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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1-9. 브라질 진보계로동자당 룰라대통령 재선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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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342회 작성일 21-09-10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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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 류태영 박사 


□ 브라질 진보계로동자당 룰라대통령 재선성공

 

브라질 최초의 로동자출신 대통령인 루이스 룰라대통령이 2006년 10월 29일에 실시된 대선결선투표에서 60. 79%의 득표률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남아메리카의 좌파 대표주자 우고 챠베스 베네수엘라대통령의 3선재선의 승리는 남아메리카 좌파세력행진의 선두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두번째로 룰라대통령의 재선승리는 사실상 남아메리카에서 반미반제좌파전선이 확대되였고 가속화되고있다는것을 확증하였다.

에꽈도르의 꼬레아대통령, 뻬루의 중도좌파 가르시아대통령,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대통령, 칠레의 중도좌파 바첼레트대통령, 니까라과의 오르떼가대통령, 베네수엘라의 챠베스대통령, 브라질의 룰라대통령, 아르헨띠나 등 12개 나라들이 남아메리카국가공동체(CSN)를 형성하여 상호협력을 다짐함으로써 남아메리카내 좌파의 립지를 더욱 강화하고있다.

지난 반세기동안 남아메리카나라들에게 강요해온 미국의 신자유주의개방정책은 남아메리카의 빈곤을 심화시킬뿐만아니라 빈부의 량극화를 더욱더 심화시켰다. 이로 인하여 사실상 오늘 라틴아메리카에서 친미보수주의를 그냥 지키고있는 나라는 불과 몇개 나라정도에 불과하다.

2008년 3월 8일부터 14일까지 6박7일간 부쉬 미국대통령은 남아메리카 5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부쉬대통령은 순방길에서 시종 남아메리카의 빈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발언을 계속하였다. 남아메리카의 반미감정을 우려하는 부쉬의 초조한 심정이 그대로 로출되였다. 그러면서도 부쉬는 빈곤을 퇴치하기 위하여 미국의 신자유무역정책을 선택하라고 강조하여 극히 모순된 자가당착증세를 여전히 드러냈다.

부쉬대통령의 거짓말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바로 그날 그 현장에서 신문기자들의 보도를 통해서 폭로되였다. 부쉬와 함께 순방길에 나선 관료들마저도 여러 나라 신문기자들과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국이 주장하는 신자유무역은 절대로 남아메리카의 빈곤층에게 리익을 주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베네수엘라 챠베스대통령에게 미국을 공격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줄뿐이며 남아메리카의 나라들이 반미동맹을 맺도록 기회를 줄뿐이였다.》

부쉬대통령이 우호적인 나라라고 생각하는 꼴롬비아, 메히꼬, 과떼말라에서까지도 반미반제시위를 강행하여 부쉬대통령의 체면을 추락시켰다.

꼴롬비아, 메히꼬 등 보수적인 우파나라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반부쉬구호를 웨치면서 시위를 하였는데 부쉬는 꼴롬비아에서 6시간밖에 체류하지 못하였다.

부쉬대통령의 남아메리카 5개국 순방길에서 첫 방문지인 브라질에서는 도착하기도 전에 시위대 6 000여명이 극렬한 반미시위를 벌렸다. 또 브라질 중부지역 고이아니아에서는 농민단체(MST) 수천명이 반미구호를 웨치면서 월마트와 맥도날드에서 시위를 벌렸다. 한편 분노한 시위군중은 미국령사관을 공격하여 건물일부를 파손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브라질에서 부쉬대통령이 통과하는 도로주위건물벽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써있었다. 《나가라, 부쉬!》, 《위선적행동 금메달!》

부쉬대통령은 자기가 집권한 후 16억US$를 남아메리카나라들에게 원조하였다고 력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브라질언론은 즉답으로 론평하였다.

《남아메리카 원조금 16US$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5일간 전쟁을 벌리는 비용이다.》

부쉬대통령은 브라질에서 《에타놀동맹》을 제안하면서 주요의제로 내놓았다. 하지만 부쉬대통령이 《에타놀동맹》을 제안한것은 대체연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동맹을 제안한것이 결코 아니였다. 부쉬는 마음속에 딴 의도를 가지고있었다.

부쉬대통령이 마음속에 가지고있는 의도는 챠베스대통령이 《Oil Money》(석유를 판돈)를 앞세워 남아메리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나아가고있는데 대한 견제를 구상하고있는것이다.

브라질언론들은 부쉬의 주장이나 약속이나 언질들은 모두다 《말잔치》에 불과한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브라질내 국제문제전문가는 2009년에 집권임기가 종료되는 부쉬대통령의 이번 순방은 어차피 손이 묶인 상태에서 이루어진 순방이기때문에 별로 기대할것 없는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룰라대통령은 자기자신이 구두닦이출신이며 가난한 로동자출신이였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친근하게 서민에게 다가서군 하였다. 브라질력사이래 제39대대통령으로 취임한 룰라대통령은 27개 주중에서 찬반성향으로 둘로 나누어진 경제적분석에 의하면 단연코 서민층의 절대적지지를 받고있다.

브라질의 어제와 오늘 500년력사를 3기로 나누어볼수 있다.

1. 뽀르뚜갈식민지시기 1500~1822년

2. 브라질독립시기 1822~1889년

3. 브라질공화국시기 1889~2007년

브라질은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뽀르뚜갈식민지로부터 일어선 나라이다. 브라질은 유럽의 여러 인종과 나라들이 각기 자기 나라의 문화를 가지고 들어와 뽀르뚜갈전통문화와 혼합되여서 차츰 독자적인 브라질문화를 형성하였다. 특히 남부지역에는 이딸리아, 도이췰란드와 프랑스 등 이민자들의 영향이 강하며 문화수준은 복합적이다. 면적은 남아메리카대륙의 47%를 차지하는 광대한 령토이지만 인구는 1억 8 210만명으로서 1㎢당 20명밖에 안된다.

조선전쟁때 미국은 브라질에 파병을 요청하였는데 브라질의 바르가스대통령은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여 브라질군인이 참전하지 않았다.

 

 

      브라질은 원주민 인디안의 땅

 

1500년에 뽀르뚜갈탐험가 Cabral이 목적지 인디아를 향하여 항해하던중 우연히 미지의 땅을 발견하고 상륙한 곳이 바로 오늘의 브라질이였다. 그때 브라질에 살고있던 원주민은 어느때부터 살았으며 또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력사가들은 적어도 3만년은 될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원주민인디안의 수는 370만~500만으로 추산하고있다. 이 수는 남아메리카대륙전체의 수가 아니라 브라질내에서 아마존강변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집중되여 살고있던 원주민의 수를 말하는것이다.

원주민들은 지역마다 여러 부족들로 갈라져서 제각기 자기들 부족의 전통과 특색을 가지고있었으며 대개 4개의 상이한 언어를 사용한것으로 력사가들은 판단한다. 뽀르뚜갈침략자들은 약 100만의 원주민들을 로동노예로 사용하면서 미지의 땅을 개척해나아갔다.

뽀르뚜갈은 에스빠냐와 량국간의 《해외령토분할조약》을 맺었다. 뽀르뚜갈은 자국의 령토를 확보한 후에 귀족들에게 분할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부여하였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브라질에 존재하는 대토지소유제의 기원으로 되였다.

뽀르뚜갈침략자들은 개척사업의 용도에 따라 원주민부족들을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강제로 이동을 시켰는데 이로 인하여 원주민부족들끼리 서로 충돌하고 대항하여 싸움이 벌어지군 하였다. 침략자들은 원주민들이 서로 충돌하고 싸우는것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원주민통솔의 방법으로 삼았다.

뽀르뚜갈은 침략초기부터 다른 나라들보다 독특한 방법으로 침략정책을 시행하였는데 해양무역의 종주국의 역할을 하였다. 목재, 설탕, 포도주, 향료 등을 유럽으로 대량 수출하였다.

1549년에 뽀르뚜갈총독부가 브라질에 신설되였다.

17세기 중엽에 아프리카에서 끌어들인 흑인만으로는 로동력이 부족하게 된 뽀르뚜갈침략자들은 《인디안 사냥부대》를 편성하여 아마존 깊은 밀림지대에 내몰아 인디안들을 대량 붙들어 로동노예로 삼았으며 그 밀림지대를 브라질령토로 편입시켰다. 이 시기에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금광이 발견되였다.

뽀르뚜갈침략자들은 이 시기를 Gold Rush가 시작된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1700년대가 끝나고 1800년대가 시작될무렵에 금광은 쇠퇴해지고 그대신 《커피시대》가 도래하였다. 커피는 1727년부터 재배를 시작하였는데 1850년경에는 브라질이 세계커피생산에서 제1위에 오르게 되였으며 세계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였다.

 

 

      뽀르뚜갈통치에서 독립한 브라질

 

1807년에 프랑스의 나뽈레옹이 뽀르뚜갈을 침략함으로써 뽀르뚜갈의 두 형제인 돈 후안6세와 돔 페드루황태자들이 브라질로 탈출해왔다. 1816년에 브라질에서 돈 후안6세가 왕위에 올라 뽀르뚜갈과 브라질을 하나로 묶어 《련합왕국》을 건설하였다.

1820년에 뽀르뚜갈 본국에서는 호헌혁명이 일어나 프랑스는 물러가고 뽀르뚜갈의 국권을 회복하게 되였다. 국권을 회복한 뽀르뚜갈은 도피중인 황태자 돈 후안을 귀국시켜 뽀르뚜갈의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돈 후안황태자는 뽀르뚜갈 본국의 왕위에 올라 귀환하여 브라질을 떠나갔다. 하지만 동생인 돔 페드루황태자는 여전히 브라질에 남아있게 하였다.

련합왕국이라고 하였던것은 무효가 되였고 브라질은 또다시 예전대로 뽀르뚜갈의 남아메리카식민지로 여전히 남아있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나어린 돔 페드루황태자를 브라질에 그냥 남겨둔 리유는 무엇이였겠는가?

얼마후 브라질에서는 큰 이변이 벌어졌다. 브라질에 혼자 남아있게 하였던 돔 페드루황태자가 1822년에 브라질의 왕이 되였던것이다. 브라질왕이 된 황태자는 《돔 페드루1세》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브라질의 초대황제로 왕위에 올라앉게 된것이다.

뽀르뚜갈의 황태자형제가 모두다 두 나라의 왕위에 올라앉게 된것이다. 이것은 뽀르뚜갈침략자들이 사전에 꾸민 고도의 정략에 의한 계획이였던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후 1824년에 브라질의 새 헌법이 제정되였고 이듬해인 1825년에 브라질은 독립을 선언하였고 뽀르뚜갈은 공식적으로 시인하였다. 독립을 시인하였지만 독립한 브라질의 왕은 여전히 뽀르뚜갈의 황태자였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절대군주적헌법이라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브라질은 1888년에 노예제도페지를 선포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어쩔수 없는 시대적흐름이였다. 하지만 대지주들과 군부는 노예제도페지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품고 1889년에 《공화혁명》이라는 반란을 일으켰다. 대지주들과 군부가 비로소 처음으로 뽀르뚜갈왕정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던것이다. 반란세력은 브라질의 제1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뽀르뚜갈을 배경으로 하여 왕권을 유지해오던 왕가도 이제는 더이상 브라질에서 왕권을 지탱할수 없는 새시대에 직면하게 되였다.

1889년에 드디여 뽀르뚜갈은 브라질과의 400년의 깊은 력사적인연을 깨끗이 청산하고 페드루1세 왕가의 가족들은 모두다 브라질을 떠나 뽀르뚜갈로 영구귀국하였다.

 

 

      브라질의 좌파정권시대 대두

 

1800년대에서 1900년대로 넘어가는 브라질의 사회적현실은 정치적사막에 씨를 뿌리고 래일의 열매를 기대하는 사람과 같은 형편이였다. 400여년의 긴 침략의 력사를 뒤에 남겨놓고 마지못해 떠나간 뽀르뚜갈왕권정치의 낡은 풍토가 그리 쉽게 단시일내에 해방되리라고 기대할수는 없는 일이였다.

왕권정부가 물러간 후에 제1공화국을 선포하기는 하였지만 군부와 소수의 부유층들은 반역적이였고 불법적이였으며 만사에 무질서하게 행동하였다. 1889년에 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데오도로가 취임을 하기는 하였지만 사실은 부자들의 독재를 공식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것뿐이였다.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브라질에 선거제도가 도입되였다. 하지만 2 200만 인구중에서 62만명만이 선거권을 행사할수 있는 부자들과 군인만을 위한 선거제도를 유지하고있었다.

브라질에서 왕정은 늦게나마 없어졌다 할지라도 그후에 진정으로 근로대중을 위한 정권이 들어서서 처음으로 브라질에 진보적성격의 바르가스시대가 열렸다. 바르가스는 력사적으로 쌓이고쌓인 착취와 억압의 정치적제도를 제거하고 새로운 시야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적지평을 열어나아갈것을 꿈꾸었다.

바르가스는 공장에서 로동자의 권리와 리익을 위한 정치력을 강조하였으며 농토를 소유하고있는 세력들의 특권을 제한시키는 정책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에 제헌의회가 신설되였고 1934년에 새 헌법이 제정되였다. 이로 인하여 브라질의 사회주의적민족주의의 색채가 뚜렷하게 밝혀졌으며 그것은 대통령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였다.

바르가스대통령은 국유철강회사를 신설하여 민족공업육성에 주력하였으며 로동조합을 결성하고 8시간로동제를 도입하여 로동자계급을 보호하고 육성하는데 힘썼다. 하지만 400년간 뿌리깊이 박혀져있는 피침략의 잠재의식과 기득권세력들의 거부반응은 말로 형언할수 없이 높은 험산이고 굳은 장벽이였다.

이 험한 산을 넘고 굳은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바르가스대통령은 비상수단으로 강권을 발동하여 이른바 자칭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가 발동하여 국회는 페지되고 정권의 주요직책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게 되였다.

이로 인하여 한편 로동법에 의한 로동자임금보장과 로동법의 도입이 추진되고 외국자본의 엄격한 규제가 시행되였으며 외국어교육에도 엄격한 제한을 두게 되였다. 사회주의적민족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하는 정책이 과감하게 추진되였다.

1955년에 바르가스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하여 쿠비체크가 브라질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기는 하였으나 정세는 불안해졌으며 그 틈을 타고 미국의 독점자본이 브라질로 뚫고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965년에 미국의 지원하에 브렁크장군이 주도한 군부쿠데타로 인하여 브라질은 그동안 쌓아놓은 민족주의적성과는 사라지고 민족주의운동가들에 대한 체포와 고문, 투옥과 추방을 무자비하게 실시한 친미우익군정이 15년동안 계속되였다.

15년 군정의 결과는 무엇인가?

원조와 차관도입으로 외세의존도는 산처럼 높아졌다. 특허권사용료지불형태로 많은 국내자본이 외국으로 류출되여 대외채무만 루적되였다.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여 군부정권의 교체를 요구하는 민원의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브라질의 최초의 좌파사회주의정권의 창시자 바르가스대통령 사망후 21년만에 또다시 브라질에 새봄이 돌아왔다. 1985년에 시르네이대통령이 취임하였다.

시르네이대통령은 군정을 종식시키고 민정을 정착시킴으로써 사회주의정치제도의 시발점을 다시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대통령직선제도입, 공산당합법화, 국가보안법철페, 군의 역할을 국방에만 국한시키는 등 많은 법과 제도를 창설하고 도입하였다.

1994년에 민주주의적민선에 의하여 사회학자이며 사회민주당소속 카르도조후보자가 대통령에 당선되였다. 카르도조대통령은 브라질력사상 최초로 재선에 성공하여 1998년 10월에 제2기 집권을 시작하였으며 2003년에 후임자 룰라대통령에게 브라질통치권을 이양하였다.

 

 

      로동자당 룰라대통령의 제2기 집권

 

브라질에서 사회주의적민족의식이 높아지기 시작한것은 1930년 바르가스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그후 77년이 경과된 2007년에 룰라대통령이 61% 대 35%의 격차로 상대방을 물리치고 재선에 승리하였다.

룰라대통령 당선후 그의 여러 발언중 가장 주목을 끄는 말은 《라틴아메리카통합의 목적은 중국보다 강력한 통합라틴아메리카의 건설이다.》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가슴설레이게 하는 발언인가?

미국은 안중에도 없다고 하는 당당한 룰라대통령의 발언은 베네수엘라대통령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룰라대통령과 챠베스대통령의 주도하에 남아메리카공동시장(메르코수르)이 앞으로 추진될것이며 이것은 유럽련합의회와 같은 영향으로 전세계에 미칠것이다.

룰라ㅡ챠베스단합은 명실공히 남아메리카좌파단합이며 미국에게는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악몽이 되고있다. 이 악몽을 깨쳐보려고 부쉬대통령은 뒤늦은 라틴아메리카순방길에 나서보았지만 그 결과는 가는 곳마다 썰렁한 반응만 맛보고 돌아온것이다.

룰라대통령은 아주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을 토해내는 인물이다. 베네수엘라를 방문하였을 때 《브라질은 베네수엘라가 필요하고 베네수엘라는 브라질이 필요하다.》라고 솔직히 발언하여 청중의 인기를 끌었다. 그의 이 말은 모든것이 다 포함된 뜻깊은 발언이다.

룰라대통령은 지금까지 세계의 관심거리중의 하나인 아마존열대수림보호를 위하여 브라질정부의 절대적인 주권행사를 발휘하였다. 그는 2020년까지 에네르기를 보다 싼값으로 공급하기 위하여 4개의 원자력발전소를 추가건설할것을 발표하였다.

 

 

      룰라대통령은 누구인가?

 

1964년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쿠데타시기에 룰라는 젊은 나이로 반정부좌익로동운동가라는 죄목으로 투옥을 당하였다.

그 당시 쿠데타는 미국이 사전에 면밀히 계획하였으며 6척의 군함이 해상에 대비하고있는 가운데 진행되였다.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 미국의 원조와 자본이 쏟아져들어왔으며 군인들은 미국의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게 되였다.

1964년 쿠데타정권시기에 일시적이나마 친미적로선을 따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였다. 그러나 그후 민정이양후에는 곧 자주로선쪽으로 돌아섰다. 브라질은 백인, 흑인, 인디안의 혼혈인종이 주종을 이루고있다.

룰라대통령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진보적지도자였다. 그는 구두수리공, 금속로동자, 로동자당 당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있는데 《로동자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있는 인물이다. 그는 민주화이후 대통령선거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도전해 3전4기로 정권창출에 성공하였다. 그 전과정에 룰라는 변함없이 로동자와 빈민의 사람이였기때문에 보수진영과 대립적인 관계를 만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브라질은 사회경제적량극화가 심한 나라인데 그동안 치른 선거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가난한자와 부자라는 대결구도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그속에서 탄생한 좌파지도자이다.

룰라대통령은 지금 《브라질정신고양》을 주창하며 사회주의적자주로선을 힘있게 웨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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