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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3. 자주국가로 방향전환하는 나이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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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468회 작성일 21-10-29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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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력사적교훈

 

□ 자주국가로 방향전환하는 나이제리아

 

검은 대륙의 나이제리아는 10대 석유산유국에 속하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뽀르뚜갈, 영국, 미국 등 제국주의나라들에 의해 시달려온 나라로서 캘리포니어땅보다 3배가량 큰 나라이며 인구도 1억 4 000만명이나 된다. 이 나라는 최근에 와서 북부조국의 선군정치에 큰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인다. 강대국들이 주목하는 조건에서도 나이제리아는 조선과 밀접한 교류를 진행하고있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있다. 이 나라에 대해 알아본것을 여기에 발표한다.

나이제리아의 작가인 친와 아체베는 1958년에 나이제리아에 대한 소설을 출판하여 아프리카뿐만아니라 서방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소설제목은 《모든것은 무너진다》(Things Fall Apart)이다.

서방강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나이제리아사회는 물론 나라전체가 총체적으로 무너졌다고 그는 주장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누오이라는 한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있다. 주인공 누오이는 나이제리아의 전통적인 부족중심의 사회에서 련일 벌어지고있는 사회적부조리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고민한다.

동리에서 비교적 존경을 받고있는 아버지가 어느날 다른 부족과 싸우는 과정에 보여준 상상밖의 잔인한 장면을 목격하고 누오이는 그만 정든 고향동리를 등지고 멀리 떠나 낯선 타향에서 끝없는 방랑생활을 한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옛날 고향친구가 전해주는 고향의 발전된 모습을 상상하면서 누오이는 고향동리로 돌아간다. 고향에 돌아와보니 옛날 아버지가 동리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그런 시대와는 딴판이다. 누구 하나 돌아왔다고 반겨주는 이웃은 찾아볼수 없다. 고향은 많이 변했다. 교회가 들어서고 작은 동리사무소도 있고 그리고 학교와 병원도 들어서있다. 석유를 생산하는 돈이 동리로 흘러들어오기도 했다. 모든것이 변하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하여 누오이에게는 생소한 분위기가 된것이다. 누오이는 고독하고 격분한다. 이런 소외감이 그를 슬프게 만들었고 분에 못이겨 동리관리인을 죽이고 자기자신은 자살을 하고만다.

비극적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비굴하지 않은 나이제리아인의 꿈과 용기를 보여준다. 침략자, 영국의 억압에 대한 분노와 그리고 절대로 굴복하지 아니한다는 강직함을 보여준것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영국이 나이제리아를 식민지화하고 지배하고있는 현실에 대하여 분개하고 규탄하고있기는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비관하고 체념하는 심리를 토로한 면도 있다.

어쨌든 이 작가는 나이제리아인의 순수하고 참된 면을 그리고 인간적인 내면의 세계를 파헤쳐 알리는데 크게 공헌한것이다.

나이제리아는 미국 캘리포니어의 3배가 넘는 크기의 국토와 인구 1억 4 000만명을 가지고있는 큰 나라이다. 하지만 17세기부터 시작된 뽀르뚜갈과 영국의 침략이 400년동안 계속되여오다가 1960년 10월에 영국의 한 련방일원으로 되였다.

그렇지만 영국은 절대로 나이제리아를 포기하지 않고 군정을 세워 국가권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1999년까지 38년동안 식민지적지배를 계속해왔다. 《고난의 땅은 거룩한 땅이다.》라고 력사가 말한다면 이 말은 나이제리아에게도 가히 해당되는 말이다. 가혹한 침략자들이 모든 권리를 다 빼앗아간다 해도 《희망을 낳는 자유》마저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실날같은 《희망》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희망출생의 충격》은 세계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다. 1986년에 나이제리아가 낳은 노벨문학상수상자 윌레 소잉카가 절망의 벽을 깨고 《희망의 자유》를 몸부림치면서 출생시켜 세계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노벨문학수상자 윌레 소잉카

 

노벨문학수상자 윌레 소잉카는 그의 작품 《그대는 새벽에 떠나야 한다》를 발표하여 《암흑의 나라》, 나이제리아의 어제와 오늘을 말한다.

소잉카는 나이제리아의 불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이제리아는 출발부터 잘못되였다. 우리는 독립이후 저들이(영국인들이) 우리에게 행한 잘못된 민주주의의 장난을 가지고 무엇인가 만들어보려고 해왔다.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가 겪었던 비효률적인 운영은 물론 나이제리아특권의 책임이다. 그러나 식민지지배자들이 우리 민주주의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영국식민지정부가 독립당시 국가권력이 례컨대 나이제리아의 가장 부적절한 세력, 군부에게 가도록 진실을 외곡시켰다.》

소잉카의 작품 《그대는 새벽에 떠나야 한다》는 민족정신의 서사시이며 나이제리아력사의 요약이다. 소잉카는 단순히 문학가로 그친것이 아니라 나이제리아의 독재와 쿠데타에 저항한 문학가이며 영국의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나이제리아의 민족적사색을 투영시켰다.

영국은 나이제리아를 식민통치하면서 어떤 정책을 썼던가?

영국은 이른바 《간접통치》방법을 활용하여 나이제리아의 종래 각개 부족들의 내부분쟁과 지배체제를 보존시키면서 오히려 분렬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와 같은 전통이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면서 부족들이 저마다 영국에게는 절대복종을 하지만 부족끼리는 치렬한 대립과 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하여 나이제리아는 오늘날에도 부족마다 다양한 전통문화를 경쟁적으로 주장하고있다. 나이제리아에서 부족간의 대립이 엄존하는 사회구조를 가지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특히 북부는 이슬람교도가 전체 인구의 50%를 차지하고있으며 경제력이 우세하다. 남부는 그리스도교가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하고있으며 서방식근대화가 북부보다는 앞서있기는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빈곤하다. 이런 상황하에서 끝을 모르는 부족분쟁과 종교분쟁은 나이제리아의 《불치의 암》으로 되고있다.

부쉬대통령은 2003년 7월에 집권최초의 첫 아프리카려행으로 나이제리아방문길에 나섰다. 나이제리아의 기근을 보고 등을 돌리지 않을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사실은 나이제리아의 《검은 황금》, 석유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방문이였다.

부쉬의 나이제리아방문에 대하여 언론들은 일제히 혹독한 비평을 발표했다.

《부쉬는 나이제리아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대해서는 일체 못본척하면서 다만 나이제리아의 거대한 석유매장량에만 관심이 있다.》

또 부쉬가 나이제리아를 방문하고있는 거의 같은 시일에 부쉬에게 망신스러운 소식이 뉴욕에서 대서특필로 보도되였다.

월 스트리트져널이 《딕 체이니부대통령과 관련있는 미국의 에네르기기업 헬리 버튼의 엔지니어링 및 건설담당지사가 나이제리아세무당국에 세금감면을 위하여 240만US$를 뢰물로 제공했다.》고 보도했던것이다.

부쉬대통령과 나이제리아대통령 두사람은 이 거액의 뢰물을 주고받은데 대하여 입을 다물고있었다. 미국이 지배하고있는 정권하에서는 석유자원은 혜택이 아니라 《비극의 씨앗》이 되고있다. 고유가로 나이제리아에 딸라가 쏟아져들어오는것 같기는 하지만 수입의 혜택은 실제로 소수의 집권층에게만 돌아가고있다.

나이제리아는 하루 200만bb1의 원유를 생산하고있으며 현재가치로 계산을 한다면 지금까지 수익금이 1조 2 000억US$가 될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외국의 독점기업들이 주관하는 무질서한 관리체제와 불공정한 배당으로 인하여 나이제리아는 고작 매년 40억US$규모의 석유수익에 의존하고있다.

만일 외국석유자본들이 끝끝내 불공정한 석유리익배당을 시정하지 않는다면 나이제리아사람들은 노예무역의 력사까지 거슬러올라가 서방의 잔악한 침략의 력사적앙금을 들춰내야만 할것이다.

 

 

      부족싸움과 종교싸움의 핵심

 

끝을 모르는 나이제리아의 부족싸움과 종교싸움의 핵심은 또 어디에 있는가?

석유수익을 어떻게 공정하게 배분할것인가 하는 문제에 싸움의 핵심이 있다. 석유유전이 있는 남쪽 원주민마을에 외국인들이 와서 석유를 펑펑 퍼내고있는데도 그 마을의 원주민들의 생활은 오히려 점점 더 어려워지고있다.

나이제리아의 서민층이 당하는 고난중의 하나는 렬악한 전기사정이다. 가난한 서민들은 항상 정전에 대비하여 초를 준비하는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이제리아의 가난한 집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한다.

《야들아! 천국에는 전기가 안끊긴단다.》

나이제리아의 북쪽 라고스에 살고있는 부유층은 해빛보다 더 밝은 전기불을 켜놓고 샴팡을 즐기고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빈곤층은 석유생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암흑속에 살고있다.

석유의 수익분배를 많이 받는 지역, 적게 받는 지역, 또는 전혀 받지 못하는 지역들사이에서 분쟁과 폭동이 계속 일어나고있는것이다. 시민무장단체들은 외국인석유기술자들을 무차별랍치하여 몸값을 요구하고있다.

2007년 1~7월사이에 100여명의 외국인들이 몸값을 노린 현지무장그룹에 피랍되였으며 그중에 《한국》인도 몇명 포함되여있었다. 그래서 나이제리아의 석유는 《불행의 씨앗》이 되고있는것이다.

 

 

      나이제리아, 그 악몽의 시작

 

나이제리아의 악몽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였던가?

대다수의 아프리카나라들의 악몽은 유럽의 백인들이 침략을 시작할 때부터라고 대답을 하면 틀림이 없다. 물론 침략의 시기와 방법에 있어서는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을수 있다.

나이제리아라는 나라의 이름은 영국인들이 《니제르강이 있는 땅》이라 하여 저들이 부르기 편리하게 붙인 나라이름이 되였다.

영국인들이 처음 나이제리아에 오기 전에 이 땅에는 솜씨좋은 녹(Nok)부족을 비롯하여 여러 부족들이 오래동안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제리아의 초기력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것이 별로 없다고 력사가들은 말한다. 11세기의것으로 보이는 축조된 성벽의 흔적을 보고 부족왕국이나 부족종교가 있었을것으로 판단한다. 13세기에 이슬람교도가 북부에 들어와 주민들사이에 침투하여 무역통로를 장악하고있었다.

15세기에 들어서서 뽀르뚜갈이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19세기까지 나이제리아는 이들에 종속되여 살았다. 17세기에는 영국도 이곳에 끼여들어 노예무역에 한몫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노예무역이 불법화되자 영국은 야자기름무역에 주력하였다.

그후 영국은 나이제리아에서 광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자연환경을 마구 파괴하는 원죄를 저질렀으며 농산물생산을 감소시켜 그때 벌써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하도록 하여 혹심한 식량부족사태를 불러왔다.

18세기말에 북쪽에 칼리파데(Caliphate)이슬람국이 창설되여 남쪽의 여러 부족들과 분리되였는데 그때부터 시작된 《분리의 뿌리》는 근절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쪽과 북쪽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있다.

영국은 분리된 남부지역을 관리하기 위하여 부족을 총괄하는 《조작된 추장》을 임명하여 내세우는 묘안을 고안해내였다. 하지만 영국의 묘안은 동그란 구멍에 사각못을 박는 격이 되여 오히려 부족들간에 시기와 반목만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고말았다.

영국은 1827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 《왕립 니제르회사》라고 불렀고 1861년에 노예무역때에 기지로 사용했던 《라고스》를 다시 점령하고 직할식민지로 만들었다. 그후 영국은 계속하여 니제르강을 중심하여 모든 부족의 족장들과 협약을 맺고 경쟁자 프랑스를 물리치고 그리고 잡다한 모든 영국계무역회사들을 하나로 통합한 후 1885년에 니제르강ㅡ베누에강일대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1914년 1월부터 영국은 《보호령》이라는 거치장스러운 명칭을 아예 떼버리고 영국정부가 북과 남 모든 지역을 직접 통치지배하는 《나이제리아식민지》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해방된것처럼 아프리카에서도 민족주의운동이 온 지역에 확산되고있었다. 특히 1960년을 아프리카의 《해방의 해》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17개국이 한해에 독립을 쟁취했다.

나이제리아도 1960년에 독립을 선포하기는 했지만 독립국을 건설해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영국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역할만 했다. 북과 남사이의 뿌리깊은 분쟁과 지역간의 적대감은 독립국가를 새로 건설해나아가는 과정에 큰 장애물로 되였다.

그래서 영국은 1963년에 나이제리아를 4개 주로 나누어 《영련방공화국》의 중앙정부정권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나이제리아련방정부는 북부를 중심으로 분파적정권을 창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 출범한 련방정부에 대하여 남쪽의 대다수인 그리스도교인들은 분노와 허탈감에 빠지였고 이것이 나이제리아의 불안의 요소가 되고말았다. 1966년 5월에 남쪽에서 이보족출신의 군장성 이론시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 련방정부의 총리를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들이 죽었다. 쿠데타정권은 불공정한 련방정권을 페지하고 새로운 중앙집권제를 새로 세울것을 주장했다.

쿠데타를 주동한 이론시장군의 배후에는 절대다수인 그리스도교의 지원이 있었다. 그렇지만 쿠데타를 성공시켰다고 생각하던 이론시장군은 두달만에 암살되였다. 이것은 북부군벌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알려져있다.

1966년 7월에 북쪽의 군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론시장군이 암살된 후 또다시 북부의 이슬람교를 중심한 련방정부가 수립되였다. 북부의 쿠데타를 주동한 고원중령은 정권을 장악하고 정부를 재구성하였으며 새로운 헌법을 제안했다. 고원군사정권이 새로운 헌법을 제시하는데 반대하여 남쪽에서는 오주쿠대령을 수반으로 하여 련방정부에서 탈퇴한다고 선포했다. 그 이듬해인 1967년 5월에 오주쿠대령을 중심으로 비아프라공화국이 창설되여 독립을 선포하였다. 오주쿠대령은 독립을 선포할뿐만아니라 남부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리권도 독점할 의도를 가지고있었다.

한편 고원정권은 비아프라공화국의 창건을 근본적으로 분쇄하기 위하여 곧 전쟁을 선포했다. 이 전쟁을 력사에서는 《비아프라내전》이라고 부른다.

비아프라내전은 2년 6개월동안 계속되다가 1970년 1월에 끝났지만 이 내전으로 인해 250만명의 나이제리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남부의 그리스도교인들이 바라던 비아프라독립의 꿈은 물거품으로 사라지고말았다.

1975년에 고원군사정권이 또 다른 쿠데타에 인하여 실각되였다.

그후 1976년 2월에 오바산조장군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오바산조는 3년후에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문민정부의 등장을 주장해나섰다.

1979년 8월에 오바산조는 민간인 샤가리를 추천하여 후임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도록 했다. 물론 민주주의선거에 의한 대통령은 아니였지만 군인이 아닌 민간인대통령이 처음으로 기록되였다.

민간인대통령은 오래가지 못하고 1983년과 1985년 그리고 1993년 세차례에 걸쳐 군사쿠데타가 련이어 일어났다. 그러다가 군사정권의 수반인 아바차가 1998년에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고 나이제리아는 독립후 39년만인 1999년 2월에 3개의 민간정당들이 참가하는 민주주의적선거가 실시되게 되였다.

그 결과로 오바산조가 나이제리아문민정부 초대대통령으로 당선되여 나이제리아독립후 력사상 처음으로 문민통치시대가 전개되였다.

돌이켜보면 1960년 독립후 39년동안의 쿠데타군정통치는 무법정국과 부정부패속에서 권력싸움으로 일관해왔다. 나이제리아는 석유를 탐내여 몰려드는 외국자본들의 소굴이 되고말았다.

군정통치자들의 무질서한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석유수출에도 불구하고 나이제리아는 막대한 외국부채에 빠져있다.

 

 

      문민정부의 등장

 

1999년에 있은 대통령선거에서 한때 정치범으로 투옥되였던 군인출신의 올루세군 오바산조(Olusegun Obasanjo)가 61. 9%의 득표로 당선되여 력사상 최초로 《인민민주당》(PDP)이 집권하는 문민정권시대의 문이 열리였다.

오바산조대통령은 남부의 그리스도교문화권의 배경을 기초로 하여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였으며 대통령자신이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교신자》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는 능력있는 종교인정치가로서 뿌리깊은 종교간의 갈등과 불화를 능히 해결할것으로 기대되였다.

전기문제만 놓고보아도 생산과 관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종전의 3 000MW에서 1 000MW로 떨어져 남쪽의 빈곤층 서민지역의 전기사정은 최악의 상태였다. 게다가 수도물의 안전과 의료시설 같은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바산조대통령은 집권초기에 종교분쟁과 지역분쟁 그리고 부패와 빈곤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모두다 뒤로 미루어두고 국제관계개선문제를 우선 옳바로 풀어나아가는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석유산업개방과 서방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전심했다. 그는 아직 미개발석유의 대량매장지인 델타를 적극 개발하여 아프리카 최대의 산유국으로 떠올려 세계 6위의 석유수출국으로 만드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오바산조대통령은 2002년에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강도높은 강요에 못이겨 마지못해 구조개혁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년간 7%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문민정부》라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데 만족하면서 자원외교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오바산조대통령은 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내부의 갈등이 점점 더 심화되고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하루속히 내부의 갈등을 해소시켜야 하겠는데 이 점에서 실패하였다. 그는 남부의 그리스도교문화권을 배경으로 대통령이 되였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그리스도교인들의 밀집지역이며 석유대량생산지역인 니제르와 델타주민들이 석유리익의 환수를 요구하고있는데 대하여 반응이 전혀 없었다. 이때문에 석유대량생산지역의 주민들은 무장투쟁을 벌리면서 외국계산유시설들을 공격할뿐만아니라 외국인석유기술자들을 랍치하면서 몸값을 요구하면서 정치적협상도 시도했다.

1999년 오바산조대통령취임후 량종교간의 분쟁으로 1만명이상이 죽는 사태들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였다. 그는 결국 2004년 5월 18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간 분쟁으로 류혈폭력사건이 계속하여 발생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오바산조대통령은 방송망을 통해 《폭력사태는 법과 질서에 대한 위협이며 폭력이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심각한 조치가 필요하다.》라고 경고했다.

나이제리아의 북부는 자원이 없는 지역이지만 인구가 많고 이슬람권이며 정치적중심지인것으로 하여 경제적혜택을 많이 받고있다. 이에 반하여 남부는 력사적으로 그리스도교권이며 정치적으로 항상 소외된 지역이다. 비록 지하자원이 무진장하지만 지금까지 석유수익의 옳바른 배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전기와 물과 의료시설이 전무한 상태가 계속되여왔다.

오바산조대통령이 비록 문민정권을 창출하여 경제외교에 성공했다 할지라도 남과 북의 빈부의 격차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과 북의 량편으로부터 모두 다같이 배격받는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말았다. 특히 그리스도교무장세력은 홍수림, 습지의 깊은곳에 근거지를 두고있으며 또 많은 무기를 보유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정규군이 쉽게 접근할수 없다. 이와 같은 악조건과 무수한 사회적난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2003년 4월 19일에 재선에 출마한 오바산조대통령은 19명의 후보자들을 제치고 재선에 승리함으로써 정치권력을 계속 장악하게 되였다.

AP통신은 오바산조대통령의 재선승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론평하였다.

《여러 지역에서 종교간, 부족간 류혈사태가 벌어졌으며 이와 같은 혼탁한 선거는 선거가 끝난 후에 최악의 정치적위기를 불러올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모든 권력자들마다 전력생산을 증대시키겠다고 선언했으나 선언한대로 리행한 권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바산조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나이제리아의 정치평론가인 앤서니 골드만은 《군부독재자들만이 정부를 비합리적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수년간 목격하고있다.》라고 하면서 오바산조대통령에 대해 쓴 소리와 실망을 토로했다.

오바산조대통령에 대한 실망은 그것뿐이 아니다. 최근 의회조사에서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그가 집권시절에 정부의 전력증산을 위한 투자금중에서 5 000만US$를 불법적으로 빼돌려서 유령회사에 넘긴것이 밝혀졌다.

나이제리아의 노벨문학상수상자 소잉카와 인권변호사 파와현미 두 지성인은 오바산조대통령의 실정에 대하여 말하기를 《오바산조대통령은 물러나고 국가의회를 통하여 헌법을 재검토해야 한다.》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오바산조대통령이 권좌에서 하루속히 물러나야 한다고 나이제리아의 최고의 지성인들이 주장하고있는 리유는 무엇인가?

오바산조대통령이 집권한 후 8년이 지난 오늘 나이제리아의 전체 인구의 평균 하루생활비는 1US$로서 8년전에 비해 하등의 변화가 없다. 빈민층의 비률은 70. 8%로 아프리카에서 비률이 가장 높은 나라중 하나가 되였다.

그러면 오바산조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총체적평가와 실정의 근본적원인은 어디에 있겠는가?

 

 

      오바산조대통령의 실정과 미국의 지배체제전환

 

미국의 클린톤행정부는 《아프리카무역발전 HR434》이라는 법안을 만들어 나이제리아의 경제구조를 지배체제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 법안은 (1) 교통과 통신 등 거대산업과 공공써비스에 대한 민영화실시 (2) 외국인에 대한 개방확대 (3) 농업과 토지, 광물을 포함한 천연자원에 대한 외국자본의 제한없는 접근 (4) 기초식량에 대한 외국기업이 요구하는 농업전환에 대한 정책 등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누구를 위한 무역법안인가?

이 법안은 미국이 모든 약소국가들에게 강도적으로 요구하는 법안들이다. 뿐만아니라 2002년 7월에 있은 미국을 위주로 하는 G8정상회담에서 아프리카개발을 위한 새 동반자관계인 《네파드》(NEPAD)라는 법안이 채택되였다.

우의 법안을 놓고 《아프리카련합》(AU)에서는 열띤 찬반토론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모든 아프리카나라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두 나라만이 찬성하였다. 그들이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음베키대통령과 나이제리아의 오바산조대통령이였다.

《네파드》법안은 국제자본이 아프리카에 파고들어와 민영화를 강요하면서 신자유주의적개발을 독촉하는 법안이다. 《네파드》법안은 아프리카자원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특권들에게 아프리카의 자원을 팔아넘기려는 공작중의 하나로 진단된다.

나중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음베키대통령은 임기 6개월을 남겨놓고 권좌에서 쫓겨났고 나이제리아의 오바산조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권좌에서 퇴장하고말았다.

 

 

      나이제리아의 혼란과 력사적전망

 

이 지구상에서 나이제리아처럼 잠재된 가능성을 현실에 반영하지 못하는 나라도 드물다. 나이제리아를 《잠든 거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나이제리아의 력사는 지금까지 자멸로 치달아왔다.

세계 8위의 산유국으로서 몇백억US$를 해마다 벌어들이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운이 무색할만큼 나이제리아는 고질적인 빈곤과 환경오염에 시달리고있으며 무거운 외국채무에 허덕이고있다.

이와 같은 나이제리아에서 지난 2007년 4월 19일에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기성정치에 대한 염증을 또다시 느낄만큼 혼란이 란무하는 가운데서 대통령선거가 진행되였는데 우마루 무싸 야라두아(56살)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앞으로 4년의 임기동안 문민정부의 제2대정권인 야라두아정권이 무엇인가 이뤄줄것이라는 기대감은 여전히 지대했다.

야라두아대통령에게 주어진 제일 큰 과제는 오바산조 전 대통령이 실패한 《부패정치척결》이다. 정권을 강화하여 옳바른 수사와 성역이 없는 징계를 강행해야 할것을 인민들은 요구하고있다.

오바산조 전 대통령시절에 석유생산지로 유명한 델타지역에 일년에 총예산 13억US$를 지원금으로 투입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지원금의 대부분은 저소득빈민층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지원금의 대부분은 부패한 중간층관리들과 지방의 부패한 말단관리들에게 모두다 넘어갔던것이다.

그러므로 야라두아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될수 있는 길은 남부의 석유생산지역의 빈곤한 사람들에게 공정한 배분을 실행하는 길뿐이다. 그러자면 부패척결을 최선의 과업으로 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나라를 쇄신시키는 길밖에 없는것이다.

그리고 야라두아대통령은 이슬람교출신이기때문에 종교적선입감으로 인하여 남부의 그리스도교세력권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을 간과할수 없다.

전임 오바산조대통령은 집권초기에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교신자이다.》라고 선전을 하면서 《신앙적경건성》을 과시하여 정치력을 행사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종교적위선은 남쪽의 그리스도교인들뿐만아니라 북쪽의 이슬람교인들에게도 갈등을 더 심화시켰을뿐이였다. 그의 비현실적인 말로만의 신앙고백은 행함이 없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말았다.

이것은 마치도 남《한》의 리명박《대통령》이 집권초기부터 《소망교회장로》를 내세워 정치력을 행사하려는 태도와 류사하다. 리명박《대통령》은 나이제리아의 실패한 대통령인 오바산조의 뒤를 따르고있는것과 같다. 《행함이 없이 믿어보았자 남는게 없다.》라고 하는 교훈을 리명박《대통령》은 오바산조대통령의 실패담에서 배워야 할것이다.

나이제리아의 문제는 끝이 없어보인다. 부정부패가 일상화되여 란무하고있으며 국가경제는 지나칠 정도로 오직 석유에만 의존하고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종교분쟁은 날로 심화되고있다. 특히 야라두아대통령은 북부의 유력한 부족인 플라나족출신이다. 그가 종교와 부족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것인가에 대하여 큰 관심사로 떠오르고있다.

 

 

      나이제리아와 북조선의 관계

 

야라두아대통령은 취임식날인 2007년 5월 28일 취임식장주변에 경찰병력 5만명을 배치했고 전국에는 20만명을 배치했다. 끝이 없는 불안과 론난속에서 취임식이 거행되였다.

사실상 세계가 이 나라에 관심을 돌릴만 하다. 나이제리아가 이른바 《석유전쟁의 화약고》로 알려져있기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원유독점체인 셰브론을 비롯하여 엑손, 모빌 등 수십개의 석유회사와 JP모건과 메릴린치 등 세계적인 투자은행들이 눈독을 들이고있었기에 이들은 마치도 벌떼처럼 야라두아대통령의 취임식에 관심을 쏟았다.

이런 정세속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새로 취임한 우마루 무싸 야라두아대통령은 《북조선을 방문해 에네르기와 천연가스에 대한 투자문제를 의론하도록 에네르기담당 장관에게 지시하겠다.》고 발표한것이다.

나이제리아의 신임대통령이 대대적인 에네르기개발을 위하여 북조선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하여 고위급인사를 북조선에 파견하겠다는 언급에 대해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인것은 미국이였다. 나이제리아는 미국의 5번째 원유수입국이였기때문이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전세계의 자주화물결이 이제는 막을수 없는 대세로 등장하고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야라두아대통령의 발언은 머지않아 조미관계가 정상화될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했다.

당시 나이제리아에는 개발을 위하여 외국기술과 외국자본이 홍수처럼 차고넘치게 이미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야라두아대통령이 북조선으로부터의 개발유치에 대하여 언급했을가?

야라두아대통령은 외국의 침략과 지배에서 벗어날수 있는 길은 늦게나마 북조선과 같은 선군정치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결심이 섰던것으로 분석되고있다.

야라두아대통령이 북조선과 석유자원의 공동개발을 원해서 그런 언급을 했을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없다. 나이제리아가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제라도 군사강국으로 나아가 더이상 강대국들에 의하여 지배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것이다.

북조선의 언론보도에 의하면 김영남위원장은 야라두아대통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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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북조선의 언론보도에 의하면 김영남위원장은 야라두아대통령취임식에 축전을 보냈다. 그리고 2007년 6월에 야라두아대통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표단 양형섭단장과 대표단일행을 접견했다고 보도됐다.

뿐만아니라 나이제리아에서 《주체사상연구 전국위원회》가 조직되여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해마다 년차총회를 진행한다고 한다.

나이제리아국민들은 제국주의적침략책동에 격분하고있으며 뿌리깊은 경제적착취에 대한 분노를 뼈저리게 느끼고있는것으로 파악되고있다.

야라두아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다. 1년이 벌써 지났다. 앞으로 3년을 신발끈 단단히 묶고 현장의 실물정치를 펼쳐나아갈것 같다.

진보와 선진이라는 이름으로 침략과 독점을 정당화해도 아무 말못하고 받아들인 종속적력사는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자주화의 바람이 이곳에도 불고있다.

나이제리아사람들은 과거 300년동안 강대국들에 의한 식민통치로 말할수 없는 수난의 세월을 보낸 피어린 아프리카의 력사를 뼈저리게 느끼고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아프리카의 검은 땅에서는 미국지배세력의 잔학행위가 멈추지 않고있다.

나이제리아의 문민정부 제2대 야라두아대통령은 늦게나마 자주의 길을 찾고있는 인물로 알려지고있다. 그는 이제 근로대중중심의 정책을 수립하여 더이상 강대국의 노예가 되지 말자는 의지를 보이고있다. 나이제리아가 자주성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북조선과 협력하여 투자를 이끌어오도록 하겠다고 밝힌것은 현 정부가 바라는것이 무엇인가를 시사해주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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