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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3)//준비된 기적, 명량해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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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작성일 10-09-28 21:34 조회 2,56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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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남은 얘기들

궁금한 얘기 하나: 명량해전을 앞두고 도주한 경상우수사 배설은 7년 전쟁이 끝난

다음 해 선산 땅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 참수되었죠. 참으로 어리석은 자의

한심한 일생이었습니다. 도망을 가는 순간 조선 팔도 안에서는 이미 어디로도 살길은

없었건만. 안위에게 했던 이순신의 말은 기실은 배설에게 해줬어야 할 말이었습니다.

배설...이름부터 어감이 전혀 안 좋았네요. 어감상 안 좋은 것이 연상되는 이름들

은 운수조차 없다는 점을 감안해 모두들 이름 잘 지어야죠.

조선이 대한민국보다 나은 점이 분명히 하나 있다면 배설처럼 조국을 배반한 자에

대해서 끝까지 추적해 처벌했다는 점입니다. 배설 같이 적전에서 도망친 유재흥 같

은 자도 멀쩡하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국방장관을 시켜 주는 대한민국은 그런 의미

에서 신상필벌이 아예 없는 이상한 나라죠. 하긴 그 태생부터가 신상필벌을 했다간 존

재조차 남아나지 않을 친일부역의 무리들이 주도한 천한 바탕의 나라이니 어쩔 수 없

다는 생각도 들지만, 요즘 들어서는 전과 14범이 대통령까지 하면서 죄 없는 전직대통

령을 능멸하다 사실상 살인까지 교사하는 지경이니. 정말 犬 같다고 해야겠지요.

이순신식으로 저들을 다스렸다면 살아남을 놈은 몇 되지 않을 겁니다.

둘: 명량해전 당일 이순신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던 거제현령 안위는 배설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명량해전에서 용감히 싸웠음은 물론 이후에도 내내 이순신의

곁에서 제몫을 다했을 뿐 아니라, 병자호란시에도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임금 인조를 구하러 나갔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또 하나의 어리석은 임금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며 돌아가 78세로 죽었습니다.

이순신에게 감화를 받았던 부하 장수들이 이후 그를 닮으려고 노력했던 대목은 이후

우리 역사를 향기롭게 했습니다. 안위도 분명 그 중 한사람이죠. 그가 명량해전에서 주

저했던 대목은 이제 잊어도 좋을 듯 합니다. 분명 그 현장에서 두려웠던 사람은 안위 혼

자만은 아니었고 사실 이순신 스스로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였을 겁니다. 저는 사실 그래

서 더 이순신이라는 인물에게 호감이 가고 존경심이 듭니다. 그는 두려움을 잘 알았고

또 그 못지않게 그것을 극복하는 법도 알았던 용기 있는 겁쟁이였으니까요. 안위는 모두

를 대표해서 가장 먼저 혼이 났을 뿐이죠. 그리고 그 후 그의 행동은 청사에 빛날 용감

함이었습니다. 반면 원균을 보면 정말 두려움을 몰랐던 멍청이라는 생각이 들죠. 하긴

그 시대에는 그런 자들이 진정한 무장이라는 평가가 우세했던지라. 멍청한데 부지런한

인사가 군대나 회사, 나가서는 나라를 지휘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이유가 명량과 칠천

량해전의 교훈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고집까지 세면...흐...답 없습니다.

셋 : 임란 해전사에서 편전과 수노 혹은 쇠뇌를 이야기 하면서도 상세한 설명을 못드

려 이번 기회에 보충설명 합니다.

먼저 편전은 일명 애깃살이라고도 하는데, 통아라고 부르는 대롱에 넣어서 쏘는

길이가 짧은 화살입니다. 짧아서 애깃살이라는 칭호도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전은

통아에 넣고 쏘는 물리역학 적 이점 때문에 일반 화살보다 최소한 1.5배는 사정거리

가 더 길어서 보통 250미터까지 나갔고 임란시 기록에는 425미터까지도 가능했다고

하니 고작 50미터에 불과한 조총과 비교됩니다. 또한 위력도 대단해서 250미터 바깥에

있는 3센치 철판도 관통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편전은 비행속도가 일반 화살보다 두

배 이상 빨라서 적이 이를 보고 피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고 더구나 작아서 잘 보이지

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길이가 짧은 애깃살을 이쪽으로 되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용법이 까다로워 쉽게 모방조차 못했지요. 오늘날 편전의 원리는 현대전

의 전차포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흔히 날개안정탄이라고 해서 발사되면

화살모양처럼 생긴 탄두가 상대 전차의 장갑을 꿰뚫는 치명적인 무기인데 사실상 편전

의 원리와 동일합니다. 이런 기술을 이미 수백년 전에 이용한 조상들의 지혜. -.-;;;

흔히 수노 혹은 쇠뇌라고 불리우는 무기는 서양의 석궁을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석궁은 일단 장전하고 있더라도 일반 궁시처럼 사람이 계속 당기고 있을 필요가 없으므

로 계속 준비상태로 조준이 가능한 장점이 있습니다. 특히나 흔들리는 해상에서는 대

단히 유용했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수노는 연속으로 조준사격이 가능한 반자동식 화살

총이었다는 점이 다른 석궁과 차별화 됩니다. 보통 탄창에 20발에서 30발의 화살을 넣고

방아쇠를 당겨서 연속해서 쏠 수 있었기 때문에 근접해서 배위로 오르려는 왜군들에겐

아주 효과적인 무기였지요. 당시 왜병들에게 해전은 일종의 공성전이었는데, 이럴때

수노궁은 거의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예로부터 조선은 활, 일본은 칼, 중국은 창이라는 소리가 있을 만큼 우리 민족은 활을

중요시 했고 또 활을 잘 다뤘습니다. 특히 당시 화포가 위력적이라고는 하나 발사를

준비하는데에는 분명히 적지 않은 시간간격이 필요했고 이 사이의 공백을 메워줄 또

다른 발사무기 편전과 수노 혹은 쇠뇌의 중요성은 화포 못지않았습니다. 특히 원거리

포격전을 했던 조선수군에게서 편전과 수노의 공헌은 절대적이라고 봐야죠. 이에 비해

왜군의 활은 지상에서도 발사하기 힘든 엄청난 크기의 장궁이었고 이 때문에 해상에서

조총만큼도 쓸모가 없었고 따라서 거의 별다른 활약을 못했습니다. 그러니 죽자사자 사

조구 던져서 상대 배 어디 못 가게 고정시켜 놓고 창과 칼 들고서 무작정 기어 올라가

려고만 했던 것이죠. 그러다가 칠천량 빼고는 거의 모든 해전에서 조선수군에게 그야

말로 묵사발이 되셨구요.

넷: 흔히 이순신 불패신화의 주인공인 거북선이 명량해전 이후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아마 거북선을 만들만큼의 여유가 명량이후의 조선수군에겐 없었을 거 같습

니다.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이었던 이언량조차도 마지막 노량해전에선 거북선 대신

일반 판옥전선에서 싸우다 전사했거든요. 그러나 우리가 흔히 거북선의 그림이나 복원

된 모형에서처럼 거북선은 이층 구조로 알고 계시는 분이 많은데 사실 거북선은 삼층

구조로 된 함선입니다. 거북선은 3층으로 구성된 판옥선에 덮개를 씌운 개념의 함선

으로 3층에 덮개를 씌웠는데, 그게 갑작스레 2층이 될 리가 만무하겠지요.

맨 아래 1층은 식량과 각종 무기를 넣어두는 배 밑바닥 그리고 2층은 노 젓는 격군

들이 있는 곳 그리고 갑판을 덧씌운 삼층이 바로 대포와 궁시를 발사할 수 있는 공간

이 되는 셈이죠. 해군에서 복원한 거북선 포함 대체적인 거북선 복원 모형들을 보면

노 젓는 격군들이 있는 갑판과 포를 쓰고 궁시를 날리는 전투공간이 겹쳐지는 아주

해괴한 모양의 거북선 선체를 제시하고 있는데, 사실상 비전투원인 격군과 전투원인

사부들이 공간을 공유하는 이러한 형태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고 또 비전투원인

격군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판옥선의 기본 설계개념을 역행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설계라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이럴 경우 느린 거북선은 실전에서

사실상 전혀 쓸모없는 배가 되고 말겁니다. 거북선이 삼층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 역시

조선역 해전도 일본그림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고증 좀 제대로 해서 복원을 하는 성의가

아쉽네요. 늘상...

하여간 거북선은 적장의 배를 공격(군사용어로는 이른바 상대의 머리를 잘라내는 참수

공격, 일명 Decapitation)하기 위해서 혹은 화포의 공격으로 파손된 적선을 직접 충파해

서 격침시키는 특수공격 함선이었지, 조선수군의 주력함선은 아니었습니다.

갑판이 높고 견고한 판옥선의 강점을 더욱 극대화 시켜 격군은 물론 사부들까지도

안전한 선내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일제 화포 공격후 무력해진 적선의

끝처리를 위해서 자주 사용되었지요. 그래서 거북선의 지휘관을 돌격장이라 불렀죠.

다만 시야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만능으로 사용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덮개를 위에 덧씌운 관계로 무거워서 속도는 판옥선들보다 더 느렸다고 봐

야 합니다. 사실 판옥선도 빠른 배가 아닌데, 거북선은 분명 그 용도가 제한되어 있었

고 덮개위에 왜병들이 기어오를 수 없도록 송곳을 꽂았다고 해서 철갑선이라고 볼수도

없습니다. 하여간 조선수군의 주력이 거북선은 아니었고 거북선이 세계최초의 철갑선

이니 무적의 전함이니 일컫는 것도 약간은 과장입니다.

임진년이후 특히 명량이후 거북선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별로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워낙 왜선들이 조선수군만 봤다하면 도망을 쳐댔죠.

다만, 조선수군에겐 사상 유례가 없었던 접근전이 된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거북선이 서너

척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해봅니다. 그랬다면 아마 관음포에 갇혔던 왜 수군

함대는 살아 돌아갈 생각을 포기했어야 했을 겁니다. 역사에 기록된 5백 척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왜선이 수장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포위된 적 함대에게 거북선만큼

무서운 존재가 또 없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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