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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5. 말리와 부르끼나파쏘의 비극의 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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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997회 작성일 22-04-0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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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류태영 박사



말리와 부르끼나파쏘의 비극의 력사

 

력사적으로 아프리카나라들은 식민지통치로 인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가슴아픈 고난을 당하여왔다. 서아프리카지역 나라들도 식민지통치의 유산으로부터 발생하는 군사독재와 사회적부조리, 이전 식민지 종주국들이 부추기고 조장하는 부족들간의 분쟁으로 인하여 산생되는 기근과 굶주림, 정치적혼란속에서 극심한 피해를 당해왔다.

말리와 부르끼나파쏘는 바로 그러한 나라들중의 하나이다.

 

말리의 간추린 력사

 

말리공화국은 면적이 124만 1 231㎢로서 조선반도크기의 5. 6배가량 되는 사막의 나라이며 인구는 약 1 301만명정도이고 주로 아프리카원주민이 80%를 차지하고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이고 종교는 주민의 80%가 이슬람교, 18%가 부족종교, 2%가 그리스도교를 믿는다.

말리 사막지대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일찌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있은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사하라사막을 가로지르는 상업무역도 진행되였다고 본다.

하지만 처음 알려진 제국은 8세기-13세기의 가나제국이였으며 13세기-15세기에는 말리왕국, 15세기-16세기에는 송가이왕국들이 대표적으로 북부에 있는 니제르강연안에서 교역과 이슬람문화를 꽃피우고있었다.

그러던 말리는 1591년에 송가이왕국을 침략한 마로끄원정군에 오래동안 지배당하였으며 1850년대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다.

1895년에 말리를 완전히 점령한 프랑스는 오래동안 말리를 통치해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56년에 이른바 식민지들의 반자치권을 인정하였다.

그에 따라 말리는 1958년 11월 프랑스공동체내에서 반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였으며 1959년에는 세네갈과 말리련방을 구성하고 다음해 6월 독립하게 되였다. 하지만 1960년 8월 프랑스식민주의자들의 조작으로 련방은 결렬되고 말리와 세네갈은 각각 독립국으로 새 출발을 하였다.

 

말리공화국에 대하여

 

1960년 9월 22일에 말리는 모디보 케이타를 국가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고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쁠럭불가담국가정책을 실시하고 사회주의를 국시로 하는 내부정책과 외교적로선을 천명했다.

그후 1961년에 말리령토에 점령군으로 주둔하고있던 프랑스군이 완전히 철수함으로써 력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였다. 1961년 3월 말리의 케이타대통령은 이전 쏘련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경제협력과 문화교류 등 긴밀한 우호협정들을 체결했다.

뿐만아니라 케이타는 초대대통령으로서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과거 외국자본의 경제체제를 완전히 봉쇄하고 새로운 자립경제체제를 도입하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시키면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967년에 케이타대통령은 국방과 개혁위원회(CNDR)를 창설하여 경제적평등과 젊은 세대의 등장 및 부패추방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케이타대통령의 이와 같은 의욕적인 정치적지도력은 말리의 력사에서 처음 보는 경이로운 새시대의 희망이였다.

하지만 케이타대통령의 의욕적인 정치개혁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들의 도전에 부딪치고말았다. 1968년 11월 19일 서방을 등에 업고 등장한 반정부세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것이다.

건국의 아버지인 케이타대통령을 밀어내고 정권을 차지한 반대파세력은 모든 사회주의적조직들을 완전히 철페시키고 새로운 명칭으로 재조직하여 친서방적정치형태를 이루어놓았다.

그러나 새로 출현한 정권은 민중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있었다. 집권기간에 여러차례 반군의 쿠데타시도가 있었으며 또한 학생들의 데모가 항상 계속되고있었다. 특히 북부사막지역에 있는 호전적뚜아렉(뚜아레그)반군에 대한 가혹한 진압으로 인하여 민심의 반정부감정은 극에 달하고있었다.

《한국》에서 박정희군사《정권》에 대한 반《정부》민심이 극에 달했을 때 박정희를 제거하고 전두환《정권》을 창출시켜 위기를 돌린 미국은 말리에서도 같은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다. 아마두 뚜마니 뚜레를 내세워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도록 공작한것이다.

1991년에 아마두 뚜마니 뚜레는 미국이 시키는대로 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붕괴시켰으며 림시정부수반으로 당분간 있다가 민간인인 수마니 삭코에게 림시정부의 수반직을 넘겨주었다. 이것 역시 미국의 의도에 따른것이였다.

한편 미국은 1992년에 말리에서 처음으로 다당제선거를 실시하도록 공작하여 이른바 민간인대통령으로 알파 꼬나레를 당선시키였다.

2002년까지 집권하는 기간 알파 꼬나레는 친미적인 로선을 추구해왔으나 미국은 아마두 뚜마니 뚜레를 2002년에 또다시 등용하여 대통령으로 당선시키였다.

보는바와 같이 미국은 말리에서 저들의 마음내키는대로 친미분자들을 갈아대며 리속을 챙기여왔다.

그러면 오늘 말리의 정세는 어떠한가?

2010년 8월 6일 미국무성은 미국인의 말리려행은 매우 위험하며 유럽인려행자들에게도 말리는 위험지대라는것, 말리에 대한 일반려행은 물론이고 특별한 행사에 참가하거나 국가공무에 해당하는 려행도 정부의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 발표는 말리인들의 반미감정을 우려한것이였다.

말리인들의 반미적인 리유는 간단하다.

미국은 지난 수십년동안 계속 말리의 군부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지원해왔다. 그러면서 미국은 말리의 지하자원들을 헐값으로 략탈해갔으며 말리의 주요농산물수출품종인 목화의 값을 대폭 떨구어 말리의 농민들을 집단적으로 죽이고있었다.

또한 미국은 알 카에다의 문제를 무조건 사막지대의 나라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면서 특히 말리령토에 미군을 주둔시킬뿐만아니라 말리군인들에게 알 카에다와 싸우도록 강요하고있다. 그러나 말리인들은 절대로 알 카에다를 원쑤로 여기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말리인들은 미국을 증오하고있는것이다.

 

부르끼나파쏘의 간추린 력사

 

부르끼나파쏘는 서아프리카의 중심부 홍토고원지대에 있는 내륙국가로서 면적이 27만 4 200㎢이고 인구 1 575만명인 크지 않은 나라이다. 국민 1인당 년간 총수입은 217US$로서 세계 최빈국들속에 속하며 문맹률은 81%,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다.

부르끼나파쏘의 력사를 14세기에로 거슬러올라가면 최초에 이 지역에는 3개의 왕국이 있었는데 이중에 가장 큰 왕국은 모씨족의 오우가도우왕국이였다.

14~16세기 모씨족은 이웃 말리 송가이국가 등과 빈번한 분쟁을 겪었으나 늘 패배하였다. 그러던 모씨족의 오우가도우왕국은 19세기말에 이웃나라들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기 위하여 프랑스에 원조를 청하였다.

기다렸던 프랑스는 쉽게 부르끼나파쏘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었으며 오래동안 이 나라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다.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장기간의 투쟁끝에 부르끼나파쏘는 프랑스공동체내에서 자치공화국으로 되였으며 1960년에 독립을 이룩하게 되였다.

독립후 모리스 야메오고가 초대대통령으로 되였으나 1966년에 일어난 쿠데타에 의해 새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새 정권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거의 10년동안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하여 국가의 경제는 파산위기에 처했으며 아사자들이 발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말리와의 분쟁이 심화되고있었는데 분쟁원인은 량국의 국경지역에서 예상되는 천연광물의 소유권때문이였다.

이런 판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또다시 정권이 교체되였다. 하지만 이 정권도 얼마 못 가 다른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고말았다.

부르끼나파쏘는 1960년에 독립을 쟁취한 후 23년동안 자연의 재해보다 더 큰 인재로 인하여 발생하는 빈곤과 부패, 외세의 로골적인 간섭과 침략행위로 세계에서 최빈국으로 전락하고있었다.

이러한 때인 1983년에 부르끼나파쏘에서는 인민구제위원회가 발족하여 구국운동이 전개되였다.

이 운동의 지도인물인 또마 쌍까라대위는 구국의 사명감에 불타는 애국적청년장교였다. 쌍까라대위는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정권을 쟁취한 후에 나라의 이름을 지금의 부르끼나파쏘로 정하였다.

그때까지 공식 나라의 이름은 상부볼따였다. 부르끼나파쏘란 《고결한 사람의 나라》라는 뜻이다.

또마 쌍까라는 누구인가?

19살에 공군에 입대하여 장교가 된 또마 쌍까라는 음악가로 이름난 밴드의 기타리스트이기도 했고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랑만가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군인훈련소 지휘관으로 있는 기간 정부의 심각한 부패와 사회적불평등, 사회적불안에 대하여 눈뜨고 빈부격차문제, 녀성학대문제 그리고 외세로 인한 착취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였다.

쌍까라는 군부내에서 공산주의장교그룹(ROC)을 결성하여 매국적인 부패정권을 타도하고 정의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983년 8월에 쌍까라는 전국혁명리사회를 조직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하였으며 곧 쌍까라는 부르끼나파쏘의 제5대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쌍까라정권은 반민족적인물들을 모두다 추방하였으며 그동안 권리만을 주장하는 부족장들이 혁명적민중의 법을 인정하고 협조하도록 설득했다.

쌍까라정권은 공금횡령죄와 부패정치인들을 심판하는 새로운 법정을 설치하여 수많은 불법공무원들을 구속하고 처벌했다.

1960년에 독립한 후 쌍까라정권이 등장하기까지 23년동안 루적된 비극적인 국가부패와 망국적현실을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ㄱ. 세계은행통계를 보면 국민총생산은 세계 170개국가운데 124위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164위로 최악의 상태였다.

ㄴ. 전국 마을수는 7 000개인데 학교가 있는 마을은 1 300개뿐이다. 아이들의 취학률은 20%에 불과했으며 교사도 1만 8 000명이나 부족하였다.

ㄷ. 부패한 정권에 종사하는 파다한 공무원수는 3만 8 000명인데 공무원들에게 지급되는 관료비는 국가예산의 70%이상이였다. 그나마 국가예산이 바닥이 나면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하여 외국에 원조를 구걸했다.

반면에 민중들은 굶어죽지 않으려고 흰개미를 잡아먹는 처지에까지 놓여있었다.

ㄹ. 부르끼나파쏘의 고질적인 사회적문제는 인두세제도였다. 국민은 누구나 정부에 인두세를 내야 하였으며 만일 인두세를 못 내면 강제로동에 동원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녀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한 신생국 부르끼나파쏘의 비극과 어두운 면을 몇문장의 글로 다 표현할수는 없다.

또마 쌍까라정권의 등장으로 인하여 개혁운동이 전개됨으로써 이러한 비극과 불평등의 어두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인간다움과 민족의 자부심을 되찾을수 있는 희망이 불타오르게 되였다.

하여 조성된 부르끼나파쏘의 새로운 국면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 본다.

ㄱ. 또마 쌍까라대통령은 외세가 나라를 지배하고있는 한 사회적정의는 절대로 이룩되지 않는다는, 이는 혁명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일으킨 개혁의 근본목적은 이 거대한 외세의 험난한 산을 물리치는것이였다.

ㄴ. 쌍까라대통령은 3만 8 000명의 공무원수를 대폭 줄이고 《자주관리정책》을 도입하여 전국에 30개 자치제행정기구를 창설하였으며 주민들자신이 그 지역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지역관리도 그 지역에서 직접 선출하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의 종족들의 거주지와 일치하도록 행정구역을 고려하였다.

ㄷ. 쌍까라대통령의 큰 공적은 도시와 지방간의 간격을 좁히는 방법으로 철도건설을 한것이였다. 과거 아프리카에서 철도건설은 인명피해라는 나쁜 기억이 남아있다. 하지만 쌍까라대통령의 철도건설사업에는 온 국민이 자발적으로, 금전적보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쌀과 물만 제공해주면 인원동원이 가능했다. 도시에서부터 사막의 시골까지 약 450km의 철도를 개설했다.

ㄹ. 쌍까라대통령이 진행한 개혁의 다른 한 공로는 고질적인 인두세제도를 완전히 철페한것이였다. 또한 쌍까라대통령의 또 하나의 큰 공로는 농지개혁을 성공시킨것이다. 쌍까라는 전국의 토지대장부를 작성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토지를 농부들의 각 가정의 수요에 따라 재분배하는 사업이였다. 이 토지개혁으로 하여 전국의 농부들은 안심하고 농사에 전념할수 있게 되였다.

쌍까라대통령의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4년후에 전국의 농업생산량이 크게 증가함으로써 국가지출을 도로공사와 상수도건설 그리고 공업발전에 우선 투자할수 있게 되였다.

또마 쌍까라대통령이 추진한 개혁은 외세의 구호와 원조는 결국 나라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며 오히려 여기에 기대를 가지면 약소국가들의 슬픈 력사는 영원히 계속된다는것, 약소국가들의 빈곤문제해결의 길은 오직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길뿐이라는 자력정신에 뿌리를 두었다고 본다.

 

또마 쌍까라대통령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마 쌍까라대통령의 혁명은 부르끼나파쏘민중에게 있어서 큰 희망이였을뿐만아니라 서아프리카 이웃나라들과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아프리카나라들에 친미친서방적인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에 있어서 쌍까라대통령이 추진하는 혁명은 커다란 불안을 자아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던 1987년 10월 쌍까라정권은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하여 붕괴되였으며 쌍까라대통령은 미국에 매수된자의 손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결국 쌍까라대통령의 죽음에는 라틴아메리카의 쌀바도르 알옌데의 죽음과 같이 미국의 검은 마수가 비껴있었다.

또마 쌍까라대통령은 자기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감하고있었다고 한다. 그는 살해되기 한달전인 1987년 9월에 있은 에티오피아방문중에 우연히 유엔인권위원회 자문위원인 지글러와 대화를 나누게 되였는데 20년전에 죽은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살해된 이야기를 신중하게 하면서 체 게바라의 나이를 물었다고 한다.

체 게바라가 39살에 죽었다고 지글러박사가 대답하자 쌍까라대통령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나도 그 나이까지 살수 있을가요?》라고 지글러박사에게 말을 했다는것이다.

또마 쌍까라대통령의 죽음을 알게 된 부르끼나파쏘민중들은 커다란 슬픔에 잠겼으며 서아프리카나라들은 물론 전아프리카나라들이 애도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쌍까라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압되고 외세를 업고 등장한 친미친서방정권은 시계를 완전히 뒤로 돌리고 극단적인 외세의존적국가를 복귀시키고말았다.

말리와 부르끼나파쏘의 현실은 이 지구상에서 불의와 기근, 살인과 독재가 종식되지 못하고있는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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