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 최종회> 칼을 어루만지고 길게 노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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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작성일 11-02-22 21:10 조회 2,198 댓글 0본문
박용만과 그의 시대
▲ 박용만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최종회, 칼을 어루만지고 길게 노래하며
▲ 철원의 금학산은 박용만이 대조선국민군단을 훈련시켰던 하와이의 코올라우산처럼 심줄들이 울근불근하다.
박용만 피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국내 한인들의 반응은 박용만에게 가혹했다. 그가 피살된 지 4일 만에 중국신문 <세계일보>는 북경 거주 한인들의 반응을 취재했다.
"박용만은 우성(又醒)이라고도 하며 조선 강원도 철원군 사람이다.
갑오 청일전쟁 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나중에 정부가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 박도 체포돼 감옥살이를 했고 석방 후 미국으로 도망갔다.
당시 한인사회가 동정하여 박은 도움을 받아 미국 사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호놀룰루 등지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했다. 1919년 구라파전쟁이 끝난 후 한인들도 독립을 선포하게 되고 임시정부를 상해에 설립하게 됐는데 박도 경력관계로 외무부장에 추천돼 중국에 건너와 독립당의 환영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중국에 온 후 독립당에 충성스럽지 못한 행동이 하나 둘이 아니었기에 크게 당의 신용을 잃었고 후에 박은 은밀히 북평 주재 일본정보원 모와 연락하여 조선총독부에 항복하여 남몰래 두 차례나 조선에 들어가 타합한 바 있다.
이것이 폭로된 후 한당(韓黨)의 간부는 곧 사형선고를 내렸다. 박은 한인사회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미 영토 호놀룰루에 도망가서 재미 한국인 영농단체들을 속여 수만금을 빼앗고 북평에 돌아와 소위 대륙농간공사를 조직하고 편안한 생활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번 피살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한인들이 잘했다고 했다. 범인 이 아무개가 돈을 꾸려다 못 꾸어 죽였다는 얘기는 마땅히 사실을 엄폐하려는 낭설일 것이다."
조선에 잠입했다는 사실은 박용만이 스스로 밝힌 것이어서 문제가 안 되지만 호놀룰루에 도망가서 한국인 영농단체들을 속여 수만금을 빼앗고 북평에 돌아왔다는 말은 사실에 어긋난 악의적인 진술이다.
박용만이 범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또 노비 1000원을 요구했다는 증언이 현장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믿지 않겠다는 것 역시 객관성을 잃은 억지일 뿐이다.
▲ 철원의 박용만 생가 터에는 아무런 표적이 없다.
박용만은 1881년 7월 2일 부친 박선병과 모친 김해 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에 건너간 박용만은 무력항쟁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않았다.
또 임시정부를 새로 구성하자는 창조파의 한 사람이었다.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 김규식도 창조파였다.
제2대 외무총장으로 임명됐던 그 역시 창조파였으니 창조파가 무개념의 과격파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김구를 비롯한 임정고수파들에게 박용만은 좋게 볼 수 없는 대상이 됐다.
그는 또 '다른 운동가들이 곤궁 속에 있을 때 몇 사람의 하인들을 두고 젊은 첩과 사는 모양새'로 질시의 대상이었다.
몇 사람의 하인들이란 하와이에서 온 독립단원들로서 농사일을 돕기 위해 숙식을 같이 하고 있었다. 젊은 첩을 뒀다고 했지만 공개적으로 결혼한 제 2 부인이었다. 본처는 병석에 누워있고 중국인들과 사업관계를 갖다 보니 중국인 처를 맞아들이게 된 것이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본처와 순조롭게 해로한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
박용만이 피살되기 1년 5개월 전인 1927년 5월 22일 조선총독부가 파견한 밀정 목등극기는 '북경재류 조선인의 개황'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에 의하면 한인들의 수는 약 500여 명이며 직업을 가진 자는 22명밖에 안 돼 그 생활 상태는 '비참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포사회는 공산계열 등 여러 갈래로 분열돼 있었다. 그해 북경에서 반일집회가 더러 있었고 목등극기는 참석자와 발기인들을 보고서에 적었지만 박용만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박용만은 쓸데없는 집회 보다는 하와이에서 온 자기 사람들과 함께 하루라도 빨리 재정적으로 자립하는 길에 몰두했던 것이다. 결국 박용만은 간고한 환경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고립시켰다. 피살사건이 일어나자 그에 대한 여론이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소이였다.
▲ 북경의 이화원 내 패방(牌坊)
서재필과 이승만은 뉴욕의 유학생들이 발행하는 <삼일신보>의 고문이었다.
두 사람은 박용만의 죽음은 암살이라는 장문의 글을 게재하게 했다.
이에 대해 김구는 피살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번에 북경에서 이해명이 박용만을 처형한 것을 암살이라고 장편설(長篇說)을 기재한 것은 우리 독립운동자는 물론 모모주의자들도 '삼일신보'에 침을 뱉을 것입니다. 우리가 박용만이 적 총독부에 투항하고 목등(木藤) 놈과 동행하여 비밀입국하여 철도여관(조선호텔)에서 묵으면서 기밀비를 받아가지고 나온 일이 발각돼 청년들이 총살하려고 함을 알고, 박은 비밀히 하와이에 가서 노동 동지들을 꾀어 자금을 긁어모아 가지고 북경에 몰래 와서 중국여자를 첩으로 두고 농간을 부리므로, 이해명이 총살하고 즉석에서 피포돼 중국법정에서 조사한 결과 정치범으로 5년 역을 선고받은 지라.
박의 첩이 박용만이 평시에 운동하던 문적을 제출하고 이러한 역사가 있는 사람을 정탐이라 하느냐 항고하는 것을 안 우리 각 단체들이 연합증명을 하고 임시정부에서 중국정부에 박용만의 죄상이 사실임을 통보했습니다."
김구는 임시정부 고수파의 선봉이었으니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박용만을 불편한 존재로 여겼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나아가 그의 경력이나 의도한 바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박용만을 알고 그와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미주 동포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놀라고 울분을 견디지 못하며 눈물로 밤을 새운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피살 소식은 하와이 '조선독립단' 단원으로 '대본농간공사'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북경에 나가 있던 김홍범에 의해 독립단 본부에 전보로 알려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1928년 11월 1일자 <신한민보>는 '조선독립단' 간부 중 한 사람이었던 정두옥씨의 제보를 받아 암살 기사를 실었다.
▲ 박용만씨 피살전말이 실린 1928.11.01자 신한민보.
신문제호를 박용만이 주창한 대로 가로쓰기와 풀어쓰기로 한 게 특이하다.
"(북경 10월 17일) 북경에 거류하는 김홍범씨가 하와이 독립단 본부에 뎐보(전보)하엿스되 '박용만 션생이 자긔 사뎌(사저)에셔 암살을 당하엿고 암살을 단행한 흉한은 즉시 톄포(체포)되엿다.' 하엿다더라.
- 하와이 졍두옥씨 통신 - 이번 북경에서 박용만씨 암살한 소문을 듯은(들은) 일반 독립단우들은 놀나고 울분함을 견대지 못하야 10월 21일 져녁에 팔나마 집회실에서 4백 명 사람이 모혀 일변 망인을 위하야 됴상(조상)하면서 일변 박씨의 공익심을 찬양하면서 일변 연조를 거두어 한 대표원을 즉시 북경으로 파송하여 박군 암살한 사실을 샹고(상고)도 할뿐더러 그의가 하던 사업을 맛하(맡아) 쥬관(주관)할 계획인대 당시에 거둔 돈이 쳔여 원에 달하엿스며 대표원은 필시 리샹호씨가 될듯 하다더라.
당 식에 신국길씨 사회 하에 젼 춍회쟝 김윤배 졍두옥 리샹호 제 씨가 끌는(끓는) 피에셔 소사나는 열변을 기울넛스며(기울였으며) 부인들은 동졍의 눈물로써 밤을 새웟다더라.
오호라! 박용만 션생은 평생에 계획하든 혁명사업을 셩취하지 못하고 불행히 흉한의게 암살을 당하엿도다. 박 션생은 과연 우리 나라에 류 두문(드문) 애국쟈시엿다.
텬도(천도)가 무심하야 우리 애국자 즁에 또 한분을 영결하엿스니 우리 한인 된 쟈 뉘 안이(아니) 동졍의 눈물을 흘니리요 만은 박 션생과 일즉 인연이 깁던 본보난 더욱 애도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본 긔쟈 역시 평소부터 친졀히 지나든 졍의라든지 교분이라든지 이 소식을 듯고 이 붓을 졍지하고 일졍의 눈물을 뿌리지 안을 수 업나이다.- 편즙자 -
여기서 널리 알려진 중국의 고사 '귤화위지(橘化爲枳)'를 꺼낼 수밖에 없다.
제나라 재상 안영이 초나라의 왕을 만나러 갔을 때 그의 기를 꺾기 위해 제나라의 도둑을 잡아놓고 "당신나라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라고 힐난했다. 이에 안영은 "귤나무는 회수(淮水)의 남쪽에서 자라면 귤이 열리지만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 사람도 초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도둑이 됐을 것입니다."
박용만에게 중국은 척박한 무대였다.
'탱자'가 되는 운명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하와이에서는 그가 움직이면 수백 명의 동지들이 따랐다. 독립운동을 실천할 수 있도록 당장 자금지원도 따랐다. 북경의 한인들이 끼니도 어려운 데 비해 하와이의 한인들은 비록 고소득은 아니지만 고정적인 수입들이 있었다.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머물고 있을 때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1926년 1월 25일자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 (전략) 박(朴)이 하와이에서 활동한 상황 등을 보고하고 자금 등이 순조롭게 진척돼 이해 2월까지 2 내지 3만원의 자금과 약간의 부하, 인쇄기와 자동차(트럭)을 주어 귀연(歸燕. 북경귀환)하는데 있어 열하(熱河)와 포두(包頭)에 상당한 토지를 조사할 것을 청하고 ...(후략) "로 나와 있다.
이걸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에 있는 동포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하와이 동지들의 힘을 얻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했다는 점이다. 물론 목표는 둔전기지 건설이었다. 그에 필요한 자재는 하와이에서 아낌없이 대겠다는 정황도 보고서에 드러나 그에 대한 신임이 어떠했다는 것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북경에서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던 박용만은 탱자의 신세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와이 동포들에게 그는 언제나 보름달처럼 잘 익은 한 알의 귤이었다. 그 귤의 당도를 의심치 않듯 그의 인격을 한 번도 의심치 않았다. 한 번 귤이면 어디 가나 귤이듯 그들은 그의 일관된 진정성을 결코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논이 필요하다면 논을 살 돈을 모아 주었고 농사지을 일꾼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을 뽑아 보내주었다.
대조선독립단 단원으로 암살 당시 박용만의 처소에 머물고 있던 김홍범은 같은 단원인 하와이의 정두옥에게 편지를 썼다.
암살 사건이 있은지 한 달쯤 후인 11월 23일 자 편지의 내용을 일부 옮긴다.
"박 선생께서 하와이를 가시기 전에 조선을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사회에서 평론이 좀 있었던 바로 저 음흉한 왜놈은 이것을 이용하여 가지고 선전을 하는 바 박씨가 조선을 들어가서 조선총독을 방문하였느니 하는 풍와주사를 일삼다가 그때에 중국 국민군이 들어오자 박씨가 분망하여 주야로 불문망식하며 주선하던 결과 조선 청년자제 몇 백 명을 우선 훈련장에 내세우고 훈련을 시키기로 밖으로 주선이 다 되고 다만 안으로 염석산(閻錫山)의 인허만 얻으면 다 되겠는데 그 일을 성의로 도와주는 국민군 군장 여장들이 박씨를 권하여 청원서만 작성하여 드리면 우리들이 허가하도록 힘쓸 터인즉 청원서만 드리라고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박씨가 청원서를 완료하여 놓고 1, 2일 후면 드릴 터인데 이런 괴변이 났습니다.(하략)"
김홍범의 편지에서도 조선에 다녀온 게 비극의 원인이었음을 적고 있다. 그러나 암살 직전 한인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중국 국민군에 청원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었음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1924년 일본측과 2번의 접촉이 있었으나 그 이후 박용만은 마지막 날까지 외곬으로 독립운동에만 전념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1911년 10월 25일자 <신한민보>에 실은 박용만의 글 '형가와 같고 자방과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의 일부를 다시 옮긴다.
"…이 글을 쓰는 자의 용렬한 주의를 취해 십년을 교육하고 십년을 재물 모아 천만 명의 힘을 합한 후에 한번 노기를 드러낼 것이다.
두 가지 길이 원래 다 용이치 않거니 그 어려운 것을 피해 아무 것도 생각지 않으면 이는 오늘 조선 사나이의 천직을 버리는 것이니 우리는 결단코 청천백일을 쓰고 원수와 함께 살기를 꾀하지 말지라. 오호라! 가을바람이 소소함이여! 장사의 머리털이 관을 찌르도다.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함이여, 남은 회포가 끊기지 않도다."
▲ 북경의 이화원 내 곤명호의 노을
암살자의 눈먼 총탄에 쓰러지기 직전까지 그가 마지막 한 일은 중국 국민군의 협조를 얻어 조선의 청년자제 몇 백 명을 훈련장에 내세우는 거였다.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겠다는 결심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중단됐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하에서도 그는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 시대의 고통이 그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있기 때문일까.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귀에 들리는 그의 노래는 그래서 가슴을 언짢게 한다.
-끝-
※ 에필로그 : 반년 동안 부족한 제 글을 실어주신 <오마이뉴스>와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비범한 인물을 평범한 사람이 쓴다는 건 무리였습니다. 빙산의 노출된 부분만 더듬는 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용만이라는 큰 빙산을 역사의 연안에 조금이라도 끌어올 수만 있었다면 그간의 무모함이 덜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김도훈 저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조규태 -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배경식 -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집필에 도움 주신 분들-
한애라, 서정자, 신원호, 박도, 유민철, 정대화, 오은택, 이정묵, 이지운, 이미경(존칭 생략)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26634&PAGE_CD=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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