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실화소설집 북부전역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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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회
전선에서 만나자
백 상 균
6
사고였다. 사고도 비상사고였다.
리효영이 기관실로 뛰여들었을 때는 주해수뽐프의 랭각관이 터져 거기에서 뿜어져나온 물이 거의 사람의 목까지 차있었다.
다행히 누군가가 결사적으로 비상변을 눌러 물을 차단한 상태였다.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기관실이 물에 잠길번 하였다. 천만다행이였다.
하지만 난감한것은 뽐프고장이 아니라 예상밖으로 랭각관이 터진것이였다.
이제 그걸 퇴치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리처럼 물속에 몸을 잠근 선원들은 파격적인 비상사고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있었다.
당황한 리효영도 당장 이렇다할 궁냥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주해수뽐프가 이렇게까지 엄청난 사고를 몰아올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공연히 우둘쩍거리며 항행을 주장한것이 후회되기까지 하였다.
항전투지휘부 일군의 권고에 심사숙고했더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던 리효영은 오한만난 사람모양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제길, 내가 지금 무슨 나약한 생각을 하고있담.
어떻게든 뚫고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북부전선에서 전쟁과도 같은 격전을 벌리고있는데 이쯤한 난관에 겁을 먹다니.
지금 그들은 우리 배에 실은 자재가 도착하기를 안타까이 기다리고있다.
그뿐인가. 저우에 있는 수백명의 탄원자들도 한시바삐 피해복구격전장에 뛰여들기를 바라고있지 않는가.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하다면 어떻게…
바닥없이 깊어지는 상념을 휘저으며 《빨리 성에 알려서 방조를 청해야 하지 않을가?》하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리효영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순간 속이 울컥했으나 용케 자신을 다잡았다.
어쩌면 그 말이 옳을수도 있었기때문이였다.
성에 알려 방조를 청한단 말이지. 하다면 그 방조라는것이 어떤것일가?
주해수뽐프를 통채로 교체할수는 없는것이고… 기껏해야 우리 배를 견인해서 끌고가는것이겠는데…
이제 련락을 해서 견인선이 오기를 기다린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왜냐면 현재 바람의 세기가 시속 15m를 넘은데다가 파도높이가 거의 3m가 되는 조건에서 견인선이 오는 시간이면 정지된 배가 파도에 밀려갈수 있다.
여기에서 공해상이 멀지 않다.… 그걸 벗어나면 해상분계선… 그쪽으로 배가 밀려가면 일이 어떻게 번져질지 모른다.
머리속에서 종횡무진하는 생각을 털어버린 리효영은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린광이 끓는 눈길로 선원들 한사람한사람을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자기를 둘러싼 그들을 헤집고 나섰다.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선원들이 어리둥절해졌다.
《왜 그럽니까?》
2등기관사 최성일이 다우쳐물었다.
《창고에 가보려고…》
《창고에요?》
《내 언젠가 주해수뽐프 랭각관규격과 치수가 비슷한 120mm관을 건사했더랬는데… 어떻소? 2등기관사동무.》
리효영이 최성일에게 물은것은 그가 용접기능이 높았기때문이였다.
최성일이 자신이 없는지 대답을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기대어린 시선들이 그를 주시하였다.
마치 그의 결심여하에 따라 배의 운명이 결정되기라도 하는듯…
최성일의 결심을 기다리는 리효영의 가슴은 기름심지마냥 빠질빠질 타들었다.
만약 그가 자신이 없다고 한다면…
낫날에 찍힌 풀대모양 아래로 꺾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한동안 모지름을 쓰던 최성일이 얼굴을 번쩍 쳐들며 웨치듯 소리쳤다.
《좋습니다. 모험이긴 하지만 한번 해봅시다.》
ⅹ
그 시각 배갑판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배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고 단잠에 들었던 탄원자들속에서 누군가가 잠에서 깨여나 배가 멎어선것을 느끼고 이상해서 동무들을 깨웠던것이다.
잠기를 채 털지 못한 그들은 배가 정지되였다는것을 알고 웬일인가 해서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는데 누군가가 배가 고장이 난게 아닐가 하는 소리에 그럴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였다.
잠에 들기 전까지만 하여도 한시바삐 북부전선에 가서 본때있게 일을 하리라 기세를 올리던 그들에게 배의 정지는 모두의 심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원산항을 떠날 때 《송평7》호가 날바다우에서 강풍과 사나운 파도와 맞다들려 격전을 벌리고있다는 소문을 들은터라 현재 기승을 부리는 바람과 세찬 파도를 놓고 자기들도 그런 정황과 맞다들렸다고 생각한것이였다.
《이건 분명 사고다.》
《선장을 찾아서 알아보자.》
탄원자들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하며 선장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알리없는 처녀는 약간 멀미가 가셔지자 선장실에 혼자 있기가 멋적어 밖으로 나서려다가 머리를 휭 잡아휘두르는 바람에 그 자리에 맥없이 풀썩 주저앉고말았다.
다시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리에 도저히 힘이 가지 않았다.
이 상태로 꽤 끝까지 가낼수 있을가.
선장동지를 위한다면서 멀미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배에 올랐는데 이게 무슨 망신이람.
실망에 잠긴 처녀의 입에서는 가는 한숨이 새여나왔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나른해서 침대에 도로 누우려는데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여들며 다급하게 웨쳐댔다.
《선장동지!》
그 소리에 화닥닥 놀란 처녀는 용수튀듯 발딱 몸을 솟구치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어마나! 이건 뭐예요.》
처녀의 질겁한 소리에 그는 얼이 빠져 그 자리에 말뚝처럼 굳어졌다.
순간 두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퀭해진 눈길로 한동안 처녀를 쳐다보던 불청객이 긴장을 채 풀지 못한채 자신없는 소리를 했다.
《난 선장동지를 찾아왔습니다.》
주밋주밋하는걸 보니 퍽 소심한 축이였다.
《선장동진 안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가요?》
선장이 없다는 소리에 불청객이 갑자기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였다.
《배가 사고났는데 선장은 대체 어디 갔다는거요? 그리고 동문 누구고…》
사고라는 말에 처녀의 입에서 외마디소리가 튀여나왔다.
《뭐라구요?! 사고가 났다구요? 도대체 무슨 사고가 났다는거예요?》
《배가 멎어섰단 말이요.》
불청객의 입에서 당장 배가 침몰된다는 말이 나올것만 같아 쟁개비끓듯 활랑거리는 가슴을 애써 눅잦히던 처녀는 그런 황당한 소리에 놀란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동지, 사람 웃기지 말고 돌아가 쉬세요. 선장동진 좀전에 식사하러 가셨답니다.》
《뭐요? 식사, 지금 몇시게 식사소릴 하는거요? 한심하구만. 그런 말을 믿다니.》
천진하다는듯 코방귀를 내부는 불청객의 비웃음에 처녀는 생각을 고쳐해보았다. 불현듯 좀전에 신호등이 야단스럽게 껌벅거리던 생각이 났다.
그걸 보며 속이 덜컥해서 선장한테 사고가 아닌가고 물었을 때 그는 다른 일이 아니라 식사시간을 알리는 신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급해맞아 달려나갔고…
난 그런줄도 모르고 오히려 식사시간이 늦어진걸 걱정했었지.
맹추같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하다면 무슨 사고가 났을가? 그렇지 않아도 멀미때문에 고통을 겪는데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들으니 또다시 가슴이 활랑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사고가 어떤 사고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싶었다.
두부자루처럼 주저앉은 몸을 힘겹게 일으켜세운 처녀는 불청객쪽으로 눈길을 들다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언제 사라졌는지 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처녀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밖으로 나서서 갑판 한쪽에 몰켜서서 왁작 떠들어대는 탄원자들에게로 다가갔다. 대출력확성기라도 틀어놓은듯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에 귀가 다 멍멍해졌다.
《무슨 고장인지 알아봐야겠어. 혹시 우리가 도울 일은 없는지.》
《맞았어. 기관실에 내려가보자구.》
탄원자들이 들썩거리며 정말 기관실에 내려가 알아볼듯 우르르 밀려갔다.
처녀도 그들속에 섞이여 따라섰다.
ⅹ
랭각관을 교체하는 전투를 지휘하던 리효영은 갑판우에서 울리는 떠들썩한 소리에 예감이 이상하여 귀를 강구었다.
이 밤중에 무슨 소리일가.
혹시 탄원자들이 배가 멎어선걸 알고 무슨 일인가 하여 소동을 일으킨것은 아닌지.
십분 그럴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속에 날바다우에서 배가 멎은걸 놓고 겁을 먹은 사람들도 있을것이다. 그건 좋지 않다.
한시바삐 저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리효영은 마음이 긴장되여 한발한발 사다리를 올랐다.
이제 그들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것인가.
그들이 사고가 났다는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겠는데.
갑판뚜껑을 열어제끼고 머리를 쳐들던 리효영은 깜짝 놀랐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눈앞에 담벽처럼 막아서고있었던것이다.
마치 자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린듯싶었다.
그들을 본 리효영은 심장이 후두둑 뛰였다.
이들중에 지금 한창 기관실에서 배를 구조하기 위한 결사전을 하고있다는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의 마음을 헤집기라도 하듯 아까 선장실에 뛰여들었던 청년이 갑판우로 올라선 리효영에게 겁질린 소리를 했다.
《배가 왜 멈춰섰습니까. 혹시 고장이 난게 아닙니까?》
그 소리를 밀어버리며 누군가가 목청을 높이였다.
《숨기지 말고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
그의 착잡한 심리를 부채질하듯 배옆구리를 때리는 파도가 폭음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고 세찬 바람이 옷자락을 물어뜯었다.
리효영은 그 어떤 압박감에 선뜻 입을 열수가 없었다.
사고소리를 한다면 이들을 실망시키는것은 물론 공포심을 자아낼것이다.
아니, 절대로 그 말을 할수가 없다.
《안심들 하십시오. 절대로 사고는 아닙니다. 북부전선으로 한시바삐 달려가고싶어하는 동무들의 심정을 안고 전속으로 달리다보니 기관이 과열되여 잠간 식히려고 배를 세웠습니다.》
그 말을 믿을수가 없다는듯 누군가가 거칠게 내쏘았다.
《그 말은 믿을수 없습니다. 속도를 얼마나 높였다고 그런 황당한 소릴 합니까. 내 배에 대해 좀 아는데… 지금껏 달린 속도가 9kn정도였겠는데 (9kn이면 시속 17Km이다.) 그 정도에서 기관이 과열되였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기관이 낡았다면 그럴수 있겠지만… 이건 분명 사고입니다. 옳지요?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리효영은 마치 이 배의 결함을 환히 알고 꼬집는것 같은 그의 반발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 사람이 우리 배의 상태를 다 알고 나를 중떠보는게 아닐가?
갑자기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재의 사고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터놓을수도 없지 않는가.
그때였다. 오리무중에 빠져있는 리효영을 놀래우며 《비렬해요. 선장동지의 말을 왜 믿지 않고 까박이예요? 동무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하는 야멸찬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 목소리의 임자는 처녀의사였다.
리효영은 자신을 난처한 처지에서 구원해준 그 처녀가 고마왔다.
《좋아요. 사고인지 아닌지를 내가 확인하겠어요. 선장동지, 반대없겠지요?》
처녀의 당돌한 청에 리효영은 한순간 당황해졌다.
허참, 옹이를 피하니 마디라더니.
자신의 립장을 옹호해주는 처녀가 고마왔으나 응할수가 없었다.
이 처녀가 저아래에서 벌어지는 생사를 다투는 격전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도저히 가늠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십중팔구 기절초풍할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기관실에 들여놓아서는 안된다.
결심을 세운 리효영은 처녀앞으로 나섰다.
《그럴 필요는 없소.》
《그럴 필요가 없다니요. 이 동무들의 의문을 속시원히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절대로 사고가 아니라는…》
처녀의 당돌한 청에 말문이 막힌 리효영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하는수없이 힘들게 결심을 내리였다.
《좋소. 나와 함께 기관실에 내려가기요.》
그때 누군가가 께끼였다.
《나도 함께 들어가보겠소.》
《?!》
그 소리에 리효영은 처녀에게 양보한것을 후회하였다.
저 사람까지 들여놓는다면…
그때 리효영의 종잡을수 없는 감정을 연기처럼 날려보내며 처녀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울리였다.
《그만두라요. 나 한사람이면 됐지 뭐가 못미더워서 동무까지 들어가보겠다는거예요?》
이어 어둠속에서 울리는 주눅이 든 소리.
《아, 그건… 못미더워서가 아니라 호기심이 동해 그러오. 배기관실이 어떻게 생겼는가 한번 좀 보려고… 난 사실 배를 처음 타보오.》
속이 오밀조밀해있던 리효영은 웃음이 나오는것을 겨우 참았다.
사내를 옴짝 못하게 휘둘러대는 처녀가 땅땅 여문 호두알 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제대군인이 달라.
《선장동지, 앞서십시오》
허, 이것 봐라. 제법 훈시질이다.
리효영은 웃음집을 흔들거리며 처녀를 뒤에 달고 기관실로 내려서며 다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뚜껑을 잡아당겨 빗장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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