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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5. 친미독재, 18년 내전겪은 소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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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099회 작성일 21-11-0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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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 류태영 박사

2.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력사적교훈

 

□ 친미독재, 18년 내전겪은 소말리아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단일민족, 단일언어, 단일문화의 나라이지만 파벌싸움과 국내외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하여 30만명이상이 기아로 사망했고 600만명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하는 수난의 력사로 점철된 나라로 알려져있다.

이 나라는 순니파이슬람교를 신봉하고있으며 유목민이 많기때문에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임에도 불구하고 진학률이 낮다.

단일민족이며 단일언어와 단일문화의 나라인데 어찌하여 독립후 오늘까지 장장 50여년동안 친미독재와 반미내전으로 참혹한 력사를 새겨왔던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두편의 작품을 통해서 찾아보기로 하겠다.

소말리아의 력사영화 《블랙호크 다운》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마크 보우덴이 목숨을 걸고 당시 소말리아전투현장에 뛰여들어가 병사들과의 현장대담을 바탕으로 쓴 원작을 2001년에 제작한 미국영화이다. 제작자 부룩하이머와 스콧감독이 밝힌 《블랙호크 다운》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국은 소말리아북부를 식민지화하고 이딸리아는 소말리아남부를 식민지화하고있었는데 1960년에 독립과 함께 단일국가로 통일되였다. 그러나 랭전시기 미국은 에티오피아와의 전쟁과 파벌싸움을 위하여 소말리아에 무기를 풍부하게 제공하였는데 이는 소말리아인들의 빈곤을 초래하였다.

소말리아의 시아드 바레대통령의 부패하고 억압적인 독재정권은 1991년에 류혈사태로 끝이 났지만 그후 권력을 얻으려는 경쟁자들간의 파벌싸움으로 1991~1993년동안 기근과 파괴가 잇달았다. 1992년 유엔의 개입은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원조를 허락받기 위한 노력이였다.

1993년 10월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쇼에 파견된 유엔평화유지군소속 미특전단이 소말리아의 군벌 모하마드 파라 아이디드대통령의 사령부를 파괴하고 그 측근들을 랍치하기 위하여 작전을 단행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중무장한 수천명의 소말리아군과 전투를 벌리게 된다. 이때 블랙호크 헬기 2대가 격추당해 추락하면서 구출에 나선 미군이 하루밤사이에 18명이 죽고 1천여명이상의 소말리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미군은 이듬해 3월에 소말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였는데 당시 클린톤행정부의 초기대외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것이 《블랙호크 다운》이 말해주는 소말리아독립후의 참혹한 현실이였다.

또 다른 한 작품은 소말리아의 녀류작가 파라(Nuruddin Fara)의 소설 《로출된 바늘》(Naked needle)인데 여기서도 소말리아의 참상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있다.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를 가진 젊은이들의 애달픈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서 소말리아의 정치적혼란과 사회적불안을 문학적으로 보여주고있다.

거의 초월적인 사회와 인간의 뉴대가 불안과 공포에 의하여 단절되여온것을 이데올로기적인 구호로 강압적으로 감추고있는 현실을 적라라하게 파헤치고있다. 특히 소말리아의 독재정권아래에서의 인간의 삶에 대하여 풍부한 상상력과 주목할만 한 류창함과 정확성을 지닌 언어로 소말리아의 참혹한 사회상을 보여주고있다.

그녀는 정치성을 띤 소설때문에 망명을 택할수밖에 없어서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로 떠돌아다니면서 교편생활로 생활을 유지하고있다.

이 두 작품들은 소말리아의 불행한 과거에 대한 륜곽을 설명해주는 작가들의 솜씨일뿐이며 근원적, 력사적고찰로 참고하기는 미약하다.

그러면 력사가 말해주는 소말리아의 비극의 근본원인과 실체는 무엇인가?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그리고 미국 이 세 나라사이에 몇세기동안 일어난 오랜 앙금의 씨앗은 30년의 전쟁과 18년의 내전으로 이어지는데 그 참상의 력사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소말리아독립이전의 침략자들

 

소말리아는 아프리카대륙 동쪽끝에 튀여나온 돌각부분을 차지하며 인디아양을 대면하고있다. 서쪽국경에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하여 케니아, 지부티 그리고 예멘 등이 린접해있다. 종족은 소말리아족이 85%이고 기타 반투족과 아랍족이 약간 있을 정도로 단일민족국가이며 인구는 950만명이다.

소말리아는 단일민족국가로서 고대에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은 력사적기록은 찾아볼수 없다. 다만 10세기무렵부터 아라비아와 교역을 시작했으며 고무와 목재 등을 수출했다. 원래 소말리아인은 유목민이였는데 이슬람교가 그들을 교화시켰다. 16세기경에 소말리아의 아달토후국이 에티오피아를 일시 침공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 소말리아는 아랍인의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으며 그후 뽀르뚜갈도 소말리아에 진출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뽀르뚜갈은 세력확장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딸리아 세 나라는 소말리아에서 식민지성취를 위하여 경쟁적으로 동분서주하였다. 이 나라들은 유럽문명을 무기로 삼아 소말리아의 평화로운 전통문화를 짓밟고 제국주의적식민지시대를 열어나갔다.

이딸리아는 에티오피아를 먼저 보호령으로 삼은 후에 소말리아의 동부와 남부의 해안지대에 대한 침략을 확대했다. 나아가 이딸리아의 침략의 야욕은 모가디쇼, 브라바, 메르카, 바르세이크항 등의 통치권으로 계속 확대되였으며 1889년에 이르러서 소말리아의 남방전역에 대한 식민통치토대를 완성했다.

이렇게 하여 이딸리아는 소말리아식민지개척의 선구자가 되였다.

한편 영국은 1854년에 소말리아북부에서 침략의 첫 발걸음을 떼였다. 영국인 알 버튼이 침략의 선발대로 북부의 하레르고원지대를 통하여 소말리아에 들어가 소말리아북방지역을 식민지개척지역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영국이 1884년에 소말리아의 북방지역을 《소말리아보호령》으로 장악하였다.

프랑스도 1860년대초에 소말리아의 북방지역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영국과 지역분쟁으로 대결하게 되였다. 그러나 1888년에 영국과 프랑스는 《영ㅡ프합의서》를 통해 경계선을 확정하고 서명하여 분쟁을 끝냈지만 사실은 남의 땅을 빼앗아가지고 서로 나누어먹는 합의를 한것이였다.

제2차 세계대전때 이딸리아는 북쪽에 있는 영국의 《소말리아보호령》을 침공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1941년에 이딸리아를 물리치고 영국의 보호령을 되찾았다. 그리고 영국은 이딸리아의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이번에는 남쪽에 있는 이딸리아의 식민지전역을 침공하여 이딸리아의 통치권을 빼앗았으며 1950년까지 소말리아의 북과 남 모든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후 이딸리아는 유엔의 개입으로 1950년에 영국으로부터 다시 잃었던 식민지를 되돌려받고 소말리아 남쪽의 식민지를 조건부로 지배하게 되였다.

한편 소말리아족은 민족자결원칙을 주장하면서 150년동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딸리아에게 주권을 빼앗겼던 력사를 회복할것을 요구하여나섰다.

특히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쇼에서 《소말리아청년동맹》이 소말리아민족의 문화적, 정치적자유를 웨치며 일으킨 운동은 소말리아전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소말리아는 1960년 6월에 북부지역에서 먼저 독립을 선언했으며 유엔관리아래 있던 남쪽의 이딸리아식민지역에서도 한달후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소말리아를 끝까지 붙들고있던 영국과 이딸리아 두 나라는 1960년 7월에 식민지통치시대의 막을 내리게 되였다.

 

 

      소말리아의 독립을 망쳐놓은 미국

 

1960년 7월에 소말리아청년동맹(ARA)의 지도자 셰르마르케가 소말리아의 초대대통령으로 추대되였지만 그는 커다란 난문제에 봉착하게 되였다. 그 문제는 우선 극악에 처한 국가적빈곤문제의 해결이며 둘째는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분파들을 련합하여 소말리아의 련합공화국을 창건하는것이였다.

소말리아는 오래동안 영국, 이딸리아, 프랑스 이 세 나라의 식민치하에 있었기때문에 소말리아의 분파도 자연히 세개의 분파로 분렬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뿐만아니라 에티오피아와 서로 얽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와의 적대적갈등과 국경선분쟁으로 하여 이 나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력사적분쟁지역으로 되고있었다. 케니아도 력시 리해관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있는 실정이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크고 더 근원적인 소말리아의 당면한 문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석유가 있는 곳에는 미국도 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맞고도 틀린 말이다. 《석유가 없는 곳에도 미국은 가있다.》는 말도 사실이기때문이다.

미국은 테로와의 전쟁을 리유삼아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를 침공하도록 개입하고 더 나아가 급기야 직접 소말리아를 공격하는데까지 관여하였다. 다시말하면 미국은 소말리아독립초기부터 간섭하고 지배하는 정책을 들고나왔다.

1969년 10월에 초대대통령 셰르마르케대통령이 암살로 쓰러졌다. 군부가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M.S. 바레군참모장을 의장으로 하는 최고혁명의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국명을 소말리아민주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바레의장은 1970년 10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즉시 사회주의국가를 선언하면서 일당체제를 구축하고 그 이후 1974년에 이전 쏘련과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여 정권을 튼튼히 강화하면서 《대소말리아주의》를 제창하며 나섰다. 바레대통령은 특히 에티오피아경내에 살고있는 소말리아인들의 합법적권리를 주장하면서 1977년 에티오피아의 오간데지역을 침공하여 오간데전쟁을 일으키고 쏘련이 소말리아를 뒤에서 지원해줄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쏘련은 오히려 에티오피아편에 서서 수수방관하였다. 그래서 바레대통령은 실망하고 오간데전쟁은 실패하고말았다.

그후 1978년에 미국이 개입하여 《에티오피아ㅡ소말리아평화협정》을 맺으므로 일단은 바레대통령이 체면을 유지하지만 나중에는 미국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하여 소말리아를 공격케 하였다.

《미국의 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말은 역시 명언이였다.

바레대통령은 오간데전쟁에서 패배하자 1978년에 쏘련과의 우호협력조약을 파기하면서 친미정책으로 선회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 미국의 군사원조를 조건으로 소말리아에 미국의 군사기지사용을 허락하였다. 이때문에 또다시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와의 관계는 적대관계가 되였다. 이 틈바구니에서 미국은 겉과 속이 다른 립장을 취했다.

앞서 지적한 군사적대립관계때문에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는 1982~1983년에 또다시 충돌하게 되고 그 결과 150만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하게 되였다. 그리고 소말리아에서는 1988년 5월에 내전이 발생하여 《소말리아민족운동》과 《통일소말리아회의》가 련합하게 되고 이 세력이 친미정책으로 전향한 바레대통령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투쟁을 벌려 마침내 1991년에 그를 권좌에서 밀어내였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두개의 진영으로 분렬되게 되였다. 통일소말리아회의는 남쪽에서 수도 모가디쇼를 점령하여 혁명정부를 수립했고 소말리아민족운동측은 북부지역에서 독립국가 소말릴란드공화국을 따로 창건했다.

그러나 혼란은 계속되였다.

남쪽 수도 모가디쇼에 창건된 새 정부에 대항해나선 아이디드장군이 주도하는 반대파사이에 내전이 또다시 계속되게 되였다. 결국 아이디드장군파가 승리하여 1991년 11월에 소말리아국민동맹을 결성하고 남쪽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소말리아국민동맹이 결성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은 끊임없이 계속되였다. 정말 끝없는 내전이였다.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아프리카에 보기 드문 최악의 가뭄이 들이닥쳐왔다. 그리하여 소말리아에서는 30만여명이 전쟁과 기근으로 사망하는 비극이 빚어졌다.

그러자 미국은 소말리아를 기근과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명분으로 1992년 12월에 국제련합평화유지군이라는 간판을 들고 소말리아에 미군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평화유지군과 소말리아의 아이디드장군파사이에 오히려 갈등이 생기고 서로 전투가 벌어질뿐 기근과 가난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결국에 평화유지군은 명분을 잃고 1995년에 소말리아에서 철수하고말았다.

그후 1996년 8월 아이디드장군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이디드2세가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 과도정부는 2001년 12월에 모든 정파들이 무장해제 등을 골자로 하는 《평화안》에 합의하고 모든 정파들이 가지고있는 병력을 통합하여 2 100명규모의 소말리아국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4년간 과도련방정부의회형식으로 국가를 통치해나아가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모든 합의는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전국을 지배하는 통일정부는 독립후 오늘까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내부는 분렬과 파벌 및 갈등으로 사분오렬되여있다.

이것을 구실로 미국이 또다시 간섭해나서기 시작하였다. 2004년 9월 30년동안 계속된 분파간 전쟁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킨다는 거대한 《설계대회》가 미국의 주도하에서 이웃나라인 케니아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개최되였다.

4개 분파의 종족을 대표하여 각파에서 각각 61명, 기타 군소집단대표 31명 등 모두 총 275명이 나이로비에서 과도련방회의를 진행하였다. 이 회의의 보이지 않는 조종자는 미국이였다.

그러나 이미 떨어져서 독립해있는 북쪽의 소말릴란드공화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나이로비회의에 초청되지 않았다. 이 세력은 30년동안 남쪽에서 싸우는 분파간 더러운 전쟁에 일체 개입하지 않고 독자의 길을 지켜왔다. 소말릴란드공화국은 독자적으로 카힌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이슬람범련합(UIC)을 정치적모체로 하여 강력한 자주적민족운동단체로서 30여년동안 소리없이 꾸준히 성장해왔다.

나이로비에서 미국의 주도하에 진행된 소말리아과도련방회의는 미국이 원하는대로 결실을 맺었는데 대통령의 선출과 과도정부명칭을 채택하는 등 미국의 각본대로 진행되였다. 대통령에 유스프 아흐메드(Yusuf Ahmed)가 선출되고 나라이름은 《과도련방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라고 정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케니아에서 새로 구성된 과도련방정부가 친미예속적인 정부이며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하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반민족적정치집단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이제부터는 미국의 허락없이는 분파간 싸움도 마음대로 할수 없게 되였다.

한편 북쪽에서 30여년동안 침묵하고있던 소말릴란드공화국은 2006년 6월에 이슬람범련합(UIC)의 체제를 강화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 세력은 드디여 침묵을 깨고 조국해방의 과업을 위해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싸움의 대상은 케니아에서 미국이 조작하여 만들어낸 반민족적친미정치집단인 과도련방정부이며 동시에 미국지배세력이였다.

이슬람범련합(UIC)의 행동개시와 그의 공세는 2006년 8월에 어느새 소말리아남부전역을 휩쓰는 위력을 발휘했다. 다급해진 소말리아과도련방정부와 미국은 12월에 에티오피아군대를 끌어들여와 과도련방정부를 지원하여 위기를 모면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내전에 재빠르게 끼여든데는 세가지 리유가 있다.

하나는 국경선싸움의 앙금이라는 과거의 력사때문이고 둘째는 에티오피아가 그리스도교국가이기때문에 소말리아이슬람교의 세력화를 결사반대하는것이고 셋째는 에티오피아가 미국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얻을수 있는 리득때문이였다.

그때부터 소말리아는 내분과 외세의 간섭때문에 세계적인 전쟁의 란장판이 되고말았다.

미국은 이슬람범련합(UIC)을 알 카에다와 련관이 있다고 억지주장을 하면서 소말리아내전을 《테로와의 전쟁》으로 확대해석하면서 소말리아내전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던중 미국은 2007년 8월에 이들에게 《화해회담》을 제안했지만 이슬람범련합은 완강히 거절하였다.

2008년 6월에 미국은 이슬람범련합의 온건파에게 접근하여 휴전을 끈질기게 제안했다. 하지만 UIC의 온건파는 미국에게 《에티오피아를 철수시킨다면 협상에 응하겠다.》라고 오히려 더 강경히 맞서나왔다.

한편 에티오피아총리는 미국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의 순진한 사람들에게 유엔이 금지하는 화학무기를 사용하고도 그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야비한짓을 하고있다. 우리 에티오피아군은 절대로 그런 위험한 화학무기를 소말리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반발하면서 《래일이라도 소말리아에서 철수하겠다.》라고 미국을 압박해나섰다.

한 언론은 소말리아내전의 참상에 대하여 이렇게 보도했다.

《미국CIA의 지원을 받는 소말리아과도정부군(TFG)은 악명높은 폭군이며 순진한 사람들에게 폭력, 탈취, 강간 그리고 살해 등을 제멋대로 20여년동안 자행해왔는데 아무도 저지할 힘을 가지고있지 못하다. 온 나라는 뒤죽박죽되였고 종족간의 분쟁만 점점 더 악화되고있다. 여기에 에티오피아군까지 합세하게 된것은 2006년 12월에 부쉬대통령의 특별조치에 의한것이다. 부쉬대통령은 UIC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소말리아에 평화를 회복할 계획이라고 말하고있지만 미국은 오히려 소말리아의 평화를 파괴하고있다.》

 

 

      소말리아해적들의 이중대리전

 

1977년과 1978년에 미국은 소말리아를 지원했다. 그러던 미국은 자국의 리익계산에 따라서 돌변하여 이번에는 에티오피아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소말리아의 자주, 자립, 민주세력을 《반군》이니, 《좌경》이니 하는 명분을 내세워 침공을 감행하고있다. 력사적으로 보면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는 미국의 리익을 위하여 《이중대리전》을 치르고있는셈이다.

그러면 여기서 일단 소말리아에서는 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적단이 란립하는지 잠시 살펴보자.

그 발생리유는 매우 간단하다. 30년전쟁과 18년내전때문에 생겨난 100만명이상의 난민을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니 이들은 바다의 떠돌이인생이 될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난 1991년 소말리아가 내전에 휩싸이면서 국가의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되자 자연히 해적들이 발호하기 시작했으며 자동화된 무기로 무장까지 하고 생존을 위해 린근해역을 통과하는 선박들을 공격하고있는것이다.

미국의 《크리스챤 싸이언스 모니터》는 최근 소말리아해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소말리아의 젊은이들에게 해적이 되는것말고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3년전에 100여명이던 해적은 1 000명으로 늘어났으며 그 수는 날마다 늘어나고있다.》

하지만 소말리아해적의 수를 정확히 파악한 나라는 아무도 없다.

《올 아프리카 뉴스》는 《소말리아사람들은 나가고 무기는 들어오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소말리아분쟁지역에서 무기를 원하면 2주안에 무기가 배달되는데 해적들은 무기를 예멘 등 여러곳에서 50US$에 구입하여 230US$에 판매하고있다고 지적했다.

《나이로비 로이터》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에 소말리아해적들이 각국 선박을 랍치해서 벌어들인 액수는 1 800만~3 000만US$라고 한다. 올해에 들어와 지금까지 소말리아해역의 해상에서 30척이상의 선박들이 해적들에게 랍치되였다. 해적들은 선박 한척당 50만US$에서 200만US$까지 받는것으로 알려져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신문들이 소말리아해역에서 일어나는 선박랍치사건보도로 지면을 도배질을 하고있는 형편이다. 그 많은 기사들중에서 주요한 몇개의 제목만 뽑아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그리스화물선과 선원 19명이 랍치됐으며 이달 들어 세번째 랍치사건이 발생했다.

* 《한국》해양수산부 발표문 《소말리아해적 조심하세요》에 의하면 2007년도 해적랍치사건 263건(2006년보다 10% 증가)

* 우크라이나선박이 로씨야 Tㅡ72땅크 33대와 로케트추진탄환을 싣고가다가 소말리아해적에게 랍치되였다. 몸값 2 000만US$에 교섭중이다.

* 프랑스는 5개월만에 두번째로 발생한 자국인을 랍치한 소말리아해적을 공격하여 구출에 성공했다.

* 남《한》어선 《동원628》호가 해적에게 랍치되여 선원 8명이 19일동안 잡혀있는데 《한국》은 미국산 소고기문제에만 온통 관심을 돌리고 언론들은 랍치된 선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랍치자가족들은 하소연했다.

* 남《한》의 마부노선 1, 2호가 랍치되여 174일간 억류, 동물처럼 취급당하고있는데 몸값협상때문에 사경에 처해있다.

* 일본선박《골든 노리》호가 선원 23명과 4만t의 화물을 싣고가다가 해적에게 랍치되였다고 보도되였다.

 

이상의 짧은 기사들을 통하여 소말리아해적문제는 단순한 해적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관련된 국제문제임을 분명히 확인할수 있다.

소말리아ㅡ에티오피아전쟁도 소말리아 18년 내전도 그리고 소말리아해적의 운명도 모두 미국의 리익을 위하여 렬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대리전을 치르고있는것이다.

 

 

      미국의 진지한 자성을 바란다

 

세계반전평화운동가들이 이라크전쟁에 대하여 《수렁에 빠졌다.》라고 말하듯이 미국은 소말리아전쟁에 있어서도 역시 《수렁》에 빠져있는 실정이다.

아흐메드 소말리아과도정부대통령은 《이제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해적들과 싸우고싶다.》라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해적을 만들어낸 장본인의 힘을 빌어 해적과 싸우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것 역시 미국의 작간이다. 미국은 《우리는 신의 자식들이고》 테로리스트들은 《악마의 무리들이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오늘 국제사회에서 미국을 《신의 자식》으로 보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미국은 세계인구의 5%에 불과하지만 세계자원의 25%이상을 소비하면서 엄청난 온실가스를 배출하여 지구환경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고있는 국가이다.

미국때문에 그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기근에 빠져있는가!

미국이 지금까지 세계에서 일으킨 전쟁회수는 백여회가 넘는것으로 밝혀지고있다.

이들은 처음 아메리카대륙을 강점하면서 숱한 인디안들을 학살했다. 1636년의 인디안대학살을 비롯하여 50만명의 필리핀인대학살, 메히꼬침략대학살, 과떼말라학살, 도미니까공화국침공때의 학살, 빠나마와 이라크침략만행 등을 포함하여 미국지배세력이 전개한 학살 및 침략행위는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고도 잔인하다.

그리고 1991년부터 오늘까지 소말리아침략은 모두다 무단침략행위들이다.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신임 포터 고스국장은 취임 1주년 기념연설에서 직원들에게 말하기를 《미국은 앞으로 세계정보확보를 위해서 상상 못할 지역까지 전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미국정보요원을 파송시키겠다.》고 언명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미국에게 필요한것은 〈민주냐 독재냐〉가 아니라 〈친미냐 반미냐〉가 더 중요하기때문에 여기에 초점의 자대를 두고 정보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력설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겉으로는 인권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인권과는 거리가 멀다. 민주적절차에 의하여 수립된 정권이라도 미국의 필요에 따라서 시위나 군사작전 또는 암살 등의 방법으로 그 나라의 정권을 전복시킨다. 미국 MIT대학의 존 터몬교수는 미국의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미국의 그리스도교복음주의적 새로운 형태의 식민침략이다.》라고 규정한다. 사실 존 터몬교수의 규정대로 오늘 남《한》교회는 비도덕적이며 비리성적열성으로 무장한 복음주의자들이 마구잡이로 나서서 인종차별문제나 사회정의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현지의 토착종교와 사회제도를 무조건 공격하면서 미국찬양과 강자론리의 호전성만 드러내고있다.

미국의 량심을 대표하는 진보적사회학자 하워드 진교수는 말하기를 《미국을 깡패국가라고 인식한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점차 많아지고있다. 나는 우리가 강자의 오만에서 벗어나 우리스스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것이야말로 국가에 진정으로 봉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침략을 일삼아온 미국의 지배세력, 이 양키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 민족을 침략한 일제를 가쯔라ㅡ타프트밀약으로 뒤에서 사주한 미국지배세력, 그러고서도 우리 민족을 분단한 미국지배세력, 오늘에 와서도 독도의 령유권이 일본에 있다고 뒤에서 두둔하는 미국지배세력, 조선전쟁을 경험하고서도 또다시 《한》미군사훈련을 벌리며 조선반도에서 제2의 조선전쟁을 추진하고있는 미국지배세력, 조선전쟁을 경험하고서도 또다시 《한》미군사훈련을 벌리며 조선반도에서 제2의 조선전쟁을 추진하고있는 미국지배세력.

이 세력은 지구촌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잔인한 침략전쟁을 일으켜 작은 나라들을 수도 없이 괴롭혀왔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소말리아도 그중의 하나이다. 소말리아의 발자취와 그 처지를 통해서도 우리 민족이 하루속히 분렬을 종식하고 통일조국을 이룩하기를 간절히 호소한다. 그리고 이제 미국지배세력도 정신차리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로마제국의 멸망과 같은 운명을 면치 못할것이라는 력사적사실을 진지하게 돌이켜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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