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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7. 앙골라, 친미반군으로 인한 내전 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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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338회 작성일 21-12-05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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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 류태영 박사

2.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력사적교훈

 

□ 앙골라, 친미반군으로 인한 내전 33년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연구하면서 이 나라들이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강대국들로부터 막심한 피해를 입어왔다는 공통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이번에 살펴본 앙골라도 뽀르뚜갈을 포함하여 미, 영, 프의 침략과 간섭정책으로 골탕을 먹어온 나라로 분석되였다. 이 나라가 강대국들에 당해온 지나간 발자취가 마치도 우리 나라가 외세에 시달려온 력사를 반영하는것 같아 더욱더 관심을 갖게 되였다.

앙골라의 력사를 간략히 살펴본다.

1975년 뽀르뚜갈로부터 독립한 앙골라는 이후 33년간 내전이 계속되고있다. 그동안 친미반군이 앙골라전역에 마치 《물을 뿌리듯》 지뢰를 매설했는데 그 수는 자그만치 600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 가더라도 목발을 리용하거나 의족을 한 주민들을 쉽게 볼수 있다. 하지만 목발이나 의족을 갖추지 못한 불구자들의 수도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더 많다고 한다.

유엔은 앙골라의 정부군과 친미반군세력간에 내전을 겪고있는 지역에서 광범위한 지뢰제거작업을 실시했지만 아직도 2만 3 000여개의 지뢰가 남아있는것으로 외신들은 보도하고있다.

《다리잃은 녀성만 오세요》라는 이색적인 행사가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서 2008년 4월 2일에 개최되였다. 이 대회에는 18개 주에서 한명씩 참가하여 모두 18명의 미인들이 참가했는데 이들은 모두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녀성들이다.

《다리잃은 녀성미인대회》를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노르웨이사람 트라빅인데 그는 4년전 앙골라를 려행하면서 수없이 많은 지뢰피해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을 위로하고 삶의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전세계에 지뢰피해의 심각성을 알릴 목적으로 이 행사를 조직했다고 한다.

앙골라에는 지뢰로 인하여 농사를 지을수 없거나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약 200만명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뢰피해자는 아직도 계속 속출되고있기때문에 그 수를 정확히 말할수 없는것이 이곳의 현실이다.

영국의 기록영화제작자인 샘 킬리(Sam Killy)는 2004년 11월에 영국텔레비죤(Britain Channel 4)을 통해 반영한 자기 작품에서 앙골라가 처해있는 비극적인 사회정치적운명을 다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앙골라는 450년동안의 뽀르뚜갈의 식민지통치에서 벗어나 1975년에 독립을 했는데 그 이후 이 나라에서는 자기 민족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로선을 따르는 정부군과 이를 반대하는 친미반군진영과의 갈등과 반목으로 장기간의 내전이 진행되여왔다. 이 내분은 독립이후 1992년까지 17년동안 쏘련과 미국을 위한 대리전양상을 띠다가 쌍방이 휴전에 합의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미국의 간섭으로 량진영간의 분쟁은 끝나지 않고있다.》

《수도 루안다에는 5천여명의 전쟁고아가 길거리에서 배회한다. 지방에도 수많은 고아들이 있다. 희생자가족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들이 정부군인지 반군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앙골라량민들은 끊임없이 살해당하고있다.》

이 기록영화를 만든 킬리는 앙골라에 주둔하고있는 미국대사와 면담을 했는데 미국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수입하는 석유의 6%를 앙골라에서 수입하고있지만 앞으로 10년안에 아프리카석유수입의 20%를 앙골라에서 수입하게 될것이다.》

킬리제작자는 자기의 기록영화 결론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소개한다.

《앙골라에 석유를 판돈(Oil Money) 수억US$가 흘러들어간것은 분명하지만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고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돈은 다 어디로 가고있는가?》

킬리뿐만아니라 이딸리아의 기록영화제작자인 후랑꼬 타비아니(Franco Taviani)는 앙골라에서 일상적사건으로 되여버린 살해, 기아, 아동학대와 질병 등을 조명하여 《하느님은 병들었는가》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 기록영화가 제13차 부산국제영화제(2008년 9월)에 출품되여 화제를 모은바 있었다.

흥미로운것은 남《한》의 모 대형교회가 내분으로 복잡한 이 앙골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그리스도교선교를 해왔다. 한 선교사는 앙골라정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면서 기도요청을 했다.

《앙골라정부(MPLA)는 좌파이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악마적정권이다. 이 악마적무신론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앙골라 우파해방운동(UNITA)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27년째 싸우고있다. 하지만 내란의 끝은 보이지 않으니 남〈한〉의 여러 교우님들은 앙골라를 위하여 기도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이에 대해 이딸리아의 후랑꼬 타비아니제작자는 《병든 하느님》에게 기도를 부탁한들 그 무슨 응답이 있겠는가고 반문한것이다.

남《한》선교사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반정부운동이 지난 27년간 어떤 일들을 하고있는가에 대하여서는 일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전혀 말이 없다.

미국이 지원하는 친미반군은 민주적선거를 통하여 세워진 앙골라의 합법적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앙골라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마을들을 급습하여 주민들을 고향에서 떠나게 하고 부족민을 살해하고 농작물을 불태우고 길가와 들판에 지뢰를 매설하고 체포한 사람들을 노예로 사용하여 미국이 제공한 군수품들을 운반하게 하고 많은 녀성들을 강간하거나 아니면 강제로 반란군들과 결혼을 하게 하는 등 27년동안 갖은 악행들을 계속하여왔다는것이 국제사회의 량심인들의 증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하나님을 믿는 유신론적국가로서 앙골라에 와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남《한》식반공주의적친미사대주의보수신앙을 앙골라에까지 가지고가서 추태를 보이고있어 국제사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다.

 

 

      3세기전 은징가녀왕의 나라 은골라

 

앙골라의 옛 왕국은 《은둠바왕국》이였다. 은둠바왕의 맏딸로 태여난 은징가는 어렸을 때부터 뽀르뚜갈상인들이 자기 나라 해안에 배를 대고 옷과 술을 내놓고 대신 흑인들을 노예로 붙잡아 배에 싣고 돌아가는것을 보면서 자라왔다.

그때 뽀르뚜갈배에 싣고 떠나간 포로들은 거의가 다 미국의 북동부지역에 있는 제임스 타운에 노예신분으로 팔려갔다.

은징가는 성장하는 동안 뽀르뚜갈, 영국, 프랑스, 이딸리아 등 유럽나라들이 《은둠바왕국》을 노예공급지로 확보할뿐만아니라 아예 《은둠바왕국》을 통채로 점령하려 했던것을 절감하였다.

뽀르뚜갈은 군대를 보내서 《은둠바왕국》을 공격했지만 생각했던것처럼 쉽게 정복할수 없었다. 《은둠바왕국》은 거의 30년동안 뽀르뚜갈군대를 대항하여 싸웠다. 은징가는 34살이 되였을 때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고 잘 훈련된 녀성부대를 조직하고 그를 이끌고 뽀르뚜갈군대와 대항하여 싸우면서 침략세력을 저지하기도 했다.

은징가는 드디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은둠바녀왕》이 되였고 그 이후 뽀르뚜갈과 평화조약을 맺고 얼마동안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정치력을 과시했다.

뽀르뚜갈인들이 노예들을 잡아 해변가로 가는 길에 그녀의 령토를 지나가는 길을 허락해달라고 은징가녀왕에게 청원을 했는데 그의 허락이 없이는 뽀르뚜갈사람들이 노예들을 끌고 해변가까지 갈수가 없었다. 때문에 은징가녀왕의 통과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은징가녀왕은 뽀르뚜갈사람들의 청원을 받아들임으로써 화해의 정책을 쓰기로 했다. 그때 뽀르뚜갈사람들에게 끌려간 노예들은 뽀르뚜갈의 남아메리카령토인 브라질로 팔려가 사탕수수재배를 위한 노예로 되였다.

1500년대부터 시작된 이 지역의 노예무역은 《은징가왕국》의 해변가를 통해서만 가능했기때문에 《은징가왕국》은 자연히 노예수출의 중심지역할을 하게 되였다.

은징가녀왕은 은둠바나라를 얼마동안 평화적으로 통치하다가 그녀의 나이 81살에 사망했다. 은둠바의 백성은 은징가녀왕을 기념하여 나라명칭을 《은골라》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전쟁군주》라는 뜻이다. 그런데 뽀르뚜갈사람들이 19세기말에 은둠바를 완전히 점령하여 식민지화한 후에 은골라를 앙골라라고 고쳐불렀다.

 

 

      자주독립투쟁과 사회주의정권의 등장

 

19세기말에 아프리카노예무역이 금지됨에 따라 유럽렬강들은 아프리카분할을 위한 새로운 분할정책을 시작했다. 이 분할정책에 의하여 뽀르뚜갈은 오래전부터 앙골라와 이미 관련을 맺고있던 기득권을 인정받아 자연스럽게 앙골라를 합법적인 식민지로 만들수 있었다.

뽀르뚜갈은 앙골라에 대한 식민지배체제를 전보다 더 강화하여 식민통치의 경영과 자원의 착취를 더욱 철저히 감행했다.

1960년을 《아프리카의 독립의 해》라고 한다. 하지만 앙골라는 1975년에야 15년 늦게 독립을 쟁취했다. 왜 15년동안 지체했는가?

그 당시 뽀르뚜갈은 군사쿠데타로 인하여 본국의 정권이 불안정한 상태에 빠져있었고 또 앙골라에는 수백만명의 뽀르뚜갈사람들이 정착하여 영주하고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렬강국들의 시민들도 50만명이상이 앙골라에 뿌리를 내리고 거주하고있었다.

이와 같은 리유로 뽀르뚜갈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정치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에 봉착하고있었으며 또한 앙골라에 오래동안 영주하고있는 백인들도 끝까지 버티고있기때문에 뽀르뚜갈정부가 앙골라의 독립선언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킬수밖에 없었다.

독재가 길어지면 저항도 역시 더욱더 강화되는 법이다. 1900년대초에 들어서서 앙골라에서 반식민주의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수십년동안의 길고긴 항쟁의 결과로 앙골라에 다음과 같은 세개의 다양한 독립운동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였다.

1956년에 마로끄에서 A. 네또가 지휘하는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이 외국에서 창설되였다. 1962년에 두번째로 앙골라에서 《민족전선》(FNLA)이 결성됐다. 1966년에 앙골라에서 《독립민족동맹》이 세번째로 J. 사빔비를 지도자로 하여 창설되였다.

《인민해방운동》, 《민족전선》, 《독립민족동맹》 등 세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창설되여 제각기 독립운동을 맹렬히 진행함으로 인하여 앙골라의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독립후에 이 세 단체는 곧 두개의 진영으로 조성되여 한 진영은 반미반외세를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적로선으로 국가건설을 할것을 주장했다. 이에 반대하여 다른 진영은 친미와 친서방로선을 선호하면서 자유민주주의국가건설을 력설했다. 독립을 어렵게 쟁취했지만 독립국가건설과정에 있어서 로선문제로 인하여 초창기부터 난관에 봉착하고있었다.

세개의 통일운동단체들중에서 네또가 주도하는 《인민해방운동》은 건국초기에 다른 두 단체들을 제쳐놓고 앞장서서 주역을 담당할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고있었다.

《인민해방운동》은 단체를 창당한 력사적경력에 있어서나 대중속에 뿌리를 깊이 내린 영향력으로 보아서나 또 지도자의 인격으로 보아서도 당연히 주도적역할을 담당할수 있는 위치에 놓여져있었다.

《인민해방운동》의 지도자 네또는 의사이며 시인이다. 그는 1948년에 시집을 발간하여 국제적으로 독립투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의사로서 빈민들을 위한 의료봉사를 하다가 뽀르뚜갈식민통치정부에 의하여 구속되여 뽀르뚜갈에 끌려가 거기서 2년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1962년에 뽀르뚜갈에서 탈출하여 마로끄에 체류하면서 시집 제2집을 출판했다.

네또는 백절불굴의 애국심을 품고 마로끄에서 1962년에 《인민해방운동》을 창건하고 의장으로 추대되여 활동을 계속하다가 독립을 쟁취하여 마로끄를 떠나 앙골라로 귀국했다. 그는 문학과 의료봉사와 독립운동을 위하여 전생애를 다 바친 애국자이며 유능한 지도자이다.

네또는 사회주의적지도자이며 이전 쏘련과 꾸바의 절대적지지와 후원을 받는 진보적지도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인 동시에 반제반미투사이기도 하다.

앙골라는 독립후 세 정파의 권력다툼이 심했다. 1976년 11월에 《민족전선》과 《독립민족동맹》 두 단체를 제압한 네또는 《인민해방운동》의 의장으로서 앙골라인민공화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추대되였다. 새로 취임한 네또대통령은 앙골라인민공화국의 정치적지도로선을 과학적사회주의로선이라고 국민앞에 천명했다.

네또대통령이 어렵게 난관을 돌파하여 대통령에 취임을 하기는 했지만 앙골라는 그가 취임한 다음날부터 또다시 분쟁에 휘말려들었다. 좌파, 우파로 분렬되여 내전의 출발점이 조성되고있었다. 《분렬시켜 점령하라》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공식이 실감나는 현상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였다.

네또대통령에게 정권을 빼앗긴 《민족전선》과 《독립민족동맹》은 즉시 보수대련합을 결성하여 《민족동맹》으로 단일화하는데 전격합의하였다. 그리고 단일화한 《민족동맹》은 사빔비를 수반으로 추대하고 네또의 집권여당을 《좌파정권》이라고 선전하며 정치공세를 강화하면서 반공친미로선을 명백히 했다.

이렇게 되여 신생 앙골라인민공화국은 출생한지 1년후에 과학적사회주의로선을 지향하는 《인민해방운동》과 이에 대항하여 싸우는 친미반공주의로선을 추종하는 《민족동맹》의 량대진영으로 갈라지고 분렬되여 정권쟁탈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였다.

 

 

      멀고도 험난한 길, 내전 33년

 

1976년 11월에 《인민해방운동》의 수반인 네또대통령이 과학적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단독집권의 첫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동시에 좌우대결전이 전개된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가장 관심을 보인것은 역시 미국이였다.

미국은 네또대통령이 주도하는 좌파정권이 앙골라에 들어섬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에 좌익세력이 확대될것을 념려한 나머지 반대파세력을 지원하며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우선 반공친미로선을 추종하는 《독립민족동맹》의 지도자 J. 사빔비를 도와주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친미국가들을 동원하여 지원군으로 3 000명을 앙골라에 투입시키고 뒤에서 무기와 자금을 후원해주면서 앙골라정부를 흔들었다. 이것은 미국이 발전도상나라들에게 보여온 상습적인 방법이였다.

새로 독립하여 대통령에 취임한 네또대통령은 군대도 없고 돈도 없고 정부의 조직도 아직은 불완전한 상태인데 미국의 공세를 혼자서 당해낼수 없었다.

네또대통령은 쏘련과 꾸바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위기를 면할수밖에 없는 다급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꾸바는 앙골라에게 지원군 5만명을 급히 파송했다. 쏘련은 머뭇거리면서 정세파악만 하고있었다.

앙골라의 분쟁은 철저히 종교와 부족간의 분쟁이 아니라 순전히 렬강들의 리념과 리권때문에 발생한 분쟁이다. 앙골라의 참혹한 내전의 발생은 미국의 작품이라고 말해도 틀림없다. 단지 미쏘간의 대리전으로 표출되긴 하였지만 이 내분을 만든 장본인은 결국 미국이였다. 다시말하면 미국이 먼저 내전의 불을 질렀기때문이다.

특히 강대국들의 리권이 개입된 분쟁에는 해결할 길이 없음이 더 큰 문제이다.

리권이 없는 곳에서 피빛의 신음소리가 울려퍼져도 미국은 자국의 리익과 무관한 분쟁에는 절대로 개입하지 않고 못본척 한다. 하지만 정략적리권이 관련된 곳에서는 분쟁의 불을 질러놓는것이 미국이 지금까지 보여온 대외정책의 일반적인 관례이다.

한편 그 당시 미국과 쏘련은 랭전시대를 종식시키려는 시대적변화에 처해있었다. 그런 리유로 미국은 앙골라에 불만 질러놓고 사태의 사후처리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책임이 없는것처럼 일방적으로 앙골라에서 철수하는 연극을 연출했다. 쏘련의 태도도 사실 이 점에 있어서 미국과 마찬가지이였다.

하지만 꾸바는 쏘련을 제쳐놓고 앞장서서 앙골라지원에 나섰으며 꾸바의 병력 5만명을 앙골라에 급파하여 쏘련을 놀라게 했다.

한편 미국은 겉으로는 《우리는 떠나간다. 너희들끼리 잘해보라.》 이런 식으로 앙골라내전에 대하여 손을 떼는 제스츄어를 취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쏘련도 원조를 중단케 하고 꾸바의 5만 병력도 앙골라에서 철수시켜보려는 교활한 술책에 불과하였다. 미국과 쏘련 그리고 꾸바의 병력이 갑자기 떠난다고 해서 이미 불타기 시작한 내란이 쉽게 끝날수 없다는것을 미국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미국은 저들이 지원하는 병력 3 000명을 먼저 철수시켰다. 꾸바도 1단계, 2단계로 나누어 5만명의 병력을 1991년 5월까지 완전철수시켰다.

한편 이와 같은 혼란속에서 앙골라의 정국에 큰 이변이 발생했다. 그것은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한 네또대통령이 갑자기 병으로 서거한 비보였다. 그는 짧은 집권기간에 큰일을 했다. 우선 집권여당인 《인민해방운동》을 근로대중을 위한 튼튼한 정당으로 요지부동의 터를 닦아놓았다. 네또대통령은 400년동안 유럽의 렬강들에게 지배를 받아온 식민통치의 잔재를 철두철미하게 청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그 누가 집권을 해도 《인민해방운동》은 흔들리지 않을것으로 확신하면서 그는 세상을 떠나갔다.

네또대통령의 후임으로 D. 싼또스대통령이 정권을 인수했다. 외국군대들이 완전히 철수한 후에 앙골라에 평화가 회복될것이라는 미국의 주장이 완전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평화의 기회가 온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전이 나날이 더욱 격화되는 상황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였다. 1991년 5월에 싼또스대통령과 친미반군지도자 사빔비는 뽀르뚜갈의 리스봉에서 미국의 중재하에 서로 만나 제1차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 평화협정에 의하여 1992년 9월에 여당, 야당 가릴것 없이 전국적으로 통합하여 민주적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물론 유엔이 두 지도자의 만남을 중재하고 미국이 뒤에서 조종한 작품이였다.

싼또스대통령은 미국의 설득작전에 넘어가 다당제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출하여 거국적으로 내각을 조직함으로 평화를 회복하기로 동의했다. 그리하여 1992년 9월에 전국적으로 유엔의 감시하에서 대선이 실시되였다. 대선의 결과는 놀랍게도 《인민해방운동》의 후보자 D. 싼또스대통령이 재선되였다. 미국의 음모는 빗나갔다. 예상외에 싼또스대통령이 재선됨으로써 미국은 당황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유엔감시단마저 공명선거였다고 판정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야당인 《독립민족동맹》과 친미반군지도자 사빔비는 부정선거라는 리유를 내세우면서 선거에 불복종을 선언하고 내전을 계속하겠다고 주장했다.

사빔비는 선거에 불복종할뿐만아니라 1991년 5월에 유엔과 미국의 중재로 맺은 제1차 평화협정을 스스로 깨고 오히려 내전을 전보다 더 격화시켰다.

사빔비는 도대체 누구를 믿고 그런 주장을 하면서 내전을 격화시켰을가?

1993년 11월에 앙골라의 내전이 격화되고있는 가운데 유엔은 또다시 량측대표를 잠비아로 불러들여 제2차 평화협정에 조인하도록 중재를 했다. 그 이후 1994년 10월에 유엔의 끈질긴 중재로 인하여 앙골라정부와 친미반군사이에 《제2차 평화협정 가조인》합의가 이뤄진다. 그 결과 1994년 11월부터 일단 내전이 중단되였다.

1995년 7월 유엔사무총장은 앙골라에서 쌍방이 평화협정에 조인했으며 20년동안의 내전이 휴전되였다고 큰소리로 발표했다. 그러나 유엔사무총장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이였다. 그것은 곧 미국의 위선을 드러내는 명백한 기만행위일뿐이였다.

유엔사무총장의 발표와는 아무 상관없이 앙골라의 내전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격화되고있었으며 친미반군의 공격은 한 지방에서 또다른 지방으로 확대되고 사망자와 부상자 그리고 난민들이 증가하여 정세가 최악사태로 전환되였을뿐이였다.

도대체 친미반군들이 33년동안 사용한 그 많은 무기와 군수물자들은 누가 또 어떻게 조달해주었을가? 그리고 미국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두번이나 성사되였는데 어찌하여 내란은 끝나지 않는가? 친미반군들을 누가 어떻게 도와주고있을가?

빙산의 일각이기는 하지만 2008년 3월에 발표한 어느 한 외신의 보도를 통해 우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륜곽을 그려본다.

《죽음의 상인》이라는 빅토르 부트는 1980년대부터 전세계테로분자들과 꽁고와 앙골라의 반군들에게 대량의 무기를 거래했다고 한다. 부트는 화물수송기를 운행하면서 대량의 무기판매를 해왔는데 2005년에 부트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였다. 그 영화제목이 매우 흥미롭다. 《전쟁으로 가는 길》(Road of War)이다.

그것뿐인가? 앙골라친미반군에게 무기를 거래한 프랑스인 42명이 최근에 무더기로 기소되였다. 빠리발 《련합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이들은 앙골라내전이 한창이던 1993~1998년에 땅크 420대, 포탄 15만개, 지뢰 17만개, 직승기 12대를 판매했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미국 세 나라는 아프리카와 중동전쟁의 한통속이고 또 전략적동업자들인데 앙골라의 친미반군에게 무기가 대량반입되는것을 몰랐다는 말을 그 누가 믿겠는가?

1996년 11월에 앙골라의 싼또스대통령은 유엔의 끈질기고 또 한편 협박적인 강요에 또 못이겨 《제3차 평화조약》을 맺기 위하여 친미반군지도자 사빔비와 회동하여 이번에는 전보다 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거국내각을 편성하여 친미반군측에게 4명의 장관과 7명의 부장관 그리고 의회의석 70석을 친미반군측에 배당하여 거국정부를 수립하고 내전을 즉시 종료시킨다. 우의 합의에 대하여 뽀르뚜갈, 로씨야 그리고 미국 세 나라는 련대보증을 한다.》

이 얼마나 희망적이며 성공적인 합의였던가?

1996년 11월의 협정은 그야말로 앙골라력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놓은 획기적이며 력사에 길이 남을 사변적인 협정이였다.

하지만 이것 또 역시 세번째 사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력사적인 평화협정을 맺고 거국적정부가 출범한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1998년 7월 17일에 평화협정은 파기되기 시작했다. 협정을 맺은 친미반군세력은 앙골라의 멀고 어두운 지방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전투를 계속하여 대량의 살해와 략탈과 강간 등을 감행할뿐만아니라 지방행정구 68개 지역을 장악하고 반군의 세력을 과시하고있었다. 그러면서 친미반군지도자 사빔비는 평화협정보증국인 뽀르뚜갈과 로씨야와 미국을 향하여 우리의 작전에 간섭하지 말라고 큰 소리를 쳤다. 미국은 유구무언이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하여 긴급보고를 받은 싼또스대통령은 1998년 9월에 거국내각에 임명된 4명의 장관, 7명의 부장관 그리고 70명의 의원들에 대한 즉시적인 해임조치를 단행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하여 세 나라가 보증하여 친미반군지도자 사빔비와 맺은 평화협정의 파기를 즉시 선언했다. 뿐만아니라 싼또스대통령은 유엔감시군과 유엔에 속한 모든 인사들에게 즉시 앙골라를 떠날것을 주장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앙골라의 내전은 2002년에 친미반군지도자 사빔비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일단 막이 내려졌다. 그동안 사빔비의 행적은 앙골라인민들에게 불신을 주기만 했다. 25년전인 1977년에 사빔비는 스스로 반군지도자로 등장하여 네또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1991년에는 싼또스대통령과 평화협정을 맺고 대통령선거를 치르었으나 선거에 패배하자 미국의 배경을 등에 지고 선거에 불복종을 선언하여 또다시 내전을 지속시켰다. 하여 11년간 친미반군의 지휘자역할을 해왔다. 사빔비는 어떤 때는 미국의 말도 고분고분 잘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 미국을 난처하게 만들 때도 많이 있었다. 한 례를 들면 앙골라의 Lunda Norte지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광산이 있는 곳인데 사빔비는 미국의 허락도 없이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여 사람들을 대량살해하여 세계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사빔비는 이곳에서 다이아몬드를 갈취하여 세계적인 다이아몬드암시장과 거래하여 1992년부터 1998년사이에 37억US$를 벌어들이고 그 돈으로 역시 암시장을 통하여 무기를 사들였다. 2002년에 사빔비의 사망후에 싼또스대통령은 11년전에 파기되였던 제1차 평화협정의 정신을 다시 되살려서 아직도 남아있는 반군잔재들과 평화협정을 다시 맺고 가까스로 총성을 멈추게 했다. 내전 33년동안 50만명이 숨지고 수없이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고 국토가 황페해졌다.

2008년 9월 5일에 반군지도자 사빔비가 사라진 앙골라에서 력사적인 총선이 비교적 평화로운 분위기속에서 실시되였다. 14개 정당에서 후보자들이 란립하는 복잡한 총선이였다. 총선을 통하여 집권당 《인민해방운동》이 의석 220중에서 129의석을 확보했으며 친미반군《독립민족동맹》은 70의석을 보유하는데 그치고말았다. 사빔비의 후임으로 나선 친미반군의 새 지도자인 사마꾸바는 총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면서 싼또스대통령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달했다. 앙골라의 력사는 이렇게 변했다.

이제 앙골라는 어디로 갈것인가?

그것은 1년후 2009년에 예정되여있는 대통령선거이다. 《인민해방운동》의 창시자이며 건국의 아버지인 네또 초대대통령의 후계자로서 30년동안 반군과 싸운 싼또스 현 대통령이 과연 이번 대선에 다시 재출마를 할것인가 하는 그의 결단여부에 대한 예측이 최대의 관심사로 떠오르고있다.

 

 

      석유, 다이아몬드때문에 등터지는 앙골라

 

앙골라는 아프리카의 최대원유생산국으로 최근 급부상했다. 석유뿐만아니라 앙골라는 다이아몬드와 철광석 등 풍부한 부존자원과 비옥한 국토로 경제발전의 잠재력이 풍부한 나라이다.

내전상황하에서도 앙골라의 다이아몬드채광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카나다, 영국, 로씨야 그리고 오스트랄리아 등이 줄곧 참여하고있었다. 오래된 통계이기는 하지만 1998년에 1년동안 다이아몬드생산량은 276만ct에 달했다. 그러나 실지 수출해서 벌어들인 총수익은 1억 3 000US$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같은 해에 친미반군이 다이아몬드 밀매업자들을 통하여 벌어들인 실수익금은 1억 4 000만US$로서 앙골라정부보다 1 000만US$ 더 많이 벌어들였다.

석유는 어떠한가? 앙골라가 아프리카에서 나이제리아를 제치고 석유생산 1위로 올라섰다. 앙골라는 2007년 1월에 석유수출기구(OPEC)에 가입했으며 현재 매일 192만bb1을 생산하고있다. 특히 앙골라는 심해유전에 대한 탐사와 생산증가로 석유수출이 더 증가할것으로 예상된다.

석유강국으로 부상한 앙골라에 대하여 미국, 프랑스 등 세계의 석유소비강국들이 경쟁적으로 구애작전에 열을 올리고있다.

미국은 지난날에 친미반군을 지원하여 내전을 일으켜서 앙골라에게 끼친 상처에 대하여 모르는척 하고있다. 그러면서 미국은 다만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제는 석유의 리권을 위하여 앙골라정부에 체면불구하고 접근해오고있다. 이러한 앙골라가 언젠가는 제2의 이라크가 되지 않을가라고 념려하는 식자들도 적지 않다.

프랑스도 앙골라반군에게 막대한 무기를 조달해준 과오에 대하여 어떠한 해명이나 사과의 말은 하지도 않으면서도 싸르꼬지(Sarkozy)대통령은 10년만에 처음으로 앙골라를 방문하여 막대한 해저유전개발에 투자할것을 제안하였다.

미, 영, 프 등 서방의 석유소비강국들은 중동의 석유공급원보다 더 안전하고 방대한 나이제리아와 앙골라에 눈독을 들이고있다. 이 강대국들은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미래의 원유자원까지 리권을 챙기려고 움직이고있다.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위치를 추락시키고 앙골라의 동반자자리를 당당히 굳히고있는것을 보고 미국은 불안해하고있다.

앙골라를 저들 마음대로 취급하던 미국과 서방렬강들이 전에는 앙골라를 무조건 목을 조르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다른 나라들과 자원쟁탈을 위한 맞대결을 해야만 하게 되였으니 이곳에서 과거처럼 리익을 챙기기가 수월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불편을 느끼고있다는것이 국제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앙골라가 이제는 내전이 아니라 대국들의 틈에서 어떻게 대처해나갈지 그것이 국제사회의 관심거리가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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