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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제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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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2건 조회 6,115회 작성일 10-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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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한국인들은 무지하고 자치가 불가능한 자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시키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제2회 초장부터 싹튼 폭력의 씨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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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은 서양의학도 수용하지 않았다. 죽은 노동자의 시신을 백인의사가 부검을 하려고 하자 일부 한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병원으로 가 의사를 살해하고 동료의 시체를 빼앗아 왔다. 널짝으로 관을 만들 수 없던 그들은 하는 수 없어 에나멜 광이 번들거리는 서양식 관 속에 시신을 눕혔다. 이어 반쯤 벌어진 시신의 입에 쌀알을 채웠다. 그리고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동전도 한 개 입에 물렸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백인 루나(십장)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잘 다림질된 양복을 입고 십자가가 달린 묵주를 손에 쥐고 얌전히 누어 있는 백인 시신들만을 보아오던 그의 안면근육은 굳어졌다. 그들은 대충 모양을 흉내낸 상여도 만들었다. 상여를 메고 떼를 지어 사탕수수밭을 가로질러 갔다.

 

"가자 가자 어서가자.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그들은 요령을 땡그랑거리며 구슬픈 목소리를 한 데 모았다. 이렇게 기상천외의 이변이 일어나다 보니 하와이 경찰국은 폭동진압 기동경찰대를 새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섬은 바다로 둘러싸인 감옥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을 기다린 건 돈이 열리는 나무 대신 루나(십장)의 우뢰바(채찍)이었다.

 

"그저 담배도 못 피우고 일만 했지. 루나가 못 먹게 해. 일어서지도 못하게 했지. 꼭 구부리고 일만 하라는 거야. 찍 소리도 못하고. 우뢰바가 날아오니까 꼼짝도 못하지. 꼭 그저 소나 말이나 마찬가지지."

 

한 사탕수수 노동자의 증언이다.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꿈은 아예 불가능한 일. 노동에 지친 사람들은 술과 아편에 기댔고 투전판을 기웃거렸다. 가슴에 꾹꾹 눌러 쌓인 스트레스는 조금만 부딪쳐도 불똥이 튀는 부싯돌이었다.

 

거리에서 대낮에 동포의 배를 칼로 찌른 자도 있었고 농장주와 월급 문제로 다투다가 칼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희망 같은 건 더 이상 삶의 건더기가 되지 못했다. 호놀룰루 시내의 총포상에 가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총기를 쉽게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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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도착하는 이민선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동포들
ⓒ 독립기념관

하와이에서 발간되던 1913년 9월 13일자 '국민보'의 기사는 누아누에서 밭농사하는 이원태가 재작일에 김이만씨를 육혈포로 쏘았는데 다행히 두 발 총알이 다 사람을 피하여 중지는 상하지 않고 다만 손등만 조금 다쳤다 한다. 총질이 생긴 근원은 재정상 관계로 말미암아 며칠 동안을 서로 힐난하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돈인즉 다만 삼원 이십 전 상관이더라고 전한다.

 

'국민보'는 박용만이 사장, 김종학이 총무로 재직했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에서 1913년 8월 1일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신문이다. 그뿐인가. 한인들 중에는 별의별 날고 기는 사람도 많았다. 미꾸라지처럼 감옥을 빠져 나오기를 식은 죽 먹듯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전덕순. 감옥을 다섯 번이나 깨고 나오는 바람에 누구보다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게 1910년 초서부터 약 4년간에 벌어진 일. 절도범으로 체포된 전은 징역을 선고 받은 후에 한 번 도망하고 두 번 도망하고 또 도망하여 중범죄자를 가두는 가장 견고한 감방에 넣어졌다. 그 감방마저 탈옥하자 간수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오하우 감옥이 튼튼치 못한 걸 비로소 깨닫고, 방비를 보강한 후 전을 다시 잡은 후에는 파수를 더욱 엄중히 했다. 나는 새와 기는 쥐도 감히 재주를 시험치 못하게 수갑도 특별히 만들고 자물쇠도 어렵게 만들어 채웠다.

 

전에게는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 썩은 노끈인지라 수갑이 채워질 때 그것을 만든 대장장이를 향해 한 번 크게 웃었다. 1913년 봄에 다시 잡힌 전은 간수에게 자기를 평안히 두지 않고 괴롭히면 또 달아나겠다고 큰소리쳤다. 몇 달 만에 그는 중범죄자 감방을 뚫고 또 탈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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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들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
ⓒ 독립기념관

이요극은 1912년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민족전쟁을 선포, 한 일본 상점의 주인에게 총을 쏘았다. 일본인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고 그들은 자구책으로 현상금 300불을 모금했다. 그 금액은 당시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의 거의 2년분 임금이었다.

 

1903년에서 1910년 대 후반까지 '하울리(하와이 백인)'들에게 한인들이 준 인상은 범죄를 저지르는 소수민족으로 지역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거였다. 무지하고 미신적이며 미국법에 무지하고 자치가 불가능한 자들이라는 거였다.

  

훗날 하와이에서 동포끼리 서로 다투고 유혈극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이처럼 폭력의 씨앗들이 초장부터 싹튼 묘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캐나다로 이민했으며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한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 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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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복복님의 댓글

복복복 작성일

잘 읽고 기사 가져 갑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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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테아님의 댓글의 댓글

도르테아 작성일

앞으로 올라오는 글 몽창 다 가져가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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