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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8. 3천년력사 지켜온 에티오피아 미국에 시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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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436회 작성일 21-12-20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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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류태영 박사

2.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력사적교훈

 

□ 3천년력사 지켜온 에티오피아 미국에 시달리다


아프리카나라에서 10번째로 큰 나라인 에티오피아, 3천년의 력사를 가진 이 나라가 봉건황제국가에서 탈피하여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였으나 그 이후 이 나라도 역시 미국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있다. 에티오피아가 걸어온 력사를 간략하여 보기로 하자.

 

 

      에티오피아의 간추린 력사

 

에티오피아는 약 3 000년의 력사적기록을 가지고있는 나라로서 고대의 력사기록에 의하면 B. C. 10세기무렵 유태왕국의 솔로몬왕과 아프리카의 스바녀왕사이에서 태여난 메넬리크1세가 에티오피아왕국을 창건하여 초대황제가 되였다고 한다.

구약성경 렬왕기 상 10장에는 아프리카의 스바녀왕이 솔로몬왕과 상봉하여 값진 아프리카의 보화를 선물로 솔로몬왕에게 증정했고 솔로몬왕은 그녀가 요구하는것은 무엇이든지 다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에티오피아의 헌법은 솔로몬왕과 스바녀왕사이에서 태여난 메넬리크1세가 에티오피아를 창건하였다는 전설과 에티오피아왕국을 창건하여 초대황제가 되였다는 력사를 《신화가 아니며 력사적실사이다.》라고 규정하고있다.

그리고 메넬리크1세를 황제로 하여 시작된 에티오피아왕국의 황제계승을 3 000년동안 련속했으며 한번도 단절됨이 없이 1973년의 마지막황제인 하일레 쎌라시에1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는 전통도 력사적실사로 규정하고있다.

에티오피아의 고대전통에 의하면 팔라샤라고 부르는 유태교를 신봉하는 흑인유태교집단이 에티오피아에 살고있었는데 B. C. 300년경에 유태교선교사 성 프루티우스에 의하여 유태교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후에 들어서서 4세기에는 에티오피아의 에지나왕이 그리스도교를 에티오피아의 국교로 제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에티오피아의 《검은 유태교》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뿐만아니라 신약성경에도 있다. 사도행전(사도들의 전도 8장)에 에티오피아정부의 한 고관대작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태교의 절기례배를 드리고 마차를 타고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면서 마차안에서 구약성경《이사야》를 읽으면서 가고있었다.

그런데 이 고관대작은 가는 도중에 로상에서 뜻밖에 그리스도교 전도사를 만났는데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개종하여 유태교에서 그리스도교인으로 전환했다.

1800년대에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유럽렬강국들이 제정한 분할정책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식민통치를 받았다. 그런데 유독 에티오피아만은 3 000년력사에 있어서 한번도 식민통치를 받아본적이 없을뿐만아니라 황제의 통치권도 끊어지지 않고 1973년까지 지속되였다.

에티오피아사람들중에 유태인혈통을 보유하고있다는 사실에 대한 력사적으로 증명이 될만 한 사건이 1984년에 이스라엘에서 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대대손손 살고있던 《검은 유태인》들 20만명이 이스라엘에 집단으로 이주해왔다. 이스라엘로 이주한 에티오피아의 《검은 유태인》들은 1년간 이스라엘의 현대적사회학교육을 집단적으로 받은 후에 《검은 유태인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지금 살고있다.

우에서 인용한 구약과 신약의 성경이야기와 에티오피아의 《검은 유태교인》들의 이스라엘이민에 대한 이야기들을 근거로 하여 에티오피아는 서방의 그리스도교 문명국, 특히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는 특이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들중에 많이 있다.

이스라엘이 외국에서 유태인혈통을 불러들인것은 에티오피아에서만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이전 쏘련에 있는 유태계쏘련인들도 100만여명을 같은 해에 불러들였다.

이스라엘이 120만여명의 유태계외국인들을 에티오피아와 쏘련에서 불러들인 리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적리유가 절대로 아니며 또한 외국에서 기근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있는 혈통들을 고난에서 구출해내기 위한 자선의 목적도 절대로 아니였다.

이스라엘이 에티오피아와 쏘련에서 120만의 혈통을 불러들인 리유와 목적은 이스라엘이 총인구 500만이라는 적은 인구를 가지고는 팔레스티나와 대항하여 싸우는데 있어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때문에 이스라엘의 부족한 인력을 급히 보충하기 위하여 혈통이라는 명분으로 집단이민을 받아들인것뿐이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에티오피아의 관계를 종교적관점에서 본다든가 혹은 에티오피아와 미국과의 관계를 종교적측면에서 해석하는것은 력사를 외곡하는것에 지나지 않는다.

 

 

      에티오피아왕국의 시련

 

에티오피아왕국은 3천년동안 지속된 력사속에서 수많은 시련과 시대적변천과 빈번한 렬강들의 위협에 의하여 초래된 고난의 파도를 돌파해야만 했다. 때로는 고대에 발원한 큰 도시의 이름을 따 에티오피아라는 나라의 이름을 《악숨제국》이라고 고쳐부르기도 했다.

4세기경에는 그리스도교가 에티오피아의 모든 생활에 침투하여 국력이 강해져서 서쪽의 백닐강과 청닐강이 합류하는 지역까지 령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7세기에 이르러서 이슬람세력이 아라비아에 출현하여 공격적으로 대두했다. 이때부터 에티오피아ㅡ《악숨제국》은 시련에 빠져서 그리스도왕국이 3대종파로 분렬되기 시작했다. 이슬람교와 유태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3대종파가 부족간의 대립과 분쟁과 결부되여 사회적불안과 혼란이 수백년동안 반복되고있었다.

13세기 후반에 에티오피아왕국은 혼란과 불안속에서 황제의 지배권을 겨우 회복하기는 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끊임없이 출몰하는 이슬람의 토후들과 소왕국들과의 분쟁을 수백년동안 련속적으로 반복해야만 했다.

15세기에 사하라사막 이남지역에 《아달왕국》이 출현하여 여러 이슬람국들끼리 굳게 뭉쳐 보호협정을 체결한것은 에티오피아에 있어서 큰 위협이 아닐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 당시 《아달왕국》은 세계적인 강국인 오스만제국의 후원을 받으면서 에티오피아가 그리스도교국이라는 리유로 100년동안 전쟁을 했다. 에티오피아는 한때 패전의 위기에 빠졌다가 서방나라들의 원조로 겨우 승리하여 황제의 통치권을 이어나갔다.

한편 영국은 이때 에티오피아황제의 금관을 탈취했다. 그 당시 탈취한 금관은 영국의 박물관에 보존되여있다가 2008년에 에티오피아의 요청에 못이겨 돌려주는 사건도 일어났다.

1869년에 스에즈운하가 개통된 후에 영국, 프랑스, 이딸리아는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이슬람토후들을 보호령으로 만들어 식민지화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유독 에티오피아만 제외되였다.

그후 즉시 이딸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식민지화하려고 공격을 시작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메넬리크2세의 통솔하에 에티오피아는 총력을 기울여 싸워서 1896년에 이딸리아군을 물리쳤다. 이 전쟁을 《1차에티오피아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1935년에 이딸리아에 무쏠리니파시스트정권이 등장하여 또다시 에티오피아에 대한 침략을 감행했다. 이딸리아는 잠시동안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다. 이딸리아에 패전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쎌라시에황제는 급히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이 전쟁을 《제2차 에티오피아전쟁》이라고 부른다.

에티오피아를 점령한 이딸리아의 무쏠리니파시스트정권은 영국과의 전쟁으로 휘청거리고있었다. 그러한 사이에 에티오피아는 이딸리아를 물리치고 1941년에 다시 독립을 회복하였으며 5년동안 영국에서 망명중이던 하일레 쎌라시에황제는 에티오피아로 다시 돌아와 황제의 통치권을 지속했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쎌라시에황제는 통치권을 겨우 복귀하기는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타고 타오르는 혁명의 불길을 끌 권위와 능력을 이미 잃었으며 황제로서의 온전한 기능을 상실했다.

황제통치의 무조건적, 봉건적우월주의와 그리고 력사적으로 루적되여온 교회의 부정축재에 대한 농민들의 원한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고있었다. 또한 서민층의 인권회복에 대한 열망의 바람도 눈에 띄게 일기 시작했다.

3 000년동안의 황제통치의 장구한 력사성은 에티오피아인들의 큰 자랑이기는 하다. 하지만 다가오고있는 근로대중의 력사적변혁에 대한 불타는 열망을 그 무엇으로도 막을수는 없었다.

 

 

      에티오피아의 혁명의 시대

 

1941년에 에티오피아력사상 처음으로 변혁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영국에 망명했다가 돌아온 에티오피아의 마지막황제인 하일레 쎌라시에황제는 력사상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하여 에티오피아를 립헌군주국가로 변형시켰다.

그 결과로 립법, 사법, 행정의 3권분리법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절대권력을 장악하고있었다. 황제의 절대권력을 정점으로 한 귀족들과 종교의 상층특권계급은 봉건적인 토지제도에 의존하여 막대한 부를 누리고있었다.

에티오피아의 마지막황제는 시대적요구에 못이겨 용단을 내려 군주제도에 대한 변혁의 뜻을 대중에게 시사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아프리카에 독립의 시대가 찾아와 개혁의 물결이 파도치고있었기때문에 에티오피아의 마지막황제가 제시한 개혁안은 절대로 대중의 요구를 만족시킬수 없었다.

1974년에 군인들의 반란에 동조한 로동자와 농민, 학생, 교원들의 항의가 전국적으로 계속 확산되여나갔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근로대중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할수 없다고 판단한 마지막황제는 6개월이내에 보다 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대중적요구에 응하겠다고 발표하여 위기를 일시 피하려 했다.

이렇게 반체제운동은 이미 농촌까지 파급되여 전국적으로 지주들과 정부관리들이 대중에 의하여 추방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군부내에서는 《군사조종위원회》와 《혁명위원회》가 결성되였다. 《혁명위원회》는 특권계급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여 마침내 1974년 9월 12일에 와서 에티오피아의 황제를 페위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혼란속에서 에티오피아의 마지막황제인 하일레 쎌라시에황제는 누군가에 의하여 암살당하였고 1992년이 되여서야 황제의 시신이 발견되였다.

1974년 12월에 군부는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사회주의공화국》으로의 변혁의 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1971~1973년에 에티오피아 전지역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500만명의 리재민이 발생하고 실업자들이 증가하여 혁명운동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이 되고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군부를 중심으로 공화국이 수립되였다. 《림시군사평의회》의 의장으로 H.M. 멩기스또가 추대되였다. 군사평의회는 악질적대지주들과 부정축재로 부자가 된 정부의 고관들을 숙청하기 위하여 강권을 발동했다.

1977년에 사회주의적국가체제를 굳히고 1978년에는 이전 쏘련과 꾸바 등 사회주의나라들과 국제적으로 상호친선적련대를 강화해나갔다.

멩기스또의장은 만난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도시주민조직》과 농촌《집단농장》을 기반으로 하여 에티오피아의 사회주의국가건설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10년이 지난 1987년에 에티오피아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창건되였으며 초대대통령으로 멩기스또가 취임했다.

뿐만아니라 황제통치하에서 미국과 맺었던 여러가지 조약과 관계설정들을 일체 취소하고 파기하여 새로운 진로를 확실히 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멩기스또대통령에게는 넘기 어려운 커다란 난관이 기다리고있었다. 그 큰 난관은 무엇이였던가?

 

 

      사회주의에티오피아에 당면한 난관

 

첫째, 10년기간동안에 극심한 가뭄이 계속 닥쳐왔다. 1974년과 1980년에 이어 1987년에 세번째 련속된 대가뭄으로 인하여 만성적식량부족과 기아가 확산되였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새로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 있어서 큰 난관이였다.

둘째, 급진적인 사회주의변혁운동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과거의 기득권층의 불만이 쌓이고 또 사회주의적구조조정의 급진적변혁에 대한 무식한 일부 사람들의 인식부족 그리고 뿌리깊은 그리스도교적전통의 잔재들로 인하여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하고있었다.

셋째, 미국이 더 큰 문제로 등장했다. 미국은 에티오피아에 사회주의나라가 건설되는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에리트리아의 고질적인 오래된 분리주의자들이 잠자는것을 깨워일으켜 령토분쟁의 불을 다시 불게 하여 에티오피아와의 분쟁을 일으켰다.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통치하던 옛시절에 발생했던 에리트리아독립분쟁이 오랜 잠에서 다시 깨여나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 뒤에서 부추겼기때문이였다.

에리트리아는 력사적으로 뿌리깊은 분쟁지역이다. 에티오피아의 북쪽 홍해연안에 위치한 조그마한 지역이며 A. D. 900년부터 줄곧 에티오피아왕국과 련합을 이루어 자치권을 지켜왔다. 인구가 430만명이며 9개의 부족들로 구성된 에리트리아는 1800년대부터 에짚트, 이딸리아, 영국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이 침략하여 저들의 군사기지를 구축해놓은 상태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이 에리트리아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추천하여 1977년에 아프리카에서 53번째로 독립국이 되게 함과 동시에 또한 유엔의 회원국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이 그렇게 한 리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리유는 에티오피아를 괴롭히기 위한 미국의 음모에 있다.

1974년에 에티오피아왕정이 무너지고 사회주의혁명세력이 에티오피아에 새로 등장하는것을 보고 미국은 에리트리아를 성급하게 독립국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유엔에도 제일 꼴찌의 회원국으로 가입시켰다. 그것은 에티오피아에 대항하여 싸울수 있는 반대세력으로 에리트리아를 키워서 리용하려는 공작이였다.

인구 430만의 에리트리아에서 50살이하 남녀모두가 군인이다. 독립적신문과 TV는 존재하지 않고 친미적정보외에는 그 무엇이든 불법이며 법을 어기면 중범죄로 처벌을 받는다.

에리트리아를 독립시키고 군대를 무장양성하는 진짜리유와 목적은 에티오피아에 새로 등장한 좌파정부를 파괴시키고 나아가서 소말리아와 앙골라 등 이웃나라에 있는 좌파군들과 지역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미국을 위하여 대리전을 치르게 하기 위한 작전계획인것이다.

에티오피아는 면적이 조선반도의 5배정도이며 인구가 6 900만인 비교적 큰 나라이다.

멩기스또대통령과 진보진영은 뿌리깊은 3천년 봉건사회를 개조하여 력사이래 최초로 근로대중의 한을 풀어줄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사회주의적국가의 등장은 미국의 《눈에 든 가시》이기때문에 당장 제거의 대상이 되고만것이다.

 

 

      미국의 에티오피아사회주의국가 붕괴작전

 

멩기스또대통령이 정권을 새로 잡고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고있을 때 에티오피아의 내부는 매우 복잡했다. 민생문제의 해결과 개혁추진과정 등이 갑론을박으로 매우 복잡했다.

미국은 이 복잡한 틈새를 리용하여 1977년 7월에 소말리아의 우익군부를 동원하여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와의 국경분쟁지역인 오가덴을 침입하였다. 침입의 리유는 에티오피아경내에 살고있는 소말리아동족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아직 힘이 약한 에티오피아의 멩기스또대통령은 긴급조치로 1978년 3월에 쏘련과 꾸바의 지원군을 불러들여 소말리아침입군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88~1989년에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전역에 극심한 가뭄이 또다시 엄습하여왔다. 이로 인하여 멩기스또대통령의 개혁운동에 큰 차질이 생길수밖에 없었다.

기회를 노리고있던 미국과 친미우익반정부세력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력을 규합하여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다. 1989년부터 시작하여 에리트리아의 우익반에티오피아군과 그리고 에티오피아내부에서 형성된 친미반정부단체인 《인민자유전선》이 서로 련합하여 1991년에 멩기스또정권을 붕괴시켰다.

1974년에 에티오피아황제의 봉건주의왕권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신생국을 창건한지 17년만에 미국의 음모와 미국이 만들어낸 친미반군에 의하여 에티오피아는 황제의 봉건주의적착취가 아닌 현대판《봉건주의》인 미제국주의의 착취를 당하고있다.

 

 

      에티오피아 어디로 가고있는가?

 

미국은 9. 11사태이후 에티오피아를 중요한 동맹국으로 역할분담을 하도록 하면서 막대한 군사적지원을 제공하고있다. 현재 에티오피아는 미국에 의하여 잘 훈련된 20만명이상의 군대를 보유하고있다. 이로 인하여 에티오피아정부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있음을 자랑하고있다.

미국은 소말리아의 내전에 대하여 처음에는 소수의 군벌과 다수의 부족간의 싸움으로만 단순히 생각하고 소수의 군벌들에게 지원을 제공하고 그이상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슬람법정련대》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나중에 친미과도정부를 공격하여 수도 모가디쇼를 장악하는 등 이슬람세력이 소말리아를 장악하게 되자 미국은 에티오피아군을 소말리아에 투입시켰다.

미국은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인들이 당하는 고통 같은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다만 이슬람세력이라는 《귀신》만 보고있다.

에티오피아인들이 최악의 빈곤과 고난속에 살아가고있는 모습을 여러 신문들과 TV방송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있다.

그런데 어느 나라도 이에 대하여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것이 더 큰 문제이다.

미국의 시대착오적국제정치, 이른바 평화의 간판밑에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한다면서도 실제적으로는 평화를 파괴하는 모순에 빠져있는것이 바로 미국이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중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경험을 하지 않은 나라이다. 그래서인지 에티오피아는 현행 태양력인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지 않고 고대에티오피아정교회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을 고집스럽게 지금도 사용하고있다.

율리우스력에 의하면 2007년 9월 12일이 새 천년 2000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에티오피아 현 정권의 제나위수상은 새 천년을 맞이하기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축제를 준비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새 천년 축제를 준비하고있는 순간에도 소말리아내전에 얽매여있다. 남부의 오모로해방전선과 동부의 오가덴민족전선이 내전을 벌리고있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이런 처지에서 막대한 돈을 투입해서 행사를 치르는것은 현실을 외면한 발상이라고 비판의 소리가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당장 굶어죽어가는 어린이들과 아무 대책이 없는 굶주린 대중에게 화려한 축제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갈수록 굶주림에 시달려 허약해진 가련한 에티오피아인들이지만 그러나 다 죽어가는듯 한 그들의 입에서 《우리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소리가 흘러나오고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미워하는것은 미국놈들이다.》라며 반미감정을 뚜렷이 표명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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