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14>- 신한민보에 실린 이승만 비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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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신한민보에 실린 이승만 비판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결성선포문'을 기초하고 1912년 11월 중앙총회에 참석했던 박용만은 그 다음 달 초 하와이행 여객선에 몸을 싣는다. '신한국보'의 주필로 초빙됐기 때문이다.
도착하자마자 박용만은 곧 '무형정부' 구상을 실현키 위해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맨 먼저 할 일은 하와이지방총회를 '무형정부'의 위상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이었다. '신한국보'의 기사들을 통해 지방총회야말로 동포사회의 존엄한 자치기관임을 인식시켰고 각 지역의 지방회를 활성화시켰다.
의무금 제도도 도입했다. 도착한 다음 해부터 각 회원이 1년에 5달러의 의무금을 세금처럼 내게 한 것이다. 그 중 50전을 중앙총회에 보내고 나머지 4달러 50전을 지방총회의 사업비로 쓰게 했다. 매달 25전씩 별도로 낸 의무금은 지방회의 경비로 사용케 했다.
조국의 독립은 하와이 동포들의 애오라지 염원이었다. 용돈마저 바닥나는 저임금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의무금을 꼬박꼬박 바쳤다. 바치지 않으면 무리에서 따돌림을 각오해야만 했다. 1914년 한 해 동안의 성금이 자그만치 1만 달러를 넘어 국민회관과 중앙학원 여자기숙사, 대조선국민군단 병영 신축 등과 같은 큰 공사를 감당해 낼 수 있었다.
▲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회관(1917년 경)
또한 박용만은 도착 6개월 만에 하와이 지방총회를 사단법인으로 등록시킴으로써 대외적인 공신력을 높였다. 그런 연후 하와이 정부에 특별경찰권을 청원하여 허가를 받았다. 이것은 한인사회의 규모나 신뢰도를 고려해 허가된 경찰자치제였다.
한인이 사는 구역마다 국민회 경찰부장을 두고 한인 간에 시비사건이 벌어지면 경찰부장이 조사하여 처리했다. 사건이 중대한 건 미국법정으로 넘기는데 경찰부장의 초기 조사를 법정행사로 인정했다.
그러나 자리를 잡아가던 동포사회에 1915년 5월부터 이승만파의 테러가 빈번해지자 하와이 정부는 특별경찰권을 취소하고 말았다.
191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회 중앙총회의 총회장과 부회장 선거가 있었다. 총회장엔 안창호가, 부회장엔 박용만이 당선됐다. 안창호는 하와이 대표 37인 중 32인의 찬표를 받았고 박용만은 30표를 받았다. 이것은 당시 동포사회가 시끄러워지는 가운데도 대의원 중 80%가 박용만을 지지한 결과였다.
취임식에 참석하려고 같은 해 6월 11일 그는 시에라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와이의 영자신문들은 박용만파가 테러를 당하고 있는 처지라 박용만이 본토로 피신했다고 보도했다. 5월에 이승만파 대의원들이 국민회 임시총회에서 난동을 부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승만과 박용만의 사이를 빙탄(氷炭)관계, 즉 얼음과 석탄처럼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적대관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원수가 되는 파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자기에 비해 연령도 높고 학식도 많은 이승만을 형님처럼 대해 왔고 대외적인 행사를 할 때는 늘 그를 웃어른으로 대접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역시 박용만파가 장악한 국민회를 불법적으로 뒤집긴 했지만 옥중동지요 자기 아들을 미국에 데려다주었고, 미국동부에서 하릴 없이 방황하고 있을 때 하와이로 초청해준 은혜도 있어 아주 영 담을 쌓을 순 없었다.
샌프란시스코로 피신했다고 보도된 박용만에게 이승만은 7월 7일 편지를 보내 자신이 옛 옥중동지를 잊지 않고 친구로 간주하고 있는 것을 알아 달라, 단 자기편이 되든지 저쪽편이 되든지 선택을 하라고 요구했다.
이승만파가 국민회를 장악했지만 쿠데타라고까지 말하는 그 과정의 풍파 때문에 이전의 2천 3백여 명이던 회원 수는 7백 40 명으로 줄었다. 의무금 납입도 3분의 1로 떨어졌다. 그걸 가지고 중앙학원과 기숙사 경비를 보조하다 보니 국민회 사업도 위축되고 교육시설도 확장할 수 없었다. 박용만에게 유화의 손길을 내민 건 그런 형편도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꼭 편지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박용만은 편지를 받은 지 약 한 달 만에 여객선 맷소니아(Matsonia)호를 타고 호놀룰루로 돌아갔다.
그런 걸 보면 그가 테러의 대상이 아니었거나 아니면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렇다고 돌아가자마자 손을 잡은 건 아니었다. 이승만에 대한 비판기사가 '신한민보' 10월 14일자에 실린다. 박용만의 문체가 확실한 편지투 기사였다.
▲1915.10.14-신한민보 <재외한인의 비운>
"리씨가 말끗마다 국민회에셔 동포의 재졍(재정)을 것우어(거두어) 남용하얏다 하면서 엇지하야 (어찌하여) 자긔는 교과셔를 츌간한다고 몇 천원 동포의 연조를 것우어 월보 몇 호 츌간하고 만 후에 지금까지 웨 재졍광포 한 번이 업셨나뇨. 국민회도 동포의 돈으로 일하고 리승만도 동포의 돈으로 일하면서 엇던(어떤) 리유로 국민회는 그 재졍의 일 푼만 축내여도 허물되고 리씨는 아모케나 자긔의 마음대로 쓰고 광포 한 번 업나뇨. 국민회 명의 하에 잇는 토디재산(토지재산)은 의심이 잇다 하고 그 따(땅)를 자긔 일흠(이름)으로 뎐매(전매)하며 국민회 임원은 재졍됴사(재정조사)를 밧으되(받으되) 리승만은 엇지하야 신성불가범이 되나뇨."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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