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2. 《우자마사회주의》를 지향했던 탄자니아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2. 《우자마사회주의》를 지향했던 탄자니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282회 작성일 22-02-05 03:35

본문

man.jpg
고 류태영 박사

《우자마사회주의》를 지향했던 탄자니아

 

아프리카대륙의 동남부 인디아양기슭에 자리잡고있는 탄자니아는 대륙부분의 탄가니카지역과 해안으로부터 36㎞ 떨어져있는 잔지바르지역(잔지바르섬, 펨바섬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15세기말부터 유럽식민주의자들의 침략이 시작되였는데 1890년에 탄가니카는 도이췰란드식민주의자들에게 강점되였으며 잔지바르는 영국의 식민지로 되였다.

그후 오랜 기간에 걸치는 외세의 침략과 식민지통치를 받아오던 탄가니카는 1961년 12월에, 잔지바르는 1963년 12월에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1964년 4월 26일에는 두 나라사이에 련합을 이룩할데 대한 문제가 합의되여 련합공화국이 수립되였다.

통합된 련합국가의 이름은 탄가니카-잔지바르련합공화국이였으며 그후 탄자니아련합공화국으로 개칭되였다. 초대대통령으로는 쥴리어스 케이 니에레레가 취임하였다. 두 나라의 통합과 련합공화국수립에 있어서 결정적역할을 한 인물은 물론 쥴리어스 니에레레였다.

1922년생으로 자니카부족의 족장의 아들로 태여난 니에레레대통령은 아프리카국민련합 즉 타누당(TANU)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적리념은 사회주의농업경제부흥에 있었으며 또한 120여개의 많은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것이 그의 꿈이였다.

탄자니아련합공화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한 니에레레대통령은 탄자니아식《우자마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쳤다. 《우자마》라는 말의 뜻은 우리 말로 가족애 혹은 동포애이다. 즉 동포애적사회주의를 뜻한다.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니에레레는 억압과 평화는 절대로 량립될수 없으므로 오늘의 세계에서 강대국들에 의하여 엄연히 현존하고있는 억압구조를 영속화시켜서는 안된다고 크게 웨쳤다.

 

탄자니아의 간추린 력사

 

탄자니아의 면적은 조선반도의 약 4.3배 되는 93만 9 719㎢이며 인구는 약 4 020만명으로 추산한다.

북쪽에는 케니아와 우간다가 린접해있고 서쪽에는 르완다, 부룬디와 민주꽁고공화국이 있으며 남서부는 잠비아, 말라위, 모잠비끄 등 여러 나라들과 린접해있다.

탄자니아는 자연과 지리에 있어서 세계적인 명승지들이 가득차있는 나라이다.

대략적으로 꼽아보아도 우선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쟈로산 (5 895m)에는 만년설이 있고 활화산과 분화구로 유명하다.

또한 중부지방에 광대한 평야가 있고 서부에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깊은 탕가니카호수가 있는데 수심이 1 435m이다.

또한 아프리카의 3대강인 닐강, 꽁고강, 잠베지강들의 발원지가 바로 탄자니아에 있다.

또한 탄자니아에는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초원과 수림이 있으며 2만 4 000㎢에 달하는 국립공원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희귀한 수천가지의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있다.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을 보유하고있는 가장 뛰여난 곳이 바로 탄자니아이다.

탄자니아협곡에서 약 200만년전의것으로 보이는 화석인류흔적이 발견되여 인류진화의 무대로 여겨지고있다.

B. C. 1000년경에 카프카스인종의 사람들이 북부에서 남하하여 흩어져 살았으며 A. D. 1년-1000년에 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반투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이 탄자니아에 정착하여 살았다.

1세기말경에 아랍, 페르샤세계와 동아프리카해안지대사이에 교역이 진행되였으며 이 시기에 중국의 도자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8세기에 아랍인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여 살면서 아랍어와 반투어가 함께 혼합된 합성어인 스와힐리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였으며 이슬람교문화와 스와힐리문화를 기조로 한 사람들에 의하여 형성된 도시가 번창하고있었다.

15세기에 이르러 뽀르뚜갈인들이 동아프리카에 출현함에 따라 아랍인들과 세력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1503년에 뽀르뚜갈은 잔지바르섬나라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아랍인들과 오만의 술탄이 동맹을 형성하여 뽀르뚜갈인들이 차지한 땅들을 빼앗음으로써 잔지바르는 오만의 보호령으로 되였다. 그후 아랍의 무역상들은 노예무역을 위하여 탄자니아 남서쪽까지 깊숙이 진출하였으며 이들은 1840년대초까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런데 1840년대말에 이르러 탄가니카와 잔지바르 등의 지역에서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 지역이 서유럽식민주의자들의 침략기지로 변하고있었던것이다. 탄가니카는 도이췰란드에 강점당하였고 잔지바르는 영국의 식민지로 되였다.

도이췰란드의 식민지로 있던 탄가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도이췰란드가 패한 후에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넘어갔으며 수십년동안 식민지통치를 받았다.

 

탄자니아련합공화국창건과 그후의 력사

 

1961년에 영국에서 독립한 탄가니카와 1963년에 역시 영국에서 독립한 잔지바르 두 나라는 같은 력사와 같은 운명의 공통점을 가지고있다.

1964년 4월 26일에 탄가니카와 잔지바르 두 나라는 련합하여 탄자니아련합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으며 니에레레가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67년에 니에레레대통령은 아루샤선언의 발표를 계기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사회주의경제체제를 도입하였으며 《우자마사회주의》제도를 창안하여 농촌의 사회주의화를 목표로 하는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니에레레대통령은 1977년 2월에 집권여당으로서 탄자니아혁명당을 창당하였으며 초대당총재로 취임하였다.

니에레레대통령은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식민지지배의 언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를 철페하고 스와힐리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으며 학교교육에서 단일국어로 규정하였다.

니에레레대통령은 《우자마사회주의》리념으로 통치하여 120여개의 서로 다른 종족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탄자니아를 사회통합에 성공한 아프리카유일의 국가로 되게 하였다.

니에레레대통령이 주장하는 아루샤선언과 《우자마사회주의》는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근로자이며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며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제국주의를 비호하는 사람들을 정치권에서 완전히 배제시켰다.

니에레레대통령은 이웃나라인 우간다의 친미독재자 이디 아민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지원하여 우간다의 좌익혁명을 성공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니에레레대통령이 추진한 《우자마사회주의》건설과정에 모든 기업들이 국유화되고 빈부의 격차가 줄어들었으며 민중의 보건, 교육조건도 전보다 향상되였다.

니에레레대통령의 탄자니아련합공화국의 창건과 《우자마사회주의》정책의 공적을 평가하여 국제사회계는 1974년에 그에게 네루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니에레레대통령은 아프리카에서 정치적안정을 이룬 국가를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였다.

하지만 니에레레대통령은 실패와 좌절도 겪었다.

니에레레정권이 사회주의를 지향해나가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은 사사건건 시비를 하며 봉쇄해나섰다.

외세는 의도적으로 본토와 잔지바르섬사이의 마찰을 조장하였으며 사회주의정권을 붕괴시키려는 반정부세력의 활동을 적극 부추기였다.

사회주의건설과정에 예상치 못한 난관들도 적지 않게 나타났으며 1979년에 있은 큰 홍수와 1980년에 들이닥친 심한 가뭄으로 농업생산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속에 1980년 10월 26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니에레레 대통령은 또다시 5년임기의 대통령직에 당선되였다.

하지만 니에레레대통령의 5년임기는 평온하지 못하였다.

잔지바르에서 탄자니아련합공화국에서의 탈퇴를 주장하는 친영국세력들이 고개를 들고 반정부활동을 더욱 로골화하였던것이다.

1982년에는 니에레레대통령의 《우자마사회주의》정치로선을 반대하는 우익집단이 탄자니아항공기를 랍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1983년에는 미국의 공작에 따른 일부 군인들에 의한 반정부쿠데타시도가 있었다.

이외에도 탄자니아국내와 국외에 둘러싸인 불안한 정세가 니에레레정권을 압박하였다. 그 배후에는 당시 랭전체제를 총지휘하던 미국과 옛 종주국들인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이 크게 작용하고있었다.

그러한 1985년 11월 5일에 니에레레대통령은 잔지바르출신의 알리 하싼 므위니부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고말았다. 이로써 《우자마사회주의》정권은 완전히 막을 내리였다.

그러나 24년동안이나 탄자니아를 이끌어온 《우자마사회주의》리념은 오늘도 제3세계나라 민중들의 가슴속에 깊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알리 하싼 므위니대통령 등장과 오늘의 탄자니아

 

대통령직을 넘겨받은 므위니는 1990년에 재선되여 1995년까지 10년동안 탄자니아련합공화국을 통치하였다.

그동안 탄자니아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한마디로 사회주의가 퇴보하였다.

집권기간 알리 하싼 므위니대통령은 집권당인 혁명당의 정책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당제를 도입하기 위하여 개헌을 진행하였다. 결과 12개나 되는 당들이 경쟁적으로 생겨나 정계와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편 알리 하싼 므위니대통령의 집권을 기다리고있던 국제통화기금(IMF)은 즉시 므위니대통령에게 사회주의제도를 포기할것을 강요하였으며 서방의 자본주의경제체제를 채택하는데 무조건 동의할것을 재촉하였다.

므위니정권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의 자본금이 홍수처럼 탄자니아로 밀려들어왔으며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농업과 산업의 90%가 개인소유로 다시 전환되고 탄자니아는 외국자본에 종속된 신세가 되고말았다.

또한 므위니대통령의 집권기간에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간의 종교적분쟁도 그칠새없이 일어나 사회적혼란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집권 10년동안에 사회주의제도를 완전히 망쳐놓은 알리 하싼 므위니대통령은 1995년 10월에 진행된 다당제대통령선거에서 락선되고말았다. 결국 사회주의정치체제를 붕괴시키고 자기가 도입한 다당제선거제도에 의하여 자기자신이 패한셈이다.

1995년에 탄자니아련합공화국의 제3대대통령으로 취임한 인물은 탄자니아혁명당출신인 벤쟈민 윌리암 음카파였다.

벤쟈민 음카파대통령은 사회주의정치체제를 완전히 다시 회복시킬수는 없었지만 총선에서 탄자니아혁명당이 186의 의석을 차지하도록 하는 성과를 올리고 혁명당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1996년에 벤쟈민 음카파대통령은 동아프리카의 좌익성향이 강한 우간다와 케니아 등 여러 나라들과 협력체인 EAC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1998년에 강대국의 시장경제체제가 약소국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연구를 위한 헌법개정위원회를 설립했을뿐아니라 집권당인 혁명당내부에서 헌법개정에 관한 백서를 발간하여 시장경제를 배격하는 개헌국면을 주도하였다.

벤쟈민 음카파대통령은 2000년 10월에 있은 대통령선거에서 5년임기로 또다시 재선되였지만 제2기 집권은 순탄치 못하였다.

외세의 사촉을 받은 분립주의자들이 탄자니아련합공화국의 한 련합체인 잔지바르에서 분립을 주장하여 정부의 큰 골치거리로 작용하였던것이다.

벤쟈민 음카파대통령은 고투속에서 10년간의 통치를 마감하고 2005년 12월에 있은 대통령선거에서 역시 혁명당출신인 자카야 키크웨테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탄자니아련합공화국의 제4대대통령으로 취임한 자카야 키크웨테 대통령은 탄자니아련합공화국의 창건자 니에레레의 혁명사상을 추종하는 개혁적인물로 평가되고있는데 그는 2010년에 진행된 대통령선거에서 또다시 재선되여 2015년까지 집권하게 되였다.

아프리카동맹 의장을 지낸바도 있는 키크웨테대통령은 빈곤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쓰고있으며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인 로선을 추구하고있다. 그는 미국이 짐바브웨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를 추진하고있을 때에도 미국을 향해 반대의견을 강하게 표시하였다.

현재 탄자니아내부에는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사이의 대립이 존재하고있다.

하지만 키크웨테대통령은 니에레레대통령의 집권시기에 종교적갈등이 없이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온 력사를 상기시키면서 종교간의 중재에 힘쓰고있다.

탄자니아의 지나온 력사를 마감하면서 세계화에 의해 초래된 탄자니아의 비극을 생동하게 묘사한 한 작품의 내용을 소개한다.

개봉 2달만에 수십만명의 관객이 모여들었다는 다큐멘터리 《다윈의 악몽》이라는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탄자니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름답고 큰 빅토리아호수가 있다. 이 호수에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무진장하여 호수가에 살고있는 원주민들은 자자손손 물고기를 잡는 어업으로 태평세월을 누리면서 평화롭게 살고있었다.

그런데 이 호수에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나타나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과학적실험이라는 리유에서 닐강의 거대한 농어를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빅토리아호수에 원래 살던 어종들은 거대하고 파괴적인 괴물에 의하여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되였으며 호수의 생태계의 파괴로 인하여 이 지역의 원주민어부들은 삶의 터전을 상실당하고 빈곤과 기아속에서 살아가게 되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농어의 살고기를 가공하는 대규모의 공장이 들어서고 이 공장에서 가공하여 생산된 농어는 고가의 상품이 되여 유럽과 미국으로 수출된다. 서방의 화려한 식품상점들에는 곱게 포장된 농어살고기들이 가득 쌓여있다.

한편 농어가공공장에서 버려진 생선의 대가리와 뼈는 해볕에 말려 공업용기름에 튀겨져서 원주민들의 주식으로 재활용된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농어를 운반하는 비행기들이 빅토리아호수로 돌아올 때는 반군에게 줄 무기들을 가득히 싣고 온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다윈의 악몽》은 제국주의세계화에 대한 악몽을 통하여 탄자니아의 《우자마사회주의》가 어떻게 붕괴되였는가를 적라라하게 보여주고있다.

한때 탄자니아는 7만 5 000명정도의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그후 외부의 압력과 비용을 리유로 1만명으로 감소되였다.

그러니 무자비하게 달려드는 제국주의침략앞에서 어떻게 《우자마 사회주의》를 지키고 성공시킬수가 있었겠는가.

자위적국방력이 없이는 사회주의를 지켜낼수 없다는것이 지난날의 《우자마사회주의》를 지향했던 탄자니아가 인류에게 주는 교훈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