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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영원한 넋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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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868회 작성일 21-09-1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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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은순은 평양역으로 나갔다. 국제렬차로 외국공연을 떠나는 학생소년예술단속에 그가 키운 학생들이 있었던것이다. 그들을 바래운 기쁨을 안고 역밖으로 나서던 은순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계단앞 주차장에 세워진 승용차옆에서 퍽 낯익은 한 녀인이 웬 장령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던것이다. 녀인의 얼굴을 더듬던 은순은 놀랐다. 그는 언젠가 집에 찾아왔던 선희였던것이다.

선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들어가보세요. 오전에 강의가 있다지 않았나요.》

《그래, 그래야 할가부다. …》

장령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엇인가 안심치 않은듯 딸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네 결심을 의심하는건 아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

《아버지…》

선희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있었다.

장령은 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떠나는 너에게 공연한 걱정을 또 한번 해본것 같구나. 하지만 아버지는 널 믿는다. 몸조심해서 가거라.》

장령은 더 긴말없이 승용차에 올랐다.

승용차가 저 멀리 다른 차들에 가리워 더는 보이지 않자 선희는 커다란 가방을 손에 들고 역사쪽으로 돌아섰다.

《선희동무! …》

은순은 반가움을 금치 못하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

흠칫 고개를 들던 선희의 얼굴에도 반가움이 언뜻 실렸다.

《은순동무로구만요!》

은순은 정작 가까이 마주서자 새삼스러운 눈길로 선희의 얼굴을 살피지 않을수 없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얼굴이 상할수 있단 말인가? 초강초강해진 얼굴, 보풀인 입술, 단지 크고 어글어글한 두눈에만 고집스럽다할 강기가 어려있어보일뿐이였다.

은순은 떠오르는 의혹을 누르며 서둘러 물었다.

《언제 평양에 올라왔는가요?》

선희의 얼굴에는 오히려 송구해하는 표정이 어려있었다.

《일주일 되였어요. 참, 은순동무네 집에 들리지 못해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 또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였거던요.》

은순의 눈길은 어망결에 선희의 만삭이 된 몸에 가멎었다.

선희도 그걸 감촉했는지 입귀에 면구스러운 웃음을 그렸다.

《어머니도 집에 왔던김에 평양산원에서 해산할걸 바라지만 그럴 경황이 못되였어요. 해산달이 아직 좀 남아있는데 그냥 무료하게 친정집에 눌러앉아있을수 없지 않아요.》

은순은 무료하다는 선희의 말에 약간 눈길을 들었다.

《하지만 해산할 때 다시 올라오자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임신부에게는 충분히 자기 몸을 돌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선희는 도리여 은순을 안심시키듯 흔연스레 말했다.

《못 올라오지요. 그렇게 작정하고 가는 길이랍니다.》

은순은 더 묻기를 그만두고 그의 수척해진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군인가족생활이란 그런것일가? 임신부에게 무슨 급한 사정이 있을수 있담. 아무렴 지방의 병원이 평양산원만 하랴. 그렇게 내려갈바에야 무엇때문에 평양으로 왔을가?

은순은 제나름의 걱정을 털어버릴수 없어 끝내 한마디 더 했다.

《부대를 떠나올 때 가정에서도 의논이 있었겠는데…》

순간 선희는 언뜻 은순을 마주보았다. 전혀 예견치 못한 관심사였던것 같았다. 질문을 스쳐넘길듯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려 하였지만 그렇게 안되는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은순은 자기를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선희의 표정에는 영문모를 당혹감과 서글픔이 낱낱이 비껴있었던것이다.

선희 역시 그런 옹색감에서 벗어날길 없는듯 침착히 말했다.

《하긴 숨길것도 없지요. 은순동무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까요. …》

선희는 한달전 그답지 않게 이 자리를 힘들어하고있었다. 결혼전 처녀에게 신혼부부의 가정사를 말하기 주저하듯 잠시 침묵하더니 힘없이 입을 열었다.

《남편이 희생되였어요. 그러니 어떻게…》

은순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너무도 짤막한 그 말을 두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자 무슨 말을 했단 말인가?

선희는 거리쪽 어딘가를 바라보며 갈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최전연이 아닌가요. …》

은순은 혼혼히 그 말을 들었다. 어쩌면 이 녀인에게 이런 불행이 차례질수 있단 말인가! … 그러자 한달전 매점앞에서 사과구럭을 사들고 밝게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며 불시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하였다.

제13렬차에 대한 차표를 찍는다는 역방송원의 목소리가 그들에게까지 들려왔다.

선희는 떠날 차비를 하였다.

《은순동무, 우린 또 이렇게 길가에서 만나자 헤여지게 되는군요.

다음기회에 평양으로 올라오면 그땐 잊지 않고 꼭 들리겠어요. 정말이예요.》

은순은 서둘러 손수건으로 눈굽을 훔치고나서 선희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제가… 제가 역홈까지 함께 나가겠습니다.》

선희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은순은 뜻밖에 받은 충격을 진정하지 못한채 선희를 따라 역홈으로 나갔다.

선희도 인차 렬차에 오르기를 주저하고있었다. 서로가 적당한 작별인사말을 찾지 못했다.

은순이 먼저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앞으로 장차 어떻게 할 결심이예요?》

선희의 얼굴에는 모진 슬픔을 이겨낸 녀인의 강의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전 그대루지요. 난 남편이 곁에서 떠났다고 생각지 않아요. 여전히 함께 있다고 생각하며 군인가족으로 살 결심이예요.

부모님들도 그래서 날 평양으로 불렀답니다. 결심을 다시 들어보고 힘도 줄겸… 그리고 난 그 결심이 조금이라도 흔들릴가봐 이렇게 내려가는거구요. 부대에 가면 내 마음은 오히려 더 평온해질거예요.》

은순은 너무도 태연무심한듯 한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나직이 부르짖었다.

《그래서 그 몸으로 내려간단 말인가요? 곁에서 살펴줄 부모님들도 친지들도 없는 그곳에… 정말 부대에 가면 마음이 더 평온해질가요?》

선희의 눈가에는 의외로 벌써 자기가 확신한 그런 평온한 웃음이 떠올라있었다.

《솔직히 물어주니 나도 속을 터놓고싶군요.

난 가장 훌륭한 남자와 살았어요. 그이와 1년남짓한 기간밖에 살지 못했지만 나의 영원한 행복으로 남아있을거예요. 그이는 자기를 생각지 않는 사람이였어요. 가정에서도 중대에서도… 그런 사람이였기에 자기보다 동지들을, 초소를 먼저 생각하고 기꺼이 최후를 마칠수 있었던거예요. 그는 떠나갔지만 부대의 모든 사람들은 잊지 못하고있어요. 그를 생각하며 나를 격려해주고 나를 보며 그를 영원히 추억하고있지요. 그러니 내가 왜 외롭겠어요. 부모님들도 그 어떤 친지들도 대신해줄수 없는 정속에서 난 살아요.

부대에는 내가 보람을 느낄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지금은 오중흡7련대칭호쟁취운동을 하고있는데 그 령역이 하도 넓어 나같은 녀인도 군인들을 도와 자그마한 힘이라도 이바지할수 있어요.

이제 아기가 태여나면 꼭 아버지뒤를 잇게 하겠어요. 총대감으로 억세게 키워 아버지가 섰던 초소에 서게 하겠어요. …》

선희의 그 결심을 부추기듯 출발을 예고하는 기관차의 기적소리가 역구내를 은은하게 울렸다.

역구내방송원이 손님들이 렬차에 오르기를 친절히 권고하고있었다.

선희의 얼굴에는 은연중 종전과 류다른 다정한 웃음이 떠올랐다.

《은순동무, 후날 기회를 보아 오빠네 집에 꼭 와요. 그러면 우리 집에도 초청하지요. 그때는 오늘과 달리 할 이야기도 많을거예요. 꼭 그렇게 하지요?》

은순은 경황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가겠어요, 꼭! …》

선희가 오르자 렬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은순은 렬차를 따라 몇걸음 걷다가 주춤 멈춰섰다. 좀전의 다정했던 웃음이 그대로 실려있는 선희의 모습을 보느라니 다시금 눈물이 솟구쳐 앞을 가려볼수 없었던것이다.

바래우러 나온 사람들이 다 돌아간 역구내에는 은순이만 홀로 남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채 그냥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선희와 자기사이에는 인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것을 절감했던것이다. 418련대에서 돌아선 리유가 결코 정당화될수 없다는것을 깨달았고 그것으로 하여 선희의 모습앞에 비쳐진 자기의 존재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것을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었다.

은순은 비로소 인생에서 단 한번뿐인 처녀시절에 앞으로의 참된 생활을 선택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를 이미 차버린듯 한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것을 후회한들 무슨 필요가 있으랴! …

문뜩 옆에서 역안내원의 조심스럽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렬차는 이미 떠나갔답니다.》

은순은 그제야 당황히 안내원을 알아보고나서 인적없는 역홈을 힘없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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