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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0. 반미자주로 전환하는 에짚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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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931회 작성일 22-01-22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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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유태영 박사

2.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력사적교훈

 

□ 반미자주로 전환하는 에짚트

 

중동지역의 에짚트를 고찰하면서도 남아메리카의 나라들과 아프리카나라들을 고찰하며 발견한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공통적으로 찾아내게 된다.

에짚트는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지만 이 나라도 3 000년의 왕조시대가 끝난 후에 로마, 그리스, 아랍, 뛰르끼예,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 렬강들의 지배를 오래동안 받았다. 그후 부상한 새로운 제국주의나라인 미국에 의해 또다시 어려움을 겪어왔다. 에짚트가 겪은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우리 민족의 비운과 류사하였던 과거사들도 접할수 있다. 에짚트연구 또한 우리 민족민주운동사에서 참고할 령역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제국주의의 침략에 시달리고 력사의 절망적종착점에 이르게 된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에짚트의 지도자들이 어두운 곤경에서 출구를 찾아나서고있는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산복합체가 핵과 미싸일을 독점하고 횡포하고있는 아랍세계의 캄캄한 어두움속에서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실날같은 희망을 품고 멀고먼 동방의 새별을 찾아나서고있는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에짚트의 력사를 고찰하면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된다.

5 000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피라미드의 나라, 에짚트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닐강에 뒤얽힌 5천년력사,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에짚트

 

서방문명보다 훨씬 이전에 발생한 《닐강의 선물》이라고 부르는 에짚트의 찬란한 문화적유산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차넘치는 예술적조각품들은 고대에짚트인들의 두각을 유감없이 나타내 보여주고있다.

세계10대명소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있는 에짚트의 피라미드의 수는 110개이상으로 알려져있으나 최근 모래밑 20m에서 4 300년전 피라미드를 또 하나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이번 발굴이 118번째라고 말하고있다.

제일 큰 피라미드는 한면의 길이가 230m이고 높이는 147m인데 이것은 B.C. 2575년경의것으로 제일 오래된 피라미드라고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있다.

에짚트 기자지방에 있는 거대한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과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있는 신화적동물의 형상을 과시하고있다. 이 스핑크스에는 우리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던졌다는 설화가 얽혀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목소리는 같지만 발이 4개가 되기도 하고 발이 2개가 되기도 하며 또 발이 3개가 되기도 하는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정답을 못하는 사람을 스핑크스는 잡아먹기때문에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일 이 질문에 정답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스핑크스는 그자리에서 자결해죽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스핑크스에게 잡아먹히는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필자가 속히 정답을 제시해야 할것 같다. 정답은 뭘가?

《사람이 유아기에는 네발로 기고 자라서는 두발로 걷고 로년기에는 지팽이에 의지하여 세발의 소유자가 된다.》는것이 정답이다.

이 옛날의 스핑크스의 설화는 바로 고대에짚트인들의 삶의 지혜를 말해준다. 뿐만아니라 에짚트의 피라미드는 비록 왕과 지배세력을 위한 무덤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는, 즉 죽은 사람의 령혼이 래세에서 실체로 회생함을 신봉하고있으며 에짚트인들이 창조한것이다. 그러므로 에짚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예술적조각품들은 모두가 다 고대에짚트문화의 신비성과 에짚트인들의 재능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에짚트의 간추린 고대력사

 

고대에짚트력사는 닐강주변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였는데 사회, 경제, 정치와 종교생활이 활발하였고 그후 점차 독립을 추구하는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B.C. 5000년경 닐강 삼각주내에 결집한 한 나라와 닐강계곡에 형성한 또 다른 나라가 창건되여 제각기 왕국을 이루었다. 아마도 그외에도 크고작은 여러 왕국들이 그 지역에 생성하고있었을것으로 보인다.

B.C. 2925년경에 메네스(Menes)왕의 통치로 인하여 에짚트의 모든 잡다한 왕국들이 하나로 통일되여 최초로 에짚트의 안정된 제1왕조를 창건했다.

메네스왕이 창건한 제1왕조이후부터 에짚트의 왕조는 약 3 000년동안 계속되였는데 B.C. 332년에 이르러서 제30왕조를 마지막으로 기나긴 에짚트의 왕조력사는 마침내 끝이 났다. 에짚트의 력사적기술에는 이 마지막 제30왕조의 끝을 《파라오왕시대의 마지막왕조의 끝》이라고 기록하고있다. 왜냐하면 파라오왕이라는 명칭은 에짚트왕조시대에 있어서 모든 왕들에게 공동으로 통용되는 대명사로서 유일한 고유명사이기때문이다.

우의 3천년 파라오왕조를 력사가들은 고왕조시대, 중왕조시대, 신왕조시대로 구분한다.

침략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후에 에짚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봉기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또다시 새로 에짚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창건했다. 새로 창건한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약 250년동안 에짚트의 또 하나의 왕조국가를 존속시켰다. 새로 시작한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행정과 농업의 관개사업 등 큰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때는 벌써 실질적으로 로마제국이 에짚트를 손안에 넣고 지배하고있는 암담한 형편에 처해있었기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B.C. 48년에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마지막왕인 아울레테스왕이 죽으면서 그의 아들과 딸(클레오파트라)에게 정권을 공유하도록 넘겨주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동생을 제치고 적극적이고 보기드문 절세미인으로서 야심을 품고 에짚트의 녀왕으로 등장했다.

B.C. 47년에 로마의 황제 케자르가 에짚트에 와서 잠시 머물러있는 기회를 리용하여 클레오파트라녀왕은 꺼져가는 등잔불같은 에짚트의 운명을 되살릴 야망을 품고 케자르황제에게 접근하여 미인계전술로 닐강을 동반유람하면서 로마황제를 유혹했다.

그리하여 케자르황제는 절세미인 클레오파트라녀왕의 유혹에 빠져 달콤한 련애를 즐기였다. 케자르황제가 얼마후에 에짚트를 떠나 로마로 돌아갈 때 놀랍게도 클레오파트라녀왕은 이미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있었다.

그녀의 배속에는 케자르황제의 아들이 자라고있었지만 B.C. 41년에 케자르황제는 정적에 의해 암살로 쓰러지고말았다. 케자르황제가 죽은 후에 클레오파트라는 또다시 로마의 총독 안토니우스와 뜨거운 련정을 맺고 에짚트녀왕의 왕위를 보존하려고 온갖 힘을 기울였다는 비사가 전해지고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총독은 그의 경쟁자이며 정적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쫓기는 비운의 신세가 되였다. 안토니우스총독과 클레오파트라녀왕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잡혀서 비참하게 죽는것보다는 차라리 용감하게 스스로 독사에 물려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드디여 B.C. 30년 8월에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클레오파트라녀왕의 죽음은 에짚트력사에 있어서 모든 왕조의 마지막왕의 죽음이 되였다. 클레오파트라녀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대에짚트의 길고긴 고대력사는 사실상 완전히 끝났고 에짚트의 왕조력사도 마지막장을 기록했다.

체스꼬 뮤지컬 《클레오파트라》는 2002년 체스꼬에서 초연 당시 55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클레오파트라영화 《반지의 제왕》 3편은 상영시간 3시간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의 역을 맡고 리처드 버튼이 안토니우스의 역을 맡았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이 영화는 옛날 그 당시 호화로운 에짚트 클레오파트라녀왕의 왕궁생활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잘 보여주고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로마제국의 총독임을 완전히 잊고 막무가내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으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미적매력을 십분 발휘하여 에짚트력사에 있어서 뚜렷하게 부각된 녀왕으로 기억되고있다.

3 000년동안 계속된 에짚트의 력사가운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클레오파트라이외에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성서중 《구약성경》에 있는 유태인들의 에짚트탈출기력사이야기이다.

구약성경 에짚트탈출기 5~14장에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하여 에짚트를 탈출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력사와 시대적배경은 에짚트왕조 제20왕조 람세스2세가 통치하던 때인 B.C. 1279~1213년경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전해지고있다.

하지만 학자들간에 정확한 년대에 대하여 약간 차이가 있다. 구약성경학자들은 요세프가 에짚트로 팔려간 때는 B.C. 1854년경이며 야꼬브의 식구 70명이 기근으로 에짚트로 이민을 간 때는 B.C. 1834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의 에짚트탈출사건은 B.C. 1444~1404년경으로 추정되고있다.

에짚트탈출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구약성경은 신화적표현으로 가득차있다. 홍해를 륙지처럼 걸어서 건너갔다는 기적이야기, 10가지 재앙이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또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져서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았다는 기적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신화적표현방법이 아니고서는 고대력사를 후대인에게 전달할수 없기때문에 신화의 형식을 통한 문화적서술방법을 사용했는지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리상적이며 또는 신화를 통한 신학적해석방법을 후기에 력사적으로 발전시킨 뜻깊은 산물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기적에 관한 기록들은 력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구전을 통하여 오래동안 전해내려온 이야기들을 후세에 사람들이 문화적이며 상징적서술방법으로 기록한 《신화화한 이야기》들로 풀이되기도 한다.

 

 

      에짚트침략에 활보하는 서방문명 제국주의발자취

 

에짚트는 인구가 6 700만(2000년현재)이며 나라의 크기는 조선반도의 약 5배에 달하는 넓은 땅을 가지고있으나 대부분이 광대한 사막지대로 되여있어 유명하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93%이고 그리스도교는 7%이다.

에짚트는 3 000년의 왕조시대가 끝난 후에 로마, 그리스, 아랍, 뛰르끼예,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 렬강들의 지배를 오래동안 받았다. 서방강대국들의 침략의 발자취, 이슬람문명의 흔적 그리고 오늘날 미국의 지배세력이 에짚트를 괴롭히고있다.

빈곤과 정치적혼란으로 뒤엉킨 나라의 모습이 바로 오늘 에짚트가 당면하고있는 현실이다.

클레오파트라녀왕이후 로마제국이 B.C. 30년에 에짚트를 침공하여 A.D. 395년까지 430여년동안 침략통치를 했다. A.D. 313년은 세계력사에서 대변혁의 해였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것을 계기로 하여 세계력사는 급변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정책이 발표되여 그리스도교의 발전이 공식화되였으며 그로 하여 에짚트는 초기 그리스도교교부들의 적극적인 활동무대로 되였다.

콘스탄티누스 로마황제가 4세기에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이동한 후 로마제국은 분렬되여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졌다. 에짚트는 처음에 갈라지기 전에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있다가 갈라진 이후부터는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는 운명에 놓이게 되였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의 지배도 끝났다. 비잔틴제국의 군대는 아라비아의 침략군과 3년동안의 치렬한 전쟁을 하다가 패배하였다. 비잔틴제국은 246년동안 에짚트를 통치하다가 통치권을 이슬람에게 빼앗기고 7세기에 에짚트에서 떠나갔다.

드디여 에짚트에 아랍화시대가 도래했다. 에짚트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되였다. 에짚트인들은 꼬쁘트계그리스도교(동방그리스정교회)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모두 개종했으며 아랍인들이 대거 에짚트농촌으로 정착했다. 8세기부터 에짚트의 공용어는 아라비아어가 되였다. 이 과정에 한때 에짚트의 꼬쁘트계그리스도교인들이 아랍종교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이것은 곧 진압되였다.

969년에 아랍계파티마왕조가 에짚트를 통치하면서 순니파를 강화하여 아즈하르사원을 건설했다. 1169년에 살라웃단왕조가 에짚트를 통치하면서 십자군을 막기 위하여 군대를 재편성하고 수리아와 련합하여 순니파의 위력을 과시하고있었다.

1250년이후 에짚트를 통치하는 아랍통치세력은 바리 맘루크세력(1250~1390)과 부르지 맘루크세력(1382~1517)으로 분렬되여 2원화된 세력구조가 형성되였다. 분렬되기 이전의 이슬람세력은 십자군과 몽골인들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강력했지만 군벌의 세력다툼과 왕조의 말기현상으로 경제적혼란이 극심해지면서 이슬람의 통치기능이 점차 쇠퇴하였다. 이슬람은 1517년에 에짚트통치를 마감하게 되였다.

1517년에 에짚트는 뛰르끼예 오스만제국의 속국이 되여 오스만총독의 통치를 받게 되였다. 이때부터 에짚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뛰르끼예의 이스딴불로 바뀌게 되였다. 오스만총독은 초기에는 중앙집권체제를 활용했으나 17세기 후반부터는 징세청부제도를 도입하여 암루크층을 내세워 농촌의 지배세력으로 만들었다. 오스만제국의 총독은 뒤로 물러서서 명목상 총독의 역할을 하고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암루크층은 토착세력화가 되여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였다.

1798년에 프랑스의 나뽈레옹이 에짚트를 침공하여 3년동안 통치했다. 나뽈레옹은 에짚트에 근대화한 국가를 건설할것을 원하면서 알바니아인용병대를 에짚트에 끌어들였다. 1805년에 나뽈레옹은 에짚트에서 퇴각하면서 에짚트통치권을 알바니아인 메메트 알리에게 위임했다.

메메트 알리는 뛰르끼예의 오스만제국에 뿌리를 두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뛰르끼예의 암루크층의 오래된 통치형태의 잔재를 일소하고 토지조사와 전매제도도입 그리고 근대공장설립, 징병제실시, 기술학교설립 등 신흥사업정책을 실시했다.

1840년에 메메트 알리는 런던 4개국조약을 체결하여 에짚트 국내시장을 유럽에 개방함으로써 그 대가로 에짚트의 공식총독의 위치를 굳히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데 성공했다.

프랑스와 메메트 알리는 에짚트를 침략통치하는 기간에 에짚트를 유럽의 정치무대에 끌어올리는데 공을 세웠다. 에짚트의 총독이 된 메메트 알리는 팽창주의와 치부를 마음껏 즐겼으며 이로 인하여 에짚트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되였다.

1848년에 메메트 알리총독이 죽은 후 그의 손자들인 사이드 파샤와 이스마일 파샤가 후계자로 되여 에짚트를 통치했다. 이들은 자유주의경제체제를 원칙으로 하여 수에즈운하를 개통하는 새로운 정책을 실시했다. 1869년에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였다. 이때 영국은 수에즈운하건설리권때문에 극구 반대했지만 프랑스와 오스만제국의 지지후원으로 파샤총독시대에 개통되였다.

메메트 알리총독때와 마찬가지로 파샤정권의 부패무능한 정치로 하여 1876년에 에짚트는 재정적으로 파탄에 이르렀다.

에짚트는 재정파탄으로 국제관리하에 놓이게 되였다. 유럽렬강들은 에짚트의 부실정권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1879년 에짚트가 국가채무와 내전으로 인하여 시달리게 되자 영국은 파샤총독의 권한을 종결시키고 1882년에 에짚트의 내란을 틈타 빚을 탕감해준다는 명목아래 에짚트를 점령했다. 1914년에 영국은 에짚트를 영국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800년대초부터 길고긴 오랜 세월동안 뛰르끼예 오스만제국과 프랑스, 영국 이 세 나라들은 에짚트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서로 치렬하게 경쟁했는데 결국 영국이 차지한것이다.

영국의 보호령이 된 에짚트인들은 유사이래 처음으로 서방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는 항쟁을 일으켰다. 에짚트인민의 항쟁에 부딪친 영국은 할수없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독립을 허락했다. 1922년에 영국은 에짚트의 독립을 형식상 승인했다.

하지만 영국은 결코 에짚트통치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1936년에 독립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영국ㅡ에짚트군사동맹조약》을 런던에서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

ㄱ. 영국군은 수에즈운하에 계속 주둔하며 치외법권을 갖는다.

ㄴ. 20년의 기한부로 영국군은 수에즈운하를 관리하고 그 지역에 주둔한다.

ㄷ. 영국군은 에짚트령내에서 유사시 자유롭게 군사작전을 전개할수 있다.

ㄹ. 수단과 에짚트사이에 자유로운 이주와 왕래를 보장한다.

영국은 이와 같은 부당한 조건하에서 진정한 독립이 아닌 형식상의 에짚트독립을 허락했던것이다. 영국이 부당하게 에짚트와 맺은 《영국ㅡ에짚트군사동맹조약》은 오늘 미국이 조선반도 남쪽에 60여년동안 주둔하고있으면서 남《한》과 맺은 이른바 《한미군사방위조약》의 내용과 흡사한것으로 나타났다.

 

 

      에짚트의 혁명가로 등장한 나쎄르대통령

 

부당한 조약을 맺고 에짚트를 지배하고있는 영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그 조약의 페지를 요구하는 국민운동과 대지주 및 외국자본에 항거하여 싸우는 농민, 로동자들의 투쟁이 에짚트에서 점점 격화되고있었다.

1956년 1월에 나쎄르는 일당정치체제하에서 이슬람교를 공식종교로 삼는 사회주의아랍국가를 표방한 에짚트헌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6월에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99%의 득표를 얻어 헌법이 승인하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나쎄르대통령은 1958년에 아랍세계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수리아와 에짚트 두 나라의 합병에 성공하여 아랍련합공화국을 창건하여 새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였다. 하지만 1961년에 수리아내부에서 발생한 쿠데타로 알바련합공화국에 대한 나쎄르대통령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나쎄르대통령은 에짚트혁명의 최고기수가 되여 옛 헌법의 페지와 농지개혁 등을 통하여 친영국적지배세력을 척결하고 에짚트의 민족적자립과 민주주의국가창건을 위하여 사회개혁사업을 전개하여 완수했다.

나쎄르대통령은 영국지배세력의 완전한 철수목표를 달성했으며 또 유럽과 미국의 군사적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과 긴밀한 련계를 맺고 비동맹국창설을 추진했다.

1956년 7월에 나쎄르대통령은 외국자본이 최대의 소유주로 된 수에즈운하의 운영권을 취소하고 에짚트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나쎄르대통령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에짚트의 주권을 아랍세계를 향해서뿐만아니라 전세계를 향하여 명확히 선포했다.

이와 같은 나쎄르대통령의 혁명운동으로 인하여 아랍세계에서 민족운동이 점점 격화되는것을 보고 깜짝 놀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이 세 나라는 1956년 10월에 에짚트에 대한 군사적침공을 감행했다. 이것이 《제2차 중동전쟁》이였다.

하지만 에짚트국민의 굳게 결속된 저항속에 온 아랍과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에짚트에 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이로 인하여 3국의 침공은 물거품으로 끝나고말았다.

 

 

      미국의 침략의도 부상

 

그후 곧장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1957년 미국은 아랍세계에 대한 침략의 속심을 숨김없이 드러내였다. 미국은 이른바 《아이젠하워독트린》이라는것을 들고나와 아랍세계에 대한 저들의 군사적개입을 로골적으로 시사했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적개입에 대한 아랍나라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1958년에 에짚트와 수리아합병은 실패했지만 유사시 동조와 결합의지는 굳건했다. 한편 이라크에서는 혁명이 발생했다.

요르단, 레바논에서도 대중의 반영반미봉기가 발생하고있었다. 뿐만아니라 예멘에서 혁명운동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온 아랍나라들의 자주화민주독립운동이 서로 결부되여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쎄르대통령은 아랍계구성원들의 일체성을 중요시하여 《아랍민족주의》를 꿈꾸었다. 나쎄르대통령은 에짚트의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온 아랍민족을 향해 해방운동의 중요성을 상기시킴으로써 앞으로의 혁명을 구상하고있었다.

나쎄르대통령은 에짚트남부의 시골에서 로동자의 아들로 태여나 8살때 어머니를 잃었다. 어린 나쎄르는 카이로삼촌집에서 학교를 다니고있었으므로 어머니가 죽은것을 모르고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린 나쎄르는 영국부 감옥에서 막 풀려난 삼촌과 함께 유태인 9가구가 사는 건물에서 방을 얻고 학교에서 다니고있었다. 중학시절부터 민족운동에 참가하면서 언제나 반영국가두시위에 동참했다. 그러던중 어느 시위에서 일격을 맞아 이마에 흉터가 생겼다. 그때 생긴 그 흉터는 일생동안 나쎄르의 얼굴에 남아있었다.

나쎄르는 사관학교졸업후에 수단에서 근무했으며 사관학교 교관이 되기도 했다. 1948년의 《제1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나쎄르청년장교는 사명감을 깨닫고 장교단비밀조직을 결성하는데 가담했다. 1952년에 쿠데타에 성공하여 에짚트의 낡은 왕조의 봉건주의친영국적잔재를 제거했으며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나쎄르대통령의 업적은 실로 대단했다. 이전 쏘련의 원조로 건설한 아스완땜을 1968년에 가동시켜 20세기의 현대적생활방식을 도입했고 산업화도 촉진했다. 토지개혁, 부패척결, 녀성들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정책을 주장, 외국세력이 차지하고있던 정치, 경제적리권을 모두 되돌려받았을뿐만아니라 외국인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나쎄르대통령은 첫째, 에짚트혁명을 주도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둘째, 팔레스티나해방기구를 설립했다. 셋째, 세계적인 비동맹국기구설립에 참가했다. 넷째, 반식민동맹과 범아랍주의를 평생동안 제창했다. 다섯째, 비록 수리아의 쿠데타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에짚트ㅡ수리아공화국》을 창건하여 놀라운 력사를 남겼다.

나쎄르대통령을 괴롭히는 반대세력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리스도교 꼬쁘트교도들, 유태인, 기존기득권세력, 군부의 파벌, 땅을 빼앗긴 지주들 그리고 끊임없는 영국의 분렬공작과 미국의 정치적압력 등이 평생 나쎄르대통령을 괴롭히고 협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쎄르대통령은 18년동안 에짚트의 자주화를 생명으로 하는 혁명적지도력을 발휘했다. 에짚트에서뿐만아니라 아랍세계전역에서 나쎄르대통령은 카리스마적지지를 얻고있었다.

 

 

      나쎄르대통령의 마지막활동

 

1967년 10월 29일에 돌발한 《제3차 중동 6일전쟁》은 전아랍세계에 분노를 일으켰으며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날 밤 자기 자녀의 생일축하연에 참석했던 그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했다는 급보에 접했다. 이틀뒤 프랑스와 영국군의 비행기가 에짚트비행장을 일제히 공격했다. 뿐만아니라 이스라엘군은 선제기습공격을 강화하여 시나이반도의 샤름앗사이호까지 점령하여 에짚트공군은 사실상 전멸을 당할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정세는 급격히 악화되여 에짚트륙군이 수에즈운하에서 퇴각하게 되였다. 이스라엘이 비밀로 미리 준비한 기습작전에 의하여 개전 6일만에 에짚트군은 손을 쓸 사이도 없이 허무하게 패전의 쓴잔을 마셔야만 하였다.

패전의 운명에 처한 나쎄르대통령은 책임을 통감하여 국회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나쎄르대통령을 지지하는 대중적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국회는 투표에서 대통령의 사표에 반대하여 대통령직을 계속하게 하였다.

한편 쏘련은 파괴된 에짚트의 모든 전쟁장비들을 즉각 교체하기 시작했고 에짚트군의 포대를 엄호하여 수에즈운하를 따라 지대공미싸일을 설치하도록 지원했다. 1970년에 미국은 자기의 본색을 또다시 나타내는 정치적기만극을 연출하면서 에짚트에 《에짚트ㅡ이스라엘평화협상》을 하도록 제안하였다.

나쎄르대통령은 에짚트문제뿐만아니라 팔레스티나문제도 동시에 군사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을 설정하고 팔레스티나게릴라간의 충돌사건을 우선 수습하려고 심혈을 기울이며 동분서주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1970년 9월에 사망하였다.

나쎄르대통령은 아랍인들의 영웅이였다. 그는 에짚트와 아랍《자주권》의 상징적의미를 지니고 아랍인들의 가슴속에 《아랍의 꿈》을 심어놓고 떠나갔다. 나쎄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속에서 그의 뒤를 이어 자살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나쎄르대통령은 아랍인들의 영웅적지도자였으며 그의 카리스마적지도력은 아랍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다.

나쎄르는 에짚트인들이 수천년동안 외세에 짓밟혔던 민족의 비운을 끝장내고 민족의 존엄성을 되찾아준 에짚트력사에 처음 나타난 지도자였다.

 

 

      나쎄르의 뒤를 이은 사다트

 

나쎄르대통령이 사망한 후에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사다트로 말하면 1950년대에 청년장교들이 혁명운동을 일으킬 때 나쎄르와 함께 가담한것으로 하여 두사람은 피로 맺은 동지였다. 하지만 동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동지를 배반하는 길로 나갔다.

1970년 10월에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나쎄르대통령이 창건한 《아랍사회주의련합》을 전격적으로 불법화하고 민족보다 자기자신의 지도체제강화를 위해 권력자로서 행세하였다.

사다트는 1973년에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사나이반도의 일부분을 되찾아 영웅으로 받들리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다트대통령은 1977년 11월에 아랍세계에 있어서 원쑤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친선방문하여 이스라엘과의 평화정책을 위한 비밀토의를 하였다.

1978년 9월에 사다트대통령은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통령의 휴양지인 캠프 데이비드에 가서 이스라엘의 총리 베긴과 만나 굴욕적인 평화협정인 《캠프 데이비드조약》을 맺었다.

사다트대통령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대하여 전체 아랍세계는 물론 쏘련 등 동유럽나라들의 반대와 비판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다트는 1979년 3월 26일에는 아랍력사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서방세계에서는 사다트대통령의 인기가 하늘높이 떠올랐지만 에짚트와 아랍세계에서는 굴욕적이며 매국적인 평화협정을 반대하면서 사다트대통령을 규탄하는 대조적현상이 일어났다. 뿐만아니라 국내의 경제위기와 민심의 악화 등으로 인하여 사다트대통령의 인기는 급격히 땅바닥에 떨어져 위기에 봉착하게 되였다.

1981년 10월 6일에 《에짚트ㅡ이스라엘전쟁》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가한 사다트대통령은 의장대의 사열을 하던중 회교극단주의자에 의해 피살당해 현장에서 쓰러졌다.

사다트대통령을 향하여 이슬람이 총탄을 쏜 그 진짜리유가 무엇일가? 그 리유는 매우 간단하다. 1978년에 캠프 데이비드에서 맺은 협정때문이였다. 《에짚트가 시나이반도를 되찾는 대신에 이스라엘에 불법적으로 점령한 팔레스니타땅을 이스라엘의 땅으로 인정한다.》

사다트는 팥죽 한그릇에 팔레스티나민족을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팔아넘기는 용서받을수 없는 죄를 범했기때문에 아랍국가들의 공분에 의하여 죄값을 치렀던것으로 평가되고있다.

 

 

      무바라크대통령의 30년집권

 

사다트정권에서 부대통령이였던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암살당한 후 즉시 무임승차로 대통령이 되였다. 무바라크는 5선대통령으로 2011년까지 30년동안 집권하게 될것이다. 그의 임기가 끝나면 아들 가말 무바라크(Gamal Mubarak)에게 정권을 인계할것이라는 여론이 정론처럼 전해지고있다.

오늘 무바라크대통령은 자신의 30년 장기집권에 대하여 미국이 간섭하는데 대해서 몹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있다. 그래서인지 무바라크대통령은 세계경제포럼회의에 참가하여 지금까지 들어볼수 없었던 놀라운 발언을 했다.

《나는 미국이 핵정책에 있어서 이중기준을 사용하고있는것을 봤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핵보유를 묵인하면서 이란의 핵프로그람을 문제삼는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바라크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미국이 듣기 거북한 발언을 계속 서슴없이 했다.

《미국은 앞으로 다자주의와 국제법을 존중하여 일방주의를 끝내는 세계를 만들어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무바라크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샤론총리가 까히라를 방문하도록 초청하여 량국력사상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는 등 갈지자외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무바라크대통령의 발언과 행동의 변화는 에짚트내부의 정치상황의 변동에 따라서 이랬다저랬다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하였다. 하지만 2008년 1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회가 《가자지구쪽 국경통제를 에짚트가 제대로 완전히 개선할 때까지 미국이 약속한 1억US$ 군사원조를 보류한다.》라고 발표했다.

무바라크대통령은 즉각 다음과 같이 미국을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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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에짚트의 존엄성은 이 세상의 모든 재화를 합친것보다 더 중요하다. 원조를 미끼로 하여 에짚트의 내정에 간섭을 하는것은 용납할수 없다.》

무바라크대통령은 미국을 향하여 전에 볼수 없었던 강력한 비난을 했다.

이 시대에 일어나고있는 에짚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희망적인 부분들도 엿보인다. 그 징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까히라발 《련합뉴스》에 의하면 무바라크대통령은 원자력발전소건설을 조만간 추진할것을 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또 동시에 지역비핵화문제를 언급하면서 이스라엘의 핵무기해체를 요구했다. 그리고 후계자로 부상하고있는 무바라크대통령의 아들도 에짚트의 핵발전을 적극 주장하고있다고 미국의 언론은 보도했다.

둘째, 부쉬에게 신발투척으로 아랍의 영웅이 된 문탄다르 알자이지는 에짚트 까히라에 본사를 두고있는 TV방송사의 기자이다. 이 사건은 에짚트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아랍인들의 자랑스러운 사건이 되였다. 무바라크대통령에게도 향후 큰 전향과 변화가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들도 나오고있다.

신발투척사건이 발생하기 바로 며칠전에 에짚트사람들은 반미시위를 하면서 《부쉬 오지 마》라는 구호를 목청높이 웨쳤다. 그러니 앞으로 부쉬는 영영 에짚트에 가지 못하게 되였다.

미제국주의침략에 시달려온 에짚트의 지도자들은 오늘의 곤경에서의 출구를 찾아나서고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산복합체가 핵과 미싸일을 독점하고 횡포하게 날뛰고있는 아랍세계의 캄캄한 어두움속에서 에짚트가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품고 멀고먼 동방의 새별을 찾아나서고있는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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