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1. 132년 식민지쇠사슬을 끊고 독립한 알제리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1. 132년 식민지쇠사슬을 끊고 독립한 알제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456회 작성일 22-01-29 03:31

본문

man.jpg
고 류태영 박사


132년 식민지쇠사슬을 끊고 독립한 알제리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강점할 당시 내각수상이였던 쥘 페리는 저들의 식민지팽창정책을 정당화하여 한 의회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여러분, 프랑스의 식민지팽창정책은 경제, 사상, 문명을 최대한 널리 전파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정책입니다. 도이췰란드와 영국 그리고 미국과의 무역경쟁을 하기 위하여 프랑스는 반드시 출구를 넓혀야 합니다. 이러한 사안들은 식민지팽창정책과 긴밀히 련결되여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프랑스인들은 보다 정직하게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 고급인종들은 사실 아프리카와 동방의 미개한 나라들의 저급인종들에 대하여 권리를 가지고있다는 사실을 터놓고 말해야만 합니다. 프랑스는 우월한 고급민족으로서 권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렬등한 민족들을 문명화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있습니다.》

파렴치하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식민주의정체를 여실히 드러낸 궤변이였다.

이 악랄한 식민지통치하에서 알제리는 132년간이나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알제리의 간추린 력사

 

238만 1 741㎢에 달하는 넓은 령토를 가진 알제리는 리비아, 니제르, 말리, 마로끄, 모리따니, 뜌니지 그리고 서부사하라 등 여러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있다.

주민의 99%가 이슬람교도(순니파)이고 그밖에 유태교와 그리스도교가 있으며 국어는 아랍어이다. 원주민인 베르베르족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있으며 뚜아레그족과 수단계의 아프리카흑인혼혈족이 사하라사막지대에 퍼져 살고있다.

알제리는 B. C. 12세기경에 페니키아인들의 침입을 받았고 그후에 카르타고의 지배에 들어갔으며 B. C. 2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침략을 받았다.

이러한 알제리는 7세기에 이르러 아랍인에 의해 이슬람교화가 시작되였으며 한때 이슬람교 우마이야드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후 11세기에는 이슬람교 여러 다른 왕조들이 바뀌여가며 15세기까지 알제리를 지배하면서 이슬람교전성기를 이루고있었다.

16세기초 알제리는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오스만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알제리를 통치하다가 나중에 알제리와 마로끄를 통합하여 오래동안 통치하였다.

17세기에 이르러 오스만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륙상교역은 쇠퇴해지고 해상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해적을 토벌하는 렬강들사이에 전투가 맹렬히 벌어졌다.

오래전부터 알제리를 노려오던 프랑스는 1830년에 해적을 제압한다는 리유로 알제리에 군대를 상륙시켜 오스만세력을 알제리땅에서 완전히 밀어냈다.

이때로부터 프랑스의 알제리식민지지배의 막이 열리게 되였다.

 

프랑스 식민지폭정

 

프랑스의 식민지폭정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최초의 저항은 알제리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인 아브델 카테르의 등장으로 시작되였다.

그러나 알제리의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무장투쟁은 성공하지 못하고 아브델 카테르가 프랑스군에 체포된 후부터 점차 사그라지게 되였다.

프랑스는 식민지통치기간 알제리의 모든 산림과 농토를 강탈하였으며 수많은 프랑스인들을 알제리로 이주시켜 알제리인들의 귀중한 농토를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또한 27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악명높은 법을 만들어놓고 그를 식민지통치수단으로 삼았으며 수많은 알제리청년들을 저들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17만 3 000명의 알제리청년들이 강제로 징집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내몰리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때에는 알제리인 15만명이 프랑스군으로 전쟁에 내몰리였다.

한편 프랑스의 알제리식민지통치시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알제리인 700만명에 프랑스인들은 100만명이상으로서 그 비률은 7:1이였다. 이것은 프랑스의 알제리에 대한 식민지동화정책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잘 말해주고있다.

 

알제리독립운동의 전개와 세티프학살사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알제리에서는 또다시 독립운동의 기운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12년에 알제리독립운동의 수장인 칼레드의 지도하에 알제리청년운동이 처음 진행된데 이어 북아프리카이슬람교대학생련합이 창설되였으며 1926년에는 알제리민족운동의 지도자 메살리 핫지에 의하여 현지토착민들의 조직인 《북아프리카의 별》이 조직됨으로써 알제리독립운동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활발하게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1937년에 독립운동가 아하메드 메살리에 의하여 알제리인민당이 창설되였으며 1943년에 독립운동가 아빠스는 알제리인민들의 정치적자결권을 요구하는 《알제리인 성명선포》를 발표하였다.

날로 높아가는 알제리인들의 독립기운을 의식한 프랑스정부는 1944년 3월 7일 이슬람교를 차별하는 악법조항을 철페시키는 형식적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1945년 5월 8일을 시작점으로 하여 알제리민족주의자들이 총력을 기울인 봉기가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이에 대한 프랑스식민주의자들의 탄압은 민중항쟁이 절정에 도달함에 따라 점점 더 잔인해졌는데 그들이 떠들던 이른바 고급문명인의 모습과 그리스도교의 자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세티프학살》로 불리우는 대학살만행에 의해 죽은 알제리인만 해도 수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학살사건은 알제리의 독립운동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였다.

1954년 8월에 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한 알제리민중들은 마침내 이해 11월 1일 전국적인 무장봉기를 일으켜 력사적인 독립전쟁을 개시하였다.

프랑스정부는 수십만명의 군대와 막대한 량의 군사비를 투입하여 이에 대항하였으나 날로 높아가는 알제리민중들의 독립열의를 꺾을수 없었다.

결국 프랑스는 1962년 3월에 휴전과 알제리의 독립을 약속하는 예비안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알제리민중들은 1962년 7월 1일에 민족자결권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95%의 찬성으로 7월 5일 력사적인 알제리독립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되여 132년동안이나 계속된 프랑스의 식민지통치는 드디여 끝이 나고 알제리는 자주독립을 쟁취하게 되였다.

그동안 독립을 위한 전면전으로 알제리민중 약 100만명이 죽었고 70만명이 투옥당하였다.

알제리가 독립한 때로부터 37년이 지난 1999년 6월 프랑스는 알제리에 대한 침략과 전쟁, 량민학살에 대하여 과오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알제리 《하르키》에 대하여

 

프랑스와 알제리 두 나라사이에서 기회주의적행동과 반민족적반역자노릇을 자행한 약 20만명의 알제리인들을 가리켜서 《하르키》라고 부른다. 하르키는 자기자신이 혈통으로는 틀림없는 알제리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처럼 행세하면서 민족반역자가 된자들이였다.

그런데 민족해방전쟁이 알제리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프랑스에 추종하였던 하르키들은 알제리민중들의 민족적규탄을 받고 응당한 법적처형을 받았다.

그중 이를 간신히 면한 하르키들은 프랑스로 도망하여 현재까지 그곳에서 생존하고있다.

그러면 이 하르키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프랑스에서 어떻게 살고있으며 어떤 취급을 당하고있는가?

프랑스에 건너온 하르키들은 겨우 주거신분증을 얻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버린 헌신짝의 신세가 되였고 프랑스의 귀찮은 불청객들이 되고말았다.

하르키들은 프랑스에서 버림받은채 도시주변의 빈민굴에 정착하여 비참하게 살아가고있다.

하르키들은 피부색갈로는 백인이다. 하지만 하르키들은 아프리카 식민지태생이라 하여 《검은 발》이라는 차별을 받고있다. 하르키들은 백인처럼 행세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했더라도 만일 《검은 발》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장 해직당하고 학대를 받는다.

또한 하르키2세, 3세들은 도시변두리에서 범죄와 폭력의 유혹에 빠지고 학교도 중도에 떠나는 일이 흔하다.

오늘 프랑스사회에서는 하르키후손들을 가리켜 《뵈르》(Beur)라고 부르고있는데 프랑스의 실직자들의 35%가 뵈르들이며 만일 뵈르들이 취직하려고 리력을 속여 프랑스식이름을 써넣었다가 발견되면 곧 거절을 당한다.

이렇게 알제리의 하르키들은 비참한 운명에 빠져있다. 이것은 민족을 반역한자들에게 차례지는 응당한 운명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면 《한국》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은, 말하자면 《한국》판 하르키들은 어떠한가?

《한국》판 하르키들은 분명히 조선민족의 피줄을 이어받은 조선사람들임에는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적극 추종하면서 《한일합병》을 극력 지지하였고 일제를 찬양하는 소설과 시를 지었으며 일본사람처럼 행세하였다.

그 덕에 《한국》의 친일파 하르키들과 그 자식들은 소학교와 중학교, 대학을 호화롭게 졸업하였고 부자들이 되였으며 8. 15해방후에 리승만《정권》과 합세하여 특권과 특별대우를 누리면서 《애국자》들로 둔갑하였다.

리승만《정권》하에서 부귀를 누리던 친일파들은 말할것도 없지만 박정희는 《한국》판 대표적하르키이다. 그리고 오늘 《한국》의 대표적하르키는 리명박《대통령》부부이다.

리명박《대통령》부부는 일본천황을 만났을 때 허리를 절반이하로 굽혀 《사이게이레》를 하여 일본에 대한 저자세와 수치를 전세계에 과시하였다.

이처럼 알제리의 하르키들의 운명에 비교하면 《한국》의 하르키들은 딴판이다. 친일파들은 일본으로 도망가지도 않고 《한국》에 편안히 남아서 오늘까지 호강하고있다.

그리고보면 《한국》은 하르키들의 천국이다.

 

독립한 후의 알제리와 오늘의 알제리

 

독립을 쟁취한 알제리는 1962년 9월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아빠스를 초대대통령으로 하는 알제리민주인민공화국을 창건하고 사회주의건설을 지향해나갔다.

그후 벤벨라가 제2대대통령이 되여 집권하였으며 1965년 6월에 제3대대통령으로 집권한 부메디엔이 13년간 통치하다가 1978년 12월에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두달후 이슬람교구국전선(FIS)을 배경으로 제4대대통령으로 집권한 샤들리는 알제리독립투쟁에 공헌한 민족해방전선(FLN)을 무시하고 일소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인 구국전선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기존의 사회주의는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에 해당되는 법규들을 개정하고 새로운 헌법개헌을 진행하였다.

1988년 10월에 이르러 알제리에서는 경제악화와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불안이 고조되는 속에 로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샤들리대통령은 로동자들의 폭동을 정치적강압책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헌법개혁을 강행하고 의회가 복수정당을 인정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새로운 선거법을 도입하였다.

샤들리대통령은 이와 동시에 알제리독립투사들의 정치적기반인 민족해방전선의 뿌리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샤들리대통령의 야욕과 흉계는 좌절되였으며 1992년에 실시한 의회선거에서 샤들리대통령은 참패하여 정권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였다. 알제리의 수도는 군부에 의해 장악되였다.

하지만 군병력을 대항하여 싸우는 FIS의 강경투쟁도 만만치 않게 지속되여 류혈사태가 벌어졌으며 수만명의 주민들이 사망하였다. 알제리사회는 혼돈속에서 시민전쟁의 소용돌이속에 빠져들고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1995년에 알제리에서는 력사상 최초로 다당제선거가 진행되게 되였으며 여러명의 대통령후보들을 물리치고 제루알이 제5대대통령으로 당선되여 취임을 하였다.

그러나 제루알대통령이 5년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남에 따라 알제리에서는 1999년 4월에 다시 대통령선거가 진행되게 되였으며 국민민주련합(RND)의 후보자인 부떼플리까후보가 당선되여 제6대대통령으로 취임을 하였다.

부떼플리까대통령은 2004년 대선에서 85%의 투표로 재선됐고 또다시 2009년 4월 9일에 치르어진 대선에서 재선됨으로써 3선대통령으로 되였다. 나이 70살이 넘은 부떼플리까대통령은 2014년까지 알제리의 권좌를 지키게 되였다.

알제리는 석유와 가스자원이 엄청나고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자원이 가득한 나라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아직도 알제리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것은 알제리의 풍부한 지하자원때문이다.

오늘 알제리의 석유산업은 국가의 생명선이며 알제리는 아프리카의 주되는 석유 및 가스생산국으로서 2003년에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총 18억bbl의 원유를 확보하고있다. 뿐만아니라 천연가스에 대한 유럽동맹의 총수요중 25%를 알제리가 공급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알제리에는 허다한 문제들이 쌓여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큰 문제는 알제리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132년동안에 걸치는 프랑스의 식민지통치기간 프랑스의 오랜 동화정책으로 인하여 알제리인들이 전통을 잃었는데 하류층보다 오히려 특히 상류층이 자신들의 전통을 잃었다.

알제리 부유층들은 식민지종주국에서 아주 못된것들을 모두다 배워서 지금도 따라하고있으며 독립후에 초기의 정부가 추진한 고상하고 리상적인 사회주의유산들을 다 버리고 퇴페한 자본주의모형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알제리를 날이 갈수록 망가뜨려놓았다.

오늘의 알제리의 형편을 보면 그 많은 석유수출에도 불구하고 빈부의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들중의 하나로 되고있고 대낮에도 할일없는 젊은이들이 몰려다니고있으며 시장에는 도적들이 성행하고있다.

오직 석유수출에 의존하여 식량과 필수품을 해결해온탓에 수시로 변동되는 국제원유가격에 따르는 위험과 손실을 항상 동반하고있으며 설사 석유수출대금이 많다 해도 그것은 빈민촌에 거주하고있는 수많은 실업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에 막대한 석유수출대금의 많은 부분이 경찰과 공무원, 군부와 퇴역군인들에 대한 과도한 대우, 고위관리와 정치인들의 부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데 지출된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점들을 안고있는 알제리의 운명을 이제 부떼플리까정권이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갈것인가가 주목된다.

풍부한 자연부원을 가지고있으면서도, 독립을 하고서도 아직도 식민지통치의 후과를 털어버리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있는 알제리의 경우는 주체성과 민족성을 살려나가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산현실로 깨우쳐주고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