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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해온 제국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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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664회 작성일 21-10-1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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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영 박사


2.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력사적교훈

 

□ 아프리카대륙을 침략해온 제국주의자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지배당해온 나라들이나 혹은 지금도 제국주의나라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고있는 나라 사람들은 제국주의자들이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고 침략하여온 력사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제강점 40여년에 이어 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아온 《한국》같은 사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잘 파악하고있어야 한다. 그런데 리명박《정권》이 들어서자 보수세력들이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깨닫지 못하고 제국주의자들의 공작을 《선물》로 착각하고있는 양상이 우심해지고있는것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본다.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 멀고 무의식적으로 미개하고 야만적인 《검은 대륙》으로만 생각하는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2010년에 아프리카대륙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월드컵》이 열리게 된다.

지금 중국은 아프리카진출에 눈부신 역할을 하고있다. 이러한 중국의 의욕적인 진출을 막기 위하여 미국이 아프리카에 미군사령부를 신설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있다.

미국이 이제는 과거처럼 쏘련을 견제할 필요가 없기때문에 중국의 아프리카진출을 막고 자기들이 독단적으로 지배하려고 총력을 기울이고있는것이다.

미국의 언론들이 아프리카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켜 케니아와 탄자니아의 유명한 국립공원의 원시적《동물의 왕국》을 보여주고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아프리카를 다 아는것처럼 생각하는것은 큰 오산이다.

아프리카는 더이상 《검은 대륙》이 아니다.

아프리카대륙은 면적과 인구에 있어서 아시아다음으로 가는 거대한 대륙이다. 세계인구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8억이상의 인구와 54개 국가들이 21세기에 들어서서 꿈과 희망으로 몸부림치면서 약진하고있다.

아프리카에는 다이아몬드, 금, 크롬, 망간, 우라니움, 린광석, 동 그리고 석유 등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으며 또한 커피와 코코아, 땅콩과 원목 등 농산물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풍요로운 대륙이다.

유럽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였다고 자랑한다.

그것이 어떻게 《발견》인가? 그것은 《발견》이 아니라 공격이였고 략탈이였으며 침략이였고 노예화를 위한 지배행위였을뿐이였다.

《발견》이란 아무도 살지 않는 비여있는 땅을 처음 발견하고 상륙하여 개척을 하였을 때에만 사용할수 있는 용어이다. 아메리카는 원주민들이 수만년동안 태평세월을 누리면서 살아온 땅이였는데 유럽인들이 그들의 땅을 처음부터 공격하고 침략하여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았기때문에 유럽인들이 《발견》이라는 미사려구를 사용하는것은 허위이며 위선이다.

어떤 학자는 《발견》이 아니라 《만남》이였다라고 궁색한 론리를 말하기도 한다. 《만남》으로 인하여 무서운 살륙사건이 일어났고 노예가 생기고 식민지가 되여 제국주의자들의 희생물이 되였는데 그런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실 콜룸부스가 아메리카에서 처음 《발견한것》이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그가 에스빠냐의 마드리드임금에게 처음으로 보고한 보고내용에서 명백히 알수 있다.

《인디안들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순진하고 재산관념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것을 누구나가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콜룸부스가 아메리카대륙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이였다.

그러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을 하였던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대하여 절대로 《발견》이나 《만남》이라고 하는 궁색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리유는 유럽인들이 옛날부터 《구전》으로 전해지고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미 다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또한 유럽인들은 매우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아프리카해변가에서 침략행위를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유럽인들의 아프리카와의 관계는 《발견》이나 《만남》이라고 말할수 없으며 력사적으로 볼 때 《재침략》이라고 말을 해야 옳을것이다.

 

 

      고대력사와 왕국시대

 

아프리카의 고대력사는 기록이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신화로 채색된 력사였다. 고대의 아프리카인들은 글이 없는 《무문자사회》에서 오래동안 살아왔기때문에 글로 기록한 력사는 없었다.

아프리카의 《구전전통》은 력사적인 측면에서뿐만아니라 아프리카문화의 정수로서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문자가 없다고 해서 력사가 없다고 말할수는 없으며 실제로 아프리카의 력사가들은 부족들의 언어를 바탕으로 한 《구전력사탐구》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아프리카에는 력사적으로 천여개가 넘는 부족들이 존재하였으며 또 천여개의 언어가 있었는데 이들중에서 순수하게 아프리카에서 파생된 언어들을 분류하여보면 크게는 4개의 어족으로 분류된다.

아프리카아시아어족(240개 언어), 나이사하라어족(100개 언어), 나이제르꽁고어족 그리고 코이산어족(50개 언어) 등이 있었다.

평화로운 부족시대와 암흑의 《식민지시대》가 모두 지나가고 모든 면에서 《아프리카인 주체》가 이루어져감에 따라서 력사연구분야에서도 종래의 신화로 채색된 력사를 재구성하여 아프리카인이 주체가 된 참되고 의미있는 력사를 쓰게 되였다. 고고학자들은 아프리카에서 발굴한 화석을 약 189만년전의것으로 추정하며 이 화석이 현재의 아프리카인의 조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가를 연구하고있다.

아프리카의 선사시대가 끝나고 B. C. 3000년경부터 왕국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는데 아프리카력사상 최초로 건설된 나라가 에짚트왕국이였다. 이 시기에 에짚트에서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이 문자는 아프리카의 타지역으로 오래동안 광범히 전파되였다.

B. C. 1000년경에 아프리카의 흑인왕국으로 쿠시왕국이 처음으로 건설되였다. 그다음에 B. C. 667년에 메로웨왕국이 건설되였으며 계속하여 아프리카문명권중에서 에티오피아왕국, 누비아왕국, 사헬왕국 등 여러 다양한 흑인왕국들이 아프리카전역에 건설되였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왕국들이 건설되는 시대적변화발전이 진행됨과 동시에 B. C.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다음의 A. D.시대가 새로 등장하여 《정복시대》가 전개된다.

A. D.시대의 막이 열리자 곧 로마제국이 아프리카를 침략하였으며 그때부터 아프리카는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문명권의 영향하에 놓여지게 되였다. 350년에 악슘왕국과 5세기에는 페르샤제국들이 아프리카를 침략하였다.

8세기에 아프리카에서는 가나제국이 번성하였는데 그때 아프리카의 금과 아랍인들이 가지고온 소금과 맞교역(혹은 구상무역)을 통하여 경제적리득을 보기도 하였다.

11세기 후반에 아프리카의 가나제국은 이슬람종교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1076년에 가나제국은 멸망하였다.

그후 1240년에 아프리카에 말리제국이 건설되여 금, 은, 보석으로 번창하였는데 1473년에 송가제국에 의하여 패망하였다. 송가제국은 이슬람종교를 보호하므로 북방나라들과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종교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였다. 그러나 송가제국은 북방의 마로끄군의 남하침략으로 인하여 1590년에 패망하였다.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이 이슬람교의 후계자문제를 놓고 두개의 진영으로 분렬되여 치렬한 싸움이 오래동안 벌어졌다. 그런데 오래 계속된 싸움에서 패배한 시아파이슬람들이 아프리카로 대거이주하여 아프리카에 정착함과 동시에 아프리카를 점령하여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시아파이슬람들은 오만, 라무, 말린디, 몸바싸, 펨바, 잔지바르, 킬와, 모잠비끄,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의 여러 지방에서 아랍인의 도시들을 건설하여 정치와 경제와 문화의 주도권을 확립하게 되였다.

이슬람종교와 그리스도교와의 충돌과 경쟁은 아프리카에서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였던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번창하던 시아파이슬람교들은 인디아양을 건너 교역을 확대하여 인디아는 물론 중국에까지 아프리카의 산물인 금, 철, 상아 등을 수출하였으며 중국에서 도자기를 수입해오기도 하였다.

이렇듯 시아파이슬람들은 아프리카땅에서 크게 번영하고있었다.

지금 미국은 중동에서 석유와 지역적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서뿔리 이라크전쟁을 일으키였지만 시아파와 순니파의 대립으로 인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진퇴량난의 곤경에 빠져 허덕이고있다.

사실 시아파이슬람들은 그때 아프리카에서부터 유럽의 백인들의 침략적근성을 절실히 경험하였기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옛날의 반유럽정서를 그대로 가지고있는것이다.

1498년에 아프리카는 또다시 비운의 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비운의 대전환이란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이 새로 시작되였기때문이였다.

 

 

      노예무역시대

 

유럽인들은 15세기초에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아프리카해안지대에서 향료무역과 다이아몬드, 금 등에 대한 무역을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적극적으로 접근하고있었다.

한편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신대륙을 점령하고 광산개발과 농업생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로동력이 금보다 더 귀하게 되였다. 이때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식민지에서 엄청나게 부족한 로동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착안한것이 바로 아프리카원주민들의 《노예제도》였으며 노예들의 로동력을 미국으로 수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였다. 결국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제도》와 《노예무역》방안을 창안해냈던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하여 뽀르뚜갈, 에스빠냐, 네데를란드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앞을 다투어가면서 아프리카노예무역에 뛰여들었다.

노예무역의 규모에 대하여 통설로는 1 500만~ 2 000만명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위스콘신대학의 력사학교수 커틴박사는 보다 정확한 과학적통계자료를 제시하였다.

한편 노예무역의 시대별수출에 대해 커틴박사는 1451~1600년까지 27만 4 900명, 1601~1700년까지 134만 1 100명, 1701~1810년까지 605만 1 700명, 1811~1870년까지 189만 8 400명이라고 발표하였다. 결국 450년동안 계속된 노예무역의 규모는 956만 6 100명으로 집계하기도 하였다.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인들은 450년동안 상상을 초월한 비극과 고난, 공포속에서 살았으며 아프리카인구가 격감하는 비운에 처하게 되였다.

그런데 백인들이 그 많은 노예들을 붙잡는 방법은 어떠했는가?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내부지역까지 깊숙이 침입해들어가지 못하고있는 실정이였다. 아프리카의 내부지방의 사정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예들을 붙잡는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백인들은 옛날부터 연약한 타민족을 리용하고 매수하는데서 명수였다. 백인들은 아프리카해안지역에 있는 부족들을 매수하여 총과 화약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그들이 아프리카내부지역으로 깊숙이 침입해들어가서 다른 부족들과 전쟁을 시작하게 하여 많은 전쟁포로를 붙잡아 끌어오도록 유도하였다. 매수된 해안지대의 부족들은 무상으로 제공받은 신기한 총과 칼 그리고 화약을 손에 들고 아프리카내부지역으로 깊숙이 침투해들어가 타부족들을 쉽게 공격을 할수 있었다. 부족들끼리 싸움을 하여 붙잡아온 포로들을 백인들에게 무상으로 넘겨주었다.

포로들을 붙잡아오는데 대한 보상은 무엇이였겠는가.

물론 아프리카인들에게 난생처음 만져보는 신기한 총이나 칼 그리고 화약을 무상으로 공급해주는것 그자체가 큰 보상이였다. 그외에 아프리카인에게 매우 신기하게 보이는 유럽의 여러가지 종류의 직물과 장식품들 그리고 사치품 등과 약품들이였다.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중에서 해안가에 살고있는 다호메부족과 오요부족은 유럽인들에게 매수되고 그들과 결탁하여 노예사냥에 가담한 대가로 얻은 리익으로 아프리카에서 제일 발전하고 부강한 부족이 되였다고 자만하고있었다.

한편 바로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한것이 영국의 이른바 《아프리카그리스도교선교》정책이였다. 1788년에 영국은 《아프리카내륙탐험협회》를 창설하여 막대한 재정적지원으로 탐험가들뿐만아니라 그리스도교선교사를 내륙지방으로 깊숙이 들여보냈다.

《런던전도회》는 리빙스톤을 아프리카 초대선교사로 파견하였다. 리빙스톤의 그 유명한 《아프리카탐험기》에 의하면 그때까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 신비로운 강과 호수 그리고 산과 계곡에 대하여 낱낱이 기록하고있다. 그러면서 그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관심과 포교의 방법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리빙스톤의 《아프리카탐험기》는 영국침략자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었으며 침략의 안내서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교선교사들이 포교와 함께 교육에 공헌한것은 부인할수는 없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인들의 손에 성경책을 전달하는 순간 아프리카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럽침략자들에게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와 금은보화를 이미 빼앗기고있었던것이다.

결국 순박한 아프리카인들은 성경책과 다이아몬드를 맞바꾸는 꼴이 되고말았다.

《한국》에서 미국선교사들이 《개화운동》에 앞장서는 사이에 미국과 일본이 가쯔라ㅡ타프트밀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침략자들이 마음놓고 《한일합방》을 추진시킨것은 아프리카의 경우와 꼭같은 수단과 방법이였다.

지금 아프리카의 54개의 나라들중에서 꽁고와 수단, 짐바브웨 그리고 에티오피아뿐만아니라 다른 여러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부족들간의 적대심으로 내전을 계속하고있다.

해마다 수십만의 무고한 아프리카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있는 나라와 부족들간의 그 비극적인 내전이 계속되고있는 근본적원인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 근본적인 원인은 유럽과 미국이 그 옛날 아프리카를 무력과 종교로 침략침투하고 지배하였던 그 낡은 방법들을 오늘까지도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사용하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부족들을 매수하고 호상간에 《리해타산》에 얽혀서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뒤에서 조종하고있기때문이다.

그뿐만아니라 오늘 아프리카인들이 반공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사로잡혀있다는것이 또 하나의 큰 리유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어느때 어떻게 끝났는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유럽의 인도주의자들이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의 죄악성을 깨닫고 반대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노예무역페지협회》를 1787년에 설립하였으며 1823년에는 《반노예제협회》를 조직하여 영국의회에 출두하기도 하였다.

1807년에 영국정부는 노예무역을 페지한다고 형식상으로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노예제도로 리익을 보고있던 상인들과 미국의 대지주들의 거센 반대로 인하여 영국정부의 발표는 말뿐이였고 아무런 실효도 없었다.

1833년에 영국은 또다시 노예제도포기를 선포하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게도 동조할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노예무역이 완전히 끝난것은 인도주의자들이 노예무역반대운동을 시작한 1787년부터 약 90여년이 지난 후인 1870년대에 들어서서야 드디여 그 죄악의 노예무역은 완전히 페지되였다.

 

 

      아프리카의 식민지와 분할정책

 

아프리카 노예무역제도가 페지되기는 하였지만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착취행위를 포기한것은 절대로 아니였다. 유럽인들이 1870년대에 《노예무역포기》를 선언하기는 하였으나 사실 그 선언은 1870년대부터 제국주의적경제침략을 또다시 새로 시작한다는것을 선포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선언》외에 아무 의미도 없는것이였다.

유럽렬강은 아프리카에서 공업제품의 원료를 확보하고 금은보석과 농산물을 획득하기 위하여 《노예무역》대신 제국주의적식민통치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시작하였던것이다.

아프리카식민통치의 시작과 그 방법은 이른바 렬강들의 《분할정책》이였다.

영국과 프랑스와 도이췰란드 등 유럽의 렬강들은 아프리카에서 《상업적영향력》과 《군사적기지확보》를 목표로 하여 서로가 날카로운 령토쟁탈전을 벌리고있었다. 이러한 쟁탈전의 결과로 인하여 발생한것이 바로 《식민지분할정책》이였다. 쉽게 말하면 《땅나누어먹기》쟁탈전외에 아무것도 아니였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나라들의 국경선이 거의가 다 《일직선》으로 그어져있는것을 볼수 있다. 그 리유는 땅을 나누어가지기에 편리한 방법으로 국경선을 일직선으로 그어서 영국과 프랑스, 도이췰란드 등 국가별 땅의 소유권을 확실히 밝히기 위함이였다.

한 례를 들어보자.

《일직선》으로 그어진 국경선량쪽에는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는 물론이고 삶의 모든 부분을 공유하고있는 한개의 단일부족이 살고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렬강들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일직선》으로 인하여 서로가 갑자기 외국인들이 되고말았다. 렬강들이 편리하게 그어놓은 《일직선》으로 인하여 같은 혈통을 이어받은 같은 부족들이 《너는 영국에 속하고 나는 프랑스에 속하였다.》이런 식으로 서로가 분렬되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아프리카대륙에서 벌어지게 되였던것이다.

식민통치초기에 렬강들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국경선으로 인하여 아프리카나라들이 먼 후날에 독립할 때에도 그《일직선》이 그대로 유지되였고 또 독립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아프리카인들을 갈라놓는 그 《일직선》이 부족간의 분쟁으로 작용하였다. 아프리카나라들에서 이 국경선을 놓고 부족과 부족끼리, 나라와 나라들사이에 참혹한 분쟁이 계속되고있는 그 근본적리유는 그들이 무지하기때문이 아니라 악랄한 렬강들이 심어놓은 분렬의 씨가 오랜 력사를 통하여 깊이깊이 뿌리를 내렸기때문이다.

오늘《한》반도의 38°선으로 인하여 북과 남이 분렬되고 서로 대치하고있는 리유는 아프리카의 분렬과 분쟁과 일맥상통하는 근원적인 원인을 공유하고있다. 랭전시대에 들어서서 렬강들의 리익을 위하여 약소국들이 희생양이 되고있는것도 강대국들의 분렬정책에 의한 결과라고 본다.

아프리카인들의 그 무시무시한 부족들간의 분쟁을 비난하거나 미개한 나라들의 행동이라고 쉽게 단정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식민분할정책》과 《한》반도의 《랭전분할정책》이 일점일획도 다를바 없는 동질의 력사성을 가지고있음을 랭철하게 깨달아야 한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관계를 편리상 간략하여 다음과 같이 구분할수 있다.

ㄱ) 유럽인들의 아프리카래왕시기(15~17세기)

ㄴ) 유럽인들의 아프리카탐험과 노예무역시기(1450~1870년)

ㄷ) 유럽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착취와 분할정책시기(1870~1885년)

ㄹ) 유럽인들의 아프리카의 분할과 완료시기(1885~1914년)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땅나누어먹기》쟁탈전의 양상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이 장기간 벌어졌기때문에 일일이 기술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렬강들의 《분할조약》들에 대한것만 몇가지 사례를 들어 간단히 기술하는것으로 대신하겠다.

1876년에 프랑스ㅡ벨지끄사이에 맺은 《국제아프리카협회》, 이 협회는 프랑스와 벨지끄 두 나라가 중앙서아프리카와 꽁고분지 등을 분할소유하기 위한 협회였다.

1884년에 영국과 뽀르뚜갈사이에 《영국ㅡ뽀르뚜갈협정》, 이 협정은 뽀르뚜갈이 령유권을 이미 소유하고있으므로 영국은 그곳에서 자유교역권을 행사할수 있다는 협정이였다.

1886년에 맺은 《영국ㅡ도이췰란드협정》, 이 협정은 영국과 도이췰란드가 동아프리카내륙부분을 2등분하여 서로 령유권을 소유한다는 협정이였다.

1889년의 《영국ㅡ프랑스협정》, 이 협정을 맺으므로 두 나라는 닐강의 수원과 우간다, 잔지바르와 소말리아 등 여러 지역을 3분할하여 영국, 프랑스, 도이췰란드가 소유한다는 협정이였다.

1890년의 《영국ㅡ뽀르뚜갈협정》, 이 협정은 남아프리카에서 오래동안 벌어지고있던 로데시아, 잠비아, 말라위, 모잠비끄의 소유권을 위한 복잡한 대립전을 끝장내기 위한 협정이였다. 그후에 영국은 남아프리카식민장관 J. 쳄벨린을 파견하여 남아프리카 보어인공화국과 전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의 승리로 인하여 반세기동안의 길고긴 유럽렬강의 아프리카분할경쟁은 사실상 완료되고 끝이 났다.

 

 

      아프리카독립운동

 

아프리카분할통치를 하고있는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운동을 사전에 방지하고 철저히 관리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묘안을 고안해내였다.

영국은 백인총독과 행정관밑에 아프리카인 수장층을 골고루 배치하여 적응훈련을 시킴으로써 대결과 마찰을 피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프랑스는 처음부터 동화정책을 사용하였는데 프랑스의 《문화화정책》을 통해서 아프리카인을 개화시키고 일부를 특권인(동화인)으로 만들어서 통치하는 방안을 사용하였다.

벨지끄는 이른바 《온정주의방식》으로 아프리카인을 어린애를 다루는 식으로 대하면서 복리후생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벨지끄는 아프리카인에게는 정치적권한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백인위주의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통치하려고 안깐힘을 다 썼지만 력사의 흐름과 변천은 그 어떤 힘으로도 도저히 막을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아프리카는 《독립운동의 영아기》를 거치면서 점점 성장하였는데 1918년에 아프리카인테리층을 중심으로 《아프리카인민족회의》가 처음 결성되였다.

1921년에는 키쿠족이 《키쿠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인종주의의 반대와 아프리카인처우개선 등을 요구하였으나 당시로서는 《독립운동》을 목표로 내세우기에는 력부족한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후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 힘입어 1957년에 아프리카에서도 처음으로 가나가 독립을 쟁취하였다.

1960년대에 프랑스령에 속하는 서아프리카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영국과 프랑스령에 속하는 나라들에서도 독립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으며 이곳의 영향을 받아 도이췰란드와 벨지끄령에서도 아프리카인들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아프리카에서 1950년대말부터 1960년대초시기에 이르는 몇년사이에 독립의 물결이 파도치면서 독립의 새시대가 전개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직후에는 가나, 에짚트, 에티오피아, 리베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개국이 독립을 쟁취하였었다. 《아프리카독립의 해》라고 불리우는 1960년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에서 54개국들이 독립을 쟁취하였다.

 

 

      독립후의 동향과 아프리카의 현실

 

독립후 아프리카나라들앞에 나선 당면한 과제는 정치제도의 확립이였다. 군주제도를 채택한 3개국을 제외하고 51개국은 모두가 전부 공화제도의 국가로서 대통령제를 선택하였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프리카사회주의로선을 따르는 방향으로 독립국을 창설하고 새 나라로 출발을 하였다.

아프리카사회주의로선은 무엇인가?

아프리카사회주의로선은 식민지화되기 이전에 옛날부터 아프리카사회가 가지고있던 평화로운 공동체의 원리를 말한다. 아프리카공동체의 원리는 착취와 억압이 없는 농민과 로동자들의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로선이였다.

아프리카의 신생국가들은 대외적으로 이전 쏘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과 관계를 맺으면서 지금까지 억압당한 유럽의 식민지적경제구조를 타파하여 경제의 자립을 성취하는것을 시급한 과제로 삼았다. 또한 식민통치하에서 백인들이 가지고있던 토지를 아프리카인에게 이전하는것과 백인들이 주도하고있던 사회적구조를 완전히 개조하여 《아프리카인화》하는 새로운 정책을 마련하는것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신생국들이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정을 실지로 진행하여나아가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였다.

특히 1973년에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교역조건의 악화와 채무의 루적에 의한 경제적파탄은 새로 출범한 아프리카나라들을 총체적으로 위기에 빠뜨렸으며 이로 인하여 국민의 불안은 날이 갈수록 증대되였다.

아프리카는 옛날부터 렬강의 침략을 받아 수세기동안 식민통치를 받은 후에 겨우 독립을 쟁취하였기때문에 아프리카의 근대적국가건설을 하는데 있어서 당면한 문제들이 허다하였다.

게다가 식민통치가 만들어낸 국경선을 그대로 이어받은 조건하에서 독립을 쟁취하였기때문에 한개의 국가안에 다양한 부족들이 무질서하게 포함되여 동거하는 실정에 처해있었다. 다양한 부족들이 아무런 준비와 훈련이 없이 독립을 쟁취하기는 하였으나 독립후 부족들간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여 정치적으로 혼란과 불안전이 심화됐을뿐이였다.

아프리카의 내부사정이 이와 같이 복잡한데 그러면 국제적인 외부사정은 또 어떤 상태였는가?

국제적인 불순세력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아프리카나라들에서는 군부의 정치적개입이 심화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에서 변함없이 계속되고있는 사건은 쿠데타에 의하여 군부주도의 정권들이 줄줄이 들어서는 사건들이였다.

물론 사회주의적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아프리카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사회주의지향적인 군부주도의 정권을 수립하고 유지하고있는 국가들이 없는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군부쿠데타가 그렇게 자주 일어나고있는 리유는 아프리카국가들이 정권을 유지할수 있는 제도적보장이 튼튼하지 못하였기때문이다.

특히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은 복잡하고 불안한 다부족구성을 가지고있다. 이것이 분렬의 요인이 되고있기때문에 외세를 배경삼아 강력한 정권을 장악하려는 요구와 유혹은 항상 존재하고있는것이다.

바로 미국이 이와 같은 기회와 약점을 악용하여 마음놓고 군부를 앞세워 친미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유도하고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에서 쿠데타와 친미군사정권을 배출시키는 원인과 근원적세력은 과거 식민시대때 종주국이였던 유럽의 영국, 프랑스, 도이췰란드 세 나라들뿐만아니라 미국이 실질적으로 친미적군사정권이 서도록 작용을 하고있기때문이다.

현재 아프리카는 경제적위기에 빠져 국제금융기구(IMF)의 조정을 받아들일수밖에 없으며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적시장원리에 따른 경제자유화압력에 시달리지 않을수 없는 처지가 되였다.

오늘 아프리카는 운명적으로 명암이 엇갈리는 깊은 혼란에 빠져있다. 《부족국가》에서 《민족국가》로 전환되여 근대적사회를 이루어나가고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중등교육수준은 9%에 머물러있고 온전한 《탈부족화》가 이루어지기는 앞길이 료원하다.

또 아프리카의 고질적인 난문제는 《인종주의》가 아직도 존속되고있는것이다. 지난 500년동안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지배하고 착취한 근원적죄악은 《인종주의》였다.

《인종주의》는 인간을 《우월한 인종》과 《렬등한 인종》으로 나누고 전자가 후자를 다스리는것과 노예로 부리는것뿐만아니라 심지어 죽이는것까지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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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이와 같은 죄악적이고 비륜리적인 유럽인들의 《인종주의》는 과거에 있어서 아프리카인들을 죽이기도 하고 마음대로 착취하고 노예화하는것을 정당화하였다.

문제는 오늘날에 와서도 친미군부쿠데타를 통하여 아프리카를 지배하고있는 미국이 인종주의적리념을 버리지 않고 아프리카를 관리하고있는것이다. 특히 오늘 세계적으로 경제사정이 악화되고있는 상황에서 아직까지도 백인의 리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인위주로 만사가 좌우되고있는 실정이다.

아프리카국가들중에서 인종주의자들의 횡포가 오늘도 여전히 심화되고있는것을 념려하지 않을수 없다.

아프리카의 발전을 막고있는 부정적요인중의 또 하나의 문제는 에이즈문제이다. 오늘 세계적으로 볼 때 에이즈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있는 심각한 지역이 바로 아프리카이다.

테로와의 전쟁에 한해에 2 000억US$를 사용하면서도 아프리카의 심각한 에이즈문제를 위해서는 국제적여론이 아무리 심각해도 불과 10억US$도 아까워하는것이 미국이 주도하고있는 세계보건기구의 아프리카에 대한 정책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는 문제는 아프리카의 뿌리깊은 빈곤이다. 하루에 1US$로 살아가는 빈곤층문제가 아프리카의 전역을 엄습하고있다.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58%가 깨끗한 물공급을 받지 못하고있는것도 어두운 면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어두운 악조건하에서 아프리카에는 희망이 전무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아프리카의 밝은 희망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아프리카 희망의 근거로 제일먼저 《아프리카련합》(AU)이 련합회회의를 통하여 《아프리카대륙통합》의 가속화를 위한 방안을 토의한것을 들수 있다.

《아프리카장관회의》(COMA)는 오래동안 추구해오던 아프리카대륙의 단합과 공동리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극복하고 앞으로 전진할것을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아프리카에는 14개의 경제공동체가 있으며 아프리카국가들은 적어도 2개이상의 공동체에 가입하고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아프리카대륙단합에 지장과 혼란을 가져올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국가들사이에 존재하고있는 경계선들이 없어지고 하나로 통합된 《아프리카대륙통합》의 경제공동체를 구성하는것이 시급하며 이 길만이 분명히 아프리카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아가는 계기가 될것이다.

아프리카대륙 경제공동체의 탄생으로 인하여 아프리카 5개(북부, 남부, 동부, 서부, 중부) 지역공동체들이 하나의 아프리카공동체로 이어지게 될것이다.

오늘 아프리카는 대륙의 생존과 발전이 점점 강화되고있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볼수 있다. AU는 아프리카의 숙원인 《분쟁종식》과 《빈곤추방》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총력을 기울이고있다.

아프리카는 유엔을 본따 15개국으로 구성된 《평화안보리》를 운영하면서 대륙의 분쟁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애쓰고있다. 뿐만아니라 아프리카투자은행과 아프리카통화기금 등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아프리카의 자체안보를 위하여 《아프리카려단》이 새로 창설되였다는 소식이다. 려단을 이끌 마칸두운길레대장은 분쟁지역의 아프리카인자체의 해결과 자연재해복구 등을 위하여 활동할것이라고 려단창설의 의미와 임무를 밝혔다.

《잊혀진 세계》로 알려진 아프리카에서 지금 서방의 주목을 받고있는것은 아프리카도 무진장의 석유를 보유하고있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석유생산으로 인하여 서방국가들의 에네르기전략의 재평가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있다.

지면상제약으로 여러 나라들의 석유매장량에 대하여 일일이 기술하지는 못하지만 이곳에는 800억bb1, 저곳에는 343억bb1 등 산유국 아프리카나라들은 저마다 보유량을 과시하고있다. 머지않아 아프리카석유생산국들중에는 하루 300만bb1의 원유생산을 과시하게 될것이 분명하다.

벌써부터 엑슨 모빌, 세브론 텍써스 등 세계 주요석유회사들은 경쟁적으로 아프리카에 접근하고있다. 약삭바른 일본까지도 아프리카진출을 서두르고있는 실정이다.

력사는 하루도 쉬지 않고 변화발전하고있는것이다.

오늘 《아프리카의 르네쌍스》를 제창하는 아프리카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무조건적인 우경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외교적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아프리카의 정치와 경제에서의 자주와 자립을 위하여 당당한 제 소리를 내고있는것이다.

오늘의 아프리카는 명암이 여전히 서로 교차하면서도 그러나 해와 별이 빛나는 밝은 미래를 향하여 꾸준히 점진하고있는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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