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454]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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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젤로나야 로샤에서 진행된 비밀회담
2. 아직 끝나지 않은 중국의 인민전쟁
3.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조선출병결정
4. 제1기병사단 궤멸시킨 제39군
5. “전쟁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
1. 젤로나야 로샤에서 진행된 비밀회담
흑해 연안의 이름난 휴양지 소치(Sochi)에 맛체스타(Matsesta)온천이 있다. 그 온천 인근에 푸른 숲이라는 뜻을 가진 젤료나야 로샤(Zelyonaya Rosha) 다차(dacha)가 있다. 로씨야에서는 별장을 다차라고 부른다. 1950년 10월 10일 젤료나야 로샤에서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조셉 스딸린(Joseph V. Stalin)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의 비밀회담이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요양하고 있었던 중국인민해방군 고위지휘관 린뱌오(林彪)가 저우언라이 총리의 요청으로 회담에 동석했다.
2000년 9월 인민해방군출판사가 펴낸, ‘북위 38도선-펑더화이와 조선전쟁(北緯三八度線-彭德懷與朝鮮戰爭)’이라는 제목의 책에 젤료나야 로샤 비밀회담의 대화내용이 들어있다. 이 책은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6.25전쟁에 참전했던 중국인민지원군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의 군사비서 겸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판공실 부주임이었던 양펑안(楊鳳安)과 왕티엔청(王天成)이 함께 집필한 것이다. 그 책에는 1950년 10월 10일 젤료나야 로샤 비밀회담의 대화내용 가운데 일부가 다음과 같이 수록되었다.
스딸린 - “미국군이 38도선을 넘어 조선 북부로 진격하고 있다. 조선이 지원을 받지 못하면, 1주일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정세가 엄중한데, 중국이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니 잘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문제도 고려해야 마땅하다. 오늘 미국은 세계적인 군사강국이다. 미국은 강한 해군과 공군을 보유했고, 군사기술과 군사장비가 우세하다.”
저우언라이 - “우리는 조선과 미국의 전쟁,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쟁선포와 중국에 대한 미국의 공중폭격 등에 대처하는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스딸린 - “중국 동지들이 고려하는 문제는 심중한 문제다. 현재만이 아니라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문제까지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저우언라이 - “이번에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나를 여기에 보낸 목적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하려는 데 있다. 소련 정부가 군사원조와 공군파병으로 도와주기 바란다.”
스딸린 - “우리는 그 문제를 검토했다. 우리도 조선 동지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일찍이 성명을 발표한 것처럼, 우리 군대는 조선에서 이미 철수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조선에 다시 파병하기는 곤란하다. 그것은 미국과 교전하자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조선에 파병하면, 우리는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겠다. 그리고 공군 전투기들이 엄호할 수 있도록 출동시키겠다. 당신들이 요청한 무장장비를 개선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에게 무기가 많이 남았기 때문에, 우리 군부와 중국 동지들이 협의하여 해결하기 바란다. (중략) 당신들이 조선에 파병할 때, 전투의 첫 번째 관건은 버티는 것이다. 만일 당신들의 전투부대가 미국군의 진공을 감당하지 못하면 소련이 파병해 지원하겠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미국군과 직접 대결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인류는 또 다시 재난을 당할 것이다.”
저우언라이 - “우리는 스딸린 동지가 말한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전쟁승패의 결정적 요인은 민심의 향배에 달려있다. 5억 중국 인민과 전 세계 인민들은 미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미제침략자들이 조선에 쳐들어갔으나, 우리는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능히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스딸린 -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당신이 말하는 방식대로 꼭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우언라이 - “이치가 그렇다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히틀러가 많은 약소국가들을 먹어치우는 것을 좌시하는 바람에 히틀러의 야욕이 더욱 커져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었다.”
스딸린 - “중국의 10개 사단을 무장시킬 무기를 제공하겠다. 그리고 중국 연해 대도시들을 방어하는 공군도 파병하겠다.”
소련의 군사지원을 약속받은 저우언라이 총리는 소치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마오쩌둥 주석에게 회담결과를 즉시 보고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당시 소련각료회의 제1부의장 비야체슬라브 몰로또브(Vyacheslave M. Molotov)가 저우언리아 총리의 숙소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통화에서 몰로또브는 소련이 공군을 파병할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군력을 지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스탈린 서기장이 중국의 조선출병에 대한 검토를 아직 끝내지 않았으므로 중국의 즉시출병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1950년 10월 당시 스딸린 서기장은 중국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고, 중국이 패하면 소련이 참전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소련과 미국의 전면전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했다. 스딸린 서기장이 대미전쟁을 우려한 까닭은 소련이 미국의 무차별적인 핵폭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련의 대도시들과 주요산업지대가 불과 5년 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가 당했던 것과 같은 핵참화를 입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소련은 1949년 8월 25일 미국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시험에 성공했지만, 1950년 10월 당시 소련은 미국의 핵폭격을 억제할 핵보복능력을 아직 갖지 못했다. 사실 미국의 핵폭격에 대한 스딸린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2017년 5월 30일 미국 군사전문매체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에 실린 분석기사에 따르면, 1950년대 미국 전략공군사령부가 작성한 800쪽에 이르는 기밀문서에는 B-52 장거리전략폭격기와 B-47 장거리전략폭격기, 그들을 엄호하는 F-101 전투기와 RB-47 정찰기 등 총 2,130대에 이르는 작전기를 총동원하여 소련,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나라들에 있는 1,200개 이상의 대도시들과 소련의 공군기지 1,100개소를 무차별적인 핵폭격으로 초토화하는 대공습계획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모스크바에서 179개소, 레닌그라드에서 145개소, 동베를린에서 91개소 등이 미국의 핵폭격대상으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이 보유했던 핵폭탄의 총폭발위력은 약 20,000메가톤에 이르렀는데, 20,000메가톤의 핵폭발력을 환산하면 상용폭약 200억톤에 해당하는 엄청난 폭발력이다.
그처럼 가공할 핵무력을 보유한 핵제국의 위세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 스딸린 서기장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조선에 출병하려는 중국에 군사장비를 제공하고, 공군을 파병하겠다고 약속해놓고서도, 회담을 마치고 헤어진 뒤에 고심과 우려를 거듭하다가 결국 자기 약속을 스스로 취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는 전혀 다른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저우언라이의 전쟁관은 인민 중심의 전쟁관이었고, 스딸린의 전쟁관은 무기 중심의 전쟁관이었다. 스딸린은 핵제국의 엄청난 핵무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조선출병을 기피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전체 인민이 단결하면 핵제국을 제압할 수 있으며, 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우는 정의의 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생각했다.
2. 아직 끝나지 않은 중국의 인민전쟁
6.25전쟁은 저우언라이의 전쟁관이 옳았음을 현실로 입증했다. 1950년 10월 중국공산당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고,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抗美援朝保家衛國)는 기치를 들고 5억 중국 인민을 항미원조전쟁에 불러일으켰다. 당시 마오쩌둥 주석은 “미국이 대만을 점령하고,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 동북변경까지 쳐들어왔기 때문에 중국은 항미원조보가위국의 기치를 들었다”고 역설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 중국 인민들은 항미원조총회를 결성했다. 항미원조총회 회장은 중국의 혁명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궈모뤄(郭沫若)였다. 항미원조총회는 항미원조의연금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스톡홀름 평화호소(Stockholm Appeal)’를 지지하는 전국적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일주일 만에 2억2,353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스톡홀름 평화호소’는 프랑스의 저명한 물리학자이며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며 프랑스공산당원인 프레데릭 졸이오 큐리(Frédéric Joliot-Curie)의 제안으로 1950년 3월 15일 세계평화협의회(World Peace Council)에서 채택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난지 2주 만에 전 세계 평화애호인민 150만 명이 ‘스톡홀름 평화호소’에 서명했는데, 세계적인 미술가들인 빠블로 삐카소(Pablo Picasso),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앙리 마띠스(Henri Matisse), 세계적인 음악가들인 러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드미트리 쇼스타코위치(Dmitri Shostakovich), 찰리 파커(Chalie Parker), 세계적인 문학가들은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 토마스 만(Thomas Mann), 조오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루이 아하공(Louis Aragon), 세계적인 영화배우들인 이브 몽땅(Yves Mountand), 씨몬 씨뇨레(Simone Signoret)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학계 저명인사들, 문화예술계 저명인사들,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동참했다. 핵제국만 그 서명운동을 반대했다.
중국공산당이 항미원조의 기치를 들자, 중국 각지에서 수많은 중국 청년들이 인민지원군에 탄원했다. 그 중에서도 결혼을 서약하면서 인민지원군에 탄원한 청년들이 40,000여 명이나 되었다.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결혼한 지 4일 만에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했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에서 미국군의 폭격으로 전사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이처럼 중국 인민의 엄청난 힘이 항미원조운동으로 분출하여 항미원조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중국의 전당, 전군, 전민의 조직적 단결은 핵제국의 핵폭탄과 항공모함과 전략폭격기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핵제국은 6.25전쟁 중에 핵폭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제24보병사단 사단장이 포로로 생포되고,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미8군사령관이 전사하면서 패색이 짙어진 핵제국은 서둘러 정전을 요청했다.
조선측 자료에 따르면, 1950년 12월 13일 전곡리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공병매복조원들이 지뢰매설과 매복기습으로 워커를 포함한 미국군 장병 80여 명을 살상하고 전차 1대와 작전차량 8대를 파괴했다고 한다.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은 약관 20살의 최종운 공병소대장인데, 그는 공화국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육군 공식문서에 워커의 사망과 관련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미8군사령관이 매복기습에 걸려 전사한 것은 미국군의 위신과 사기를 땅에 떨어드리는 치욕사건이므로, 그가 전사한 상황에 관해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공식기록이 없기 때문에, 한국측 자료들에는 사망날짜도 사망경위도 사망장소도 모두 불명확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교통사고 사망설만 무성하다. 이를테면, 그가 보좌관과 함께 작전차량(jeep)을 타고 가다가 한국군 차량을 뒤쪽에서 추돌하여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설, 그가 작전차량을 직접 운전하다가 한국군 무기수송차량과 정면충돌하여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설, 그가 탄 작전차량이 한국군 무기수송차와 충돌을 피하려다가 전주를 들이받고 세 차례 굴러 전복하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설 등이다.
어쨌든 미8군사령관의 전사로 충격을 받은 백악관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정전을 요청했다. 1951년 7월 1일 <민주신보> 보도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1951년 6월 29일 전사한 워커의 후임으로 임명된 매튜 릿지웨이(Matthew B. Ridgway) 미8군사령관에게 “정전교섭을 시작하라고 지령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중국공산당은 인민 중심의 전쟁관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중국의 대만해방전쟁을 앞당기는 사상정신적 요인이다. 미국은 무기 중심의 전쟁관밖에 모르기 때문에,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언제, 어떻게 시작할지 예상하지 못한다. 미국은 중국과의 전면전을 가상한 컴퓨터모의전쟁연습(wargame)을 수없이 거듭해도, 인민 중심의 전쟁관에 기초한 중국의 대미군사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전쟁관에 기초하여 미래상황을 예상해보자. 만일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개시하면, 중국공산당은 인민 중심의 전쟁관에 의거하여 전당, 전군, 전민을 대만해방전쟁에로 불러일으킬 것이다. 2021년 6월 현재 중국공산당 당원은 9,515만8,000명이고, 각계각층에 침투한 당세포조직은 486만4,000개에 이른다. 이처럼 엄청난 조직력을 중심으로 결집한 중국 인민 14억1,000만명은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해방전쟁을 적극 지원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대만해방전쟁은 군민융합전략에 의거한 인민전쟁(people's war)으로 전개될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말하는 군민융합전략은 무엇인가? 중국은 평시에 각 산업부문에서 생산로동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민간군사조직으로 개편되는 민병제를 운영하고 있다. 2020년 11월 16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18~35세 연령층 어민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한 해상민병대는 평시에 어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경무장을 하고 해상정찰감시, 해상전시물자수송, 해상수색 및 구조 등으로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의 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하게 된다고 한다. 윁남의 정치분석가 응우웬 칵 지앙(Nguyen Khac Giang)이 2018년 8월 4일 동아시아연단(East Asia Forum)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중국해상민병대에 소속된 선박은 무려 700,000척에 이른다고 한다.
2015년 10월 27일 미국 해군 미사일구축함 라쎈함(USS Lassen)이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있는 중국의 군사기지화된 인공섬 영해를 침범했을 때, 중국 해상민병대 소속 선박 수 백 척이 벌떼처럼 라센함에 덤벼들며 위협했다. 2021년 3월 21일 필리핀 언론보도에 따르면, 중국 해상민병대 소속 선박 220여 척이 남중국해 어느 암초 부근에 집결, 정박한 것을 필리핀 해상경비대가 관측했다고 한다.
대만해방전쟁이 일어나면, 중국은 해상민병대 소속 선박 400,000척이 발해, 황해, 동중국해, 대만해협, 남중국해를 뒤덮을 것이며, 상상을 초월한 ‘벌떼전술(swarming tactics)’로 미국 해군 항모타격단과 상륙타격단을 포위할 것이다. 또한 해상민병대 소속 선박 가운데 선체가 해안상륙에 적합하게 개조된 선박 수 천 척과 민간수송기, 민간헬기, 민간무인항공기 수 천 대가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작전을 지원할 것이다.
오늘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숙적인 미국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현대적인 무기로 무장시켰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국의 전당, 전군, 전민이 일치단결하는 인민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는 사실이다.
3.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조선출병결정
역사의 시계바늘을 다시 1950년 10월로 돌려보자. 스딸린 소련공산당 서기장과의 회담을 위해 모스크바에 잠시 머물고 있었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1950년 10월 13일 오후 스딸린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날 오전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긴급회의 결정사항을 스딸린에게 통보하려고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날 오전 마오쩌둥 주석은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펑더화이(彭德懷), 가오강(高崗)이 참석한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소련이 공군을 파병하지 않아도 조선에 출병하기로 결정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그 회의의 결정사항을 스딸린에게 전했다. 통보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국공산당 정치국 동지들과 협의한 결과 우리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데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제1시기에는 전적으로 남조선위군(南朝鮮僞軍)을 공격한다. 우리 군대는 남조선위군을 대응하는 데서 우세하다. 원산과 평양 이북의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만들어 조선 인민을 떨쳐일으킨다. 제1시기에 남조선위군 몇 개 사단만 전멸시키면 조선의 정세는 우리들에게 유리하게 전변될 수 있다.”
해설 -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남조선위군(南朝鮮僞軍)이라는 용어에서 위군(僞軍)은 작전지휘권이 없는 가짜군대를 뜻한다.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위군은 상부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뜻을 지닌 괴뢰군(puppet army)으로 번역된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은 한국군을 남조선위군이라고 깔보면서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2) “우리가 이처럼 적극적인 정책을 채택한 것은 중국, 조선, 동방, 세계에 매우 유리한 것이다. 우리가 출병하지 않으면, 적들이 압록강변을 압박해 국내외적으로 반동의 위세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 방면에서 불리하게 된다. 먼저 동북지방이 매우 불리해진다. 모든 동북변방군이 대응해야 하고 남만주 전력을 통제당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마땅히 참전해야 하고,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고 여긴다. 참전은 이익을 극대화하고, 불참전은 손해를 극대화한다.“
그날 저우언라이 총리는 스딸린 서기장에게 위와 같은 내용을 통보하고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저우언라이 -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소련 공군의 출동여부와 관계없이 출병해 조선을 지원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스딸린 - “중국 동지들이 그렇게 결심했다니 얼마나 큰 불행을 맞을지 모르겠다. 참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데...”
저우언라이 - “마오쩌둥 동지와 정치국 동지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신중하게 결정했다.”
스딸린 - (감동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국 동지들이 위대하다.”
저우언라이가 스딸린에게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조선출병결정을 통보하기 열흘 전인 1950년 10월 3일 헨드릭 분(Hendrik N. Boon)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자신이 파악한 중국의 의사를 미국에 전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저우언라이는 39도선이 붕괴되면 중국이 참전할 것이라고 내게 사석에서 말했다.”
2) “쉬상첸(徐向前) 중국인민해방군 참모총장은 미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면 중국은 참전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미국과의 전쟁으로 중국의 발전이 50년 이상 후퇴하더라도 미국의 침공을 지금 저지하지 않으면 중국은 영원히 미국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고 내게 사석에서 말했다.”
1950년 10월 10일 중국 외교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조선반도 침략전쟁은 초기부터 중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으로 되었다. (중략) 중국 인민은 미국과 추종국들이 저지르는 조선반도 침략전쟁을 묵과할 수 없으며, 이는 또 다른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이 있다. (중략) 중국 인민은 조선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며, 미국과 추종국들의 전쟁확대를 결연히 반대한다. 그리고 전쟁확대의 모든 책임은 침략자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다.”
위의 성명은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할 것임을 예고한 것인데도, 미국은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1950년 10월 12일 그들이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현재 중국의 지상군은 공군 및 해군 지원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코리아전쟁에 개입할 수는 있으나 결정적이지는 못할 것이다. (중략) 저우언라이가 성명을 발표한 것, 군대를 만주에로 이동시키는 것, 그리고 잔혹행위 및 국경침범에 관한 선전전을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코리아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확고하다는 증거는 없다. (중략) 중국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은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세계대전을 피하려는 소련의 결정을 생각하면 1950년에 그런 일(중국의 전쟁개입을 뜻함-옮긴이)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당분간 중국의 개입은 북조선에 은밀히 지원하는 형태로만 이루어지는 제한적인 개입으로 될 것이다.”
4. 제1기병사단 궤멸시킨 제39군
1950년 10월 8일부터 19일까지 11일 동안, 중국은 동북병방군 제13병단을 주축으로 조선에 출병할 지원군을 편성했다. 제1차로 조선에 출병할 전투병력 260,000명은 12개 보병사단과 3개 포병사단으로 편성되었고, 펑더화이가 인민지원군 사령원으로 임명되었다.
중국이 260,000명의 병력을 지원군으로 편성하고 있었던 1950년 10월 17일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의 모자를 쓴 미국 원동군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130,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북진공격을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1950년 10월 19일 펑더화이 사령원이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은 두 방면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땅을 밟았다. 제39군과 제40군은 랴오닝성 단둥(丹東)과 창디옌(長甸)에서, 제38군과 제42군은 지린성 퉁화(通和)시 지안(輯安)에서 각각 압록강을 건넜다. 펑더화이 사령원은 중국인민지원군 전투부대들에 무전기 사용을 통제하고, 조선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큰 길을 피하여 밤에만 행군하고 새벽에 취침하며, 대외선전을 금하고, 출병비밀을 철저히 지킬 것을 명령했다.
1950년 10월 21일 밤, 펑더화이 사령원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어둠이 깔린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에 도착했다. 당시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 있는 최고사령부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던 김일성 최고사령관은 그날 밤늦게 자신을 찾아온 펑더화이 사령원을 만났다.
1950년 10월 27일 미국 중앙정보국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미국군이 평안북도 운산지역에서 조선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중국인민지원군 병사 한 명을 포로로 붙잡았는데, 그는 심문 중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고 한다.
“나는 중국 국민당군과 공산군(인민해방군을 뜻함-옮긴이)에서 복무했다. 우리 부대는 미국군 무기와 일본군 무기로 무장했는데, 탄약은 충분한데 식량이 부족하다. 다른 부대들도 우리 부대와 마찬가지로 압록강 남쪽 방어진지에 투입되었다.”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는 자신이 제2차 국공내전시기에 국민당군과 인민해방군에서 각각 복무하였다고 진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국공내전은 인민해방군과 국민당군이 싸운 전쟁인데, 양쪽에 모두 복무했다는 그의 진술은 무슨 뜻인가? 중국인민지원군 전투원들이 미국군 무기와 일본군 무기로 무장하였다는 그의 진술은 또 무슨 뜻인가?
2020년 10월 16일 서울에서 진행된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한 중국 중산대학 첸줘(陳卓) 박사의 발표문에서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의 발표문에 따르면,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 소속이었다가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붙잡힌 장병들, 그리고 국민당군에서 싸우다가 투항한 후 재교육을 받고 인민해방군에 입대한 장병들을 중국에서 ‘해방전사’라고 불렀는데,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 이후 ‘해방전사’ 전원을 인민해방군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또한 국민당군 군단장이 인민해방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국민당군 군단 전체가 인민해방군 군단으로 편입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조선에 출병한 중국인민지원군의 약 50%가 ‘해방전사’들로 채워졌다는 것이다. 국공내전시기에 국민당군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미국산 무기를 보유했으므로, ‘해방전사’ 출신 인민지원군에는 미국산 무기로 무장하고 조선에 출병한 장병들이 많았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버리고 간 일본산 무기도 많았으므로, ‘해방전사’들 가운데는 일본산 무기로 무장하고 조선에 출병한 장병들도 많았다. 그런 까닭에 위의 인용문에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는 자기 부대가 미국산 무기와 일본산 무기로 무장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그러면 조선에 출병한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국군과 한국군을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살펴보자.
1950년 11월 당시 서울에 주재하던 미국 <합동통신(UP)> 특파원의 보도기사를 인용한 <경향신문> 1950년 11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미8군사령부 대변인은 11월 4일 오후 10시에 발표한 성명에서 적어도 2개 사단 이상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의 서북전선에서 미국군과 교전 중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닷새 전인 1950년 11월 1일 오전 9시 펑더화이 사령원은 중국인민지원군에 첫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그 작전명령에 따라 중국과 미국은 조선에서 사상 처음 격전을 벌였다. 첫 격전은 평안북도 운산지구에서 벌어졌다. 당시 운산지구에는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과 한국군 제1사단이 주둔했는데, 작전 당일에는 한국군 제1사단이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후방으로 빠졌고,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이 전방을 지키고 있었다.
1950년 11월 1일 오후 5시,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은 운산지구에서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을 포위하고 기습공격을 퍼부었다. 운산전투는 11월 3일까지 치렬하게 계속되었다. 포위당한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은 전투기의 공습지원과 전차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탈출에 실패했다.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은 운산전투에서 미국군 제1기병사단을 궤멸시키고, 포로 2,00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항공기 3대를 격추했고, 항공기 4대를 노획했으며, 전차 28대, 각종 전투차량 170여 대, 각종 화포 119문을 파괴하거나 노획했다. 중국과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에서 중국은 미국의 기를 꺾었다. 운산전투가 중국인민지원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 직후, 펑더화이 사령원은 사기가 충천한 휘하 장교들이 참석한 총결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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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우리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와 제1차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번 전투에서 15,800여 명의 적을 전멸시켰다. 마오 주석이 대단히 기뻐했다. 제공권이 없는 조건에서 미국군과 싸우는 전투가 우리에게 불리할 것으로 처음에 우려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곤란은 극복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비행기가 없고, 대포와 전차가 부족하지만, 근접전과 야간전으로 싸우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 미국군은 대단한 군대가 아니다. 우리는 남조선위군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제일가는 군대, 조지 워싱턴이 건국 당시 창설했던 제1기병사단도 이겼다. 이 군대는 미국에서 유명하다. 이제까지 그들은 전투에서 져본 일이 없는데, 이번에 패했다. 우리 39군에 패했다.”
5. “전쟁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
“폭약배낭을 등에 메고 나팔을 불며 기관단총을 쏘아대는 중국군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우리 참호로 몸을 날려 들어와 자기의 몸과 우리 참호를 산산조각으로 폭파했다.”
이 인용문은 6.25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참전로병 케네스 켈드(Kenneth Keld)가 1953년 4월 28일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서 벌어진 중국인민지원군과의 격전에서 겪은 체험을 서술한 것이다. 그의 체험담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전투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폭약배낭을 등에 메고 적군의 참호로 돌진하는 자폭공격으로 싸웠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라던 미국군을 상대로 자폭혈전을 벌인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밤안개처럼 소리 없이 스며들어 계곡에 매복하였다가 어둠 속에서 피리를 불었다. 그들은 중국의 전통악기인 샤오(簫, 피리의 일종)나 디즈(笛子, 피리의 일종)를 사용했다. 멀리 어둠 속에서 들리는 피리소리는 적군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심리전에 걸려든 적군이 공포를 느끼고 있을 때, 중국인민지원군은 사방에서 나팔을 불고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매복전, 기습전, 포위전, 유인전, 우회전 같은 다양한 전술로 공격했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상공격 앞에서 공포에 질린 한국군과 미국군이 만들어낸 말이다.
한국 국방부가 1987년에 펴낸 전사자료에 따르면, 한국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받으면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까지 팽개치고 달아났다”고 한다. 미국 육군전사에는 “한국군은 중국의 피리소리 또는 중국인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고 서술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1950년 11월 24일 청천강 작전지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국군 제2군단을 궤멸시켰다. 한국군 연대장 3명이 생포되었고, 연대장 1명은 전사했으며, 전사자, 실종자, 포로를 합한 인명손실은 전체 병력의 60%에 이르렀다.
1951년 5월 16일 강원도 인제군에서 벌어진 현리전투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전투원 100여 명은 한국군이 방어하던 오미재를 점령했다. 곧이어 조선인민군 제5군단, 중국인민지원군 제12군단과 제27군단은 한국군 제3군단 25,000명을 포위했다. 기겁한 한국군 제3군단 군단장은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혼자 연락기를 타고 후방으로 도주했다. 한국군 제9사단 사단장도 휘하장병들을 포위망 속에 버리고 도주했다.
한국군 군단이 거듭하여 궤멸되는 참상을 보고 경악한 당시 미8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는 자기 상관 맥아더에게 오합지졸군대의 작전지휘권을 빼앗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 건의를 받아들인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연락하여 한국군이 궤멸당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므로 작전지휘권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강박했고, 이승만은 “장군이 요구하신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쓴 치욕의 이양각서를 맥아더에게 보냈다. 그렇게 넘어간 한국군 작전지휘권은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주한미국군사령관이 틀어쥐고 있다.
▲ 위의 사진은 2020년 9월 조선이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전선참전 60돐에즈음하여 발행한 기념우표다. 1950년 10월 조선출병을 결정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전당, 전군, 전민에게 제시한 '항미원조보가위국'이라고 한자로 쓴전투적 구호가 조선우표에 선명히 새겨졌다. 조선과 중국은 그 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리며 핵제국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오늘 조선과 중국은 끝나지 않은 전쟁을 끝내려고 한다. 동아시아정세는 매우 긴장되었다.
한국군 육군본부가 2009년에 발간한 전사자료에 따르면, 6.25전쟁 중에 한국군 2개 군단이 궤멸되었다고 하는데, 궤멸된 2개 군단은 위에 서술한 제2군단과 제3군단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궤멸된 제2군단 군단장도 유재흥이고, 궤멸된 제3군단 군단장도 유재흥이라는 사실이다. 2개 군단을 궤멸시키고, 자기 혼자 연락기를 타고 도주한 패장 유재흥은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는커녕, 육군참모차장, 군단장, 참모총장 직무대리로 계속 승진했다.
1921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난 유재흥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대좌로 복무한 친일파다. 191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대좌로 복무한 친일파 유승렬이 그의 아버지다. 유승렬은 자기 아들 유재흥을 일본인으로 키우는 동안 우리말을 전혀 쓰지 못하게 금하고, 일본말만 쓰게 했기 때문에 유재흥은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6.25전쟁 중에 유재흥은 일본어 통역관을 데리고 다니며 한국군을 지휘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제57기 졸업생 박정희는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나서, 일본육군사관학교 제55기 졸업생 유재흥을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유승렬, 유재흥, 박정희만이 아니라 수많은 일본군 출신들과 일제의 만주괴뢰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비호와 지시 아래 한국군 고위지휘관으로 임관되어 6.25전쟁에 참전했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은 친일파 소굴이었다.
육해공군총사령관 (일본군 출신 채병덕)
제1보병사단 사단장 (만주괴뢰군 출신 백선엽)
제2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이형근)
제3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유승렬)
제5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이응준)
제6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김종오)
제7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유재흥)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일본군 출신 이종찬)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6.25전쟁의 내전적 측면은 조선인민혁명군 출신 항일세력과 일본군 출신 친일세력의 싸움이었고, 6.25전쟁의 국제전적 측면은 중국과 미국의 싸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년 9개월 동안 한반도에서 제1차 대미항전을 벌인 중국은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오늘 대만해협과 동중국해에서 제2차 대미항전을 예상하고 있다. 중국의 항미원조전쟁도 정전상태로 남아있고, 중국의 대만해방전쟁도 정전상태로 남아있다. 2020년 10월 23일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대회’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되었다. 중국 전역에 생중계된 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연설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以戰止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