰다.

차이나타운에서는 중국인 상인을 한 명 구했다. 중국인 상인으로 변장한 박용만과 함께 다음 날 아침 중국 안동에 장사하러 가는 양 둘은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신의주까지 기차를 타고 갔고 어스름에 작은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갔다. 안동에 도착해서야 박용만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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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하구에 놓여진 철교

 

박용만이 서울에 가 총독부와 접촉했다는 사실은 중국의 한인들에게 그가 변절했다는 이전 소문에 새로운 악재 하나를 추가했다. 바로 그 해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었던 국민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는 일본 영사관의 지원을 받지 않았던가.

그로인해 6월 15일 국민위원회 집행위원 명의로

" --- 개인의 일시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데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 제명이 되지 않았던가. 그런 후 몇 달도 채 안된 10월 중국의 밀사로 서울에 가 총독부를 드나들고 왔으니 변절자의 꼬리표가 붙지 않을 리 없었다.

 

그것이 구실이 돼 그로부터 4년 후인 1928년 10월 17일 의열단원 이해명(본명은 이구연(李龜淵))에 의해 암살된다.

그러나 이구연은 실제 의열단원도 아니었고 뚜렷한 경력도 없는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돈을 요구했다가 얻지 못하자 방아쇠를 당긴 인물이었다.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여러 종류였다.

다 지사들이 아니었다. 대책 없이 유랑하는 투사들도 많았다.

 

그 중에는 투사 정신이 지나쳐 자제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한 테러는 맹목적이어서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김구 역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동족의 총격을 받고 쓰러지지 않았던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이었다가 분란을 일으켜 당에서 제적당한 이운환이 그 앙갚음으로 회식자리에 뛰어들어 무차별 사격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여운형도 무참한 테러를 당해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다. 독립운동을 한다고 배회하는 한인 청년들에 의해서였다. 1925년 7월 그는 아주민족협회 집행위원인 중국인 오산(吳山)으로부터 다과회에 초청을 받았다.

그것을 괘씸하게 본 패들이 있었다. 정위단 청년들이었다. 각 계파의 양해도 없이 참석한 것이 비위를 거슬렀다는 거였다. 정위단 청년 7명은 여운형의 집으로 몰려갔다.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 철근과 돌덩이를 내리쳤다.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서울을 다녀 온 박용만의 행적에 대해 북경의 한인들 간에는 두 가지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1926년 1월 25일 외무성 아세아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엔 이렇게 적혀 있다.

 

"박용만에 대한 조선인의 비평은 양분돼 있다. 하나는 박을 반역자, 친일자로 배척하는 사람들과 일본관헌과 유력한 독립운동가 사이를 이간 중상케 함으로써 그들(일본 측의 공작자들)의 술책에 의해 유력한 동지를 잃는 것은 불가하다는 편이 있어 박을 배척하는 편과 옹호하는 경향으로 나뉘어져 있음.

그러나 두 파가 다소 완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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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남대문과 서울역 사이 거리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력한 독립운동가를 환대해 돌려보내는 것은 일본으로서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반역자로 동족의 손에 처단케 함으로써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재미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조선호텔에서 이주현을 만났던 순간 박용만의 처신이다.

이미 변절자였다면 일본의 밀정이 돼 있는 이주현을 기피하고 굳이 탈출을 서두르지 않았을 것 아닌가.

둘은 외려 동반자임을 토로하고 옛정을 다시 더듬으려 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총독부와 접촉한 것이 목적의식도 없고 스스로 떳떳치 않았다면 다음 해 그가 하와이로 건너갔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떠벌이지도 않았을 게다.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는 자가 진정한 무인(武人)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박용만이었다.

조선에 밀행하는 것은 만용일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무책임하고 사려 깊지 않은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당한 비판을 그는 아랑곳 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어떤 굴곡도 돌파하는 게 망한 나라를 위해 애국하는 길이라고 믿는 그였다.

 

일단 목표에 대한 확신이 서면 당장의 위험이나 장차의 개인적인 이해를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몇 번의 잠행에 몸을 던진 게 아닐까. 따라서 여운형의 경우처럼 그의 확신이 어떤 동기였는지 파악하는 게 일제와의 접촉 행위를 지탄하는 것에 앞서야 되는 것 아닐까.*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조규태 -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배경식 -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18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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