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52> 한글은 참 문명국에서 일등가는 문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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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 박용만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 기자 말
52.한글은 참 문명국에서 일등 가는 문자라...
▲ 1900년 초 서울 풍경. 초가집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1905년 그의 나이 24세 때 박용만은 고국의 '뎨국신문'에 '청춘소년들아'를 발표했다. 미국에서 써 보낸 수필이었다.
이것은 민태원이 1930년대에 쓴 '청춘예찬' 보다 약 25년 앞선 것이다.
민태원은 '청춘예찬' 수필 한 편으로 잊히지 않는 이름이 됐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그의 글 일부를 다시 읽어보자.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과 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중략) 그들은 앞이 긴지라 착목(着目)하는 곳이 원대하고 그들은 피가 더운지라 실현에 대한 자신과 용기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의 보배를 능히 품으며 그들의 이상은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우리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하략)"
▲ 1900년 5월 6일자 뎨국신문(제국신문)
다음은 '뎨국신문'에 실린 '청춘소년들아'라는 박용만의 수필이다.
"즐겁다 청춘들아 청춘이 곧 오늘이요 오늘이 곧 나의 날이로다. 청춘들아 오늘 세계가 곧 청춘이요 나도 또한 세계의 청춘일세. --- 오늘은 나의 날이요 이 세계 곧 나의 세계라, 만일 주먹을 한번 들어 힘 있게만 칠 양이면 반드시 저 아시아 구라파도 한편이 무너질 것이요. --- 고로 대장부 세상에 태어나서 능히 당시 애란을 구하지 못하고 천하의 근심을 풀지 못하면 필경은 다만 의식에 종노릇만 하고 세월에 도적놈만 되어 두렵도다.
오늘날 우리 한국 청년들이여 나 일찍이 서양사람 말들을 들으매 세상에 세 살 먹은 노인도 있고 팔십 된 청년이 있다 하며 또 한편 청국지사 양계초 씨의 말을 들으니 그대가 만일 소년이면 그대 나라도 소년이요 그대가 만일 노인이면 그대 나라도 또한 노인이라 하니. --- 오직 우리가 소년의 때를 당하여 소년의 뜻을 가지고 다시 소년의 일을 행하면 자연 우리 국보는 소년의 기상을 가지고 우리 이름으로 소년 역사에 올라 저 옛적 영웅호걸과 어깨를 비길 터이니 이는 우리 청년의 감히 때를 잃지 못할 때라. 원컨대 청년들아 나 여러 말 다하지 못하고 오직 다시 일만 가지 일을 함께 포함하여 한번 다시 크게 부르노니 이 즐겁고 아름다운 청년시절 청춘세계에 우리 사랑하는 소년 한국 모든 청춘소년들아."
박용만의 '청춘소년들아'가 발표됐을 때 당시 12살이었던 민태원이 그걸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수필의 흐름이나 내용은 유사한 데가 적지 않다. 도입부는 특히 그렇다.
민태원의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와 박용만의 "즐겁다 청춘들아 청춘이 곧 오늘이요 오늘이 곧 나의 날이로다"는 비록 표현은 다르지만 맥박의 강도는 같다.
또 민태원의 문장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와 박용만의 문장 "만일 주먹을 한번 들어 힘 있게 칠 양이면 반드시 저 아시아 구라파도 한 편이 무너질 것이요"도 열정의 강도가 같다.
뎨국신문은 1898년 창간돼 1910년 폐간되기까지 대한제국의 대표적 민족지였다.
발행인 이종일은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모든 기사를 한글로만 써 한글의 발전에 크게 공을 세웠다. 신문제호 '뎨국신문'도 당시의 한글 표기를 그대로 쓴 것이다. 한국 최초의 신소설이라고 치는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도 이 신문에 실렸다. 일반 서민과 부녀자들 가운데 독자들이 많았다.
1904년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죄수들이 팔도 사투리를 쓰는 것과 글이 일정하지 않은 것을 통탄한 나머지 박용만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등록회원의 인적사항 난을 적을 때 그는 전공을 '정치학, 군사학, 어학'이라고 적었다. 그만큼 그는 한글 연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넘쳤다.
일본 유학 시절 박용만은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와 망명 중이던 중국의 선각자 양계초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쓰는 글과 말이 같아야 한다는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주장했다.
박용만은 1909년 '신한민보'에 실은 '국문자모음약해(國文子母音略解)'라는 논문에서 한글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가장 가치 있는 문자라고 주장했다. 한문과 일어와 영어가 가지고 있는 결점들을 배제한 우수한 문자라는 것이다.
미국에 와서도 틈틈이 국문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소년병학교에서 한글 문법을 가르쳤다. 성대학(聲帶學)과 주요 외국어의 어원을 연구하기도 했다.
1909년 4월 21일자 신한민보에 논문으로 실은 그의 '국문자모음약해(國文子母音略解)'에서 박용만은 결론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 국문의 자모음 분석이 대개 이와 같으니 그 조리의 정제함과 응용의 편리함이 참 문명국인 제 일등 가는 문자라고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라. 만일 자전을 완비하게 제정하며 문법을 상밀하게 연구하여 대한 인민이 특별히 가진 문자에 채색을 더할치면 저 뜻만 대표하는 한문과 음을 대표하되 자모를 분간치 못하는 일본 '이로하'와 뜻과 자모음이 있어도 열자(영어의 스펠링)음에 일정 규칙이 없는 영국글과 같은 것들이 장차 그 재주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며 그 체질의 흠결됨을 한탄할지니 우리 국민의 문학에 유의하는 자의 급선무가 이에 있다 할지로다.
애닲도다. 이러한 자가의 무짐보장을 두고도 나아가 연구 아니 하는 자도 개견하려니와 저 꼴도 보기 싫은 '이로하니호헤도'라 하는 방정맞기가 염불하는 소리와 같은 일본글로 우리나라 학교에 쓰려하는 저 미친놈들이여, 참 미친놈들이로다."
▲ 1909년 4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박용만의 논문 '국문자모음약해'
하와이로 가서는 '국민보'를 통해 한글의 보급에도 힘썼다. 하와이 동포들은 문맹이 많았다. 다행히 한글은 배우기 쉽고 문법이 단순했다. 게다가 한문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글이라도 우선 배우려고 했다. 짧은 기간에 문맹퇴치가 가능했던 것은 그런 연유였다.
박용만은 우리 민족이 가져야 될 혁명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문화혁명이요, 둘째가 정치혁명, 셋째가 경제혁명이라고 주장했다. 문화혁명은 정신상의 공작이므로 어느 때고 가능하니 사상과 정신이 날로 독립성을 가지면 정치혁명도 뒤따른다고 했다.
그는 민족문화(우리말과 글)을 보존할 수 있으면 독립의 기회는 언젠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다른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그 안목을 문화혁명에도 초점을 두고 그 밑바탕이 되는 한글 연구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린 것을 보면 그의 식견은 범인과 차별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물을 부른다. 대한제국이 쓰러지던 시기 그 부름에 응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박용만의 등장은 절묘한 데가 있다. 절묘하게도 일본과 미국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은 그가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조선은 봉건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전환점에 있었다. 누가 됐던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에 대한 비전과 이론적 틀을 제시해야 했다. 박용만이 그 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공헌이 아닌가.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국가의 3대 요소인 국민과 영토와 주권 중에서 영토와 주권을 강탈당했다. 언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지 막연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망국민의 운동역량을 결집시키고 조직해내는 일은 여간 지난한 일 아니었다.
박용만은 당장 실현성이 어렵고 또 반대하는 층도 많았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처럼 독립운동의 지향점과 그 방법론을 열정적으로 제시했다. 그의 논설문은 논리의 전개가 정연하고 그 논리를 전달하는 문장력 또한 빼어나서 읽는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1911년 초반을 박용만은 '신한민보'의 편집인으로 많은 논설들을 발표한다.
5월 3일자 '정치적 조직에 대해 두 번째 언론'이라는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글의 주의는 본 기자 충성을 다하고 아는 바를 다해 우리 국민회원 전체와 일반 한인에게 간절히 하는 것이라. 비록 글이 길고 말이 지루해도 사람마다 다 한번 읽기를 요구하며 구절마다 연구하여 가부를 판단하기를 원하노라. 이 문제에 대해 말할 것이 아직도 몇 천 마디나 한 번에 다 할 수 없어 아직 대강 기록하노라. "
박용만은 불모지를 개간하는 개척자처럼 선뜻 동조하지 않는 동포들의 이해부터 구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의 분석과 구상을 펼쳐 보인다.
"이제 우리 조선민족으로 말하면 이미 국가를 성립하여 4천여 년을 지켜왔거니와 4천 년 후에 나라가 한 번 망하고 4천 년 후에 우리 백성이 비로소 바다 밖에 나온 것은 이는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한 새 나라를 만들게 함이라.
오늘날 나의 학식과 나의 안목으로 보는 바에는 북아메리카 대륙은 한인의 새 나라를 만드는 땅이 되어 장차 조선 역사에 영광스러운 이름을 더하게 되고 또 북아메리카 대륙에 나온 한인은 자기들의 새 정체(政體)를 조직하여 장차 조선헌법의 아버지들이 될 줄 믿노니 이는 내가 무당이나 판수 같이 덕담하는 것이 아니요 신문 주필이나 연설가가 되어 공연히 사람을 고동하는 말이 아니라.
만일 황천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다시 성립되기를 금하시지 않으면 응당 우리가 조만간 한 '무형한 국가'를 성립할 터이요 또 시방은 비록 발버둥 치면서 싫어하여도 장차는 성립되고야 말지니 만일 이렇게 안 되면 조선이나 한국은 그 슬픔을 면치 못 할 진저. (후략) "
이것이 그의 유명한 '무형국가론'이었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01194&PAGE_CD=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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