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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미래행 급행렬차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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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432회 작성일 21-10-30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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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15

 

검푸르러진 나무잎들이 해빛에 번쩍이는 한낮이다.

한여름의 이맘때면 모란봉은 오히려 조용해진다. 젊은이들은 대체로 뽀트나 유람선이 기다리는 대동강유보도가 아니면 시내에 새로 생겨난 물놀이장들을 찾아가는것이였다.

그리하여 모란봉에는 명소를 유람한다면서 찾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련인들의 모습이나 드문히 보이기마련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류별난 한쌍이 보이였다. 련애하는 처녀총각이 분명한데 그들은 해방탑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맨우에 땡볕을 맞으면서 나란히 앉아있는것이였다.

그곳은 주변 어디에서든지 다 볼수 있는, 은밀한 사랑의 대화를 속삭이기에는 적합치 않은 흡사 무대와도 같은 곳이였다. 혹시 우리들은 그저 보통사이이니 누가 봐도 꺼릴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하는 제딴의 약삭바른 타산을 하고 그 장소를 택한 련인들이나 아닌지?

하긴 해볕에 한껏 달아오른 계단가까이에는 유람객들이 있을수 없고 멀리 지하철도쪽에서 나와 공원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계단우의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수가 없는것이였다.

그곳은 라영국과 전영랑이 불과 두달전에 처음으로 사랑을 약속하던 곳이였다.

그때에는 정말 사랑을 속삭이기에는 누가 보면 별다르게 생각할수 있는 으슥진 곳보다도 이런 《개활지대》가 오히려 유리하다고 두사람이 다같이 생각했다.

라영국은 좀 희떠운데가 있었다. 그는 눈아래 보이는 계단을 가리키며 《인생계단》에 대한 이상한 철학을 《강의》했다.

《사람이 한생을 산다는것도 이 계단을 오르는것과 같소. 하나의 계단을 올라서면 새로운 계단을 올라야 하지. 평지란 없소. 아니, 평지를 걸어갈 생각을 한다면 인생의 종착점에는 가닿을수 있어도 인생의 목적에는 도달할수 없는거요. 사람에게는 생의 목적이 있는것이요. 그 목적이란 가까이에 있는것이 아니여서 단번에 오를수는 없는것이지. 한계단 또 한계단 밟아오르는거요.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것도 수행할수 있다고 했소. 그런데 사람마다 다 마지막계단까지 오르는건 아니요. 그건 의지와 신념과 관계되는 문제지. 의지와 신념이 얼마나 강한가에 따라 어떤 사람은 한두개 계단에, 또 어떤 사람은 중간계단에 머물러버리기도 하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한두개 계단을 극복 못하여 마지막계단을 앞에 두고 지쳐 쓰러지기도 하오. 그건 아쉬운 일이지. 나는 말이요, 이 마지막계단까지 오르고말테요.》

처녀의 샘물같이 정갈한 눈이 새물새물 웃었다.

《동지의 그 〈철학〉은 이 계단을 보면서 불쑥 떠오른거예요? 아니면 아름다운 처녀의 마음을 움직일 지레대가 필요해서 일부러 생각해낸거예요?》

《동무가 아름답다? 대학을 졸업했다는 처녀가 하는 말 치고는 좀 경박하구만.》

처녀는 또 웃었다. 이번에는 입을 가리우며 소리내여 웃었다.

《남자들이 그러더구만요. 속엔 아무것도 든것이 없는 남자들이, 처녀의 얼굴만 보고 반해버리는 남자들이 말이예요.》

사실 처녀는 자기 말처럼 아름다왔다. 약간 도드라져나온 하얀 이마며 사색적인 그윽한 눈… 처녀에게서는 신선하면서도 야릇한 향기같은것이 풍기였다. 그것은 고급향수나 화장품향기는 아니였다. 처녀의 체취였다. 총각은 굽실굽실하고 윤기나는 검은머리칼이 반쯤 내리덮인 처녀의 하얀 뒤목을 도적질하듯 슬그머니 바라보다가 눈길을 떼며 히죽이 웃었다.

《나도 그런 사람으로 보오?》

《모르겠어요.》

《이거 너무하구만. 대학을 금방 최우등으로 졸업한 사람을 그렇게밖에 안 보다니!》

《됐어요. 뜻을 세우지 못하는것은 키없는 배나 기수없는 말과 같다고 하더군요. 난 동지가 대학에서 수재로 소문났고 리상이 높다는걸 알아요. 동지와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우리 동무가 그러더구만요. 그런데 동지의 그 마지막계단이라는건 뭔가요? 박사인가요? 원사인가요?》

《박사도 돼야지. 원사도 될수 있소.》

라영국은 처녀를 위해서 기꺼이 박사가 되고 원사가 되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정정했다.

《난 말이요, 박사가 되고 원사가 되여 우리 나라가 강해지는데 기여할 좋은 일을 하자는거요. 세상이 부러워할 거창하고 현대적인 창조물들에 내가 바친 지식이 비껴있을 때 그걸 자랑으로, 긍지로 여기겠소.》

《현란하군요.》

처녀의 나직이 뇌이는 말에서는 야릇한 비난의 색채가 감촉되였다.

무엇이나 지나치게 요란하면 진실감이 없어진다는 소리가 아닌가.

라영국은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정말로 화를 냈다.

《동문 내가 소설책에서 베껴둔 문구나 외운다고 생각하는게 아니요?》

《…》

처녀는 제멋대로 돌아간 자기의 혀를 원망하는듯 얼굴이 빨개서 말이 없었다.

라영국은 정색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화학공장 로동자요. 아버지는 자주 말했소. 이 땅에 무수히 솟구치는 만년대계의 창조물들과 우리 공화국의 상표를 달고 나가는 명제품들 하나하나에는 나라를 받드는 훌륭한 인간들의 진실한 사랑이 깃들어있다. 만약 어느 한 창조물에도 자기의 넋이 깃든게 없다면 우리 사회에서 그 사람은 참 불쌍한 인간이다라고 말이요.》

《동진 참 훌륭한 아버지를 모시고있어요!》

처녀는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감동에 젖어 나직이 부르짖었다.…

그렇게 사랑이 이루어진 두사람사이에 요즘 좀 별난 일이 있었다.

김호성조장의 표현대로 순풍에 닻을 올렸던 사랑의 배가 《암초》를 만난것이였다. 부상인 아버지가 이제 정식 나오게 되는 시험정보과에 떨어지려는 라영국의 결심을 알고 그 일에 몸을 담그면 발전이 없고 더우기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이라는것이 학계의 권위있는 많은 사람들의 리해를 받지 못하는 일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처녀가 깜짝 놀란것이였다. 리해를 받지 못한다고 하는거야 반대한다는 말을 못해서 그러는것이지 뭐겠는가? 더우기 아버지는 교육부문에서 그래도 한다하는 일군인데 아무렴 모르고 말씀하신걸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그 동지는 한생 빛을 못 볼 일을 하게 된다는것이 아닌가!

하여 전영랑은 한창 프로그람개발에 바쁜 애인을 불러냈다.

《대학에서 강좌에 떨어지라고 했다는데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어제 아버지를 만나 우리 관계를 말씀드렸어요.》

《아버지한테 말씀드린건 잘한거요. 아무래도 아시게 될 일인데뭐.》 흔연스레 말하던 라영국이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처녀의 얼굴을 빤히 건너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대학에 떨어지라는건 무슨 소리요? 아버지한테서 말을 들은게 있소?》

전영랑은 한동안 즘즘해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지네가 하는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이라는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교육부문에서 한다하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이라더군요. 난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막연한 일을 위해 동지네 연구조가 모두 집을 떠나 고생한다는게… 그런데다가 아버지가 하는 말이 전국적인 원격시험에로 넘어가는 경우 동지네 연구조는 한생을 그 일에 바쳐야 한다더군요. 별로 빛을 보지 못할 일을… 그러니 동지가 시험정보과에 떨어지려면 애초의 꿈은 포기해야 된다는게 아니예요.》

대학강좌에 떨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하는 말을 무슨 당치않은 소리를 하느냐는듯 귀등으로 흘려보내던 라영국이 처녀의 아버지가 시험연구조의 일을 두고 했다는 말에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단 말이지…》 라영국이 깨끗이 면도를 한 매끈한 턱을 슬슬 문지르며 혼자소리로 뇌이다가 고개를 돌려 처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마!》 총각의 눈이 가까이에서 이글거리자 처녀는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지며 나직이 비명을 질렀다.

라영국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동문 이 라영국이 함께 고생하며 시험프로그람을 개발해오는 동무들을 훌떡 배반하란 말이요? 물론 학계에서 발전하여 박사가 되고 원사가 되는건 이 라영국의 꿈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락을 같이해오는 동지들을 배반할수는 없지 않소. 나 하나의 명예를 위해 그러는줄 우리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소? 동문 말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마오.》

말같지 않다는 말에 처녀는 발끈했다.

《동진 뭐예요?! 제 전망문제를 생각하라는것인데 그게 어디 말같지 않은 소리예요? 누구에게나 발전할 권리는 있는거예요!》

라영국은 삽시에 익은 가재처럼 온통 빨개진 처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실없는 사내처럼 또 싱글거리였다.

그것이 처녀의 약을 부채질했다.

《저를 위해 신중한 말을 하는데 웃기만 한담!》

《동무생각이 틀린다고는 볼수 없소. 하지만 꼭 맞는 말이라고도 할수 없는거요.》

《그건 무슨 말요술을 피우는거예요?》

《요술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거요. 사람은 자기의 권리보다 량심을 앞에 놓아야 한다 그 말이요. 그리고 말이 난김에 하는 소리인데 동무 아버지에 대하여 난 리해할수가 없소. 동무 아버지가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반대하는게 사실이라면 말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라의 교육발전을 두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할 부상동지가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말이요. 제대로 되자면 누구보다 동무 아버지가 우리 일을 지지해서 발벗고 나서야 한단 말이요.》

《동지는 자신의 견해만을 너무 절대화하는게 아니예요?》

《그럴수 있소. 그렇지만 주관이라고 다 그릇된것이라고는 볼수 없소. 그리고 높은 사람이라고 그 견해가 다 정의일수도 없는거요. 그런 즉 내 생각은 이렇소. 이 라영국은 앞으로 동무의 아버지나 동무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수 있소. 그러니 동문 우리 문제를 놓고 후날 후회하지 않게 잘 생각해보고 결심을 해야 할거요.》

첫날에는 그렇게 헤여졌다.

전영랑은 아버지에 대한 라영국의 비난은 기분이 나쁠지언정 참을수 있지만 자기들의 관계를 두고 잘 생각을 해보라느니 어찌라느니 한것은 아무리 삭여버릴래야 언밥을 삼킨듯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말이 쉽사리 나온담! 그게 결별을 선언한것과 다른게 뭐람! 《인생의 계단》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자기만이 꿈이 하늘에 닿은 지성인이고 사랑도 영원히 변함없을것처럼 꿀같은 말을 하더니 그건 다 침발린 소리였나?

전영랑이 며칠을 고민하다가 아무런 전화련락도 없이 라영국이네 연구조가 들어있는 청사정문에 불쑥 나타난것은 그날의 일때문이였다.

처녀는 좋은 감정을 가지고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찾아간것이 아니였다. 싸움닭처럼 부리를 뾰족하게 벼리여가지고 간것이였다. 그런데 영랑이 싸움을 걸어볼 사이도 없이 남자쪽에서 자기는 무척 바쁘다는 말 한마디를 매정하게 쏟아버리고 들어가버렸다. 그게 관계를 영 끊어버리자는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다시는 내 발로 찾아가지 않을테야! 우리 관계는 영원히 끝장이야!

웬걸, 보름도 안되여 그 애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영랑동무, 나요. 지금 어디에 있소?》

《어디에 있건 그건 왜 물어요? 선생님.》

《이거 별나게 그러누만. 갑자기 선생님이라는건 뭐야?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요. 집에 올라와있겠지? 만나자구.》

천연덕스럽기두 하지!

《난 몹시 바쁜 사람이예요!》

그것은 앙갚음이였다. 시험연구조를 찾아갔을 때 매정하게 굴던 그 말에 대한 앙갚음.

라영국이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하하 웃어댔다.

《만나자구, 열시정각에… 우리가 평양에서 처음 만나던 그 자리에서 말이요. 잊지 않았겠지? 그럼.》 그 말을 하기 바쁘게 먼저 전화를 꺼버렸다. 응당 처녀가 응하리라고 생각하는듯…

그렇게 되여 두사람은 여기 《운명의 계단》우에서 다시 만난것이였다. 처녀도 총각도 다시 안 만날듯이 그랬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련인들의 부질없는 변덕에 불과한것이였다.

사실 처녀를 통해 전학선부상이 시험연구조의 일이 성공하여 전국적인 대학입학시험을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체계로 넘어가는 경우에 한생을 빛이 나지 않는 그 일에 바쳐야 한다고 했다는 말에 라영국은 자기의 앞날을 놓고 생각이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였다. 누구에게나 발전할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는 처녀의 말도 그른데가 없는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권리보다 량심을 앞에 놓아야 한다고 라영국이 말한데는 처녀앞에서 사내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희떠운 감정도 작용한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진심도 있었다. 자기 하나의 발전을 위해 집단에서 떨어져나가는것이 함께 위원회에 올라와 반년나마 한가마밥을 먹으며 고심어린 탐구의 나날을 보내는 동료들을 배반하는 량심없는 일로 생각되는것이였다.

그런데 라영국이쪽에서 먼저 오늘 만나자고 전화를 한데는 사랑하면서도 애인을 울려서 보낸 자신에 대한 후회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김광우부국장의 입김이 작용해서였다. 처녀는 그것을 알수 없었다.

바로 어제 시험연구조에 나타났던 부국장은 라영국을 보자 대뜸 애인과의 일이 어떻게 돼가는가고 물었다. 라영국이 지나가는 말처럼 여기고 마치 일이 끝장난것처럼 시들하게 말했더니 뜻밖에도 부국장은 무슨 큰일이나 난것처럼 화를 냈다.

《이보우 라영국동무, 처녀와 사랑을 약속하고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는거요? 무슨 당치않은 소리요? 사랑을 약속한다는게 무슨 철없는 아이들의 놀음놀이인가 하오? 그게 사실이라면 동무문제를 단단히 봐야겠소. 그 처녀는 나도 잘 아는데 인물도 잘났지만 속에 든것이 있고 마음은 더 곱소. 세상처녀들을 다 갖다놔도 그런 보석덩이는 고르지 못해. 래일이 일요일인데 무조건 가서 처녀한테 용서를 빌라구.》…

라영국은 처녀를 만나자 그 말부터 하면서 우리 부국장동지를 어떻게 아는가고 물었다.

처음부터 새파란 인상을 보이며 《부리》로 쪼아댈 구실만 찾던 처녀는 그 소리에 놀라 대뜸 왕사발눈이 되였다.

《어마나! 동진 마치도 이 영랑이 그 부국장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우리사이 관계에 대하여 푼수없이 다 말한것처럼 생각하는게 아니야요? 내가 우리 상급도 아닌 부국장동지를 어떻게 알아요?》

라영국은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그렇다면 이상한데? 동무를 잘 아는것처럼 말하지 않아.》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차대접하느라고 아버지방에 들어갔다가 한번 얼핏 봤던적은 있어요.》

《그-으-래? -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구만.》

《뭐가 이상하다는거예요?》

《부국장동지는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실현하자고 애쓰는 사람인데 동무의 아버지는 그 일을 믿지 못해서 그런다니 말이요. 정말 반대하는건 아니요?》

처녀는 대번에 얼굴이 새파래지며 독을 내뿜었다.

《동진 전번에도 그랬지요? 동지가 우리 아버지를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말해요?》

《아, 됐소됐소, 영랑동무.》 라영국은 항복한다는듯 두손을 번쩍 들어보이며 화해의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에이, 됐소. 그런 말은 그만하자구. 그런데 말이요.》

《뭐예요?》

《동무가 전번에 아버지의 말을 듣고 대학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것은 나의 전망을 생각해서였을거요. 하지만 난 동무가 집단을 선듯 떠날수 없어하는 이 라영국을 리해했으면 하오. 우리 김호성조장동지가 어떤 가정적부담을 안고있는지 아오? 안해없이 앓아누운 가시어머니를 모시고있으면서 집을 떠나 살고있단 말이요.

우리 조의 다른 동지들도 다 그렇게 가정을 떠나살면서 일밖에 모른단 말이요. 그런데다가 부국장동지는 시험연구조에 내려올적마다 우리 일이 진척되지 않는다고 하지. 일이 긴장한것도 사실이요. 그런 형편인데 시험정보과가 나온다 해서 나 하나만 발전하겠다고 훌 빠져나가겠다는건 말하기 바쁜 일이란 말이요.》

전영랑은 실망의 한숨을 폭 내쉬였다.

《그러니 동진 100살을 살아도 여기까지 올라와보지 못하겠군요.》

라영국은 의아해서 처녀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여기까지라는건 무슨 소리요?》

《여기 마지막계단까지 말이지요.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이 자리에 앉아서 동지가 말하지 않았어요? 사람이 한생을 산다는것은 계단을 한계단 한계단 밟아오르는것과 같은거라구요. 어떤 사람은 한두개 계단에 그치고 어떤 사람은 중간에서 주저앉고만다구요. 동진 아마 한계단도 못 오른채 그 자리에서 생을 마치겠지요?》

라영국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면서도 처녀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것만 같아 슬그머니 약이 올랐다.

《이보라구 영랑동무, 우리 시험연구조의 선생들이 지금 어떤 각오를 가지고 개발전투를 하고있는지 아오? 나라의 과학을 저 하늘높이 우뚝 세우는데서 그것을 떠받드는 하나의 조약돌이 되자는거요. 동문 저 거대한 건축물들도 땅속에 묻혀있는 기초우에 서있다는걸 알지?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땅우에 솟아있는 건축물의 웅장미에 감탄하면서도 그 건축물을 땅속에서 말없이 떠받들고있는 기초가 하나하나의 모래알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안하거던.》

《알겠어요, 모래알동지. 하지만 그건 소학생때부터 들어온 〈철학〉이예요. 유치하다고는 볼수 없지만 뻔한〈철학〉! 동진 이제 나한테 모래알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자고 그러겠지요?》

《틀렸소!》

《그럼 뭐예요?》

《우리 사회의 원리에 대하여 말하자는거요. 아니, 발전의 원리이지. 아니, 량심에 관한 문제라고 할수 있소. 김광우부국장동지가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두고 뭐라고 그랬는지 아오? 우리 조국의 꿈을 싣고 미래로 질주하는 급행렬차가 되여야 한다고 했소. 난 그게 마음에 드오. 그 급행렬차에 올랐다가 도중에 내리고마는 락후분자가 될수는 없지 않소.》

라영국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처녀의 작고 보동보동한 고운 손을 급히 자기의 커다란 줌안에 넣으며 싱긋이 웃었다.

《됐어됐어, 동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소. 중요한건 내가 동무를 사랑한다는 그거요. 이젠 유보도에 나가 뽀트나 타자구. 가만… 이거 배가 의견이 있어하누만. 창고가 텅텅 비였는데 주인이란자는 뽀트생각만 한다고 말이요. 어! - 그러고보니 점심때가 다됐는걸. 차라리 식당에 가야겠소. 내가 우리 영랑동무 좋아하는 록두지짐을 사내지.》

《됐어요!》

처녀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하지만 처녀의 호수같은 눈에서는 기쁨이 은은히 빛발쳐나오고있었다. 애인을 만나면 한동안은 이지러진 소리를 하여 전날 《수모》를 당한데 대한 앙갚음을 단단히 하리라던 생각을 처녀는 그만에야 가뭇 잊어버린것이였다.

《오늘은 내가 하자는대로 해야 해요.》 처녀는 명령조로 말하며 애인을 모란봉너머 자기가 잘 아는 조용한 식당으로 안내했다.

두사람은 일부러 맨 구석의 빈 식탁 하나를 차지하고 마주앉았다.

전영랑이 이런데서는 녀자가 나서는것이라면서 책임자인듯 한 녀자를 만나고왔는데 조금후에 물찬 제비같이 쭉 빠진 접대원처녀가 음식을 날라왔다.

라영국이 몰몰 흰김이 피여오르는 자기단지를 내려다보며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이거야 단고기국이 아니요? 동무가 좋아하는 록두지짐을 하자고 했는데…》

《동진 단고기국을 좋아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거야 불공평하지 않소. 동문 록두지짐을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단고기국이 나왔으니 말이요.》

좋아하면서도 처녀생각에 미안해하는 라영국을 보면서 영랑은 고운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담뿍 담았다. 그러고보면 녀자의 행복의 조건이란 요란한데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영국동진 밤낮 콤퓨터앞에 앉아있지 않나요. 영양보충을 하지 않으면 안돼요. 제 말을 명심해야 해요.》

《하하.》

《무슨 생각을 하고 웃어요?》

《무슨 생각? 과연 호텔료리사가 옳긴 옳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나를 비웃는거예요? 대학졸업생이 하늘을 나는 수리개는 못되고 기껏해서 료리사라고?》

그 말에 라영국은 바빠맞았다.

《그런게 아니요. 동문 별나게 오해를 하누만. 이보우 영랑동무, 내가 재미나는 이야기 하나 할가?》

《단고기가 의견있어하겠어요, 음식을 차려놓고 이야기만 한다고요.》

《어, 하긴 그렇겠구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먹구보자구.》

식사를 채 끝내지 못했는데 처녀쪽에서 먼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 무슨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려댔어요?》

《그건 말이요, 사람의 몸안에서 있은 일이요. 말하자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생겼을 때 입이 의견있어했소. 입이 말하기를 〈이거 공평하지 못하구만. 난 말이야, 식사시간이 되면 기껏해서 맛이나 보는데 음식을 씹어놓으면 위가 혼자 다 가져간단 말이야. 위는 참 량심이 없거던. 욕심쟁이야. 〉라고 했지. 그러자 눈과 코와 귀가 한마디씩 했다구. 눈이 〈입은 말도 말라구. 그래도 입은 음식을 씹으면서 맛이라도 보지 않아. 난 늘 사람이 길을 헛갈리지 말고 바로 가라고 앞을 봐주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식사시간이면 눈을 펀히 뜨고 진수성찬을 구경만 해야 하니 이런 기분 나쁜 일이 어디에 또 있겠어. 〉 그러자 코는 또 뭐라고 했는지 알아? 눈은 눈맛이라도 보지만 자기는 고소한 음식냄새만 맡아야 하니 더 죽여준다는거야. 그 말을 듣고있던 귀가 화를 벌컥 냈다구. 〈입이나 눈과 코는 말도 말라구. 나는 말이나 그밖의 온갖 소리를 듣고 주인이 제때에 결심채택을 바로하도록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식사시간이면 맛을 보거나 눈으로 보지도 못하면서 맛있게 먹는 소리나 들어야 하니 더 죽여준단 말이야. 〉하고 말했지.

모두 저마끔 그렇게 한마디씩 하는데 손은 입을 다물고있었지. 그게 이상해서 입이 말했소. 〈이보라구 손, 자네는 왜 한마디도 하지 않나? 〉 그러자 부지런하고 과묵한 손이 말했지. 〈이보라구, 위를 욕하지 말라구. 사람한테는 입이나 눈도 꼭 있어야 하구 코나 귀가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한다고 그러나. 혼자서 묵묵히 음식물을 소화시켜서는 인체의 각 곳에 영양물질을 보내준단 말이야. 그러니 위가 없으면 자네들 입이나 눈과 코와 귀는 제구실을 하지도 못해. 〉 입과 눈과 코와 귀는 그제서야 자기들만 인체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게 아니라는것을 깨닫고 위의 수고를 알게 됐지.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것을 알게 됐는데 말이야. 손이야말로 말은 없지만 그 어떤 보수도 바람이 없이 부지런히 일을 해서 재부를 창조한다는거요. 그러니 결과는 뭐겠어? 》

처녀는 귀염상스럽게 입을 비쭉 내밀어보였다.

《음- 알겠어요. 사람은 명예나 보수같은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에 자기를 바칠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을 하자는거지요?》

《옳소. 그렇단 말이요. 자자, 단고기국이 정말 의견있겠소. 빨리 맛있게 먹구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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