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2)// 태평양의 한산도대첩, 미드웨이 해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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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작성일 10-09-06 14:49 조회 3,525 댓글 2본문
폭풍전야와 양측의 불안
42년 5월 26일, 산호해해전에 참가해보지도 못하고 돌아온 핼시지휘의 TF(Task Force)
16의 항모 엔터프라이스와 호넷이 진주만에 입항했지만, 두 항모 모두 급유와 정비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다시 미드웨이로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니미츠가 내심 미드웨이
결전의 총지휘관으로 생각하고 있던 윌리엄 핼시 중장이 개전이래의 과로로 인해 심한
피부발진을 일으켜 입원하자,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경험이 많아 가장 믿을 수 있고,
태평양 함대에서 항모전술에 관한한 따를 자가 없는, 솔직담백한 성격과 과감한 리더십
으로 참모들과 장교들은 물론 일선 수병들에게까지도 인기와 신망이 높았던 핼시 제독
없이 우세한 일본항모들에 맞선다면 패전가능성이 너무도 컸다. 다급해진 니미츠 제독은
대안을 찾아야 했다. 여전히 출전을 고집하는 병상의 핼시를 위로차 방문하며 니미츠는
핼시에게 후임 지휘관을 추천해주기를 원했다. 핼시는 자신의 항모를 호위해온 과묵하고
침착한 순양함대 지휘관인 레이먼드 스푸르언스 소장을 추천했고 스푸르언스는 TF16의
새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산호해해전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오고 있는 요크타운 함대의
플레처 제독과 함께 단 한 번도 지휘해보지 못한 항공모함 부대를 이끌고 미드웨이로
나서야만 했다. 5월 28일 항모 엔터프라이스와 호넷, 순양함 6,구축함 9으로 구성된
스푸르언스의 TF 16이 미드웨이를 향해 출발했고 3일간의 집중수리를 한 요크타운과
순양함 2, 구축함 5의 TF 17이 5월 31일 그 뒤를 따랐다. 일본 연합함대 전체가 동원
되다시피한 대부대에 맞서 미 해군이 동원한 함대는 고작 항모 3, 순양함8, 구축함 14,
잠수함 19척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미 태평양 함대가 얼마나 열세에 몰려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미 태평양 함대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진주만 이후 해전의
주역은 항모와 항공기였고 아무리 거포를 가진 거함이라도 제공권이 없다면 그저 물에
뜬 만만한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히 입증된 상황에서 비록 열세라지만 항모
와 함재기들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해볼 만한 대결이었다.
니미츠가 스푸르언스와 플레처 두 지휘관에게 내린 지시는 매우 간결하고도 명쾌했다.
'6월 4일(일본시각 6월 5일) 새벽, 미드웨이 섬 서북쪽에서 접근해올 일본 항모부대에게
미드웨이 섬 동북방에 대기하다가 강력한 소모전술을 써 최대한의 타격을 주라'는 것.
이미 해독된 암호정보에 의해서 일본함대가 어떤 루트로 언제 미드웨이에 접근하는지
알고 있는 열세의 미해군은 남은 전력을 총동원해 최대한 일본해군의 중추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미드웨이로 향하던 TF 16의 기함 엔터프라이스의 갑판에서 신임지휘관
스푸르언스 제독은 연일 산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수병들은 새로 온 보스가 걷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쑤군댔지만, 제독의 산책은 언제나 한명의 참모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이었고 얘기가 끝나면 다른 참모를 불러 산책은 또 계속되었다.
이 묘한 산책회의의 주제는 '열세의 미 해군이 어떻게 하면 전세를 반전시키는가' 였고
처음으로 항모를 지휘하게 된 스푸르언스는 이러한 산책회의를 통해서 미심쩍은 것은
묻고 확인하며 다가올 작전에 대한 참모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그들의 견해를 저울질
하며 다가올 결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핼시가 스푸르언스를 추천한
것에 모두들 반신반의하고 있었지만 냉정하고 침착한 새 지휘관이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한편 지구의 반대편쪽에서도 일련의 함대들이 부지런히 출항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일본 함대의 선봉 나구모 기동부대(정식명칭 제1항공함대)가 5월 27일 세도내해의
하라시지마에서 출항했고 다음날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이 인솔하는 주력전함부대
가 세계최대의 전함 야마토를 필두로 하라시지마를 떠났다. 29일에는 북방 호카이도에
대기하던 제2기동부대와 애투섬 공격부대가, 같은 날 매리아나 제도에 대기하고 있던
미드웨이 공격함대와 수송선단이 일제히 미드웨이를 향했다. 6월 3일 맨 마지막으로
키스카 공격부대가 목표지점을 향해 출발했는데, 무려 10개 함대가 각각 다른 항로로
움직이고 있는 실로 일본해군 사상 최대규모의 작전이었다. 작전 계획상 미 항모함대
가 미드웨이 공격시에는 주변해역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주력 수상함대가 출발
하기 훨씬 전에 출항한 일본 잠수함들이 6월 3일부터 하와이 남단과 북단 해역에서
정찰과 초계를 시작했으나, 미 해군의 TF16,17은 이미 그 해역을 지나가버린 후였다.
원래 예정보다 늦은 도착으로 미항모를 포착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 것이다.
일본해군의 정찰 불운은 또 있었다. 진주만 기습 직후 미해군의 최전방 전진기지였던
웨이크 섬을 점령한 일본해군은 그곳에서 장거리 수상비행기를 띄워 하와이 제도와
미드웨이를 정찰하곤 했는데, 미드웨이와 하와이 제도 사이에 있는 "프렌치 프리깃
숄'이라고 명명된 암초지대를 중간기착지로 삼아 대기하고 있던 일본잠수함들로부터
급유와 정비를 받곤 했다. MI작전을 앞두고 이번에도 일본해군은 '프렌치 프리깃 숄'
을 중심으로 하와이와 미드웨이 사이를 정찰하며 미 항모들을 접근하는 것을 포착할
생각이었으나, 미 해군은 항속거리상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한데도 하와이일대를 기웃
거리는 일본 수상정찰기들이 '프렌치 프리깃 숄'을 중간 기착지 및 재급유 장소로
쓴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아예 그 일대에 고정적으로 구축함을 배치해버렸다.
일본해군은 프렌치 프리깃 숄 일대에 미 구축함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미드웨이
하와이간 정찰계획을 취소해버렸다. 이것으로 일해군은 미항모를 사전에 포착할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일본의 불운은 또 있었다. 5월 30일 도쿄의 해군 군령부는 북태평양
일대에서 미 항모의 것으로 보이는 무선을 청취했고 이 사실을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에게 알렸다. 야마모토가 인솔하고 있던 주력 전함 부대내에서는 이 사실을 앞서서 항해
하고 있는 나구모 기동부대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의견도 있었으나, 작전개시 전 무선침묵
을 해제하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우려와 더 가까이 미드웨이에 접근하고 있던
나구모 기동부대 역시 이를 청취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알리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나구모
함대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무렵 남태평양 일대에서 초계중이던 미해군
함정들은 항모가 아직도 남태평양 일대에서 작전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토록 하기 위해서
니미츠의 지시로 항모에서 사용하는 콜사인으로 연일 기만전파를 발사하고 있었다.
아무도 편히 잠들지 못한 결전전야
니미츠는 플레처, 스푸르언스 양 함대에게 미드웨이 동북방에서 철저히 통신을 끈 채
나구모 기동부대의 내습을 기다리도록 했다. 일본함대의 접근은 미드웨이 기지 항공대의
정찰에 의존하고 그전까지는 철저하게 TF16,17의 존재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이무렵 야마모토의 기함에서는 하와이섬에서 발신되는 다량의 무선을 청취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드웨이섬을 정찰한 잠수함으로부터는 해안가 일대에서 연일 공사를 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분명 미군측에서도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명백한 징후였으
나, 연합함대는 지금 통신을 사용하면 나구모 기동부대의 위치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알리지 않았다.
미드웨이에 배치된 해군의 PBY 카탈리나 비행정들과 육군항공대의 B-17장거리 중폭격기
들이 연일 미드웨이 서측방 해역을 수색하며 장거리정찰에 나섰고 사전에 배치된 잠수함
들 역시 초계망을 펴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42년 6월 2일, 나구모 기동부대의 기함 아카기에서는 참모장 구사카 소장을 비롯해 여러
참모들이 미드웨이 공격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핼시가 입원했던 것처럼 그간 진
주만 기습 입안등 나구모 기동부대에서 핵심 작전참모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겐다 미노
루 중좌는 폐렴으로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나구모 제독은 정보참모에게 미 항공모함이 출동한 징후나 동태를 묻고, 일단 주변에
미 항모들은 없다는 전제하에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일본 시간으로 6월 5일/4일(미드
웨이가 날짜 변경선에 겹쳐 있는 관계로 미국과 일본의 기록은 하루의 차이가 난다.
이후 날짜는 행동 주체에 누구냐에 따라 서술했음을 밝힌다) 새벽 기동부대 전력의
절반으로 미드웨이 공습에 나서고 나머지 절반은 혹시 나타날지 모를 미 항모들에
대한 공격용으로 남겨두었다.
6월 3일 오전 9시경, 해군소위 잭 리드가 모는 카탈리나 비행정이 미드웨이 남동방면
을 순찰하는 도중, 망원경으로 동진하고 있는 거대한 함대를 발견했다. 리드가 찾아낸
함선들은 곤도 노부타케 중장이 이끄는 미드웨이 침공함대(전함2,경항모1, 순양함5,
구축함7,급유선3)와 미드웨이에 상륙할 육군 이치기 지대(약5천여명)를 실은 수송선단
(수송선12)들이었다.
리드의 적 함대 발견 보고는 즉시 하와이의 진주만 태평양 함대기지에 알려졌고 그때
까지 초조하게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고 있던 미 태평양함대 참모진과 니미츠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안도감과 더불어 자신들이 해독한 암호전문이 기만이 아닌 실제
임을 완전히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리드의 보고를 분석해보니, 가장 기대하고 있던
항모부대가 아닌 침공함대였음이 밝혀졌고 진주만에서는 TF16,17이 행여 이들을 추적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전문을 발신한다. 그날 오후 늦게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B-17폭격
기들이 곤도의 함대에게 고공에서 폭탄을 투하했으나 움직이는 해상의 함선에게 고공폭
격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경험 없는 육군항공대 승무원들이 과장된 보고
를 해왔으나 하와이는 이를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 카탈리나 비행정들이 어뢰로 일본
함대를 재차 공격했으나 급유선 한척에 경미한 피해를 입혔을 뿐, 전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두 차례의 공습으로 야마모토는 미드웨이 공격계획이 미군에게 노출
되었음을 인지했지만 그와 그의 참모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미 해군이 이제야 자신
들의 계획을 인지했다고 판단해 진주만의 미 주력함대의 출항시각을 앞당겨 산정했을
뿐이다. 그날 밤, 미드웨이 기지는 팽팽한 긴장감에 둘러싸여 느리게만 시간이 흘렀다.
해병대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웨이크 섬(41년 12월 중순 미드웨이보다 2천km
전방에 위치했던 웨이크기지의 미 해병대는 상륙해오는 일본군에 용감히 저항해 첫
승리를 거뒀으나 곧 강화된 2차 공격을 받고 크리스마스에 항복했다)처럼 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각자의 포대와 기총좌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비행장에 대기하고 있던 승
무원들은 사령부의 출격명령을 기다리며 무전기 앞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드웨이 동북방 480km해역을 서성거리고 있던 3척의 미 항모 TF에게도 밤은 길기만
했다. 많은 병사들이 가족과 애인에게 보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편지를 썼고,
요크타운의 파일럿들은 늘상 즐기던 주사위놀이를 그날 밤 9시를 기해 일찍 마쳤다.
갑판 아래의 격납고에서는 정비병들이 밤을 새워가며 내일 출격할 비행기에 달라
붙어 기체와 무장을 정비하고 점검했다. 그 아래 편 주방의 취사병들은 다음날 작전
중에 파일럿들이 먹을 샌드위치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같은 시각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전문을 통해 두 TF의 지휘관에게 상황이 예상대로 전개되고 있으며 최우선
공격목표는 일본의 항모임을 재차 주지시켰다.
1차 공격
42년 6월 5일 새벽 2시 45분, 미드웨이 서북방 460킬로 지점에서 나구모 기동부대는
1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출격에 앞서 새벽 1시 반 파일럿들은 야참인지 아침인지
모를, 밥과 된장국과 채소절임에 더운 청주를 곁들여 식사를 마치고 4척의 항모에서
각각 9대의 제로전투기를 차출해 공격대 호위임무를 맡기고, 기함 아카기와 가가에서
각각 18대의 급강하 폭격기로 모두 36대의 급강하 폭격대(500kg 고폭탄)를, 소류와 히
류에서 각각 18대의 함상공격기(800kg 고폭탄)로 36대의 수평폭격대를 구성하고 새벽
4시 45분 일제히 미드웨이로 향했다.(같은 새벽 1시 반, 미 항모에서도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스테이크와 계란으로 미 파일럿들 역시, 일러도 너무 이른 아침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미드웨이 공습을 감행할 총 108대의 비행대장은 소좌진급이 예정된, 항모 히류 소속
도모나가 죠이치 대위. 진주만 기습당시부터 비행대를 이끌던 베테랑 후치다 미쓰오
중좌는 5월 27일 급작스런 맹장염수술로 비행에서 제외되고 대신 도모나가에게 미드
웨이 공습의 중책이 맡겨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아카기와 가가에서는 정찰기 1대
씩을 띄웠고 순양함 도네와 지쿠마에서 각 2대의 수상정찰기 그리고 전함 하루나에
서도 한 대의 정찰기를 띄워 주변 해역을 부챗살 모양으로 수색하며 혹시 있을지
모를 미 함대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당시 일본해군은 정찰기를 색적기(索敵機)라고
불렀는데, 항모의 공격대와 함께 출격하는 것을 일단색적(一段索敵), 공격대보다 30분
먼저 출격하는 것이 이단색적(二段索敵)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일단색적을 실시했다.
주변에 미 항모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일단색적을 실시케 했다. 미드웨이 공격대
가 출격하고 난후 항모의 상공에는 CAP(Combat Air Patrol;항모를 지키는 전투초계
임무)를 맡은 3대의 제로 전투기들이 각자의 모함인 아카기와 가가, 소류와 히류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고(이들CAP를 맡은 제로전투기들은 30분에서 한시간 간격으로
항모에 착함과 이함을 반복하곤 했는데, 5시 반을 넘기면서 CAP 제로전투기의 숫자는
항모 1척당 3대에서 6대로 증가되었고 이들 전투기들은 미군공격기가 내습할 때 마다
급격한 전투기동과 화력소모로 인해 수시로 착함해 재급유와 재무장을 해야만 하는
사실을 기억해두시길) 4척의 항모 아카기와 가가, 소류와 히류는 각각 정사각형의
꼭지점을 형성하면서 이들 항모를 중심으로 전함과 순양함 그리고 구축함들이 전투
대형을 이뤘다. (당시 항모간의 거리는 약 8km)
그러나 일이 틀어지려고 그랬는지, 순양함 도네의 정찰기들은 사출장치 고장으로
예정보다 30분 늦게 출격했고 지쿠마의 정찰기 역시 엔진고장을 일으켜 수색을 중단
하고 귀환했다. 후일 밝혀진 사실이지만 지쿠마의 정찰기가 예정된 해역을 다 수색
했다면 TF 16과 17을 발견했을 것이다. 출발이 늦었던 도네의 수상정찰기가 제 시각
에 발함했다고 하더라도 미 항모들을 훨씬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나구모의 항모들에서는 같은 수의 108대로 2차 공격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급강하 폭격기에는 미 함선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250kg의 철갑탄을 장착 했고
함상공격기에는 수선하부에 치명타를 줄 833kg의 중어뢰를 장착했다. 혹시 나타날지
모를 미 항모에 대한 공격용이었다. 지휘는 아카기의 뇌격대장 무라다 시게하루 소좌.
5시 45분 경 V자 대형을 이루며 비행하는 도모나가 공격대를 미드웨이 기지에서
출격한 하워드 애디 대위의 카탈리나 비행정이 발견하고 이들의 뒤를 추격했다.
15분 후에는 윌리엄 체이스 대위의 카탈리나 비행정도 도모나가 비행대를 포착했다.
호위하던 제로 전투기들이 미 비행정을 격추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비행정은 구름
속을 들락거리는 지능적인 비행패턴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일본공격대의 항로와 위치,
속도 등을 미드웨이 기지에 보고하기 시작했다.
10분 뒤에는 미드웨이기지의 레이다에서도 일본 함재기들을 포착했고 기지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스턴 섬의 활주로에 대기하던 B-17 폭격기들이 폭탄을 싣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남아 있던 모든 공격기들이 각자 어뢰와 폭탄을
싣고 일본항모를 찾아 서쪽으로 내달렸다.
5시 57분경 도모나가 공격대를 발견했던 애디대위의 카탈리나 비행정이 구름속으로
도주하다가 약 40킬로 전방에 위치해 있던 일본항모들마저 찾아낸다. 드디어 고대
하고 고대하던 목표물을 찾아낸 것이다. 애디대위는 미드웨이 기지로 급보를 타전했다.
"항공모함2,전함2, 위치는 미드웨이 서북방 180마일 해상, 침로 135도, 속도 25노트"
로쉬포트 중령이 예견했던 바로 그 시간과 그 위치였다. 니미츠 제독은 애디대위의
보고를 받고 정보참모 레이턴 중령에게 "겨우 5마일(8km) 빗나갔군"하며 그와 하이포
국의 노고를 치하했다. 로쉬포트 중령의 예상은 그만큼 완벽에 가까웠던 것이다.
6시 5분 경 항모 엔터프라이스와 호넷 그리고 요크타운에 카탈리나 비행정의 보고가
수신되었고 미 항모들 역시 정찰기를 발진시킨다. 6시 15분 경 미 해병대 소속 버펄로
전투기와 와일드캣 전투기 27대가 제임스 팍스 소령의 인솔하에 미드웨이 전방 상공에서
도모나가 공격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공격대를 뒤따르고 있던 카탈리나 비행정이 미드웨이 섬 55킬로 지점에서 조명탄
을 투하했고 이 신호를 기다리던 미드웨이 기지의 해병대 전투기들은 일제히 도모나가
공격대를 향해 급강하했다. 그러나 미 전투기들은 선회와 기동에서 도저히 제로전투기
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파일럿의 기량마저 떨어졌다. 날렵한 제로전투기의 기총세례에
버펄로와 와일드캣은 내동댕이쳐지듯 격추됐고 잠시의 공중전으로 지휘관 팍스소령을
포함해 17대를 잃었다. 살아 돌아온 10대도 8대가 심한 손상을 입어 결국 폐기되었다.
이후 미드웨이 기지에 사용가능한 전투기는 고작 2대. 사실상 전멸해버린 셈이다.
잠시의 공중전으로 미드웨이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한 도모나가 공격대는 치열한 대공
포화에도 일방적인 폭격을 퍼부었다. 샌드 섬의 수상비행기 격납고와 유류탱크가 박살
이 났고 병원도 파괴되었다. 그러나 정작 도모나가 공격대가 노렸던 이스턴 섬의 활주로
에는 공격할 만 한 먹잇감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일본의 공습을 알고 모두 공중으로
대피했던 때문이다. 겨우 발전소와 해병대 지휘소를 파괴하는데 그쳤다. 많은 피해를 입
히기는 했으나 여전히 미드웨이 기지가 건재함을 목격한 도모나가 대위는 약간의 실망
감을 느끼며 미드웨이의 공군력을 일소하고 미드웨이 기지를 완전히 무력화 하려면
재공격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기함 아카기에 송신했고, 6시 50분경부터 미드웨이섬 서쪽
에서 사전에 약속된 재합류지점에서 공격대를 수습해 7시 25분 모함으로의 귀환을 시작
했다. 1차 공격으로 도모나가 공격대는 급강하 폭격기 1대, 함상공격기 2대, 제로 전투기
2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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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별 말씀을요...^^;
제이엘님의 댓글
제이엘 작성일나그네님의 글을 한마당에서 다시 접하게 될수 있어서 기쁩니다.. 다시 읽어도 새롭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