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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1운동은 상해로 부터 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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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작성일 11-08-18 19:04 조회 2,68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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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史 모두 다시 써야 하나?

 

 3 .1운동은 상해로부터 점화(5부)

3.1운동, 임시정부, 파리강회회의는 함께 묶어서 보아야 한다.

 

김상구  2011.08.08 역사복원신문

 

2) 삼일운동은 상해로부터 점화되었다.

1919년 12월 3일, 조선군참모부가 작성한 선내외일반정황을 보면 '朝鮮軍配置圖, 國外排日鮮人獨立運動關絡圖(조선군배치도, 국외배일선인 독립운동관련도)'라는 서류가 첨부되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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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외배일선인 독립운동관련도, 상해지역 인물에 김복이 보인다.     © 김상구


이 연락도를 보면, 상해가 모든 연결고리의 중심임을 알 수 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상해 지역 주요 인물들 중 안창호, 신규식, 이동휘 등은 대부분 임시정부와 관련이 있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바로 김복(=김규흥)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앞서 인용한 不逞團關係雜件(불령단관계잡건)에도 김복이 상해지역의 핵심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아무튼 일제는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파리강화회의 등 일련의 사건을 주도한 인물로 신규식, 김규흥을 주목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이후 다른 문건을 보면 신규식에 대해선 많은 정보를 수집했음이 들어난다. 하지만 김복의 이름은 여러 번 등장하지만 그의 실체에 대해선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이 점에 대해선 뒷글에서 좀 더 상세히 거론하기로 하겠다.

일제가 신규식 및 일련의 사건의 배후 조직에 대하여 정보를 얻게 된 계기는 장덕수의 체포와 국내 3·1운동 관련자의 심문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는 밀정을 통해 조선인 항일단체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해왔지만,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파리강화회의에 관한 정보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1919년 3월 1일을 전후한 일본 기밀문서에는 신규식, 신한청년당, 김복 등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것으로 증명된다. 결국 대부분의 정보는 장덕수와 국내 3·1운동 관련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입수했다는 뜻이다.

일제는 3·1운동, 임시정부, 파리강화회의를 언제나 함께 묶어 파악하고 있었다. 『高等警察秘史』‘在外 不逞鮮人(고등경찰비사 재와불정선인)의 상황’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겠다.2)

《1919년 3월의 일대소요사건은 저들의 마수로부터 점화된 것이다. 즉 그 소요사건의 원인은 제1차 세계대전(1914)이 준 세계 사조의 변조 특히 소위 윌슨(Willson)의 민족자결주의가 내외 조선인에게 이상(異常)의 충동을 주어 다년간의 울분을 폭발시키는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직접적인 도화선은 실로 상해재주 불령조선인 신견(申樫) 일당의 책동에 인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문서는 3·1운동의 배후로 신견(신정의 잘못, 즉 신규식)을 분명히 지목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 선우혁(鮮于爀)을 파견하여 양전백, 이승훈, 강규찬 등을 움직여 시위운동을 획책하였는데, 그들은 후에 천도교측과 합쳤다.
■ 조용운(趙鏞雲-鍾殷)을 동경(東京)에 파견하여 조팔용(趙八鏞, 최팔용의 오기)등을 선동하여 2월 8일의 선언서 발표를 행했다.
등을 직시하여 동경2·8선언과 3·1운동을 주동한 것은 신규식과 그 일당이라고 단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임시정부도 이들의 소행이라고 했는데, 아래 인용 문서를 참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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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 김상구


《그리고 동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어서 의정원(議政院)을 개설한 이래 이곳의 불령조선인 다수를 더하여 각종 불온단체를 조직 책동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태평양회의 이후 특히 1926년 공산주의의 고조는 어쩔 수 없이 점차 저들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어 오늘날 국외불령운동의 대세는 만주로 이동하고 상해방면에서는 무릇 왕년의 잔해를 품고 있는 고성낙일(古城落日)일 뿐이다.》3)

한편 이 문서는 상해임시정부의 연혁, 조직 후 행동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거론하고 있는데, 임시정부 수립 부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18년 12월 신규식의 이름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의 원조를 요청하는 취지의 전보를 보냄.
② 김규식(金奎植)을 상해로 초대하여, 1919년 1월 파리를 향하게 함
③ 여운형(呂運亨)·선우혁(鮮于爀) 등은 널리 동지를 모집하기 위해 ‘청년단(靑年團)’을 조직하고 여운형(呂運亨)이 단장이 되어 단원으로써 상해의 청년학생 등 약 1백 명을 모집함.
④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내지(內地) 동경, 만주 각지에 동지를 파견하여 독립운동의 선전에 노력하는데 힘씀.
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손병희(孫秉熙) 등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재상해 불령조선인들도 지체 없이 ‘상해고려교민친목회(上海高麗僑民親睦會)’를 조직하고 신석우(申錫雨)를 회장에 여운형(呂運亨)을 총무에 추대하고 회원이 3백 명에 달하였으며 기관지『우리의 소식』(등사판 인쇄)을 발행 독필(毒筆)을 행함.
⑥ 이무렵 여운형(呂運亨)·선우혁(鮮于爀)·신규식(申圭植)·서병호(徐丙浩)·한진교(韓鎭敎)·김철 및 소요(3·1운동) 전에 도항시킨 현순(玄循)·손정도(孫貞道)·이광수(李光洙) 등의 주모로 상해임시정부조직의 협의를 진행함.
⑦ 상해 기세의 앙양(昻揚)에 자극 받은 조선 내 기타 각지로부터의 모집이 격증(激增-3월까지는 재류조선인이 3백여 명에 불과했는데 4월 중순에는 약 7백 명에 달한다)하고 4월 중순에는 재외 각지의 조선인이 미국 조계(租界)에서 회합, 의사회를 개최함.
⑧ 동월 하순에는 프랑스조계 개자통로(愷自通路)에서 ‘고려국민공화대회’를 개최하고 강화회의에 대하여 일대 적극운동을 개시하고자 논의함.
⑨ 이어 동 5월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으로부터 상해로 돌아옴
⑩ 3월(4월의 오기) 3일 상해임시정부의 조직을 완성하고 다음의 각원(閣員)을 정하여 프랑스 조계 협평리(協平里) 1호에 사무실을 두고 이어 ‘대한민국의정원법’을 제정하여 이곳 거주자 중에서 각도 대의원으로 33명을 선출하고 손정도(孫貞道)를 의장에 선출함.
⑪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발표하니 이것이 소위 상해임시정부조직의 시작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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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원 일동(대한민국 원년(1919)  초기 임정요원 대부분은 신한청년당 소속이었다.   © 김상구


한편 상기 인용문서와 비슷한 내용이나 좀 더 상세하게 기록된 문서도 있다.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의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 중 임시정부 조직 건에 있어서의 한인의 행동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다.4) 근거로 예수교측 유력자인 李昇薰(이승훈)·梁甸伯(양전백)·吉善宙(길선주) 등을 조문한 바를 참고로 하고 있음을 밝히며,

《2월 초순경 鮮于爀(선우혁)이 상해로부터 비밀리에 평안남도 선천(宣川)에 와서 같은 곳에 거주하는 牧師 梁甸伯(목사 양전백)을 방문하여 프랑스파리에서의 강화회의(1919)에 한국민족대표자를 파견할 것과, 한국 내에 있어서는 그 소리를 크게 하여 극력 독립운동을 실행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같은 사람의 찬동을 얻고 옮기어 평남 정주군 곽산(定州郡 郭山)에 거주하는 李昇薰(이승훈)을 방문하고 다시 평안남도 평양에 이르러 吉善宙(길선주)와 같은 곳의 耶蘇敎(예수교) 유력자인 姜奎燦(강규찬)·安世恒(안세항)·邊麟瑞(변인서)·李德煥(이덕환)·金東元(김동원)·都寅權(도인권)·金聖鐸(김성탁)·尹愿三(윤원삼)·尹聖運(윤성운) 등과 만나 梁(양전백)에 대한 것과 같은 말을 하여 독립운동과 자금모집에 찬성을 얻고 상해로 돌아갔는데 그 사람 등은 鮮于爀(선우혁)의 권유에 따라 평양의 관.공.사립학교 생도로써 3월 3일 故李太王(고종)의 국상 당일을 기해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있었으나 때마침 천도교측으로부터 崔南善(최남선)을 사이에 세워 李昇薰(이승훈)에 의해 합동운동을 할 것을 교섭받고 드디어 협동하여 일을 하기로 변경한 것이 판명되었다.》

또 상해로부터 동경을 거쳐 한국에 잠입한 張德秀(장덕수)를 체포하여 조문한 결과에 의하면 동경 한인유학생 崔八鏞(최팔용) 등이 주동한 2·8선언은 “상해에 거주하는 申檉(신정, 신규식)이 趙鏞雲(조용운)[鏞殷(조용은)]이란 자를 동경으로 밀파하여 유학생을 선동하여 거사케 한 것이며 또 張德秀(장덕수)는 동경과 한국에 있어서의 독립운동 정황시찰의 용무를 도래한 자임이 판명되었다.”고 하였다.5)

이 문서는 현순의 상해 잠입과정, 임무 등과 김규식의 파리 파송과정 그리고 大韓靑年黨(신한청년당)의 설립 과정등도 상술하고 있다. 특히 신한청년당 당원들의 임무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張德秀(장덕수)는 일본으로,
■ 金徹(김철)·鮮于爀(선우혁)·徐丙浩(서병호)는 한국내지(韓國內地)로,
■ 呂運亨(여운형)은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가서 한인독립운동자(韓人獨立運動者)의 거두와 회견하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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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 부터 장덕수, 조소앙, 김철     © 김상구


그 외 임시정부 수립과정은 앞서 인용한 문서와 거의 유사함으로 생략하겠다.


이상 몇 가지 일제의 기밀문서를 분석하면, 일제는 3·1운동, 2·8선언, 임시정부의 수립 등 일련의 사건을 동일선상의 사건으로 파악하고, 그 실행기관은 급조된 신한청년당이라는 것을 파악한 것 같다. 그리고 신한청년당과 표면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신규식이 실질적인 배후였다는 것은 인지하였으나, 신한청년당이 동제사의 하부 단체라는 것 또 다른 배후인 김복(김규흥)의 정확한 정체는 알아내지 못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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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鮮內外 一般 情況(1919.11.1~11.30), 朝特報 제79호, 1919/12/03, 朝鮮軍參謀部
2) 백암박은식선생전집편찬위원회 백암박은식전집 제6권 = THE COMPLETE WORKS OF PAIKAHM PARK EUNSIK 편 서울 동방미디어 2002 제1권 저술Ⅰ 제2권 저술Ⅱ 제3권 저술Ⅲ 제4권 저술Ⅳ 제5권 시문 독립운동관련자료 역사 독립운동
3) 상기 인용문서와 동일
4) 上海大韓民國臨時政府 組織에 關해 一九二○年 六月 朝鮮總督府警務局長이 外務次官에 通報한 要旨와 補輯,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p17~20, 국회도서관
5) 지산외유일지에 의하면, 당시 조소앙은 길림인근에 있었다. 장덕수가 허위 진술을 했는지, 정원택의 착오였는 지 이 부분은 좀 더 검토되어야할 사항이다.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528&section=sc12&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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