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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3)//준비된 기적, 명량해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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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0건 조회 2,123회 작성일 10-09-2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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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맞서다 맞이한 천행

9월 7일 벽파진의 충돌로 왜 수군은 조선함대가 겨우 13척의 판옥선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탐망군관 임준영, 김중걸 등의 보고에 따르면 도도 다카도라와 구루시마 미

치후사가 이끄는 왜 수군주력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9월 14일 벽파진에서 좀

더 적과 가까운 전라우수영 본영으로 진을 옮긴 이순신 함대는 울돌목, 즉 명량의 앞바다

에서 적을 맞기로 했다. 흔히 우리는 조선 함대가 울돌목 바로 코앞에서 적을 가로막아

세웠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늘날의 기계의 힘으로 나가는

선박들도 명량의 역류 앞에서는 웬만한 크기의 배로는 이를 헤치고 나가기가 어렵다.

오직 격군의 노 젓는 추진력에만 의존해야 할 판옥선으로 이 거센 역류에 직접 맞선

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더구나 난중일기의 당일 기록에도 적선 130여척이 조선함대

를 발견하자마자 포위를 해왔다는 대목이 있다. 좁은 명량의 물목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움직임이다. 오늘날 해사의 이민웅 교수를 비롯한 젊은 학자들은 명량해전 장소로 해

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로 보고 있다. 여기서는 명량해전은 우수영앞바다에서 오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

정하는 신학설을 채택하고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자.

아무리 통제사 이순신이 명장이라고 하더라도 너무도 불리한 전투. 그토록 군율에 의

거해 물러서거나 주저하면 엄벌하겠다고 제장들과 병사들에게 엄포를 놓았음에도 막상

전투가 시작되고 엄청나게 많은 왜선들이 몰려오자, 이순신을 태운 대장선을 제외한

나머지 판옥선들은 슬금슬금 뒤로 빠지거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대장선 홀로 앞장서자,

왜 군선들은 쉽사리 이순신이 탄 판옥선을 포위해버렸다. 이순신은 동요하지 않고 반격

을 명했다. 조선수군의 우세한 화포를 사용해 일제히 포를 발사하며 갑판위의 사수들이

편전과 쇠뇌와 장전을 무수히 발사하며 위용을 과시하자, 왜선들은 능히 그 위력을

잘 아는지라, 쉽사리 접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많은 수로 대장선을 포위

해왔다. 이 당시 다른 배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고 특히 전라우수사 김억

추의 배는 거의 1킬로 너머까지 멀리 물러나 있었다. 대장선에 탄 장졸들은 점점 불안

해지기 시작했다. 적이 아직 근접하지는 못하고 주변을 맴돌고 있기는 했으나, 포위된

대장선의 운명은 이순신 스스로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후일 난중일

기에 적고 있을 지경이니, 휘하 장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감히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

하여 적선에게 쏴라." 애써 큰소리로 장졸들을 격려하며 주위를 돌아본 이순신의 눈에는

멀리서 꾸물거리고 있는 예하 제장들의 판옥선이 보였다. 물러나서 저들을 데리고 올까

도 생각해봤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자칫 전열이 완전히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

들을 부르기로 했다. 나발과 호각을 불고 북을 치며 대장선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도 응답이 없어 소집을 알리는 초요기를 올리자, 중군을 맡고 있던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다가왔고 이어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더 먼저 다가왔다. 안위가 다가

오자 이순신은 뱃전에 서서 안위에게 호통을 쳤다. "안위(安衛)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이 소리를 듣자,

그제야 군법의 지엄함과 한다면 하는 이순신의 무서운 결의를 깨닫은 안위는 황급히

적선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는 중군장 첨사 김응함을 꾸짖었다. "너는 중군장으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호된 꾸중을 들은 김응함 역시 적선을 향

해 돌격해 들어갔다. 다른 배들 역시 슬슬 눈치를 보며 안위와 김응함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때 맨 먼저 돌격해 들어가던 안위의 판옥선이 적선에 겹겹이 포위되어 일대

난전이 벌어졌다. 사조구(왜 수군이 상대선박으로 넘어 오기위해 사용하는 줄 달린

갈고리)를 던지며 접근해오는 왜병들에 맞서 사조구를 잘라내는 장병겸으로 왜병들의 팔

과 다리도 함께 걷어냈고 준비된 수마석으로 기어오르는 왜병들의 머리를 찍어댔다.

편전과 장전 수노궁을 연신 쏘아가며 판옥선의 갑판을 기어오르는 무수한 왜병들을 가차

없이 도륙하고는 있었으나, 안위의 판옥선은 위태로웠다. 이를 본 이순신은 부하를 구

하기 위해 다시 대장선을 몰아갔고 안위의 배를 위협하던 3척의 세키부네를 침몰시켰다.

이어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판옥선이 공격에 합세해 기세를 올렸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마저 다시 전열에 합류했다. 우세한 판옥선

의 화포와 장전에, 연이어 왜선들은 침몰하기 시작했고 편전, 수노의 위력에 왜병들 역시

무수히 쓰러져갔다. 정신없이 싸우던 도중, 안골포 해전 당시 투항해온 왜인 준사가 바다

에 뜬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시체를 보고 적의 선봉장 구루시마임을 통제사 이순신에게

알렸다. 김돌손이 갈고리를 던져 건져낸 시체를 자세히 살펴본 준사는 '적장 마다시가

틀림없다'고 재차 확인을 했다. 조선수군은 적 선봉장의 시체를 토막 내어 이를 돛대에

걸었고 이를 본 왜병들은 크게 사기가 꺾이고 만다. 반면 적장 구루시마의 목이 내걸린

대장선을 바라본 조선수군의 함선은 환성이 터져나왔고 사기충천해 더욱 맹공을 가했다.

사기가 오른 조선함대는 연이어 화포와 편전을 발사하며 적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이어

오전 내내 조선수군을 압박하던 물때마저 바뀌기 시작하자, 역조를 타게 된 왜 수군은 더

욱 불리한 상황에 빠진다. 점점 거세지는 역류에 밀려나가면서 좁고 구부러진 명량의 언

저리에서 무수히 서로 부딪히며 자멸해버렸다.

아무리 급하고 빠른 물결에 익숙한 구루시마 수군이라 하나, 지휘계통을 잃고 좁은 울돌

목의 물길 속에 갇혀버리자 선회반경이 큰 세키부네를 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여기에 순조

를 타고 공격해오는 조선함대의 집요한 함포사격은 좁은 구역에 갇힌 왜 수군의 함선에

거의 명중되면서 더욱더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날 기세 좋게 명량을 넘어온 왜 수군은 33척을 잃었고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100여

척에 이르는 군선들이 파손되거나 망실되었다. 선두에 섰던 왜 군선들은 조선수군의 함포

에 의해 깨져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고 나머지 군선들은 울돌목의 역류에 휩쓸려 자기들

끼리 부딪히며 피해를 자초한 것으로 보인다. 선봉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전사해버렸고

이것으로 구루시마 가문은 후계자가 없어져 멸문해버렸다. 많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싣고

그 뒤를 따르던 도도 다카도라 등의 잔존 200여척 함대는 하릴 없이 이를 지켜보다 결국

선단을 뒤로 물려 순천방면으로 후퇴해버렸다.

330여척의 대함대가 고작 13척에게 길목이 막혀 130여척의 군선이 깨지고만, 세계해전사

에서도 다시없을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써 왜군은 승패의 관건이 되는 서해로의 진

출이 또다시 저지되고 말았다. 조선은 두 번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또다시 수군덕분에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준비된 기적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에 좀처럼 수군의 전투상황을 기록하지 않아 한산도 대승을 거두

고도 고작 서너줄의 사실만을 간략히 적었을 뿐이지만, 명량해전의 일만큼은 너무도 감회

가 남달랐던지, 난중일기에 그처럼 해전의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된 전투는 명량해전이 유

일하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맨 마지막에 실로 천행이었다라는 말을 덧붙여 놓았을 만큼

이 전투 결과는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아무도 심지어 이순신 스스로조차도 승리를 예측

하지 못했던 명량해전은 그저 운이고 하늘의 도우심이었을까. 사실을 다루는 역사의 관점

에서 우리는 왜 조선수군이 칠천량 참패 두달이 지나지 않아 어떻게 이토록 승리할 수 있

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참고해야 할 일본의 그림 하나를 소개해본다.

(http://blog.chosun.com/sorrydan/330598 를 참조 하실 것)

조선역 해전도라는 칠천량 해전당시 왜 수군의 전투도인데, 이 당시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근접전투 장면이 아주 세밀하게 묘사된 그림이다. 그런데 한가지

우리의 상식을 깨는 놀라운 일은 이 그림에서 조선수군의 무장상태. 잘 알려진 화포는

물론 장군에서 병졸에 이르까지 모두 두터운 두정갑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자동연사가

가능한 수노와 편전 등 막강한 발사무기는 물론 질려포통이라는 오늘 날의 수류탄과

같은 폭발무기로 중무장하고 있음이 엿보이며 의외로 많은 팽배수(방패잡이)들이 겹

겹이 판옥선의 갑판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왜수군은 여전히

함포를 뱃전에 매달아서 쓰고 있는 한수 아래의 모습이다. 아울러 왜 수군의 전술은

오직 근접해서 뱃전에 오르는 단병접전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절대로 적군인 상대방을 미화해서 그렸을 리 만무한 일본화가의 작품인 점을 감안하

고 당시 화가들의 기록화의 용도가 오늘날 사진과 같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 모습은

당시 조선수군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명량해전에서 조선수

군은 이런 모습으로 단단히 중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왔을 것이다. 그 험악한 명량전투,

특히 여태까지의 전투와는 달리 근접전도 벌어졌던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대장선 인명

피해는 전사 2(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명, 경상 3(박영남과 봉학,강진현감

이극신;충무공은 이름과 출신까지 꼼꼼히 기록했다)명에 그쳤다. 다른 판옥선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아마 가장 앞장서서 전투를 벌였던 대장선이 이 정도였다면 포위를 당해

위태로웠던 안위의 판옥선을 제외한 나머지 배들의 피해도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이것으

로도 왜 조선수군의 피해가 늘 상대방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설명이 되

며(여담이지만, 여태 우리수군의 일반병졸들에게 갑옷도 아닌 무명옷에 벙거지만을

씌운 이순신 관련 드라마의 모습은 명백한 고증착오다) 조선수군은 공격력은 물론 방어

를 위한 개인장비와 방패등에서도 나름대로 탄탄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분명 조선수군의 무기체계는 공격과 방어 모든 면에서 왜 수군에 비해 한수 위였다.

근본적으로 왜 수군은 7년 전쟁 내내 조선수군의 앞선 선박기술과 무기체계를 한번

도 앞서지 못하는 열세에 있었다. 조선의 수군이 상대를 일정한 거리에 두고 우세한

화력으로 상대의 전선을 깨트려 바다에 수장시키는 근대해군의 성격을 뚜렷히 한 반

면, 왜 수군은 여전히 배를 탄 보병으로 상대의 선박에 올라 승부를 결정짓는 전시대

적 해군의 모습을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유지했고 바로 그러한 근본적인 차이가 명량

에서의 승부를 가른 주된 원인 중 하나다.

한산도 해전과 마찬가지였지만, 이순신은 손자가 지적한 천시와 지리를 철저하게

자신에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번에도 상대방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위치

로 유인해서 다시 그 상황을 뒤집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 와키자카가 한산도의 너른

바다가 휘하 함대의 사지가 되는지도 모르고 돌격해오도록 유도했듯이, 8월 말과 9월

초순 내내 조선함대의 모습을 노출시켜주면서 상대를 명량으로 끌어들인 유인작전

역시 크게 주효했다. 구루시마는 와키자카와 같은 실수를 했다. 늘 고향 시고쿠와 세

도 내해의 바다와 유사한 명량 울돌목이었기에 그는 이 해류를 이용해 단숨에 이순신

함대를 격파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해류의 순조를 타고 적을 급습하고 다시 역류를

타고 추적하는 적을 따돌리는 솜씨로 정평이 난 일본 제일의 해적집안 출신이었다.

당연히 울돌목의 급류가 자신에게 유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전투를 시작했지만, 칠천량

에서 자신들이 어째서 대승할 수 있었는지를 염두에 두지 않았고 분명 그 시점에서 너무

도 열세인 이순신을 과소평가했다. 구루시마가 좀 더 용의주도했다면 명량으로 무턱대고

주력을 돌진시키기 보다는 우세한 함대를 나눠 일부는 진도 외곽을 돌아 칠천량에서처럼

사방에서 점차적으로 조선함대를 포위하는 전술을 썼어야 옳았다(물론 사방에 탐망을 두

고 있었던 이순신이 과연 이런 식의 포위망에 걸렸을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순신은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으헉! 명량보다 어려운

싸움이라? 그런 게 있을 수 있을까)

왜 수군은 고작 13척에 불과한 이순신 함대를 너무 안이하게 경시했고 이미 칠천량에서

사상초유의 대승으로 조선수군이 제 아무리 이순신이 있고 화력에서 우세하며 판옥선이

더 우월하더라도 이젠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자만했던 것이 패전의 다른 원인이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명량에서의 참패로 인해 이후에는 심리적으로도 완벽하게

조선수군과 이순신에게 눌리는 매우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왜 수군은 조선 수군

의 깃발만 봐도 도망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순신의 이름은 그들 모두에게 공포와 경악

그 자체로 각인되고 마는 최악의 상황으로 반전되고 말았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여야 할 것은 공식장계에 보이는 무수한 민중들의 장한 용기와 희

생. 이날 삼도수군의 배후에는 수(해전 다음날 난중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을 옮겨간 곳

에만도 물경 300여척이 근처에 정박하고 있었다고 한다)를 헤아리기 어려운 민간의 피난

선들이 숨죽이며 이 결전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이순신 함대가 패배한다면

이들은 피난짐을 싸들고 정처 없이 북상해야 할 처지. 그리고 이들 중에는 많은 수가 가족

과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협선을 타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근접전투에 나섰는데, 바로 이

들이 명량에서 적지 않은 수의 왜군을 수장시켰고 판옥선에 달라붙은 적들을 걷어 내는데

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 와중에 왜병과 근접한 탓에 조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고 난

전 중에 왜병들과 함께 물속으로 떨어질 정도(대표적인 예가 오극신과 오계적 부자로 이들은 작은 협선을 타고 왜병과 싸우던 중 아들은 조총에 맞아, 아버지는 왜병과 난전을 벌이

던 중 배가 뒤집히면서 두 부자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로 결사적으로 싸웠다.

원균이 수군통제사로 있었던 시절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자발적인 민중의 도움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민중이 전해주는 적정에 대한 목격담과 왜군의 움직임에 관한 첩보는

이순신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이순신은 공을 세운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해서 조정

에 올렸을 만큼 정성을 다했다. 이들 중에는 당시 시대관념으로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

던 노비와 천인의 이름들도 무수히 눈에 띈다. 이순신은 7년 전쟁 내내 휘하의 부하들의

이름을 꼬박꼬박 적어서 그들의 공과 업적을 기록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이날 조선수군의 명량해전 승첩은 분명히 운이 따른 천행이

전부는 아니었다. 원래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그렇게 어이없이 패할 군대가 아니었고

적절한 지휘통제와 적합한 전술을 다시 사용하게 되자 수월하게 원래의 실력을 다시

되찾은 것은 아닐까. 난중일기 정유년 7,8,9월 내내 이순신의 행보를 보면 이미 원균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나름대로의 계책과 방비를 세우는데 분주한 그의

모습이 엿보인다. 하물며 이순신 혼자만 그러했을까. 당시 전체 수군의 역량과 지휘관

들의 능력 역시 그에 합당한 수준에 올라서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통제사 이순신은 연일 각 진과 포구의 수령들과 장수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가

그들을 만나서 그저 상견례만 하고 다녔을 리는 없고 불리한 상황에서 적은 수의 함대

로 큰 적을 어디서 맞아 싸울 것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의 교환이 있었을 것이다. 이 무

렵 이순신은 간신히 살아 돌아왔으나 부상을 입은 조방장 배흥립과 순천부사 우치적,

영등포만호 조계종, 발포만호 소계남, 거제현령 안위는 물론 고산현감 최진강, 김제

군수 고봉상,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송희립의 형 송대립과 최대성은 물론 그에게

총포를 만들어준 정사준, 정사립 형제 등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이들을 만나 수군

의 일을 논의하고 다가올 결전의 작전을 논의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들 모두의 노력과 열정으로 조선수군은 무능한 지휘관과 조정의 판단착오로

잠시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제 모습으로 돌아와 싸운 해전이 명량해전이다.

이것을 단순이 운이 따른 천행이라고만 하기에는 칠천량 패전이후 두 달간의 조선수군의

모습은 분명 이전 원균의 지휘시절과는 달랐고 이러한 준비된 모습이 전쟁의 결과를 예측

외의 상황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왜 수군에게는 뜻밖의 대패로, 조선수군에겐

기적 같은 대승으로 연결되었다.

두 번 나라를 살리다

명량해전이후 삼도 수군은 계속 탐망을 펼치며 왜 수군의 재도전을 경계했지만, 그해

겨울이 다 지날 때까지 왜군의 함대는 명량근처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패배

에 대한 보복으로 해남과 전라도의 남해안을 휩쓸며 닥치는 대로의 마구잡이 보복학살

과 갖은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것은 패자의 치졸한 화풀이였을뿐, 전쟁의 흐름은 완전히

조선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유재침은 명량참패로 그 목적을

상실한 채 다시 물거품이 되었고 고니시와 가토의 육군은 전진을 중단하고 다시 남하해

순천과 울산에 성을 쌓고 장기농성에 들어간다. 수군이 서해를 통해 보급품과 증원병력

을 보내오지 않는 한 조선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고작 13척의 조선함대

에게 330척의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고도 이기지 못해 오히려 130여척의 전선이 부서지

거나 침몰하는 수치스럽고 망신스러운 참패를 경험한 왜 수군은 실력에서나 정신적인

측면에서나 이순신과 삼도수군에게 완전히 압도돼버렸다.

이후 왜 수군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군 함대가 보강되고 더욱

강해지는 것을 번히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는 조선수군에게 정면대결을 시도하지 않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고작 13척의 한줌도 안 되는 함대조차 어쩌지 못하는 왜 수군의 역

량으로 다시 도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산도의 대승이 임진년의 전쟁 흐름

을 완전히 바꾸었듯이 칠천량의 승리로 곧 조선을 굴복 시킬 것 같았던 왜군의 기세는

명량의 참패와 그것이 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완전히 흐름이 바뀌고 만다. 아마 오사카

에서 이 소식을 들었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격이 가장 컸을 것이다. 이후 히데요시는

점점 더 병약해졌고 결국 이렇다 할 전쟁지휘를 하지 못한 채 원정군을 철수시키라는 유

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명량해전은 어찌 보면 임진년 보다 더 다급했던 조선의 위기

를 구한 7년 조일전쟁사 최대의 변곡점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그의 수군 장졸

들은 나라를 두 번 구했다. 조선의 역사에서 이보다 더 위급한 순간에 나라를 구한 사례

는 없었고 세계 해전사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는 아직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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