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1)//한산도 해전, 조선을 멸망에서 구하고 해전의 방식을 바꾸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그네 작성일 10-09-04 18:56 조회 4,687 댓글 2본문
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 (1)
-한산도해전, 조선을 멸망에서 구하고 해전의 방식을 바꾸다-
시작하며
흔히 말하곤 한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라고.
그러나 이 말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잘 와 닿지 않는 경구도 없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육지에 서 나고 죽는 동물이기에 자신들의 삶에서 왜 바다와 물이
중요한지 평소에는 거의 모르고 지낸다. 하지만 인류의 문명은 물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전개되어 왔고 그 과정에서 물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해온 것도 엄연한 역사다. 다만 바다 혹은 물위에서의 전쟁은 대자연이라는 더 절대
적인 지배환경에서의 생존을 전제로 하기에 육지에서의 싸움과는 달리 훨씬 더 어렵고 복
잡다단한 요소들의 제약을 받아야 한다. 쉽게 말해 물위에 떠 있지 못하면 제 아무리 힘이
세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인류사에는 해전보다 당연히 지상전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인류역사의 흐름을 바꾼 전쟁은 대부분 해전이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강력한
지상군으로 전유럽을 장악했지만 바다를 지배하지 못해 결국 패했다.
수세기에 걸친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외치며 야심차게 조선정벌에
나섰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끝내 야망을 이루지 못했던 원인도 바로 바다를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 첫 얘기는 바로 망국의 위기에
몰렸던 조선을 구했던 한산도해전으로 시작해볼까 한다.
한산도 해전의 배경
사실 한산도 대첩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다. 그러나 왜 한산도 해전이 조선과
일본의 명운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그리고 이 해전이
왜 전세계 해군사관학교 교과서마다 죄 실려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더 없다.
흔히 우리는 이렇게 기억한다. 불세출의 성웅¹이신 충무공 이순신이 철갑선 거북선의
맹활약에 힘입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적의 배 70여척을 일거에 섬멸한 전투로.
그러나 거북선은 당시 조선수군의 주력함선도 아니었고 한산대첩은 충무공 혼자만의
위대한 결단으로 이뤄진 작전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산도 해전은 어떤 배경에서 시
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역사에 길이 남는 이정표가 되었던 걸까.
우선 한산도 해전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조선과 일본의 근본적으로 다른 전쟁방식
에서 기인했다. 전국시대 일본 군벌세력들의 전투방식은 상대방 성주의 성을 공격,
점령해 항복을 받거나 그 성주의 목을 베면 끝이 났다. 패한 성주의 부하들과 백성은
승자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그런데 7년 조일전쟁은 일본이 여태까지 싸워온 전투와는
다르게 전개되어 간다. 일본의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1만 8천의 병력을 이끌고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쳐들어가 일본에서 싸우던 대로 승부를
끝내려고 했지만, 조선의 국왕과 정부는 일본의 예상과는 전혀 엉뚱하고 재빠르게 몸을
피신해 달아나 버렸다. 당시 일본장수들의 관념에서 수장이 자기의 본성을 내버리고 도망
을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상황전개였지만, 고래로 한반도의 조정들은 수도가 위험하면
몽진은 기본상식에 가까운 일이었음을 저들만 몰랐던 것이다. 이래서 손자의 말 지피지기
는 전술전략의 기본이 아닌지 싶다. 하여간 조선의 조정이 도성을 비워버리자, 일본은 매
우 당황하게 된다. 달아난 조선조정과 왕을 잡으려면 여태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
시하고 있었던 서해로의 뱃길을 열어야만 했다. 서해의 뱃길을 통해서 조선은 여전히 일
본군이 점령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조운(세금)과 통신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조직적인 반격을 개시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바닷길을 장악하고 있는 한 조선의 행정시
스템은 여전히 작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특히나,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수군이 경상도 해안 일대에 정박하고 있는 함대들을 기습 공격하며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기 시작하자, 서해의 뱃길을 열기 위해서 또 위협받기 시작한 남해의 제해권
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정면대결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일본 조정은 이를 위
해 수전에 능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구키 요시타카, 카토 요시아키 등의 함대를 총동원
하여 전라도의 조선수군을 멸하기로 한다.
한편 경상도의 수군함대가 초기에 궤멸되면서 사실상 조선수군의 최선봉이 된 전라도
의 좌수군은 소수의 원균 우수영 함대가 알려준 정보에 따라 거제도 옥포만에 정박
하고 있는 일본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첫 전과를 낸다. 매우 조심스럽게 시작된 첫 해
전에서 조선수군은 주력함인 판옥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근접전에 능한 일본군
과의 접전을 피하고 일정한 거리에서 화포와 철환, 궁시를 이용해 일본 수군의 함선을
침몰 혹은 불태우는 전술을 사용했고 거듭되는 전투에서 이의 효과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조선수군이 사용한 화포는 오늘날의 화포처럼 명중되면 파편이 터지는
식의 포탄이 아니라 무거운 돌이나 철환, 혹은 커다란 나무화살(대장군전:어찌보면
원시적인 미사일이라고 봐도 좋을)을 발사해 일본수군의 함선들을 깨트리거나 배 옆구
리나 바닥에 구멍을 내 침몰을 시키는 방식이었다. 당시 일본의 수군 전선들은 강도가
약한 삼나무 재질에 쇠못을 사용했는지라 조선수군의 화포에 맞으면 쉽게 부서졌고
파도가 거친 큰 바다에서 활동하기에 적합한 V자 형의 침저선이어서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굴곡진 만이 많은 조선의 얕은 바다에서는 기동성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이순신 함대의 1,2차 출격에서 일본 수군이 속수무책으로 패전했던 배경에는 바로
사전에 일본함대의 위치를 정찰로 파악한 조선 수군이 신속하게 좁은 만에 정박한 일본
함대를 포위하고 우세한 화력을 이용해 함선만을 부수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연이은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체면을 구긴 일본수군는 수전에 능한 장수들과 수전 경험
이 풍부한 함대를 총동원하여 조선함대와의 일전을 통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전쟁을 속히
끝낼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일본 수군의 동태를 늘상 세밀하게 정찰해오던 조선 수군 역시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고 결전을 준비하게 된다.
치밀한 준비와 유인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1차,2차 출격의 양상은 전술한 것처럼 일본 수군의 정박장
소를 정찰로 파악하고 이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조선수군의 판옥선 함대에게 접근하기
전에 이를 일자진의 형태로 포위한 후 우세한 화력을 집중해 일본함선을 깨트리는 일종의
치고 빠지기 식의 유격전이었다. 그러나 한반도 바다의 제해권을 놓고 겨루게 될 세 번째
진검승부에서는 1,2차 전투의 양상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일본
수군과는 달리 와키자카의 함대는 70척이 넘는 대군이었다. 그 배후에 대기하고 있는
구키와 가토의 함대까지 합치면 조선수군의 전력의 배가 넘는 130여척에 가까웠고 이들은
서서히 조선수군의 본영인 좌수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함대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 수군은 이들이 더 다가오기 전에 서둘러 결전장을 정하고
싸워야만 했다.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만약 일본 수군이 좁고 구불구불
한 경상도의 해안을 빠져나와 그 마지막 물목이 되는 좁은 견내량을 지나쳐버리면 거기서
부터 전라좌수영(현재 여수)까지는 한산도의 너른 바다뿐이었다. 깊고 넓은 바다에서 빠
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일본 수군의 주력선 세키부네를 상대적으로 느린 판옥선이 요격하기
는 쉽지 않았다. 1,2차 출격 때와는 다른 전투양상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두 번의 출
격에서 조선수군은 훨씬 열세의 일본 함대를 안정적으로 포위하고 장점인 화포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같은 전술을 사용하다가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일본함대에게 순식
간에 거리를 허용하고 근접전상황을 맞이할 공산이 컸는데, 전통적으로 근접전에 약한 조
선수군이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뭔가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
당시 3차 출동에 동원된 이순신의 좌수영과 이억기의 우수영의 함대는 판옥선 49척, 여
기에 소수의 원균 경상 우수영함대를 합쳐도 조선 연합함대의 수는 고작 56척, 70척이 넘
는 와키자카 함대와 맞서 싸우기에는 열세였고 2진,3진으로 대기하고 있는 구키와 가토
의 함대까지 염두에 두면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더구나 일본 수군이 작정을 하고
달려들게 뻔한 결전중의 결전이었다.
전혀 새로운 국면에 즈음하여 조선수군의 작전참모들은 유인과 포위섬멸을 생각하게 되
는데, 이 작전을 좌수사 이순신에게 제의한 사람은 좌수영의 조방장(오늘로 치면 부사령
관)이었던 백전노장 정걸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미 70대 중반의 정걸은 수륙의 주요지휘
관을 두루 역임(그는 이순신이 미관말직을 전전하던 시절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사직은
물론 함경도 병사직등 사실상 모든 주요 지휘관자리를 경험했다)했던 경험 많은 장수였
고 조선 수군 주력인 판옥선을 만든 장본인이었기에 누구보다 판옥선의 장단점을 잘 알
고 있었다.
흔히들 한산대첩을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천재적인 작전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한산
도 함대 결전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필두로 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은 물론 최
초의 제안자인 조방장 정걸을 비롯해 조선수군의 제장(배흥립, 정운, 권준, 이순신, 김
완)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사전에 치밀한 준비와 각본을 거쳐 만들어낸 작품이라 봐야
할 것이다.
먼저 조선수군은 허허실실을 이용해 일본수군을 유인했다. 이는 사전에 분명 약속이 되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맞서 싸워 출정했는데 우연히 견내량과 한산도의 지
형을 보고 떠올린 즉흥적인 작전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때까지 일본수군은 탈출할 통로
가 없는 좁은 만에 방심한 채 정박하고 있다가 번번히 판옥선에 포위되어 곤욕을 치렀기
에 경상도의 해안(바람과 노를 사용해야 했던 당시 수군함선의 한계 때문에 거친 외해를
직접 횡단해 좌수영으로 진격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을 따라 전진하면서도 내내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특히나 한산도 너른 바다에 이르기 전의 마지막 협수로인 견내량을 선점하
지 않으면 승리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의외로 와키자카의 선봉함대는 견내
량까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도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수군의 계산된 행동이자
유인책이었고 이를 모르는 와키자카는 작전이 사실상 성공했다고 자만하게 된다. 수전에
능한 와키자카의 판단으로는 조선수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함대를 막아설 수 있는 마
지막 협수로인 견내량을 선점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조선수군이 겁을 먹고 도망쳤거나
설사 출동한다 하더라도 기존의 전술을 쓸 수 없을 것이므로 먼저 기선을 제압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후일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한산도에 통제영을 세우고 굳건히
막아선 곳이 바로 견내량 물목이었고 일본수군은 아예 견내량을 넘어올 생각조차 하지 못
했던 것을 생각하면 와키자카는 충분히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것이 분명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서기 16세기까지 해군은 그저 '배를 탄 육군'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해전의 주된 전술은 상대의 함선에 다가가 보병을 동원해 상대의 배에 올라가
백병전을 통해 배를 점령하거나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미 화포가 발명되어 있기는 했지만,
지상의 전투에서도 명중률이 떨어지는 화포를 가지고 흔들리는 배위에서 움직이는 상대
의 선박을 명중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었고, 화포발사시의 충격을 이
겨낼 튼튼한 함선을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와키자카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조
선수군 판옥선의 화포가 위력적이라고는 하나, 좁은 수로나 협만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승
산이 있다고 보았고 너른 바다에서 싸울 수만 있다면 충분히 일본 수군주력인 세키부네
의 기동성을 이용해 근접전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관건이라고 부심했던
견내량을 선점하고 나니, 다가올 전투에서 희망이 보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1592년 7월 8일, 세계 해전사를 다시 쓰다
조선수군은 1592년 7월 4일 좌수영에서 25척의 이억기 우수영 함대가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이틀에 걸쳐서 작전협의와 연습을 했고 좌수영 함대 24척(거북선 2척포함)이
발진 한 것은 7월 6일이었고 당일 노량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대 7척과 합류하여
총 56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해 결전에 나선다. 7월 7일 당포에서 정박하는 도중 척후선
의 보고와 지역주민의 제보(목동 김천손이었다고 전한다)를 통해 견내량에 일본 수군주력
이 당도했음을 확인한다.
7월 8일 조선수군은 5-6척의 판옥선을 견내량에 접근시켜 유인전을 벌이는데, 이를 발견
한 와키자카함대는 조선수군 주력을 섬멸할 기회로 생각하고 성급히 전함대를 출격시킨다.
당연히 조선 수군의 선발대는 수적 열세를 절감하고 급히 본대쪽으로 후퇴하게 되고 일본
수군의 본대를 발견한 전라좌우수영 연합함대의 본진 역시도 긴 종대대형을 이루면서 뒤로
물러 서게 된다. 분명 압도적인 적함대를 큰 바다에서 맞아 싸우기를 꺼려하는 모양세였다.
이를 추격하는 와키자카 함대는 그야말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견내량 너머 한산도는
넓고 깊은 바다였고 속도가 빠른 일본수군 함선은 곧 무거운 판옥선의 뒤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견내량을 선점하지 못한 조선수군은 화포를 사용할 기회조차 잃
고서 조만간 전열이 무너질 터였다.
그러나, 일본수군의 주력이 한산도와 미륵도의 중간지점에 이르러 한산도 난바다의 한가
운데에 있게 되자, 이열 종대를 이뤄 후퇴하던 조선함대가 대장선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산개하기 시작하며 학익진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미륵도
와 화도 일대에 매복하고 있던 또 다른 판옥선들도 일제히 다가오면서 포위망을 형성하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일본수군과 와키자카의 눈에는 조선수군이 자살행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학익진은 병력이 우세한 부대가 열세의
부대를 포위할 때 쓰는 전술이지 약세의 부대가 이를 잘못 쓰다가는 전열에 구멍이 나면
서 자칫 전부대가 전멸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전술이었다. 전국시대에도 도쿠카와 이에
아스가 열세의 병력으로 학익진을 쓰며 허세를 부리다가 어린진을 쓰며 달려드는 다케다
신겐에게 큰 망신을 당하며 참패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와키자카의 입장에선 그야말
로 승기를 잡은 셈. 와키자카는 학익진을 펼치며 자신들을 포위하는 조선함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격을 명했다. 어차피 화포는 한번 쏘면 재장전이 필요하고 그 사이에 접근
해서 학익진의 어느 한군데만 돌파해도 승부는 끝이라고 본 것이다. 학익진을 펼치고
와키자카의 함대가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조선 함대는 일제 사격을 개시했고
이 일제사격으로 어린진을 펼치면서 떼거리로 몰려오던 일본수군의 선봉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조선수군이 재장전하기전에 학익진을 돌파하면 된다고만 생각했던 일본
수군의 판단은 여기서부터 크게 빗나간다. 일제발사를 마친 조선수군의 판옥선들은 신속
하게 노를 저어 제자리에서 빠르게 반대편으로 선회했고 반대편 현측에 준비되어 있던 화
포들은 또다시 대장군전과 철환과 조란환을 퍼부으며 두 번째 불벼락을 가했다. 바닥이
깊어 넓은 바다에서 안정적이며 속도가 빠른 일본주력선 세키부네와는 달리 조선의 수군
주력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고 조선수군의 노는 수직형으로 꽂혀 있어 손
쉽게 제자리에서 방향전환이 가능했으며, 일본과 서양의 노와는 달리 상체만을 사용하
는게 아니라 전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일본 수군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선회가 가능했다. 포위 대형을 갖춘 조선수군의 판옥선들이 일제히 제자리에서 선회하
면서 접근할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일제 함포 사격을 가하자, 와키자카의 주력함대 대
부분은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조선수군의 화력을 뒤집어 써야 했고
하나 둘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 방향을 선회하여 포화를 피하고 싶어도 세키부네의 뱃바
닥 특성상 밀집된 어린진의 공간내에서 함부로 배를 돌리기도 어려웠고 계통을 잃고 이리
저리 포화를 피하기 위해 움직이던 세키부네들은 서로 부딪히며 자멸²해갔다.
넓고 깊은 한산도의 앞바다에서 충분히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와키자카의 주력함대는 도망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판옥선에 덮개를 씌운 돌격
선 거북선이 접근하며 화포와 불화살 그리고 충파를 시작하자 그야말로 전 함대가 꼼짝
없이 포위망에 갇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후미에 있던 와키
자카는 보다 못해 최후의 수단으로 전력을 다해 조선수군의 대장선을 공격하라고 지시했
지만, 이미 계통과 대열이 무너진 일본수군 함대는 무모하게 조선함대의 화망에 접근하
다 차례로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 일본이 자랑하던 조총은 사정거리가 짧아 거의 위력
을 발휘하지 못했고 고작해야 한척당 1-3문에 불과한 일본의 화포로는 조선수군의 우월
한 화력에 맞설 수 없었다. 그들이 능숙하게 다룬다고 자부하는 칼과 창은 한번 휘둘러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 반면, 조선수군이 발사한 대장군전은 여지없이 명중할 때마다
세키부네와 아타케의 갑판을 뚫고 배 밑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냈고 화포발사 사이사이에
끊임없이 쏘아대는 조선수군의 편전과 쇠뇌와 조란환(구슬모양의 소형탄으로 오늘날의
크레모어산탄을 연상하면 된다)과 피령전(화포에 넣고 쏘는 다연발 화살)은 갑판위에
서있는 일본군들을 삼단 쓰러트리듯 넘어트렸다. 이렇듯 막강한 화력으로 배 자체가 깨어
져버리니, 갑판위의 병사들이 아무리 접전에 능한 정예병이라 할지라도 바다위에서 견뎌
낼 재간이 없었다. 이날 73척의 위풍당당했던 일본수군의 결전주력 와키자카 함대는 와키
자카가 탄 대장선 1척을 포함해 소형선박이 대부분인 14척만이 살아남아 간신히 견내량으
로 도망쳤고 대형함선 아다케와 주력인 세키부네 59척 대부분이 모두 격침되거나 나포되
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고깃밥이 되고 말았다. 간신히 살아남아 한산도로 헤엄쳐 달아
난 400여명도 당시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았던 관계로 거기서 굶어죽었다. 와키자카가 총
애하던 장수 마나베 역시 한산도에 상륙했으나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할복자살했다고 한다.
적장이었던 와키자카가 남긴 기록을 보더라도 유리하다고 생각해 추격에 나섰다가 뜻밖에
도 조선수군이 대형을 변형해 포위망을 펼치고 반격을 해오자 변변한 대항조차 해보지 못
하고 간신히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야말로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일방적으
로 두들겨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이날 와키자카는 자신의 투구에까지 화살을 맞았다고
하니...일본수군이 얼마만한 피해를 입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이날 일본수군의 인명피해는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경상수군의 군관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제만춘의 기록과 와키자카 개인의 기록에 따르면 약 9,000여명이 바다
속에 수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와키자카는 조선에 건너올 때 약 만 명의 군사를 이끌
었는데, 단 한번의 해전으로 사실상 모든 부대를 잃어버린 셈이다. 이에 비해 조선수군
은 단 한척의 배도 잃지 않았고 전사 19명과 부상 115명의 상대적으로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니, 완벽한 대승이었다. 세계 해전사 어디를 뒤져봐도 이와 같은 일방적이고 완벽
한 승리는 기록된바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힘겨운 하루의 싸움을 마친 후 조선수군
은 그날 저녁 견내량에서 정박해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척후선을 띄워 7월 10일에는 안골
포에서 구키 요시아키의 46척 함대를 전멸시킨다. 이미 선봉 주력 와키자카 함대가 참패
를 당한 상황에서 구키와 가토는 더 이상 저항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아예 함대를 버리
고 육지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7월 13일 조선함대는 진을 파하고 각자의 수영으로 개선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와키자
카가 견내량을 선점했다는 것에 안도하여 후미에서 따라오는 구키와 가토의 함대와 연합
하지 않고 단독으로 섣불리 전투를 벌였다가 유인책에 말려들었고 생전 처음 보는 해상에
서의 학익진법과 근대함포의 위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렇게 한산도에서 기선을 완
전히 제압당한 상황에서 결전함대의 남은 세력마저 안골포 등지에서 각개격파당하는 치욕
적인 완패를 당했고 조선수군은 사실상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이
후 이순신이 파직될 때까지 두 번 다시 조선수군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의 참패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원정군에게 해전금지령을 내렸다.
사실상 조선수군의 제해권을 인정하고 간신히 부산과 일본과의 해상교통선만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한산도 해전으로 임진왜란의 향배가 완전히 갈렸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남해를 거쳐 서해로 진격해 조선조정을 추격하고 있던 고니시 선봉군에
게 군량을 비롯한 보급물자와 13만에 달하는 추가 병력을 보내려던 계획(한산도 해전이
시작되기전만 해도 고니시는 선조에게 '대왕의 수레가 이제는 어디로 가시려 하시나이까'
는 조롱조의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당시만 해도 열악한 도로사
정 때문에 대규모 물자수송은 뱃길에 의존하고 있었고(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대
량 수송은 아직도 해운에 의존한다) 고작해야 소나 말이 끄는 수레를 이용해 군량과 군수
물자를 실어나르는 방식으로는 기존의 원정군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점차로 강
화되는 조선의 의병과 관군들은 사방에서 일본의 보급선을 교란해댔다. 한산도해전의 대
패로 제해권을 잃고 서해로의 직접 보급로를 얻지 못한 일본군은 점점 기존 보급선을 유
지하는 데에도 힘이 겨워 차츰 세력을 잃고 남하하게 된다. 이후 조선수군의 배후를 치
기 위해 진주와 금산등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진주성과 금산전투 등에서 조선의 의병
과 관군은 결사항전을 통해 전라도 수군의 배후를 지켜낸다. 다음 해 2월 행주산성에서
일본육군은 3만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고작 2천 8백에 불과한 권율의 육군에게 참패했다.
이미 일본군은 지상전에서도 현저하게 힘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산도 해전의
승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조선에게 기사회생의 계기가 되었다. 한산도 해전이전
만 해도 조선의 운명은 매우 불투명했으나, 대승 이후 서애 류성룡의 지적대로 일본군은
한쪽 팔이 잘려나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수군이 한산도에서 일본수군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조선이라는 역사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후일 칠천량의 대패로 남해
의 제해권을 잃자마자 전라도 지역을 거의 대부분 유린당하면서 조선이 두 번째 절체절명
의 위기에 몰렸던 것을 감안하면 한산도 해전의 전술,전략 그리고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선조가 전후 전라도 지역을 상찬하며 내린 글귀 약무호남 시무국가(호남이 없었다
면 나라도 없었다)라는 말에서도 바로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전라도
수군의 공이 컸고 호남지역이 전쟁수행의 견인차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계속됩니다)
- 이전글 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2)// 태평양의 한산도대첩, 미드웨이 해전(1):계속
- 다음글 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1)//한산도 해전, 조선을 멸망에서 구하고 해전의 방식을 바꾸다(계속)
댓글목록 2
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감사합니다. 재미 있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위대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을 다시볼 수 있도록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그네님의 글은 정말 흥미진진 읽으면서 글 속에 쏙 빠져들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