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3. 갈길을 모색하는 모잠비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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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을 모색하는 모잠비끄
뽀르뚜갈 500년 식민지통치에서 독립한 모잠비끄
면적이 79만 9 380㎢인 모잠비끄에 반투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이주하기 시작한것은 약 2 000년전부터였다. 약 1 000년이 지난 후에 이번에는 아랍인들이 모잠비끄에 출현하여 무역항구를 개설하고 영향을 미치였다.
모잠비끄에 대한 뽀르뚜갈의 식민지통치는 사실상 뽀르뚜갈의 탐험가 바스꼬 다 가마가 모잠비끄에 처음 상륙한 때부터 시작되였다고 볼수 있다.
그 당시 뽀르뚜갈은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령토확장에 욕심이 많았다.
뽀르뚜갈의 뒤를 따라 유럽인들이 동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지개척에 열을 올리게 된 동기들중의 하나는 로마교황 알렉산더6세가 뽀르뚜갈과 에스빠냐가 마음대로 식민지를 개척할수 있도록 권한을 무제한 허락해준데 있었다.
로마교황 알렉산더6세는 동아프리카지역에서 이슬람교의 아랍세력을 몰아내고 그곳에 그리스도교세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뽀르뚜갈과 에스빠냐에 식민지를 개척할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허락해주었다.
물론 로마교황이 제멋대로 다른 나라를 통치할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것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어쨌든 뽀르뚜갈과 에스빠냐는 동아프리카지역을 서로 나누어가지기 위하여 국경선을 직선으로 그어놓았다. 아프리카의 대부분 나라들의 국경선이 직선으로 그어져있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식민지초기 뽀르뚜갈은 아랍인들과 경쟁적인 충돌을 일으키면서 금과 상아무역에서 막대한 리윤을 획득했다.
그리고 1700년대 중반에는 아프리카흑인들에 대한 노예무역에 열을 올려 저들의 탐욕을 채웠다.
또한 1800년-1900년대에는 모잠비끄의 남자로동력을 남아프리카와 당시 로데시아로 팔아넘겼다. 이때 팔려간 로동자들은 종종 쇠사슬에 묶여 일하군 하였다.
식민지통치기간 모잠비끄에는 교육기관과 보건시설이 오직 큰 도시에만 있었고 그나마도 뽀르뚜갈인과 다른 백인들만을 위한것이였다.
이와 같은 식민지통치제도는 곪을대로 곪아 1960년에 들어서서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게 되였으며 뽀르뚜갈군인들이 식민지통치에 저항하는 평화적인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수백명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모잠비끄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모잠비끄의 독립투쟁은 1962년에 모잠비끄해방전선(Frelimo)이 창설되여 게릴라전이 전개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프렐리모게릴라투쟁조직을 창설한 창설자는 몬들라네와 사모라 모이세스 마셀 두사람이였다.
그러나 1969년에 공동창설자인 몬들라네가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한 음모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사모라 마셀이 단독으로 프렐리모 게릴라투쟁을 지휘해나갔다.
프렐리모의 게릴라투쟁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불안을 느낀것은 미국과 남아프리카였다. 미국과 남아프리카는 이에 대처하여 1973년경에 모잠비끄에서 미국과 남아프리카가 공동으로 지원하는 반란세력을 육성하여 이른바 전국항쟁운동(Renamo)을 조작하였다. 목적은 모잠비끄에서 훈련받은 앞잡이들을 내세워 통신시설을 비롯한 사회의 기반조직들을 파괴하여 사모라 마셀이 지휘하는 프렐리모게릴라전을 무력하게 만들어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한데 있었다.
하지만 사모라 마셀이 지휘하는 프렐리모게릴라투쟁은 최후의 목표인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중단없이 계속 벌려나갔다.
그리하여 모잠비끄는 프렐리모게릴라투쟁을 전개한지 13년만인 1975년에 독립을 성취했다.
모잠비끄의 독립과 사회주의국가창건
독립한 모잠비끄의 초대대통령으로 사모라 마셀이 취임하였으며 1977년에는 모잠비끄인민의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인민민주주의국가건설과 사회주의지향을 위한 이데올로기적기초를 마련하는 등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여난 사모라 마셀은 초등학교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직업훈련기관에 간호사로 취직하여 간호사기초훈련을 받았다. 그 당시 흑인이 간호사훈련을 받는다는것은 하나의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행운의 기회가 사모라 마셀에게는 인종차별의 쓰라린 아픔을 직접 경험하는 기회가 되였다. 사모라 마셀은 개인의 운명을 구하는것보다 식민지노예의 처지에 있는 민족의 운명을 우선 해결해야만 하겠다는 비상한 결의를 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1963년에 사모라 마셀은 반식민지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앙골라에서 반뽀르뚜갈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군사훈련이 후날에 모잠비끄독립운동을 위한 프렐리모게릴라투쟁전선에서 큰 힘으로 발전할줄은 마셀자신도 알지 못하였다. 사모라 마셀은 프렐리모게릴라운동의 창설자인 몬들라네와 혈맹의 동지가 되여 긴밀하게 반뽀르뚜갈게릴라투쟁을 펼쳐나갔다.
1965년경 250명정도에 불과했던 프렐리모게릴라운동은 점점 확대강화되여 수많은 백인들의 농장을 빼앗고 철도와 다리를 파괴하는 등 전과를 계속 올리였다. 1969~1970년경에 이르러 게릴라전은 모잠비끄북방의 전역을 장악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던중 몬들라네가 암살로 희생되였다.
사모라 마셀은 몬들라네를 상실한 비극을 극복하고 분발하여 반뽀르뚜갈게릴라투쟁을 보다 더 맹렬히 전개하여 마침내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1975년의 독립의 기쁨과 평화의 희망에는 불안한 구름이 비껴들었다.
미국과 남아프리카가 부추기는 레나모가 일으킨 반정부활동이 내전으로 번져갔기때문이였다.
이러한 정세속에서도 사모라 마셀대통령은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었다.
그런데 제국주의적랭전체제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서방의 언론들은 사모라 마셀대통령을 없는 사실까지 날조해가며 악의에 차서 헐뜯었다.
그러나 여기에 사모라 마셀대통령에 대한 옳은 리해를 가지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모라 마셀대통령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고있을 때부터 북조선을 두차례나 방문하여 김일성주석으로부터 식민지통치에서 벗어나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민족해방투쟁방안에 대한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사모라 마셀대통령은 모잠비끄의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들의 위협을 당하고있음을 시인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도를 찾으려고 북조선을 방문하여 김일성주석의 가르침을 수차례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모라 마셀대통령은 김일성주석의 가르침을 받아 실질적인 모잠비끄의 외교정책과 국내의 통치리념에 대한 독창적이며 민족의 자주와 자립정신에 립각한 정치로선을 선택하고 실천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사모라 마셀대통령이 선택한 정치로선과 통치리념은 반외세와 민족의 자주정신에 립각한것이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일성주석의 로작 《재미교포 최덕신과 한 담화》에 지적되여있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소개한다.
《모잠비끄대통령은 이번까지 우리 나라를 네차례 방문하였습니다. 모잠비끄대통령이 우리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한것은 뽀르뚜갈의 식민지통치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민족해방투쟁을 벌릴 때였습니다. 그때 그는 우리에게 민족해방투쟁방법을 배워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나라에 〈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혼자서는 장군이 될수 없다는 말이다, 혁명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각계각층 군중을 묶어세워야 하며 그러자면 통일전선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
나는 모잠비끄대통령에게 우리의 통일전선사상을 이야기해주면서 인민대중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 기초하여 통일전선사업을 하여야 각계각층 군중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고 그들을 하나의 숭고한 목적실현을 위한 투쟁대오에 굳게 묶어세워 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어나갈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모잠비끄대통령은 나라의 독립을 쟁취한 다음 집권하기 전에 다시금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는데 그때에는 나라를 어떻게 건설하겠는가 하는것을 의논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와 이틀간에 걸쳐 오랜 시간 담화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을 꾸리고 정권을 세우며 군대를 건설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점차로 건설해야지 단번에 건설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혁명과 건설은 그 발전단계를 뛰여넘을수 없으며 성숙된 요구와 환경, 조건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 그는 집권후에도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으며 이번에는 나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왔댔습니다.
잠비아대통령과 기네대통령, 모잠비끄대통령들은 다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사람들이기때문에 그들과는 의사소통이 잘됩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그들을 구원하자면 농업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군 하였습니다.》
이처럼 모잠비끄의 사모라 마셀대통령은 김일성주석으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위한 혁명투쟁방법과 독립후에는 아프리카나라들에 매우 적절한 새 사회건설과 건설방안을 받아안았다.
하지만 이를 어찌할가.
사모라 마셀대통령은 집권한지 10년 6개월이 되는 1986년 10월 남아프리카상공에서 의문의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했던것이다.
그 당시 사모라 마셀대통령에게는 3개의 무거운 압력세력이 존재하여 정권전복의 기회를 노리고있었으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마셀대통령의 생명을 위협하고있었다.
첫째는 미중앙정보국이 내세운 정치적깡패조직이며 국내의 반정부조직인 레나모의 활동이였다.
둘째는 독립국인듯이 행세하고있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종속국인 남아프리카의 간섭과 압력이였다.
셋째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들이 사회주의를 지향해나가고있는 아프리카신생국들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면서 모잠비끄의 반란세력을 배후에서 조종한것이였다.
이러한 조건들은 마셀대통령을 사망케 한 의문의 비행기사고가 어떻게 되여 일어났겠는가를 시사해주고있다.
이렇게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은 아프리카지역에서 반제반서방신생국들의 출현을 막고 그 근원을 말살하기 위한 행위를 계속 자행하고있었다.
사모라 마셀대통령의 사망후에 그 후임으로 등장한 인물은 죠아낌 알베르또 쉬싸노였다.
쉬싸노대통령은 취임하는 즉시 전임 사모라 마셀대통령의 사회주의적정치로선을 완전히 버리고 시장경제체제와 다당제정치제도를 도입한다는 신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모잠비끄인민공화국으로 부르던 나라이름을 모잠비끄공화국으로 고치였다.
또한 쉬싸노대통령은 곧 IMF로부터 막대한 서방자본을 끌어들이였으며 미국과 영국 등 서방나라들을 행각하는 과정에 친서방적인 립장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쉬싸노의 취임후에도 프렐리모와 레나모와의 내전은 여전했으며 오히려 한때 더 치렬하게 싸울 때도 있었다.
1992년에 이르러서야 두 진영은 내란을 종식시키고 영구적인 평화협정에 조인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내란기간에 모잠비끄민중 50만명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240만명이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잃은 난민이 됐다. 사실 말이 내란이지 미국과 뽀르뚜갈, 영국 등 나라들에 의한 공동침략행위였다.
쉬싸노대통령은 2004년에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모두 18년간 집권하였는데 이동안 사회주의지향적국가를 망쳐놓고 친미적예속국가로 만들었다.
오늘의 모잠비끄는 어디로 가는가?
모잠비끄에서는 2004년 12월에 대통령선거가 진행되였는데 선거결과 아르만두 에밀리우 게부자가 모잠비끄의 제3대대통령으로 선출되였으며 그는 또다시 2009년에 재선되여 지금 현직대통령으로서 집권하고있다.
모잠비끄의 독립후 사모라 마셀대통령행정부에서 내무장관으로 사업한 경력이 있는 게부자대통령은 2002년에 반외세사상에 뿌리를 두고있는 프렐리모의 총재가 되였다.
아르만두 게부자는 이 프렐리모의 후보자로 출마하여 모잠비끄의 제3대대통령으로 당선되였던것이다.
아르만두 게부자대통령은 지금 프렐리모의 독립투쟁, 게릴라전통을 고수하면서도 500여년간의 식민지통치의 뿌리깊은 유산으로 남아있는 한맺힌 굶주림과 빈곤의 고질적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길을 모색하고있다.
2010년 12월에 아르만두 게부자대통령은 모잠비끄의 최고급관광호텔인 Poiana호텔의 개통식에 참가하여 모잠비끄의 개방은 절대로 강대국에 의한 《피동적개방》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민족의 최선의 리익을 위하여 선별적으로 문호를 열어놓는 《체제적개방정책》이라고 력설했다. 말하자면 자주적립장에서 민족의 리익을 위해 하는 《개방》이라는것이다.
이제 오늘의 모잠비끄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변은 아르만두 게부자대통령이 제창한 정책이 실지 현실에서 어떻게 실천되는가에 따라 주어질것이다.
그러나 예측컨대 프렐리모에 뿌리를 두고있는 오늘의 모잠비끄정권이 자주의 길로 나갈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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