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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의 역사 (6)//태평양을 제패한 제로의 짧았던 영광과 기나긴 몰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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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4건 조회 29,097회 작성일 10-08-30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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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싸움의 역사(6)

                    -태평양을 제패한 제로의 짧았던 영광과 기나긴 몰락(하)-

 

  진주만 기습작전을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해 성공시키면서 일본의 초반 연전연

승을 주도했던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이 예상했던 대로 일본의 우세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야마모토는 처음 6개월-1년 정도의 우세이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으니,

화평의 길을 찾아달라고 전쟁 1년 전부터 내각과 군수뇌부에 수차례 진언을 했으나, 묵살 당했지요)

 

    개전 5개월 만에 처음으로 산호해해전에서 진격을 저지당했고, 6월 초 국운을 걸고

일본연합 함대의 함선을 총동원하다시피 했던 미드웨이해전에서는 여태까지 승리의 원동

력이었던 4척의 주력 항모를 모두 잃으면서 회복불능의 치명타를 입고 맙니다. 일본은

이때의 손실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합니다. 얼핏 광대한 영역을 얻으면서 대동아공영권을

달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쟁의 주도권을 서서히 내주고 있었던 셈입니다.

 

  한편 미드웨이의 승리로 기사회생한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 두 달 후인 8월 7일 처음

으로 남태평양에서 일본에 대해 공세를 취합니다. 바로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 끝자락에

제주도 3배 크기의 과달카날에 일본해군이 비행장을 건설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해병대

를 상륙시킵니다. 과달카날의 비행장이 완성되어 항속거리가 긴 일본항공대가 진출하게

되면 미국과 호주를 연결하는 교통선은 심각한 지장을 받게 되고, 이미 대부분의 육군을

유럽과 아프리카전선에 보내버린 호주의 방위를 위해서도 또 호주를 발판으로 대일반격

을 준비해야 했던 미국은 과달카날의 일본군 비행장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거지요.

기습으로 감행된 미 해병대의 과달카날 상륙으로 일본군은 하루 만에 건설 중인 비행

장을 내주고 밀림 속으로 패퇴했습니다. 그러나 일본해군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았지요.

비행장을 점령한 날 저녁, 어둠을 틈타 잠입한 일본함대의 어뢰공격과 함포사격으로 작

전 성공에 취해 경계를 소홀히 했던 미,호주 연합군 함대는 하룻밤에 순양함을 4척이나

잃는 등 대패를 했고 연일 라바울에서 날아오는 일본해군 항공기들의 폭격과 계속되는 미

일 항모간 공중전으로 인해 충분한 보급품을 해병대에게 하역하지 못한 채 서둘러 수송

선단을 철수시켜야 했으니까요. 비록 미드웨이 해전에서 기세가 크게 꺾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일본해군의 전력은 미해군보다 앞서 있었고 특히 남태평양 일본군의 전진기지 라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항공력은 전쟁 초 태평양을 제패한 제로전투기를 필두로 그

일대에서 최강의 전력(라바울을 근거지로 한 일본해군 기지항공대 '타이난'은 일본해군의

최정예 파일럿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후 '대공의 사무라이'를 써서 유명해진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 역시 이 부대 소속이었지요)을 투사하고 있었기에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

해병대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 했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탁월한 군수보급 능력을 자랑

하는 미군답지 않게 과달카날 점령 초기 미 해병 1사단은 일본군이 밀림으로 도망치면서

버리고 간 식량으로 끼니를 연명할 정도였으니까요. 그것도 하루 두 끼로만.

 

 

   전반적으로 불리했던 상황에서 과달카날의 미해병대는 서둘러 일본군이 거의 완성중이

던 비행장공사를 마무리하고 헨더슨 필드로 명명합니다. 그리고 8월 22일, 미 해병 항

공대 소속의 와일드캣 전투기 24대와 SBD던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12대가 날아와 착륙하

면서 미 해병대는 자체 항공력을 갖추게 되고 이것이 과달카날 공방전의 중요한 전환

점이 됩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라바울에서 일본해군 항공기들의 공습(오전 10시면 날아오

는 일본기의 공습을 미해병들은 당시 일본총리의 이름을 따서 도조타임이라고 불렀죠)이

지속되었으나, 과달카날의 미해병 항공대는 라바울에서 솔로몬 제도에 이르는 요소요소

에 숨어 있던 호주 연안감시대원들의 정찰보고로 일본 공격대의 고도와 도착시간을 정확

히 파악하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요격을 가해 번번히 큰 타격을 가합

니다. 초반 6개월이 지나면서 제로의 장단점을 파악하게 된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잠시 화제를 돌려 간단히 정리하면, 미드웨이 해전 시기에 제로전투기 한 대가 북태평

양 알루션 제도에서 기체고장으로 비상착륙을 시도하다 전복된 것을 우연히 발견, 거의

손상이 없었던 기체를 획득하는 뜻밖의 수확을 거둡니다. 이 기체를 집중적으로 테스트

하고 분석하면서 미군은 제로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대책을 수립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먼저 제로의 경이적인 선회력과 기동성, 그리고 놀라운 장거리 항속능력이 모두 기체의

내구성과 방어력을 희생한 결과라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적극 활용합니다. 기계공업력이

여전히 뒤떨어졌던 일본은 제한된 마력의 엔진에서 원하는 수준의 근접공중전(선회기동

력) 능력을 얻기 위해 기체의 무게를 줄일 수 있는 한 최대한 줄이는 극단적인 설계를

택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전투기들에선 필수였던 피탄 시 연료누출과 화재를 막아

주는 셀프실링 탱크를 무겁다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고 파일럿이나 엔진을 보호하기

위한 장갑은 아예 고려조차 되지 않았으며, 그것도 부족해 기체를 더 가볍게 하기 위해

주요골격에 구멍을 뚫어 놓을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극단적인 다이어트(?)로 기체가 가

벼워지니, 연합군 파일럿들이 경악했던 뛰어난 상승력과 선회력 그리고 장거리 항속이 가

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플라잉타이거스의 사령관 셰놀트가 간파했던 것처럼 급강하시

나 고속기동시에는 기체의 내구성이 현저히 떨어져 도리어 조종성능이 떨어졌고, 방어력

이 너무도 빈약해 한두발만 제대로 명중탄을 맞아도 바로 파괴된다는 걸 알아냅니다.

 

   뿐만 아니라 기체의 경량화로 인해 조종하기가 까다로워 숙련된 파일럿이 아니면 제 성

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을 것까지 밝혀냅니다. 이후 미군은 제로기와의 공중전에서 절

대적으로 1차대전 식 선회근접전을 회피하고 셰놀트가 창시한 일격이탈 에너지 파이팅과

미드웨이 해전에서 처음 성과를 냈던 지미 타치 소령(노획한 제로기를 테스트했던 당사자

)이 개발한 2인 1조의 타치웨이브 기동을 대응전술로 선택합니다. 이와 동시에 제로기를

성능으로 능가할 수 있는 신형 전투기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게 되죠.

 

   캑터스(과달카날의 미암호명) 항공대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해군 최정예 타이난

항공대와 접전을 치릅니다. 그러나 이 공중전은 처음부터 캑터스 항공대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우선 라바울에서 출격하는 일본항공대는 거의 천킬

로가 넘는 거리를 왕복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상으로도 거의 10시간에 가까운 살인적인 비

행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정작 과달카날 상공에서는 영국을 공격했던 루프트바페들처럼

불과 10분에서 15분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대단히 불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주 연안

감시대원들의 정찰로 기습이 전혀 불가능했고 이미 제로의 약점을 파악한 미 해병대 전투

기들이 일본파일럿들이 선호하는 근접선회전 대신 고공에서 급강하로 다가와 막강한 화력

을 투사하는 에너지 파이팅을 펼치자 연일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또한 2인 1조의 편대

가 타치웨이브(2대의 와일드캣이 S자로 교차비행을 하는 대형으로 자칫 제로가 이를 잡

기 위해 그 사이로 파고들면 어느 쪽의 와일드캣을 선택하건 다른 하나의 와일드캣에게

꼬리를 내주게 되는 일종의 함정이었음. 전후 일본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는 타치웨이브

에 대해서 제로전투기의 개미지옥이라고 평했고 타치웨이브를 펼치는 와일드캣 두 대는

제로 5대의 위력과 맞먹는다고 상찬함)를 펼치면 번번히 그 함정에 말려들어 패배를 거듭

했습니다. 제로는 일대일 공중전에서는 최적이었지만, 성능이 뒤떨어지는 와일드캣 전투

기들이 집단으로 편대를 형성해 대응하면 오히려 불리해져 버린 것이죠. 와일드 캣 역시

플라잉 타이거스의 주력기 P-40과 흡사하게 상승과 선회에선 뒤졌지만 급강하능력과 고속

기동에서는 도리어 제로를 앞섰고 화력과 내구성 또한 우수해 힛앤런과 헤드온 정면

대결을 펼치면 방어력이 전무한 제로는 손쉽게 불이 붙거나 공중분해 되곤 했습니다.

 

 

  게다가 미해병 항공대는 공중전시 고장이나 피탄이 되더라도 헨더슨 필드로 급히 돌아

가거나 인근 해상으로 낙하해 미해군이나 해병대의 구조를 받을 수 있는 홈그라운드의 이

점이 있었던 반면, 멀고 먼 라바울에서 날아오는 일본항공기들은 사소한 손상으로도 귀환

길에 문제를 일으켜 사실상 전혀 구조를 바랄 수 없는 밀림이나 태평양의 공해상에 추락

하거나 행방불명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라바울 항공대의 손꼽히는 에이스였

던 사카이 사부로가 과달카날 공습 첫날 큰 부상을 당하고 간신히 살아돌아온 것을 필두

로 연일 과달카날 출격을 강행했던 타이난 항공대는 대체가 불가능할, 실전경험이 풍부

하고 노련한 베테랑 파일럿들을 계속해서 소모하면서도 과달카날의 제공권을 획득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듯 제공권을 미군이 쥐게 되자, 해상과 지상전에서도 일본군은 점점

고전을 하게 됩니다. 비행장의 탈환을 위해 여전히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야음을 틈타

상륙했던 일본육군은 헨더슨 필드주변에 방어선을 펼친 미 해병대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처음엔 대대규모를 투입했다 전멸되었고 이후에도 결정적인 일제반격보다는 여단급을 투

입해서 안되면 사단을 투입하는 식의 축차투입을 지속합니다. 작전 또한 졸렬해 압도적

인 우세를 가진 미 해병대의 화력 앞에 정면 돌격을 일삼다 커다란 출혈과 함께 참패를

거듭합니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 개시 이후 무적을 자부하던 일본육군은 과달카날에서

커다란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고, 이후 거의 감정적인 수준의 무리한 작전으로 일관, 더

욱 피해를 부추깁니다. 결국 일본육군은 끝내 헨더슨 필드를 장악하는데 실패합니다.

 

 

   헨더슨 필드를 되찾기 위해 일본연합함대도 라바울에서 항공대를 보내는 것 외에도

수시로 수상함대와 항모기동부대를 파견해 필사적으로 육군을 지원했습니다. 그 덕분에

7차례나 미해군과 야간해전과 항모간 해전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미일 모두 항모의 전력

을 다 소진할 정도로 치열한 접전을 벌입니다. 미 해군은 일본해군이 장기로 삼는 야간해

전과 신무기인 장거리 산소어뢰로 인해 초중반에 걸쳐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점차 저력

을 발휘했고 결국 11월 말에 이르자 일본해군은 전함을 2척이나 상실하면서 해상에서의

주도권마저 내주게 됩니다. 7차례의 해전으로 양측은 각각 24척의 함선을 잃었으나, 미해

군은 막강한 산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충분히 손실을 만회하고 도리어 점점 전력을 증강할

수 있었던데 비해 일본해군은 점점 원하지 않는 소모전으로 전력을 약화시킵니다.

 

   특히 캑터스 항공대의 근거지인 헨더슨 필드에 야간 포격을 가한 일본함대는 번번히

헨더슨 필드에 큰 피해를 입히곤 했으나, 미 해병대와 육군항공대는 그 때마다 굴하지

않고 즉시 기지를 복구하고 새로운 항공기를 대체하여 캑터스 항공대의 기능을 유지합

니다. 활주로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 수천명의 인력을 동원해 몇 달씩 걸리는 일본군에

비해 기계력을 앞세워 불과 1-2주면 활주로 하나를 뚝딱 건설해내는 미해군 공병대가

있었기에 일본해군이 그토록 헨더슨 필드에 큰 피해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미해병대는

헨더슨 필드에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점점 활주로를 추가로 건설하기 시작해

해병 항공대뿐 아니라 육군항공대마저 캑터스 항공대에 합류하게 되자, 과달카날 상

공의 미제공권은 더욱 더 확고해집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군수보급에서 엄청난

지장을 초래합니다. 증원병력을 보내기 위한 수송선들은 번번히 과달카날에 도착하기도

전에 캑터스 항공대의 공습으로 수장되기 일쑤였고 이미 과달카날에 도착해 있던 일본

육군 18군에 필요한 각종 군수품과 식량 역시 극도로 부족해집니다. 야음을 틈타 은밀

하게 수송선이 과달카날에 도착하더라도 해만 뜨면 날아오르는 캑터스 항공대의 전투기

와 폭격기에 의해 불덩어리가 되버리니,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발만 구릅니다.

 

   일본육군이 마지막으로 파견했던 38사단의 경우, 지속되는 캑터스 항공대의 공습과

미해군 잠수함과 어뢰정들의 공격으로 사단 병력의 거의 절반인 6천명만이 그것도 대부

분의 중화기와 탄약과 식량을 잃은 상태로 간신히 과달카날해안에 다다릅니다.

   12월이 되자,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고작 목표량의 10%도 안 되는 보급품만을 겨우

받게 되고, 탄약과 포탄은 물론 기본적인 식량마저 극도로 부족해 아사자와 병사자가

속출하면서 전력 자체가 와해 돼버립니다. 당시 일본군의 보급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야음을 틈타 구축함이나 잠수함으로 간신히 식량을 수송하는 수준

이었고 거의 4만 명에 이르던 일본군에게 이 정도 수송으론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간 자존심 때문에 버티던 일본육군은 2월말이 되어 거의 70%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

손실을 뒤로한 채 패잔병 1만 3천명을 구축함에 싣고서 라바울로 퇴각해버립니다.

 

 

    라바울 항공대 역시 600여대에 달하는 제로전투기와 각종 폭격기와 공격기를 상실했

고 무엇보다 사카이 사부로와 같은 유능한 파일럿들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해 크

게 전력이 약화됩니다. 사카이 사부로의 회고에 따르면 부상에서 회복해 1년만에 라바

울에 들렀으나, 그때엔 이미 자기가 알고 있던 대다수 동료들이 거의 전사했었다고 하

니, 일본의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말해줍니다. 한때 일본해군의 야간 포격으로

거의 80%에 이르는 항공기가 파괴되기도 했었던 캑터스 항공대는 카달카날 공방전 6개

월 내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개된 공중전에서 적절한 전술과 우세한 군수보급

능력과 탁월한 기지복구능력 그리고 굴하지 않는 용기와 감투정신을 발휘해 일본 최정

예 라바울 항공대에 압승했습니다. 이 6개월간의 항공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미 해

병항공대 출신 의회명예훈장 수상자 19명 가운데 10명이 과달카날에서의 전공으로 이

훈장을 받았다는 것으로도 입증이 됩니다. 이중에는 살아서 명예훈장을 받은 사람들보

다 전사 후 훈장이 추서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이는 많은 파일럿들의 희생이 뒤따랐

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첫 출전에서 6대의 일본기를 격추하고 명예훈장을 받았던 제퍼슨

드블랑 소위와 같은 행운아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파일럿은 첫출전이 마지막 출전(1차대

전 기간 중 파일럿들의 평균 수명은 3주일이었는데, 2차대전 기간중에도 이 평균치는 크

게 달라지지 않았을만큼 공중전은 위험하고 치열한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신참들은 처음

부터 적응해 바로 고참이 돼버리거나 아니면 그냥 죽거나 부상당해 실려 나가는 일상이

반복되곤 했던 것입니다)이 되었고 전사자 못지않게 열악한 열대의 환경으로 인해 미 해

병대는 전사상자보다 병자가 더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장장 6개월에 걸친 과달카날 전투

는 2차대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상과 해상, 공중전과 보급전이 혼합된 치열한

싸움이었고 결국 캑터스 항공대가 헨더슨 필드를 끝내 지켜내면서 제공권을 확보한 것에

힘입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끝에 승리했습니다. 이로써 미군은 첫 공세를 성공적

으로 마무리 지었고 다음 공세를 이어가게 됩니다. 또한 제공권을 확보하지 않으면 절대

로 이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됩니다.

 

 

    이후 미군은 과달카날섬의 기지를 발판으로 점차 솔로몬 제도의 북쪽으로 진격을 개시

합니다. 43년 4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의 솔로몬 제도 최전선 순시계획을 감청해 이

를 중간에서 요격했던 육군 항공대의 P-38 전투기들도 헨더슨 필드에서 출격했지요. 그만

큼 과달카날기지는 미군에게 커다란 효용가치가 있었습니다. 한편 과달카날에서의 격전

으로 라바울의 항공력이 크게 약화된 틈을 타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과 호주육

군 역시 서서히 반격을 시작하면서 일본은 점점 더 많은 파일럿들을 상실하는 끝없는 소

모전에 휘말려 듭니다. 43년 내내 미일양측은 과달카날의 연이은 해전으로 완전히 전력을

소모한 항공모함들 대신 지상기지를 중심으로 미 해병항공대와 육군항공대VS일본 기지항

공대(항공함대로 불린)와 육군항공대간의 치열한 공중전을 남태평양에서 전개합니다.

그러나, 이즈음에 이르러 한때 연합군 파일럿들에게 공포와 경악의 대상이었던 일본의

자랑 제로전투기는 사냥꾼에서 점점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43년에 이르자, 과달카날의 공중전과 플라잉타이거스의 맹활약으로 일본의 제로는 거의

모든 약점이 드러났고 더 이상 연합군 파일럿들은 제로전투기와는 근접 선회전을 하지

않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제로전투기보다 180여킬로나 더 빠른 최고 시속 712킬로에,

제로보다 월등한 상승력과 높은 고도를 날 수 있는 육군항공대의 P-38 전투기와 해군과

해병대에서 모두 사용한 최고 시속 730킬로에 강력한 무장을 탑재한 F-4U코르세어 그리

고 제로전투기와의 결전을 상정하고 맞춤설계되어 기존의 와일드캣을 대체하게 된 함재기

F6F 헬캣전투기와 같은 신형 전투기들이 속속 전선에 등장하자, 이미 구형이라던 와일드

캣과의 공중전에서도 힘에 겹던 제로전투기는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43년 내내 일본군은 뉴기니와 솔로몬제도 양쪽에서 패퇴를 거듭했고 이 과정에서 제로

전투기는 압도적인 성능의 미군 전투기들에게 질적,수적으로도 크게 뒤져 악전고투를 거듭

하게 됩니다. 시간이 가면서 미군전투기들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제로전투기가 최고시속 530킬로의 속도를 낸다고 해도 적게는 70킬로에서 200킬로나 더

빠르게 날수 있는 P-38과 코르세어, 헬캣 전투기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고속기동시

움직임이 현저히 둔해지는 제로전투기는 번번이 먹잇감이 되고 맙니다. 무엇보다 압도

적인 화력과 방어력을 가진 미군 전투기들이 그 장점을 활용한 일격이탈 에너지 파이팅을

펼치면 장갑이 전무했던 제로전투기는 한두발만 얻어맞아도 손쉽게 연료탱크에 불이 붙거

나 아예 공중분해 되어버렸고 이 약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군 전투기들은 기관총 탄약

으로 화재를 일으키는 소이탄을 사용하면서 제로는 더욱 더 불리한 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미 공중전의 대세는 더 빠르고 튼튼하며 강력한 화력을 지닌 신형 전투기들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고 최소한의 방어력조차 가지지 못한 제로전투기는 전쟁 개시 2년 만에

시대에 뒤진 구시대의 퇴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때 제로전투기는 태평양에서 상승

과 선회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지만 이제 제로보다 거의 2배나 더 큰 2천 마력의 대형

엔진을 장착한 헬캣과 P-38은 제로보다 훨씬 더 빠르게 상승할 수 있었고 제로맞춤형

설계를 채택한 헬캣의 경우에는 선회에 있어조차도 제로보다 훨씬 더 민첩한 움직임을

선보이니, 그간 장기로 삼아왔던 근접전에서조차 제로의 무대는 점점 좁아지게 됩니다.

 

  물론 일본도 제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개량을 시도했지만, 보호장갑을 추가하자

기체중량이 증가해 도저히 예전의 선회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가

되고 말았고 화력이 강화하기 위해 더 큰 구경의 기관총을 설치했지만 대형 엔진을 설치

하면서 출력이 남아도는 미군 전투기들은 이전보다 더욱더 방어력과 장갑이 강화되어

아무리 제로가 사격을 해도 쉽사리 격추되지 않았습니다. 미군 전투기의 엔진출력에 맞

먹는 더 빠르게 날수 있는 신형전투기의 개발이 절실했지만 일본의 항공산업은 제로의

후속 전투기 개발에 실패했고 제로는 종전하는 날까지 계속 생산됩니다. 개발된 몇 개의

후속기종들은 대부분 엔진의 결함과 각종 고장으로 전혀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43년 내내 남태평양의 하늘곳곳에서 전개된 공중전에서 일본은 거의 1만대에 가까운 항

공기를 상실했고 그와 동시에 전쟁 개시 당시 수천 시간에 이르는 비행경험을 가진

정예 베테랑 파일럿들을 거의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43년내 후반기에 이르자 외형상

솔로몬 군도의 대부분과 뉴기니섬의 상당수를 내주기는 했으나 여전히 엄청난 대동아

공영권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43년 11월 약 1년여의 정비와 훈련을 마친 미해

군 항공모함들이 본격적으로 중부태평양에서 반격을 개시하자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전선이 와해되고 맙니다. 막강한 공업력을 기반으로 한 미국의 전시생산은 43년을 기

점으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이미 진주만에서 잃었던 항공기정도는 이틀이면 모두

보충할 정도였습니다. 만톤급 화물선을 불과 3일만에 건조해내는 조선업계 역시 거의

20척이 넘는 정규항모와 경항모들을 불과 2년만에 완성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소형의 호위 항모들은 거의 한달에 한척씩 뽑아내고 있었으니, 전쟁 기간 중에 고작해

야 10여척의 항모들을 건조 혹은 개조했던 일본은 아예 비교가 되질 않았습니다.

 

 

  44년 2월 미항모 9척이 주축이 된 TF 58은 일본의 진주만이라고 할 수 있는 트럭섬을

공습해 불과 3일만에 완전히 무력화시킵니다. 동시에 미육군 항공대와 협력해 남태평

양의 라바울 기지에 대해 엄청난 파상공세를 펼쳐 고립시켜버립니다. 그 결과 라바울

의 항공대는 사실상 전멸했고 남은 항공기들은 북쪽으로 이동합니다. 이 과정에서 숙

련된 기술을 가진 대다수 정비병들은 라바울에 발이 묶였고 이는 후일 일본항공력에

큰 지장을 줍니다. 43년 11월부터 개시된 미 해군과 해병대의 본격적인 반격은 타라와

마킨 제도를 거쳐 에니웨톡에 이르렀고 일본의 태평양 방어의 주요거점 구실을 해왔던

인 남태평양의 라바울과 그 바로위에 위치한 트럭제도가 미항공력에 의해 완전히 무력

화 되면서 미군은 일본이 절대국방권으로 설정했던 마리아나 제도까지 이르게 됩니다.

 

  마리아나 제도가 미군의 손에 넘어가면 일본은 태평양전쟁 도발로 획득한 대부분의 남

방 식민지에서 원료물자를 전혀 수송해올 수가 없게 되므로 그야말로 명운이 걸린 중요

한 요충지대였지만 그 전진기지였던 라바울과 트럭이 너무도 일찍 붕괴되자 마리아나

제도의 방어는 거의 제대로 준비된 게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번 전선이 무너지자 도

대체 수습이 안 되면서 연쇄붕괴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44년 6월 14일 미 해병

대는 해군의 압도적인 항공지원과 함포사격속에서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최대기지인

사이판섬에 상륙합니다. 일본의 예측보다 거의 3개월이나 빨리 마리아나 제도가 공격을

받게 되자 일본해군은 국운을 건 중대 결전에 나섭니다. 1년여 동안 고이 준비했었던

항모 9척과 450여대의 함재기를 총동원해 마리아나제도에서 미해군을 저지키로 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 미해군이 보유한 항모는 무려 15척이었고 함재기는 거의 두배인 890

여대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미 함재기의 파일럿들은 훈련과 경험

이 매우 풍부한 베테랑이었던데 비해 43년의 치열한 공중전으로 대부분의 경험있는 파

일럿을 상실한 일본함재기의 파일럿들은 비행교육을 받은지 석달도 채 되지 않은 신참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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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엘님의 댓글

제이엘 작성일

엄청난 소모전에 결국 일본이 미국의 저력에 무릎을 꿇은 결과가 되었군요..  잼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의 끝부분이 조금 짤려져 나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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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글을 꼼꼼히 보시지 않았다면 절대로 못하셨을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부주의하게 올려놓고 끝도 확인하지 않은 걸 그냥 들켜버렸네요. 송구합니다. 다음부턴 주의하겠습니다요. 늘 제이엘님이 챙겨주시니 고맙습니다. 또 뵐날이 있어야 하는데...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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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나그네님의 글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무엇보다 잘 구성된 글이 이해를 쉽게 해주는데다 재미까지 주어서 거침없이 읽게 만드는군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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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아이구 과찬의 말씀을...끝이 잘려서 마저 올려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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