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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7. 사상적 단결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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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564회 작성일 22-05-0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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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7

사상적 단결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민족통신 편집실]




청와대 앞에서 국가보안법철폐 단독 시위중인 김영승 선생 (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학습과 투쟁을 통하지 않고는 확고한 사상적 리론 수준을 무장을 할 수 없다.

감옥은 바둑판과 장기판과도 같다.

전국에서 투쟁하다 붙잡힌 동지들이기 때문에 직위 지식(문명) 사회성분 투쟁경험 리론무장 등등의 차이가 많다.

전쟁 전에 투쟁한 동지들을 구빨찌라고 말했다. 구빨찌는 주로 간부들이 많다.

그럼에도 신빨찌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기본 계급 출신들은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동지들이 절대다수다 노동 계급출신 중에는 농민출신이 절대다수다. 그 가운데는 문맹도 있다. 학생출신들은 초기에는 좀 있었으나 나중에는 없는 것 같다. 이상은 우리 동지들이 수백명이 생활 하던 때를 말한다.

초기에는 당학교 교원출신이나 선전선동부 출신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배웠던 것을 기억을 더듬어 학습 교양제강을 짜고 했으며 전쟁 후 조선에서 공작원으로 넘어온 동지들의 기억을 통한 제강 보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로 제강은 맑쓰 레닌주의 철학과. 사회주의 운동사, 해방의 조선, 조국전쟁, 쏘련 볼세뷔키 당사. 레닌의 준칙. 자유주의 배격 11훈 당원의 생활 준칙. 팔항주의. 김일성장군의 항일 빨찌산 전술, 모스코바평화선언 등이었다.

전방이 자주 있기 때문에 아는 동지방에 들어가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암기하는 것이다. 이 암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외우는 것이다.

그래서 취침후에 입만 딸삭하면서 외우는 것을 본 순찰 간수는 중놈처럼 무얼 입을 달삭거리느냐고 말도 한다. 그래야 전방가면 다른 동지들에게 전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못 배운사람들은 열심히 배우고 암기한다.

인테리 출신들은 듣기만 하고 외우지 않아 전방되어도 전수하지 못한다.

외우다 보면 초기에는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자꾸 되풀이 해 외우다 보면 문리가 터 조금씩 그 뜻을 알게 된다.

나는 무조건 다 외웠다. 나는 한방에 5명이 있을 때와 3명이 있을 때에 감방생활도 체계적으로 했다. 독방에 있을 때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옆방과 소통을 통해 주고 받고 했다.

개인생활은 접고 동지들을 위하고 전 대열의 리익을 위하여 생활한다고 했지만 부족한 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5명이 한방 생활할 때는 당번을 정하고 그 당번의 주장을 받들고 5명의 토론을 통해 하루의 일과 월일과를 세우고 전대열의 이익을 위해 어덯게 생활 할 것인가를 정한다.

학습은 매일 일과로 되어 있으며 생활 총화도 매월 한다. 일년 총화도 계획은 세웠으나

다 이행하지 못하고 전방가는 경우가 많다.

오전에 검방 검신이 끝나면 학습을 한다. 처음에는 강사가 강의한 내용을 돌아가면서(순번을 정한다) 강사의 말을 반복한다. 이는 듣기만 하는 것은 완전한 자기 것이 못된다. 직접 말을 해보아야 자기 것이 되고 전방가서도 다른 동지에게 전수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전은 자기만의 발전 뿐만이 아니라 전체조직의 발전을 목표로 평균화 발전을 발전이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각자 지적수준에 따라서 차이가 많이 났었다.

이렇게 반복학습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다. 기본출신들은 부로죠아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 발전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다. 나는 열심히 외우고 공부하여 나중에는 학습강사가 되기도 했다.

소위 인테리들은 외우려 하지 않고 반복학습에도 적극적이지 못한 결함을 자아냈던 점도 있었다. 그리하여 인테리출신들은 끝까지 사상적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이탈해 나간 동지들이 절대 다수다.

나중에는 비닐판을 만들어 안티프라민을 사서 비누와 범벅을 만들어 비닐막 한쪽에 발라서 띠었다 붙었다 하도록 하고서 꼬쟁이로 글씨를 써서 사용하였는데 나중에 떼면 글씨가 없어 진다.

비닐판은 검은 천이나 걸레를 찢어 판대기위에 붙이고 그위에 비닐을 붙인다.

이렇게 공책 대용품을 만들어 쓰기를 하면서 공부했다. 여름에는 칠푼 송판을 사용하였는데, 대젓가락 끝에 걸레 조각을 묶어서 물을 묻혀 글씨 연습과 수학도 공부했다,

학습제강 쓴 것을 운동나갈 때나 기회가 되면 전달도 하고 그러다가 들키면 씹어먹고 조사도 받는다. 이렇게 공부해서 문맹도 퇴치하고 집이 있는 사람은 편지도 써 부칠 수 있게 되니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모른다.

우리들은 항상 김일성 장군님이 우리들 머리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렇게 지내면 잡병도 없었고, 항상 원칙적인 생활을 끝까지 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모두가 그렇게 하기로 결의도 했다.

그리고 낯 12시가 되어 방천정 구석에 붙어 있는 스피카에서 방송이 나오면 방내가 시끄럽다. 그 공간을 이용하여 문화 오락시간을 갖는다. 이때에 배우지 못한 노래를 큰소리로 배운다.

조선의 유명한 시인인 조기천동지의 “문경고개“를 소리내어 배우다 교대간수 오관규란 간수한테 들켜 갑자기 문을 따고 우리 5명을 불러내 무슨 노래를 불렀느냐고 추궁한다.

이때 서로 얼굴만 보고 말을 못하는데 내가 돌아지와 성불사의 밤을 불렀다고 말하니 간수는 한번 불러보라고 하기에 문경고개에 곡처럼 맞추어 불렀다. 그가 듣고서 아닌데 하고 말하니 옆에 있는 동지들도 전부 그 노래를 불렀다고 한목소리를 냈었다.

그후 간수보고에 의해서 감방 전체가 불러나가 조사를 받았으나 무진장 두들겨 패는 매만 맞고 제방에 들어온 사실도 있었다. 동지들로부터 그후에 임기응변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기도했다.

공화국의 귀중한 노래를 우리가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이러한 환경에서 어렵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때 가르쳐준 동지는 출옥후 돌아가신 비전향 장기수 금재성 동지였다. 그외 노래를 가르처준 동지들은 그후 전부 전향했다.

1965년 4사 북풍바라지의 10개방은 서로 감방간에 소통을 통하여 통일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다른 방들은 독방이나 한방 띄어 있어 통일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면회 없는 동지들방과 면회오는 방의 차별을 두고 전방되어 있었다. 면회 없는방은 일년 12달 관식밖에 먹지 못하는 여려움을 겪고 있었다.

면회 오는 방에서 구매물을 사서 사방 소제를 공작해서 전달해 주기도 하지만 날마다 검방검신 하기 때문에 이상한 물품이나 먹을 것이 있을 때는 압수당하고 불러나가 조사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고문구타를 당하기 마련이다. 결국 사준 방동지들도 고문구타 당하여 먹방에 들어가 징벌을 받게된다.

그런 관계로 구매물을 사먹는 동지도 맘이 편치 않다 그런 환경속에서 관에서 주는 것 외에는 감추어 놓을 곳도 없기 때문에 있는 방과 없는 방 생활의 차이가 많이 난다.

아예 독방에 있는 동지나 혼방한 동지들 중에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구매물이나 영양제를 자기 혼자만 먹는 동지들은 비난이 많았다.

이런 환경속에서 리더가 되어 이끌어주는 동지가 없다. 그런 관계로 사상만 있을뿐이지 생활은 개인자유주의 생활이라고 해야 할까.

일상생활에서는 비누가 없어 손과 몸을 비누로 쓸수 없었다. 당국에서 주는 빨래비누 한쪼각으로 한달을 살아야한다. 런닝구가 없어 걸레를 찢어 실로 꼬매워 입다보니 내중에는 실밥만 나타난다. 검신에서 압수당하고 말았다.

초기에는 윗 내의만 허락했다가 나중에는 한 벌을 허락했다. 이렇게 되니 좀 여유가 있는 분들은 털내의도 차입해 들어와 소제들과 범칙을 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소제들의 눈밖에 나면 생활이 여렵기 때문에 범칙을 하게 된다.

이러한 4사 생활속에서 10개방이 통일적인 생활하기 동의만 하면 소제와 범칙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양쪽방은 방 천정 구석에 공기통이 있었다. 한 사람이 시찰구를 통하여 사방 간수나 소제의 움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양어깨 위에 올라 천정구석 공기통을 이용하여 먹을 것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옛 목재 건물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통일 경제 생활을 제기했었다.

그런데 우리 양옆에 있는 3개 방은 절대 지지하고 7개 방은 반대하였다. 반대한 7개방은 영치금도 들어와 구매물을 사먹을 수 있는 방이고 찬성한 3개방은 가족면회가 전혀 없어 주는 관식에만 의존하는 기본출신 방이었다.

그래서 과거 평등 사회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운 투쟁 원칙을 망각한 개인 자유주의 생활로 전락했는가라고 비판했었다.

결국 10개방 총화를 짓는데 어느 양방의 마루방 빈틈을 이용한 통방을 큰소리로 통방하다 간수에게 들켜 그방 5명이 불려나갔다. 각자가 통일적인 암호도 정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분리하여 취조 중에 이런말 한마디는 괜찮겠다고 생각하여 말하다 보니 들통이나고 말았다. 감시 원칙을 망각한데서 온 결과였다.

그래서 들통난 양방 두 동지와 제기한 내방은 내가 책임지고 3명이 먹방에서 수정차고 2개월 징벌을 받았다.

그후에 7사 독방으로 전방되었다. 그때 내가 제기한 것처럼 반대로 결론 지었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인데 감옥상황을 잘못파악하고 무조건 원칙만 주장한 것은 전적으로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투쟁과정을 겪고 난 후는 적들의 감시가 강화 되고 전방조치가 많아 어려움이 많았지만사상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 일은 이후 감옥에서 통일적인 생활을 하는데 큰 경험과 교훈이 되었다.

2022년 4/30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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