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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2)// 태평양의 한산도대첩, 미드웨이 해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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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작성일 10-09-05 18:01 조회 2,94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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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2)

                  -태평양의 한산도대첩, 미드웨이해전-

             왜 미드웨이인가

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감히 미국에게 전쟁을 하자고 달려들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 남고 할 이야기들도 적지 않다. 하긴 진주만 기습을 왜 미국이 허용했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까지 얘기하다간 배가 산으로 가고 말 것

이기에 이번엔 어쩌다가 미국과 일본의 해군이 태평양의 제해권을 놓고 미드웨이에서

격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간단한 배경설명만 하고 지나가련다.

잘 알다시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은 홈런을 친 셈이고 미국은 졸지에 함대

주력을 몽땅 잃었다. 그리고 개전 후 2일도 되지 않아 필리핀의 미 항공대와 영 아시아

함대 주력 전함 2척이 똑같은 진주만 꼴이 나버리면서 일본의 무적 6개월 신화가 막이

올랐다. 일본군은 사방에서 무섭게 전진했고 불과 반년도 채 되지 않아 히틀러가 2년

에 걸쳐서 얻은 영토보다 더 많은 지역을 손에 넣었으니 복권의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었다. 미국과 영국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진주만 기습전까지 함대의 보조전력

(정찰과 전함 보호용)이라고만 치부했던 항공모함과 함재기가 주축이 된 일본 연합함대

의 기동부대(정식 명칭 제1항공함대)는 진주만 기습이후 남태평양 라바울과 호주의 다윈

은 물론 인도양의 트링코말리제도까지 거침없이 항진하며 소위 황군의 진격을 주도했다.

초기 6개월 일본의 대승은 바로 항공모함 부대의 위력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승리를 주도해 국민적 영웅이 된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은

내심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전쟁 전, 일본의 내각과 해군의 고위층에게 시간이 날 때

마다 미국과의 전쟁만은 안 된다고 역설했던 대표적인 반전파였고 오랜 유학생활과 무관

의 경험으로 미국의 산업잠재력을 너무 잘 알았기에 지금의 승세가 오래가지 않을 것임

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제 야마모토에게 남은 방법은 함대 결전을 통해 미 태평양

함대를 전멸에 가까운 극도의 열세로 몰아넣고 미국과 적당한 선에서 화친을 꽤하는 것

이었고 중부태평양 일대에서 미 태평양 함대와 최후 결전인 MI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선배였던 도고가 러시아와 대마도에서 단기 함대결전으로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은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야심찬 최후결전 계획은 현실성이 없고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해군 내 여기저기에서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야마모토의 고집을 정당화해줄 사건이 하나 발생하는데, 42년 4월 18일 미

항모에서 출격한 미육군 폭격기들의 도쿄 공습사건. 제임스 둘리틀 중령이 지휘한 미국

결사대는 항공모함에서 무겁고 둔한 쌍발폭격기를 이륙시켜 그것도 대낮에 수도인

도쿄의 하늘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중국으로 내빼버리면서 미 항모들을 추적하는 데만

혈안이 된 일본 해군을 허탈하게 했다. 피해 자체는 경미했다고 하나, 일본이라는 나라

가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본토를 공격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해온 일본조야는 충격에

휩싸이게 되고 이를 막지 못한 일본 해군의 수뇌부는 심하게 체면을 구긴 셈이 되었다.

이후 야마모토는 더욱더 함대 결전을 통해 미 해군의 마지막 주력인 항공모함들을 잡아

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연패로 인해 떨어진 국민적 사기를

올리기 위해 이벤트성 작전을 한 것뿐인데, 뜻밖에도 이 폭격으로 인해 태평양의 제해

권을 놓고 일대 결전을 하게 된 셈이다.


            최초의 항모격돌,
산호해 해전

전쟁전부터 미해군의 하와이에 해당하는 일해군의 전진기지는 매리아나(괌,사이판)

제도의 아래편에 위치한 캐롤라인 제도의 트럭 섬에 있었는데, 전쟁이 개시되자 트럭

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시로는 호주령이었던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을 점령

해야 했고 예의 항모기동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42년 1월 손쉽게 라바울을 점령하고

이곳을 일본 남태평양 전선의 중심 기지로 삼는다. 일본은 라바울을 장악해야만

그간의 남방작전을 통해 얻게 된 인도네시아 유전지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라바울을 점령하고 나니 이젠 그 아래쪽 뉴기니 섬 포트 모레스비의

연합군 공군기지가 거슬리는게 아닌가. 연일 포트모레스비에서 라바울로 출격하는

연합군 폭격기들과 전투기들로 인해 격전을 치르게 되자, 이젠 뉴기니로 전선을

확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시기에 즈음하여 숨죽이고 있던 미 항공모함들이 뉴기니

섬의 라에와 사라마우아 그리고 중남부 태평양 제도 곳곳의 일본군 기지들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공격하게 되자, 신경이 곤두선 일본 연합함대는 아예 포트 모레스비를

점령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뉴기니 섬의 포트모레스비는 도저히 육로로 접근하기

어려운 천혜의 요새였고 해상에서의 상륙만이 가능했는데, 이 작전을 주도할 일본

제 4함대의 항공엄호를 해줄 것을 연합함대에게 요청하게 되고, 바쁘게 태평양과

인도양을 오가던 일본 기동부대의 6척 항모중 제5전대의 2척(쇼가쿠,즈이가쿠)으로

이를 지원토록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6척의 항모(진주만

기습에 참가한 일본 항모 6척은 아카기,가가,소류,히류,쇼가쿠,즈이가쿠다. 미드웨이

해전을 음미하시려면 기억해두시도록)가 모두 함께 작전을 해야 위력이 배가되는데도

불구하고 연합함대는 전력을 분산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반면 미 해군은 남태평양에서 작전 중이던 항모 1척(렉싱턴)에다 일본이 포트모레

스비 공격을 본격화하자 진주만에서 항모1척(요크타운)을 추가로 배치했고 심지어

도쿄 공습작전에 투입되었던 엔터프라이스와 호넷 항모들도 하와이로 돌아오는 대로

남태평양으로 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물론 너무 거리와 시간이 되지 않는 관계로

두 항모는 산호해 해전에 참가하지 못함) 전력을 분산시킨 일본해군과 가능한 전력을

모두 집중시키려고 노력했던 미해군간의 42년 5월 7,8일에 걸친 산호해 해전은 이순신

이래 500년간 지속되어온 함대간 포격전이 아닌 최초의 항모 대 항모 해전. 정확히는

어느 쪽 함재기가 상대편 항모를 미리 보고 먼저 격침시키는 쪽이 승리하는 새로운

형태의 해전이 시작된 걸로 역사에 기록된다. 전투 내내 서로를 직접 보지 못한 치열

했던 이틀간의 전투는 양쪽 모두에게 가혹한 결과를 낳았다. 두 해군 다 이런 양상의

전투는 처음 해본지라 정찰과 공격에서 실수를 남발했지만, 미해군은 처음으로 일본의

경항모 1척(쇼호)를 격침시키고 항모 쇼가쿠를 대파했다. 그러나 일본해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미해군이 보유한 가장 큰 항모였던 렉싱턴이 침몰하고 요크타운 역시 3발의

폭탄을 얻어맞고 최소 3개월의 수리가 필요한 중상을 입었다. 살아남은 함재기는 양측

모두 고작 40대-50대 수준일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전술적으로는 일본해군이 분명 더 큰 전과를 얻었지만 이 격전으로 인해 일본해군은

포트 모레스비 작전을 중지해야 했고 미 해군은 처음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피해는 컸지만 전략적인 승리는 미국에게 돌아간 셈이다. 일본해군은 미 항모 2척을

모두 격침시켰을 것으로 오판해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고 자위했지만, 야마모토가 심

혈을 기울여 준비하고 있는 가장 중요할 함대결전에서 항모 쇼가쿠와 즈이가쿠는 참가가

불가능해졌고 이것은 분명 일본해군에게 불길한 징후였다. 여태까지 일본해군의 전승신

화를 만드는데 가장 공이 컸던 항모기동부대의 전력 3분의 1이 날아간 셈이었고 다음

작전을 수립하면서 일본은 이제 미해군에게 남은 항모가 엔터프라이스와 호넷 단 두척

뿐이라고 생각하는 치명적인 오판을 한다.


                 선택과 집중

진주만 기습허용으로 해임된 킴멜(니미츠와는 해사동기)의 후임으로 41년 12월 30일에

취임(전통적으로 전함에서 취임식을 하는 관례를 깨고 니미츠는 잠수함에서 취임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당시 쓸 만한 전함이 하나도 없었던 미 태평양함대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한 신임 미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제독은 연일 욱일

승천의 기세로 전선을 확장해오는 우세한 일본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기존의 주력이던 전함은 한척도 쓰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고작 3척에 불과한 항공

모함으로 9척이나 되는 일본 항모들과 정면대결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특히나 6척의

정규항모로 이뤄진 일본기동부대의 기세를 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허용으로 문책을 염려하던 참모들에게 특유의 인간적인 배려와 격려로

분위기를 일신시킨 니미츠 신임사령관은 불요불급하며 낡은 요소들을 과감히 개혁하며

태평양함대의 전열을 가다듬는데, 당장 전투에 불필요한 구식 전함들을 일찌감치 본토

방어로 돌리는가 하면 정찰함대를 폐지하고 항공기와 잠수함에 의한 정찰체제로 전환

했다. 진주만 기습으로 해전의 주역은 이제 항공모함이 되었음을 절감하고 이후 반격

의 주력을 항공모함 중심으로 편성하였고 통신기술의 발달과 종합적인 지휘통제시스템

의 대두에 따라 과거처럼 사령관이 기함에 올라 함대를 지휘하는 시대가 지났다고 판단,

안전한 지상기지에서 지도와 무전기를 놓고 전체 함대를 통제하는 새로운 지휘방식을

선택한다. 열세에 놓일수록 니미츠는 정확한 정보수집과 분석에 심혈을 기울였다.

부임 초 니미츠는 진주만 기습을 예측하지 못했던 해군 암호분석반 하이포에 대해서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으나 이후 하이포에서 해독해낸 일본해군의 동태와 움직임에 대한

분석과 예측들이 놀라울 만큼 실제와 일치하기 시작하자 점점 더 하이포에서 분석해낸

자료에 의거해 최대한 남은 전력을 집중하는 대응책을 구상했다.

42년 4월부터 일본해군의 통신량이 폭주하기 시작했고 하이포는 야마모토의 연합함대

가 일련의 대규모작전 MI를 준비 중임을 탐지했다. 태평양 어딘가에서 결전을 벌일 것

임을 하이포의 암호해독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분명하게 어디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열세의 병력을 잘못 배치라도 하는 날에는 전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미해군은

자칫 하와이마저 버리고 본토서해안으로 후퇴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염려해야 했다.

일해군의 차기 작전 MI에서 연합함대가 노리는 목표는 AF. 태평양 함대 사령부내에서는

AF의 위치를 두고 설전이 오갔다. 하와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니미츠는 직감

적으로 야마모토가 미드웨이를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증이 없었다.

사령관의 고민을 눈치 챈 니미츠의 정보참모 레이턴 중령은 하이포의 로쉬포트 중령

에게 해결책을 상의하고 이에 로쉬포트는 모략전보를 제안한다. 당시 미드웨이 기지와

하와이간에는 이미 해저 전화선이 깔려 있어 도청의 염려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파로

미드웨이기지가 급수장치 고장으로 담수가 부족하다는 내용을 일부러 흘려보기로 한다.

모략전문이 발송된 지 48시간 후 하이포는 "AF에는 신선한 물이 부족하다"라는 일본

해군의 암호전문을 감청해냈다. 이로써 다음 목표는 미드웨이가 분명해졌고 계속되는

일본해군의 통신전문을 통해 하이포는 일본해군의 참가부대와 편성은 물론 최선봉이

되는 일본 항모 기동부대가 몇 월 몇 일 몇 시경에 미드웨이의 어느 방향으로 접근해 올

것인지를 매우 상세하게 니미츠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진주만 기습당시 진주만 공격에 대한 정보는 전혀 무선통신에서 언급하지 않으면서

극도의 몸조심과 세심한 준비를 통해 대성공을 거뒀던 일본해군은 불과 몇 개월의 연승

에 도취돼 상대를 과소평가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암호통신에 대한 지나친 과신으로

너무도 많은 정보를 통신을 통해 미해군에게 유출시키고 있었다. 가령, 일본해군은 미군

이 일본어의 독특한 뉘앙스와 어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미해군

하이포에는 일본어를 영어인 모국어만큼 구사하는 요원들이 적지 않았고 특히 하이포의

책임자 로쉬포트 중령은 뛰어난 일본어 실력으로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일본해군의 JN25

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이렇듯 통신감청을 통해 너무도 구체적이고 상세한 정보가 쏟아

지자, 태평양 함대의 일부 참모들은 '이것은 우리를 기만하려는 모략정보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고 이무렵 니미츠와 미 태평양 함대는 야마모토 일본 연합

함대의 다음 움직임과 의도를 소상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5월 2일 니미츠는 곧 결전장이 될 미드웨이 섬을 방문하고 기지사령관인 시머드 해군

중령과 해병 6수비대대장 섀넌 중령에게 미드웨이를 지켜낼 자신이 있는지를 물었다.

두 중령은 충분한 지원을 해준다면 해낼 수 있다고 답했고 하와이로 돌아온 니미츠는

하와이 기지에 남아있던 모든 여분의 항공기(SBD 던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18대,

와일드 캣 전투기 7대, 신형 TBF 어벤저 뇌격기 6대, B-26폭격기 4대, B-17중폭격기

18대, 장거리 정찰용 카탈리나 비행정 34대)와 대공포 부대, 그리고 요새 구축에 필요

한 중장비와 철조망, 지뢰는 물론 초계용 잠수함까지 미드웨이로 보냈다. 그리고 기지

사령관 시머드와 지상수비를 책임진 섀넌 두 사람을 대령으로 진급시키며 격려했다.

5월말이 되자, 구형 버펄로 전투기 21대와 낡은 빈디케이터 급강하 폭격기 16대에

불과했던 미드웨이 섬의 항공대는 갑자기 항모수준을 능가하는, 124대의 대부대로

변해 버렸고 너무 많은 비행기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섬을 지키던 해병대원들은

이러다가 섬이 가라앉겠다는 농담을 해댈 정도로 미드웨이의 방어태세는 강화되었다.

특히나 카탈리나 비행정들의 투입으로 미드웨이 서쪽 1000킬로 너머 해역까지 연일

세밀한 정찰과 초계가 이뤄지고 있었고, 해안가에는 지뢰가 매설되고 연일 기지의

각종 시설에 대한 보수공사와 대공포대가 설치되면서 다가올 결전에 대비했다.

급작스레 전력을 강화하느라 육군과 해군, 해병대의 전투기와 폭격기, 공격기들이

모조리 뒤섞였고 경험이 없는 신참 파일럿들이 대부분인, 부실한 혼성부대였으나,

당시 니미츠는 열세의 항공모함세력을 상쇄하기 위해서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남아 있던 모든 것을 싹싹 긁어 미드웨이에 올인 한 셈이다.

그러나 니미츠의 올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산호해의 격전을

치르고 간신히 돌아온 요크타운에게 휴식과 정비의 시간을 주었을 터였지만, 니미츠는

함체가 기운 채 진주만으로 돌아오고 있던 요크타운에게도 항행 중 계속 수리를 명

했고 진주만에 돌아오자마자 건선거에 밀어 넣고 천 4백명의 해군 수리반에게 모든 기존

작업을 중지하고 요크타운에만 매달릴 것을 지시, 72시간의 집중적인 수리 끝에

다시 전투에 내보내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다. 다행히 미 해군의 항모와 비행대는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어 손실이 컸던 요크타운의 기존 항공대 대신 하와이에

대기 하고 있던 사라토가(잠수함에 피격되어 수리 중)의 항공대를 대체 투입했다.

이는 항모와 항공대가 단일조직으로 운영되어 역시 같은 산호해에서 큰 손실을

입고 미드웨이 작전에서 제외된 일본 제5항모전대(쇼가쿠, 즈이가쿠)와는 크게 비교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일본 해군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멀쩡한 즈이가쿠

역시 전열에서 제외했는데, 함재기만 보충하면 투입이 가능한 항모를 제외했던 것은

이미 당시의 일본해군이 점점 자만에 빠졌음은 물론 효과적인 항모운용전술에 대해서

충분한 인식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준비 부실의 MI작전

42년 3월 중순 무렵 일본 연합함대 참모장 우카기 마토메 중장이 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예정된 1단계 작전이 생각보다 더 빨리 성공적으로 종

료 될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실 우카기의 물음

은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에게 던졌어야 할 의문이기도 했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성공과

연승으로 인해 그들은 필요이상으로 들떠 있었고 그로 인해 조심성을 잃고 부주의한

상태에 빠져 들고 있었고 MI작전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획되고 있었다.

전술했듯이 당시 일본이 직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승산 없는 미국과의 장기전

대신 과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식의 전쟁종결과 화평체결이 절실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케 하는 또 한 번의 진주만 승리와 같은 전과가 필요했다.

그 때문에 남방지역으로의 전선확대와 자원 획득에만 관심이 큰 육군과 해군 일부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야마모토는 대동아공영권의 측면에서 화근이 될 미태평양함대와의

결전을 고집했다. 더구나 둘리틀 폭격대의 도쿄 기습 이후에는 미 항모들을 격멸하지

않으면 본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고 더 이상 야마모토의 주장을

반대할 명분조차 없어졌다. 그러나 야마모토가 결전장으로 지정한 미드웨이 섬을 놓고는

대본영은 물론 연합함대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너른 태평양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미드웨이 섬은 미 태평양함대의 전진기지인 하와이에서 고작 1,80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반면 일본의 태평양 기지나 본토에서 너무 멀었다. 설사 점령한다 하더라도 기지를 유지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생각은 좀 달랐다. 미해군 최대의 전진

기지인 하와이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미드웨이 정도의 껄끄러운 위치를 선점해야만

미 해군의 주력함대를 유인 섬멸할 기회를 노릴 수 있다는 게 그의 역발상적 지론이었다.

모두가 반대했었던 진주만 작전을 강행해 보란 듯이 성공시킨 연합함대 사령관의 카리스

마와 권위에 압도된 대본영과 일본해군 군령부는 결국 MI작전을 재가했다.

MI작전에 동원된 일본해군의 규모는 엄청났다. 활용 가능한 연합함대의 전력을 총동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것도 모자라 북태평양 알루션열도의 애투와 키스카를 점령하고

더치하버를 공격하는 AL작전까지 동시에 병행하고 있었다(AL작전에 대해서 미국의 사가들

은 한동안 일본이 북태평양을 먼저 공격해 미해군의 시선을 끌려는 양동작전으로 서술했

으나 오늘날 일본측 사료와 자료를 비교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이것은 별개의 작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해군은 뒷감당이 안 되는 전선확대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드웨이 공격 및 미함대와의 결전 MI작전와 북태평양 AL작전에 참가할 함대를 정리하면

-미드웨이 공습과 함대결전을 벌일 나구모 중장의 제1항공함대

(항모4,전함2,순양함3,구축함12,급유선5)

-미 주력전함들과 결전을 벌일 야마모토가 직접 인솔하는 주력 전함부대

(전함 7,경항모1,수상기모함2,순양함3,구축함 21,급유선2)

-미드웨이를 공격할 침공함대(전함2,경항모1, 순양함5,구축함7,급유선3)

-미드웨이 상륙시 근접 지원사격을 담당할 근접지원함대(순양함4, 구축함2,급유선1)

-미드웨이에 상륙할 병력(이치기 지대 5천명)을 수송할 12척의 수송선단

-수송선단을 호위하는 구축함대(순양함 1,구축함 10척)

-수상기모함 함대(수상기모함1, 수송선1,순찰정1)

-소해정부대(기뢰소해정7,보급선1,수송선2)

-하와이와 미드웨이 사이를 초계하며 미 함대를 기습할 잠수함대(잠수함 15척)

-미드웨이 점령 후 기지 항공대로 활용할 제11항공함대 소속의 제24항공전대

(약 100여대의 제로 전투기와 36대의 함상공격기, 26대의 비행정)

여기에 북태평양 알루션 열도를 공격할 AL작전을 담당할

-북태평양 알루션 열도를 공습할 제2 기동부대(경항모 2,순양함2,구축함4)

-알루션 공략 주력함대(순양함1,구축함2, 급유선2,수송선3)

-애투 아타크 공격부대(순양함1,구축함4,소해정1,수송선1)

-키스카 공격함대(순양함2,구축함3,수송선2,소해정3)

-잠수함대(잠수함6척)

-수상기 모함부대(수상기모함1,구축함1)

모두 10만의 참가병력과 350척의 함선 그리고 1,000여대의 항공기가 동원된 연합함대

최대 규모의 작전이었다. 상대를 기만하기 위해 복잡한 부대편성과 작전을 선호하는 일본

해군이었지만 특히나 미해군을 기만하기 위해서 MI작전의 함대 편성과 접근 항로는 그야

말로 복잡다단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요지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제1항공함대 즉 기동부대로 하여금 미드웨이를 공습하여 미드웨이 기지항공대를

무력화시킨 후, 침공함대의 엄호하에 수송선단의 병력을 상륙시켜 미드웨이를 점령한다.

-이후 미드웨이를 구원하고자 나타날 미 항모와 전함들을 맞아 제1항공함대의 항공

엄호 하에 주력 전함 부대가 최후 결전을 벌여 미 태평양 함대를 궤멸 시킨다

-기동부대의 미드웨이 공격일은 42년 6월 5일이며 미 함대와의 결전은 미드웨이를

점령한 후인 6월8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MI작전은 매우 근본적인 하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첫째, 매우 복잡한 함대 편성과 그 못지않게 난해한 함대들의 양동기만 작전을 통해서

연합함대의 진짜 의도를 숨기려 했지만, 미 해군은 암호해독으로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연합함대의 모든 작전에는 일본군이 미드웨이를 공격할 때까지 이를 미 해군이 모르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고 일 항모부대가 미드웨이를 공격할 때 그 주변해역에

는 미 항모들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 정세판단에는

어떤 구체적인 정찰정보나 믿을만한 근거가 전혀 없었다.

둘째, 산호해해전의 전과를 과대평가해 철저하게 미 해군의 남은 항모가 2척뿐이라는

전제 하에서 모든 작전을 수립하고 있었다. 실제 미 해군은 3척의 항모를 미드웨이

작전에 투입했고 42년 1월 잠수함으로 격침시켰다고 믿었던 항모 사라토가도 수리를

마치고 샌 디에고에 대기 중이었다.(사라토가 역시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기 위해 미

본토를 떠났으나 6월 8일에 하와이에 입항하여 미드웨이 해전에는 참가하지 못함)

셋째, MI작전에 편성된 함대와 함대간의 간격이 너무 멀어 유사시 서로간의 협동이나

구원이 전혀 불가능했다. 바로 첫 번째 문제점에서 기인한 것인데, 미 해군이 연합함대의

의도를 전혀 모를 것이므로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안이하게 판단했다.

넷째, 함대 결전의 주력이 될 전함부대와 항모함대의 배치가 완전히 반대였다는 점.

지상군에 비유하면 전함은 보병이고 항모는 포병에 해당되는데도 포병을 앞세우고

보병이 뒤를 따라가는 형식의 매우 위험한 배치를 강행했는데, 이러한 연합함대의 작전

방침을 놓고 선봉에 설 제1항공함대의 참모들과 비행대 지휘관들은 큰 우려와 불만을

표시했으나, 연합함대 작전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해군은 잇따른

승전에 도취되어 어느덧 상대를 가볍게 보기 시작했다. 이제 미 항모들은 고작 2척이

남았을 뿐이고 그 정도면 현재 명중률 80%를 상회하는 베테랑 파일럿들로 구성된 최정

예 제1항공함대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제압이 가능하고 이후 연합함대의 주력전함들은

미군의 잔여 전함들만 처리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미 해군은 이미 모든 구식

전함들을 본토 서해안으로 철수시킨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함대는 5월 말 행해진

도상연습에서 6월 8일 미 항모들과 전함들을 상대로 하는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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