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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대지의 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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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194회 작성일 21-12-3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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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17년이 지나 새 고장에서


4


명숙은 워낙 낮잠이라는것을 몰랐거니와 새 고장에 온 첫날의 흥분상태로 하여 쉬지 않고 일어나 집안팎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다음 대문을 열고 나갔다. 집뒤쪽에 큰 건물이 솟아있는데 문화회관이였다. 명숙은 목도리를 감고 문화회관마당으로 나가보았다.

점심시간이 지나 농장원들이 작업반으로 나가기도 하고 리소재지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이 왔다갔다했지만 누구도 명숙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직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것이다. 이 사람들과 이제부터 낯을 익히고 같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명숙은 자기를 무심하게 대하는 그들이였지만 벌써 애정이 가는것을 어쩌지 못했다.

문화회관앞 고성기에서 명숙이가 좋아하는 노래 《해바라기의 노래》가 울려나와 그는 속으로 따라불렀다. 회관앞에는 당 제6차대회를 높은 정치적열의와 빛나는 로력적성과로 맞이할데 대한 구호들과 선전물들, 새로 나온 영화를 소개하는 간판이 나붙어있었다.

리소재지마을은 도로들이 포장되고 단층기와집들과 2층문화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깨끗하고 현대농촌맛이 두드러졌다. 상점앞을 지나니 대수로를 건느는 다리가 나졌다. 다리를 건너가자 중학교와 소학교가 있고 탈곡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살림집들이 꽉 들어차다싶이 한 밋밋한 언덕, 그 언덕은 높아지다가 불시에 끊어졌으며 그밑으로는 논벌이 아득히 멀리까지 펼쳐졌다.

하늘은 파랗게 개여있었다. 해볕이 마을의 살림집들과 커다란 탈곡장지붕에 쏟아져내리고있었다. 바람은 맵짰으나 해가 비치고있어 명숙은 머리에 썼던 목도리를 뒤로 제끼고 목과 어깨만을 감쌌다. 그는 마을로 난 좁은 길을 걸어들어갔다. 집들은 이 등성이에 몰켜있는데 담장으로 에워싸여있었다. 모두 일을 나가고 길은 조용했다.

명숙은 문득 경사진 길 웃쪽에서 풍뎅이를 쓰고 무릎까지 오는 두툼한 솜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두팔을 휘―휘― 내저으며 제법 패기있게 걸어내려오는것을 보았다. 키는 크지 않으나 얼굴이 넙적하고 몸이 다부졌다. 풍뎅이밑으로 흰 머리카락이 보이고 구레나룻이 희슥희슥했다. 얼굴은 추위때문인지 붉게 달아올랐고 코끝에는 코물이 매달려있었다. 그 코도 붉은빛이였다.

명숙은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할아버지.》

로인의 눈물이 질적한 눈이 금시 떼꾼해졌다.

《어, 누군가?》 가늘게 떠는 고음으로 묻는다.

《낯이 설구만.》

《저는 오늘 왔습니다.》

《음, 우리 농촌에 진출해나온 모양이구만?》

명숙은 할아버지의 모습과 말하는 품이 웬일인지 재미나게 느껴졌다. 패기있게 걸어오느라 했지만 로인은 비칠거리였고 지금도 몸을 온전히 가누지 못하는것을 보면 점심시간에 한잔 마신것 같았다.

《저는 여기 관리위원장으로 왔습니다.》

명숙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하얀 이가 해빛을 받아 눈부시였다.

《관리위원장이라구? 어데서 이렇게 인물이 환한 내인이 관리위원장으루 오셨소?》 하며 할아버지는 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이며 코물이며를 분주스럽게 씻었다. 《이거 첫대면에 실례하는군. 실은 친구가 생일날이라구 초청을 해서 갔다오는 길이요.》

《예, 좋은 일인데 무슨 실례가 되겠습니까?》

명숙은 더 밝게 웃었다.

《대낮에 취해서 다닌다고 주책없는 늙은이라구 할게 아니겠소. 한데 이보라구, 관리위원장동지!》

《동지》라고 부르는 소리에 명숙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였다. 로인이 우정 정중하게 부른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술에 취하기도 했겠지만 워낙 해학이 있는 할아버지 같았다.

《아니야, 웃지 말라구. 우리 잠정리의 웃어른이 아닌가. 참,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가… 아, 그렇지. 내 나이가 지금 일흔셋이요. 이 잠정리에서 태여나 여태 다른데를 가본적이 없구 내내 여기서 평생 농사를 지었지. 나는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개인가 하는것까지 다 알아. 이 잠정땅이 어떻게 변해왔는가 하는걸 알고싶거든 나한테 물으면 되오. 일두 많이 했구 겪은 일도 많소. 이 쌀고장에서 왜정때는 죽두 겨우 먹으며 살았다구. 지금이야 세상이 아주 달라졌지요. 기계루 농사짓지, 흰쌀밥을 먹지, 이 좋은 세상에서 난 부러운게 없구 걱정이 없쉐다. 년장자라구 잔치집이건 생일집이건 이 오만수를 빼놓지 않구 찾습네다. 내 그래 지금 어디 가서 좀 마시구 오는 길이요. 생일집에서 노래두 불렀소. 헤헤…》

《호호…》 명숙은 따라웃으며 《평생 농사를 지어오며 땀인들 오죽 많이 흘렸겠습니까. 이제는 년세도 많으시니 편히 쉬여야지요.》 하고 말했다.

《할아버지, 이 잠정리를 전에는 청룡리라고도 했다는데 여기서 무슨 룡이 솟아올랐다던지 하더군요.》

옆집할머니에게서 들은 소리였다. 그래 오만수로인에게 다시 묻는것이였다.

《옳습네다. 우리 잠정리는 이 넓디넓은 벌판에 두드러진 섬이나 같은데 그게 청룡 비슷하게 생겼다우.》 오만수는 손을 들어 큰 원을 그려가며 말했다. 《저기 높은데가》하며 그는 등성이가 차츰 높아지다가 우뚝 솟으며 절벽을 이룬 곳을 가리켰다. 《청룡의 대가리라우. 지금은 과수원이요. 그아래루 내려오면서 넓어진 등성이에 잠정리마을들이 몰켜있는데 이게 청룡의 몸뚱이요. 저쪽등성이가 낮아져서 벌판과 잇닿은데가 청룡의 꼬리인데 거기에 늪이 있소. 그 늪에 청룡이 꼬리를 담그고있지요. 아까 룡이 솟아올랐다고 하는건 틀린 소리웨다. 청룡이 저 늪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려다가 여기 벌판이 기름지고 여기서 나는 쌀로 지은 밥이 하도 맛이 있어서 그냥 넙적 엎드려서 잔등에 마을이 생기고 농가들이 자리잡고 사람들이 천년만년 잘살게 하려 했답데다.》

《예, 천년만년 잘살게 하려 했군요. 할아버지, 이제 더 좋아지고 더 잘살게 될겁니다.》

《암, 그래야지. 하지만 지금도 좋아.》

지난날 고생을 했고 또 지난 시기에 비해 지금 알곡생산이 높아지고 생활이 유족해졌으니 로인이 만족해하는것이리라. 하지만 오만수로인은 현재의 농장의 구체적내용을 알수 없을것이고 허명숙이 왜 이 고장에 관리위원장으로 왔는지 별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것 같다. 거나하게 취했으니 기분이 떠있는것이다.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 사십니까?》

《저 집이 바루 우리 집이요.》

《여기는 몇작업반마을입니까?》

《여기가?… 우리 집에서는 남새작업반에 다니는데?》

《그러니까 남새작업반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런것도 아니요. 농산5반사람들이 기본이요. 저기 저 기와집이 5작업반장의 집이요.》

《예, 그러니까 여기는 5작업반마을이군요?》

《동리가 좀 얼럭덜럭하오. 전에는 여기를 교항동이라 했소.》

《잘 알았습니다. 추운데 붙잡고 말을 시켜서 안됐습니다. 처음 오다보니…》

《난 몸이 훈훈하오.》

그는 풍뎅이를 벗어들기까지 했다.

《그럼 집에 가서 편히 쉬십시오.》

《그러지요. 수고하겠소.》

오만수로인은 답례를 하고 풍뎅이를 다시 쓰고서 집을 향해 골목을 걸어가는데 기분이 좋은지 흥얼흥얼 노래까지 불렀다.


에라 만수 풍년이로구나

두리둥둥 북소리는

풍년 불러서 흥이로다


허명숙은 웃음이 나오는 입을 손으로 막으며 가던 길을 계속하여 청룡의 대가리라고 하는, 등성이에서 제일 높은 곳인 과수원에까지 올라가보았다. 눈아래 아득히 펼쳐진 들판으로부터 맵짠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앙상한 사과나무가지들에 매달려 휘파람소리를 내였다.

등성이를 내려 다시 수로뚝우에 놓인 다리를 건너 리소재지마을에 이르렀다. 리당위원회는 벽에 하얗게 회칠을 한 아담한 기와집이였다. 리당비서 차성재가 누군가와 담화를 하고있었다.

《쉬지 않고 나오시오?》

차성재가 반기였다. 그리고 마주앉아있는 사람을 어느 작업반의 부락당비서라고 소개하였다.

부락당비서가 나가고 두사람이 마주앉았다. 어느새 해가 퍼그나 기울어 서쪽창문으로 들어온 볕이 장판바닥을 길게 비치고있었다.

《어떻게 할가요?》 차성재가 맑은 눈으로 명숙을 쳐다보며 물었다.

《래일 나 아니면 기사장동무와 같이 작업반들을 돌아보아야지요?》

《저는 방금 수로를 건너 거기에 있는 마을들과 과수원까지 올라가보았습니다. 과수원이 있는 언덕을 〈청룡의 대가리〉라고 하더군요.》

명숙이가 입을 가리우며 웃자 차성재도 같이 웃었다.

《허… 벌써 정찰을 적지 않게 했구만요.》

《비서동무, 이렇게 하는것이 어떻습니까? 작업반들에는 제가 혼자 나가보겠습니다. 작업반들이 〈청룡의 몸뚱이〉라고 하는 등성이에 집결되여있으니 나가보는것이 어렵지 않을것입니다. 당분간은 그렇게 작업반들에 나가서 실정을 료해한 다음 관리위원회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자고 합니다.》

차성재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도당책임비서동지도 관리위원장동무가 때묻지 않은 생신한 관점과 판단을 가져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말입니다. 오늘 저녁에 작업반장들을 다 불러서 관리위원회 성원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도록 합시다. 부임인사가 있어야지요. 그래야 관리위원장동무가 혼자 작업반에 나가도 몰라보지 않을테니까. 좀 있으면 해가 지고 하루일이 끝나니까 관리위원회에 가서 인사를 나눕시다.》

《녜, 그렇게 합시다.》 명숙은 이렇게 대답하고 계속하여 《저를 많이 도와주고 이끌어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이것은 진심으로 하는 부탁이였다. 처녀관리위원장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 리당위원장 라순돌의 방조가 없었더라면 명숙은 매우 힘들게 첫걸음을 떼였을것이다.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그는 정치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성장한 녀성일군이다. 하지만 당조직의 지도와 방조를 받아야 한다는 원리는 같은것이며 또 이 생소한 고장에 와서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수 없을것이다.

차성재도 허심하게 말했다.

《나도 여기 온지 몇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잠정농장 사람들은 우에서 도움을 받는데 버릇이 되여있습니다. 군에서는 우리 농장에 지원로력도 많이 보내주고있고 오전에 연유문제가 론의됐지만 사실 기계화수준이 높은 단위이니 연유도 다른데보다 잘 보장해주려 합니다. 리소재지마을을 현대적으로 꾸리고 2층살림집을 비롯한 문화주택을 짓는데도 군의 지원이 컸습니다. 이렇게 지원과 도움을 받는데 습관이 된 이곳 사람들은 쩍하면 군이나 도에 손을 내밉니다.》

명숙은 오전에 도당책임비서가 애로가 무엇인가고 묻자 기사장이 연유문제와 올해알곡생산계획이 높다고 제기했고 군경영위원장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던 일이 되살아났다.

차성재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잠정리는 다른 농장에 비해서 앞선축이고 생활수준도 괜찮으니 만족병에 걸려 더 전진하려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작년에 알곡생산계획을 넘쳐해서 분배를 많이 탔는데 올해에 다시 105프로 장성이라는 계획수자가 떨어졌으니 그래서 기사장동무도 당황해하는것입니다.》

명숙은 방금전에 만났던 오만수로인이 눈에 삼삼했다. 지금도 좋다고 하며 풍년가를 부르던 오만수에게서 만족병에 걸려 더 전진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농장의 모습을 볼수 있는것이 아닐가? 그 만족병이 기사장으로 하여금 그러한 제기를 하게 했을수 있다.

저녁에 허명숙은 관리위원회 성원들, 작업반장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차성재가 허명숙을 소개하고 힘을 합쳐 농장을 발전시켜나가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리고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을 한명씩 소개했는데 명숙은 해볕에 탄 그들의 적동색얼굴들이 하나같이 무뚝뚝하게 안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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