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1)//한산도 해전, 조선을 멸망에서 구하고 해전의 방식을 바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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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해전의 시작 : 500년을 지속해온 전술의 탄생
한산도 해전이 오늘날 전 세계 해군사관생도들에게 필수로 교육되는 이유는 바로 이 해전
을 통해서 해군은 비로소 '배를 타고 싸우는 육군'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근대해군'으로
탈바꿈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니 서술하기는 쉽지만 여러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다반사로 발생하는 실제 전투현장에서 그것도 바다라는 혹독하고 무서
운 자연환경 속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열 종대의 진형에서 학익진을 펼치는 것. 그것
도 무서운 기세로 추적해오는 적함대의 바로 코앞에서 이러한 전투대형의 변화는 사실상
자살행위에 가까운 위험한 도박에 다름 아니었다. 일본함선들이 근접해오기 전에 모든
대형이 준비를 갖춰야 하고 단 한척의 함선이라도 예정된 수순을 지키지 못하면 전체
함대가 전멸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이순신과 이억기, 원균이라는 독립된 작전구역을
가진 개별 함대 사령관 세 명이 모인 연합함대가 합동작전에 임한지 열흘도 채 되지 않
아 이런 고난도의 대형변화와 전술전개를 해냈다는 것은 당시 조선수군의 역량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발달해 있었음을 반증한다. 당시 수군의 지휘 통제 통신체계는
고작해야 제한적인 의미만을 가진 깃발과 나팔, 북과 연, 그리고 신기전 정도의 신호용
화살이 있었을 뿐임을 감안하면 사전에 충분한 훈련과 숙달이 되어 있지 않았다면 한산
도 해전과 같은 복잡한 전술대형의 전개는 전혀 불가능했다. 무선연락과 각종 통신수단
이 발달한 20세기 현대해전에서도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펼친 것과 같은 완벽한
대형전개는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놀라울 뿐이다.
상대가 관건으로 생각하는 어려운 지형이었던 견내량을 허허실실로 내주고(물론 여기
에는 충무공의 장계에서처럼 판옥선 전체가 싸우기에는 너무 좁았다 라는 현실적인 이유
도 있었다) 상대의 방심을 유도함은 물론, 적 함대를 자만의 상태에서 유인하여 상대가
원했던 지형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작전을 구사해 그야말로 넉아웃상태로 몰고 간, 손
자가 그의 병법에서 강조했던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닌 이겨놓고 싸우는' 최상의 작전을
구사해냈다.
이는 이순신과 이억기, 원균과 같은 수장뿐 아니라 작전을 최초 기획했던 정걸은 물론
선봉에 나서 싸웠던 배흥립, 권준, 이순신(동명이인),신호, 어영담, 정운 등 좌수영의 장
수들과 황세득, 한백록, 우치적, 이운룡, 기효근 등 전라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제장들
거개가 고난도의 전술을 숙지하고 이를 충분히 현실화 해낼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도 입증
된다. 또한 이들의 휘하에서 싸운 무수한 이름 없는 병사들과 격군(노잡이), 중하급 지휘
관들 역시 평소 잘 훈련된 상태였음을 말한다. 또한 조선의 함대가 출정할 때마다 사방
곳곳에서 일본군의 동태와 행적을 알려주던 무수한 조선 백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승
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산도 해전의 대승은 이순신 혼자만의 영웅적인 업적은 결코
아니다. 그가 그 역사의 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으나, 그 혼자의 영웅적인 업적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주연급 조연들과 빼어난 단역들이 있었음을 사초에서부터
부인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보충하면 당시 세계수준급의 함선건조기술이다. 무겁고 발사시
충격이 엄청 났을 화포를 탑재하고 이토록 눈부신 해상기동과 진법을 펼치며 강력한
화력을 투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조선수군의 주력함 판옥선이 당대 최고수준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판옥선은 기본적으로 일본함선보다 함체가 높게 설계되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
다보며 화포 등 각종 발사 무기들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근접백병전을 선호
하는 일본군은 반면 판옥선의 높은 갑판으로 기어오르기가 매우 힘들었다.
재질면에서도 판옥선은 튼튼한 소나무로 만들었고, 쇠못을 사용해 물속에서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틈새가 벌어지는 일본함선과는 달리 나무못을 사용해 해상에서 사용
할수록 목재의 틈새가 더욱 더 단단하게 들러붙어 그야말로 최강의 강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판옥선은 예사롭게 일본함선을 들이받으면서 전투를 지속할 수
있었고 돌격선 거북선이 나오게 된 배경도 판옥선의 단단한 내구성과 구조적 강점에서
출발했다. 물론 판옥선이 모든 해전에서 무적의 배는 아니었으나, 분명 임진년간 바다
의 싸움에서 일본의 함선을 맞아 싸우기에는 최적의 전함이었다.
분명 16세기 조선수군은 일본의 함대에 비해서 한수 위의 전략과 작전을 구사했고 이들
이 구사한 전술은 해전이 생긴 이래 수천년을 지속해왔던 '배를 탄 육군'의 싸움에서
"함포를 이용해 적선을 격파하는 새로운 형태의 근대해군"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후 이순신함대의 전술은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항공기
가 해전의 새로운 주역이 될 때까지 거의 500년간 전세계 해군의 기본 전술이 되었다.
오늘날 현대해군들도 여전히 상대방 함대는 전면의 화력만 이용하도록 정면에서 자기 함
대의 측면으로 가로막아 함선 전후방의 모든 화력을 적에게 투사하는, 일명 "T자 가로막
기 전술대형"을 함포 포격전의 기본으로 배운다. 이 대형을 취하면 상대방은 제한된 화력
으로만 공격을 해야 하는 반면 아군은 보유한 화력 전부를 상대에게 투사할 수 있어 절대
적으로 유리하다. 바로 한산도에서 조선수군의 일제사격을 모조리 뒤집어쓴 일본 수군의
재판인 셈이다. 이 고전적이지만 치명적인 대형은 바로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
쳐 일제사격으로 일본 수군을 수장시킨 조선수군의 전술에서 비롯되었다.
세월이 흘러 1905년 도고가 지휘하는 일본함대는 압도적인 러시아 발틱함대를 맞아 대마
도일대에서 해전을 벌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순신에게 제를 올리고 출격했다. 그리고
그해전에서 일본함대는 과거 한산도에서 당했던 T자 가로막기 전술로 러시아 함대에게 치
명타를 가해 대승을 거뒀다. 그들이 왜 적국의 장수이자 치욕적인 연패를 안겼던 이순신
에게 제를 올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까지로는 마지막 함대 포격전이 된 44년
레이테 해전에서도 미해군의 전함과 순양함들이 수리가오 해협에서 일자로 전진해오는 일
본함대를 T자로 가로막는 전형적인 이순신 함대의 전법을 구사, 구축함 1척만이 간신히
살아남고 2척의 전함을 포함한 일본함대를 사실상 전멸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영국이
그토록 자랑하는 넬슨제독의 트라팔가 해전은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서로에게 T자 가로
막기를 시도하면서 뒤엉켜 싸운 전투였다는 점에서 이순신 함대가 한산도에서 보여준 학
익진 전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역사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이순신 이전의 해전에서도 함대의 대형에 따른 전술과 전법은 존재해왔다.
그러나, 해전에서 사용되는 무기의 한계로 인해 언제나 해군의 전법은 사실상 배에
탄 육군이 상대방의 함선에 올라타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는 방식에 의존해 왔었고 그
결과 어린진을 이용한 중앙돌파가 주된 전술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순신 이후 아니
정확히 한산도 해전이후 해군의 전술은 획기적으로 변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쉽고
단순해보이지만, 500여 년 전 조선수군이 누란에 위기에 몰렸던 조국을 건져낸 결전에서
보여준 놀라운 혁신은 이후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성웅¹:나는 이순신이 뛰어난 군인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를 성웅이라고까지 호칭한 것은
좀 과장된 것이라고 본다. 이순인은 오히려 내유외강형의 깐깐한 지장(知將)에 가깝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난 후에는 허약해진 몸 때문에 걸핏하면 자리보전을 해야 했고
외지에 부임하는 당대의 대다수 조선 관리들처럼, 자신의 기록(난중일기)으로 봐도
세 명이나 되는 첩실을 거느리셨으며, 맘에 맞지 않는 원균에 대해서는 육두문자에
가까운 독설을 마다치 않았다. 군율을 어긴 부하들이나 백성들은 가차 없이 참형과
곤장으로 다스린 냉혹한 일면도 엿보이고 전란의 참혹한 와중에 병사들의 징집과
군량의 염출을 위해서 휘하 수령들과 향리들을 비정하리만치 채근했어야 했었던
실존적 인간이었다. 그는 특별한 영웅의 면모보다는 부단한 노력과 신중함으로 평범
에서 비범으로 다가간 사람에 가깝다.
자멸²: 간단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당시 일본군이 어느 만큼의 포화세례를 받았는지 추
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략 판옥선에 배치된 함포의 수는 좌우현에 각각 5문 정도로 추산된다. 당시 조선 연합
함대는 모두 56척의 판옥선이 있었고 일제사격으로 발사되는 포화의 총 수는 280발이다.
한번 선회해서 발사되는 포화수는 560발이고 두 번만 선회해도 1,120발의 포화가 일본
함대에게 쏟아지는 셈이다. 이 정도 숫자로도 제한된 공간에 어린진의 형태로 뭉쳐 있는
일본함대는 굳이 조준을 할 필요가 없이 무더기로 명중탄을 얻어맞는 것이 되며, 고작
73척의 일본함대에게 척당 15.3발의 포화가 날아간 셈이다. 이중 5분의 1만 명중되었다
고 하더라도 1척당 세발의 명중탄. 내구성이 약한 일본함선이 치명타를 입었음을 짐작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당시 조선함대가 판옥선 한 척당 보유한 장군전
과 철환의 수를 감안하고 한산도 해전에 걸린 시간(이날 조선함대는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다)을 감안하면 조선함대는 최소한 8회 이상 최대 16회의 선회를 했을 것으로 추정
되고 이 경우 일본함대가 뒤집어 쓴 포화수는 최소 4,480발에서 최대 8,960발에 이른다.
이 계산에는 조선수군이 보유했던 편전이나 쇠뇌 등의 더욱 더 빠른 연사가 가능한 소형
총통과 개인화기들의 숫자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학익진에 포위
된 일본함대가 얼마만한 지옥도에 직면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이러한 다량의 함포를 동
원해 일정한 구역에 일제사격으로 투사해 특별한 조준이 없이도 적함선을 격파하는 전술
을 서양에서는 살보(Salbo)전법이라고 하여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보편화 된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레판토 해전에서처럼 근접전을 상정한 함대편성으로 영국해군에 달려
들었지만 원거리 함포전으로만 일관한 영국함대에게 기선을 제압당했고 이후 유럽의 주도
권을 내주고 쇠락하게 된다. 유명한 넬슨의 트라팔가 해전과 1차대전시 유틀란트 해전도
바로 이러한 살보 전법이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파도와 바람 때문에 정확한 조준사격
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시대에 적함을 명중시키기 위해 다수의 함포를 제한된 구역에 일제
발사로 사격하는 전법은 지금 생각해도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오늘날 미사일이 나
오기 전까지도 해군의 함포사격 정확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변변한 조준
장치나 사격통제 장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함을 화포로 쏴서 격침시킨다는 조선수군
의 전술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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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예전에 케이시애틀에 올렸던 글이지만, 지금 이곳에 두어도 괜찮지 싶어 올려봅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나그네님의 귀한 글을 다시 이렇게 나눌 수 있어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아닙니다.

도르테아님의 댓글
도르테아 작성일
저는 첨 읽는 글인데...
안 올려주시면 서운할 뻔 했네요.
매우 흥미진진한 글이에요.
감사합니다~

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즐겨주셨다니 고맙습니다.

아아님의 댓글
아아 작성일아는것두 많수... ㅎ

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배고플거 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