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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16>- 사진신부들은 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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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르테아 작성일 10-10-11 18:57 조회 2,5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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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히며

 

사진결혼은 사람을 속여 노예를 만드는 것 

 

하와이 하면 떠오르는 건 '독립운동 돈줄'과 '사진신부의 비극'이다.

이민역사가 1백년을 넘었는데도 하와이 동포는 큰 기업 하나 일으키지 못했다.

독립운동 자금 대느라 똥줄이 탄 결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던 한인들의 월급은 16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돈으로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술 한 잔 마음 놓고 사 마실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와이의 한인들만이 그나마 전 세계에서 고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처지였다.

임시정부나 구미위원부를 지탱하는 경비의 염출은 옴팍 그들의 몫이 됐다.

누가 계산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독립운동 지원으로 나간 돈이 총 3백만 달러가 된다고 한다.

이걸 오늘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무려 3억 달러 아니면 5억 달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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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섬으로 흩어지기 전에 하와이에 함께 도착한 사진신부들이 찍은 기념사진. 

 

'사진신부의 비극'은 하와이 이민사의 얼룩이다.

이 비극을 보고 누구 보다 참을 수 없는 사람은 박용만이었다.

1914년 3월 7일자 논설 '하와이가 낙원이냐 지옥이냐'에서 그는 끓어오르는 의분을 토해 놓았다.

 

"사진혼인을 시작하여 사람을 속여 노예를 만드는 것은 원래 일인들이 시작하여 한인까지 전염병이 들게 함이라 우리가 일인들에게 배울 것이 없지는 않되 이것을 힘써 배우는 것은 '국민보'가 심히 반대하는 것이요, '국민보'는 다만 신성한 조선 족속이 다시 야만의 길로 돌아가는 것을 분히 여겨 이렇게 심히 말하거니와 만일 동포들이 이것을 인연하여 '국민보'를 배척하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국민보'는 차라리 문명한 시대에 없어지고 말지언정 결단코 야만시대에 신문지 노릇하기는 싫어하는 것이요, 또는 본국 여자들이 하와이 한인의 인구가 번성함을 기뻐하지 않는 바가 아니로되 야만시대에 야만의 종자가 더 생기는 것은 원치 않는 바라. 그러므로 '국민보'는 인도(人道)를 유지하고 천리(天理)를 보호하기 위해 비록 하와이 한인이 종자가 끊어질 지라도 오늘날 현상은 그대로 보고 앉을 수 없노라."

 

하와이에 최초의 사진신부가 도착한 건 1910년 12월 2일. 신부는 23세의 최사라였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이민국에서 민찬호 목사의 주례로 38세의 이내수와 혼례를 올렸다.

이내수는 공동생활에 헌신하기를 즐겨하는 노총각이었다.

신부가 도착하기 전 해인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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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2월 하와이지방총회임원들. 뒷줄 좌로부터 3번째가 부회장 이내수. 그는 같은 해 7월 총회장이 된다.

 

최사라가 도착하고 22일 지나 6명의 사진신부들이 호놀룰루 부두에 내린다.

그렇게 해서 1924년 5월 15일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사진신부 951명이 하와이 땅을 밟게 된다.

 

사진 결혼은 사기가 많았다.

사진관에서 빌려주는 고급양복에 기름을 잔뜩 바르고 찍은 사진과 실제의 얼굴은 같지 않았다.

젊었을 때 찍어둔 사진을 중매쟁이한테 건넨 50대 남자도 있었다.

멋모르고 온 나이 어린 신부들은 평균 나이차가 15살이나 더 많은 남편들과 맺어져야 했다.

이민 초기 7200명의 한인들 중 약 5300여 명의 남자들이 외톨이 신세였다.

박용만이 다른 섬의 한 동포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방안에는 여 나문 명의 장정들이 어린 여인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있었다. 한 장정이 소리쳤다.

"박용만씨가 너를 잡으러 왔어. 이년아."

박용만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은 무서운 눈으로 박용만을 째려보면서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년아, 좋은 말 할 때 김 서방하고 혼례를 할 껴? 안할 껴?"

박용만은 그 제서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장정들은 나이 어린 사진신부가 결혼을 거부하자 단체로 협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진신부들은 꿈이 있었다.

그들 중엔 학교를 다니거나 교회생활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외국에 나가면 공부도 더 할 수가 있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더 문명된 생활을 할 수 있으려니 기대했다.

그러나 기다린 건 아버지 벌 나이의 남자와 장래가 보이지 않는 노동의 현장이었다.

높이를 몰랐던 꿈이 끈 떨어진 연처럼 곤두박질친 것이다.

약을 먹고 죽으려는 여인, 수모를 당하면서도 홀로 빌어먹는 여인, 제 정신을 놓아버린 여인, 바다만 바라보고 눈물만 씻는 여인들이 생겨났다.

이 사진결혼은 일본인들이 먼저 시작했다.

박용만이 도착한 후 2년 동안 하와이 정부가 발급한 이혼증서 5천 장 중에 그 3분의 2이상을 일본인들이 받았다.

사진결혼의 파경 때문이었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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