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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의 역사(9)//초강력 에어파워도 굴복시키지 못한 베트남 민중의 저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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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6건 조회 58,371회 작성일 10-09-08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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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싸움의 역사(9)

             -초강력 에어파워도 굴복시키지 못한 베트남 민중의 저항(상)-

  한국전쟁이 승패 없이 끝날 무렵, 미국은 또 다른 아시아의 전쟁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

었습니다. 바로 2차대전의 승전국이라는 어줍짢은 이유로 다시 슬금슬금 인도차이나를 차

지하려고 들었던 프랑스 덕분에. 40년 일본이 인도차이나로 진주하면서 직접적인 태평양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베트남 땅은 이미 백여년에 가까운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베트남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허울 좋은 대동아공영권 치하에서 아시

아 최대의 쌀 농사를 짓던 풍요로운 땅은 45년에만 2백만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호된 착취와 압제의 고통이 계속 됩니다. 프랑스 식민통치시절부터 밀림속에서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계속해온 공산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베트남 독립동맹(일명 베트민)은

동남아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항일 게릴라를 지원했던 미국 OSS(현 CIA)와 손을 잡고

일본에 저항했고 결국 일본이 항복하면서 꿈에도 그리던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듯

했지만, 일본이 물러가자 프랑스는 다시 인도차이나로 기어들어왔습니다. 일본이 패망

하자마자 독립국가를 선포했던 호치민 초대대통령과 베트남민주공화국에겐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요. 프랑스는 압도적인 선거에서의 지지로 확인된 베트남 민주공화국

을 인정하려들지 않았고 다시 교묘한 식민통치를 하려했지만, 이미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무력함을 확인했던 동남아시아 민중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인도차이나

일대는 전운에 휩싸이게 되고 이후 30여년에 걸친 기나긴 외세와의 투쟁과 내전을 치르

게 됩니다. 다시 돌아온 프랑스와의 내전이 십여년간 지속됐고 그 첫 절정은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된 53년 11월 북베트남 서부 산악의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가 대규모 공수

부대를 투입하면서 시작됩니다. 이곳을 점령당하면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베트남 민주공

화국의 호치민 정권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될게 분명했고 이로 인해 디엔비엔푸를 둘러

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프랑스는 최정예 외인공수연대까지 투입하며 초강수를

던졌지만, 밀림전투에 익숙한 베트민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도 물러설 줄 몰랐고

다음 해인 54년 3월 13일 외부로의 보급통로인 비행장을 모두 빼앗긴 프랑스군은 결국

항복했고 이후 베트남에서 완전히 손을 뗍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베트남의 시련은 끝난

게 아니었지요. 여전히 외세에 의존하는 남베트남의 고딘 디엠 정권은 베트남 민주공화

국와의 통합을 인정하려들지 않았고 약속했던 통일선거도 무산시켜 버립니다. 그들은 이

제 새로운 스폰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가 물러간 후에도 베트남

은 통일된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분단되고 맙니다.

 

 

   이후 17도 이남의 남베트남 지역에서는 외세에 의존하는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정권에 항

거하는 민중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고 밀림을 이용한 게릴라들이 출몰하는데 바로 이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었지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고 있던 이들은 라

오스와 캄보디아의 국경을 통해서 계속 보급과 지원을 받아가면서 남베트남 정권에 저항합

니다.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요구했던 이들을 전세계 공산화를 노리는 공산세력으로 본

미국과 프랑스는 도미노 이론을 내세우며 남베트남 정권을 지원했지만 프랑스가 디엔비엔

푸의 패배로 손을 떼면서 점차 미국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50년대 중

반부터 서서히 베트남이라는 깊고도 험한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초기 미국의 개입은 군사고문단을 통한 남베트남군의 훈련과 장비와 물자의 지원에 그쳤

으나, 이러한 간접적인 지원으로는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베트남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 전통을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했다면 그 단계에서 손을 떼는 게 현명했음에도 불구

하고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하에 미국은 태평양과 아시아에

대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베트남과 인도차이나 문제에 개입합니다. 사실 그들

이 지원했던 정권들은 하나같이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집단이었고 이들을 내

세워 미국의 이해관계를 베트남에 강제하는 한, 베트콩과 북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저항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험한 밀림과 산악지대로 구성된 인접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루

트(일명 호치민 트래일로 불린)를 통해서 북베트남의 물자와 인력지원에 힘입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들은 계속 남베트남 전역을 교란해댔고 가혹한 진압과 토벌작전에

도 불구하고 이들 베트콩의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가 떠난 이후 거의 10

여년의 세월을 지켜보던 미국은 결국 직접개입을 결심하고 64년 8월 2일 북베트남 통킹

만 해역에서 미 구축함 매덕스호가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전면개입을 선언

합니다. 그러나 이는 후일 밝혀졌듯이 완벽한 미국의 자작극이었고 베트남 개입을 정당

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풍요로운 자원과 풍성한 먹을거리와 아름다운 자연

과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가졌지만, 그 때문에 잦은 외침과 외세지배의 아픈 역사를 가진

작은 나라 베트남은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초강대국 미국과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한편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냉전이 지속되면서 항공산업은 더욱 비약적인 성장을 50

년대와 60년대 내내 지속합니다. 50년대 중반에 이르자 소리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나는

초음속전투기가 실용화되었고 핵폭탄이 더욱 정교해지고 소형화되자, 2차대전 당시 거대

한 폭격기에 실어 날라야 했던 핵무기는 이제 전투기에 의해서도 투하가 가능해집니다.

또 하나의 진보는 미사일의 등장이었습니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무렵만 해도 로켓탄은

전혀 유도나 조준이 되지 않았지만, 이른바 적외선을 사용해 자동으로 조준되는 열추적

미사일인 사이드와인더가 개발되면서 이제 전투기의 공격범위는 눈에 보이는 가시권수

준의 기관포나 기관총의 사정거리를 넘어선 더 먼거리로 확장되었고 레이더로 조준 발

사되는 스패로우의 등장으로 인해 가시권을 넘어선 수평선 너머의 공격까지 가능한 이른

바 원거리 공격시대를 열었습니다. 60년대 초에 이르면 초음속 전투기의 속도는 음속의 두

배가 넘는 마하 2.4까지 이르게 되었고 그 항속거리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되자, 1차대전부터 2차대전을 거쳐 한국전쟁시기까지 공중전의 기본으로 간주되

어온 도그파이팅 이른바 근접공중전술은 시대에 뒤진 한물 간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시대의 고성능전투기에는 그에 맞는 전술개념과 작전방식이 필요하다는 명분하에

2차대전부터 경험을 쌓아온 중견장교들의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후 미공군과 해군

은 신규 파일럿들에게 근접공중전 기술을 가르치지 않게 됩니다. 이와 때를 맞추어 전투

기의 설계 개념도 달라집니다. 58년 처음 비행을 실시한 해군의 최신예 F-4팬텀은 마하

2.23의 최고속도에 항속거리가 2600킬로, 상승한도 만8천 미터였고 무장탑재량은 2차

대전 시 활약한 대형 B-17폭격기와 맞먹는 4톤에 이를 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지만

정작 과거와 같은 근접공중전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고정무장인 기관포

를 아예 배제해버린 첫 전투기이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면서 초점은 베트콩을 지원하는 통로인 호치민 트래

일과 북베트남 지역 내 주요 군사시설물들과 군수공장등을 차단하는 일이 시급했고 당연히

이일은 미공군과 해군의 전폭기들에게 맡겨졌습니다. 본격적인 북폭이 시작되는 65년, 미

군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어차피 북베트남에 제대로 된 공군력이 있을 리 없다고

판단한데다가 공군이 센추리 시리즈로 불리우던 전투기(F-100, F-102,F-105)들의 폭탄

적재량은 2차대전 때 폭격기를 능가하는 수준이었고 해군 역시 F-8크루세이더 전투기와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등 우수한 기종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공중급유시스템과 각종전자

장비들의 우세를 활용하면 과거 일본본토 폭격때나 한국전쟁 때처럼 손쉽게 제공권을 장

악하고 북베트남의 주요거점을 무력화시키고 전쟁의지를 꺾어버릴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막상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면서 미 공군과 해군은 만만치 않는 대공포

화와 소련이 제공한 SA-2 지대공미사일의 반격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냈고 미 파일럿들이

이 북베트남의 대공방어망을 강철장막(아이언 커튼)이라고 부를 정도로 견고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미국과의 전쟁을 예견했던 북베트남정권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아 기존 미그 15기의 결점을 보완한 미그 17 전투기 50여대로 구성된 나름 탄탄한 전력

의 공군을 창설해놓았고, 소련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가면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대

공초계시스템과 대공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북베트남 전역에 소련기술로 만든 레

이더들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었고 이들과 연계하여 대공미사일은 물론 대공포와 소화기들

까지 모두 조직적인 대응이 가능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미군은 몰랐습니다.

호치민 정권에 대한 정보수집을 게을리 했고 무엇보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저력을 너무 과

소평가했었지요. 특히나 소련제 신형 SA-2 대공미사일은 사정거리가 30킬로미터에 이르렀고

폭발 반경이 100미터가 넘는데다 마하 3의 속도로 비행이 가능해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미사일이었지요.

 

   F-4C 4대가 편대비행을 하는 한가운데에서 폭발해 1대를 격추하고 나머지 3대가

 적지 않은 손상을 입고 간신히 돌아올 정도로 소련제 지대공미사일(이하 SAM)은 위력적

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북위 17도선 위 어느 지역을 공습하더라도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대공포들은 놀라울 만큼 조직적이고 집요한 화망을 구성하고 미 항공기들을 괴롭혔습니다.

고공에서는 소련제 SAM SA-2가 이들을 노렸고, 저공에서는 보병용 소화기까지 동원된 대공

사격이 너무 집요해 쉽게 피해나갈 곳이 없었습니다. 북베트남 공군의 미그 17전투기들도

영악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무거운 폭탄을 잔뜩 단 미국의 공격기들을 향해 기습적인

치고 빠지기 전술을 구사하며, 강력한 기관포(2문의 23밀리와 1문의 30밀리)로 이들을 위협

하면 격추위험을 느낀 미국의 전폭기들은 어쩔 수없이 폭탄을 내던지고(오늘날도 베트남

각처에 불발탄들이 넘쳐나는 이유 중 하나가 됨) 회피기동을 해야만 했고 이 때문에 제대

로 된 폭격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미그를 요격하고자 호위전투기들이 달려오면 정면대

결 보다는 빠르게 회피하거나 지상의 대공사격망이나 대공미사일 사정거리로 유도하며 조

직적으로 미군을 괴롭혔습니다. 매 출격 때마다 이런 식으로 미공군과 해군은 세계 최강

대국의 최정예항공력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는 피해를 입고 졸전을 거듭했습니다.

본격적인 북폭에 나선 65년 한해 동안 미군은 80여대의 전폭기가 격추 되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마디로 미군은 베트남 개입 첫해부터 체면을 단단히 구겼던 겁니다.

 

 

   이러한 미군의 실패 요인은 2가지로 요약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미군에게는

소련제 미그 17과 같은 순수한 제공전투기가 없는 것이 첫 번째 요인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전투기 컨셉에는 강력한 엔진출력을 바탕으로 한 장거리 항속능력과 우세한 폭장

능력과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과 이를 제어하는 정교한 전자장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실전에서 미그 17이 날렵하게 선회하며 근접해오면 다목적으로 설계

된 미군의 전폭기들은 근접한 상황에서는 이렇다 할 대응책이 없어 고전했습니다.

해군의 F-8크루세이더 전투기(고정무장 20밀리 4문)을 제외하면 그 어떤 전투기들도

미그 17과 근접공중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의 싸움에서 가장 기본이어야

할 개싸움(근접공중전)의 논리를 외면한 댓가였지요. 게다가 대부분의 제트세대 파일럿들

은 근접공중전 전술을 잘 모르고 있었고 무거운 폭탄을 탑재하고 있었던 때문에 속도가

느려져 북베트남의 미그 17전투기들이 손쉽게 선회해서 6시의 꼬리방향을 잡아버리면 당

황했습니다. 이 무렵 미공군의 일각에서는 지금 베트남전에 필요한 전투기는 한국전쟁

때 쓰던 F-86세이버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고 2차대전과 한국전의 경험을 가진 중견 베

테랑 파일럿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맙니다. 새로운 시대의 다목적 전투기라는 설계개

념이 제공권우위라는 항공력이 존재해야 할 기본 원칙을 무시해버린 결과였습니다.

 

   또 다른 원인은 북베트남의 정교한 대공방어망과 레이다 시스템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소

련의 대공방어체계를 모방한, 베트남의 대공방어시스템은 지상의 관제소에서 레이다와 통

신망을 연결해 공중의 파일럿들과 지대공 미사일기지와 전국의 대공포기지와 보병용 소화

기를 모두 통제하는 정교한 신경망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특히 미 공군의 접근을 탐지해내

는 레이다가 있는 한 북폭의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미 공군은 북베트남 전역의 레이더 기지를 파괴할 것을 결심하고 와일드 위즐(야생

족제비)작전을 준비합니다. 상대의 레이다에서 발신되는 전파를 추적해 이를 역이용해 파

괴하면 북베트남의 눈과 귀를 마비시키는 격이 되고 그 이후 맘 놓고 목표지점에 대한 폭

격을 가할 계획이었습니다. 초기 와일드 위즐 작전은 전투기에 소련제 레이다의 특정 주

파수를 감지해내는 장치를 부착하여 이 전투기가 레이다 기지의 위치를 파악하면 다른 공

격기들이 다가와 공격하는 방식이었으나, 곧 미해군이 개발한 AGM-45 슈라이크 공대지 미

사일에 레이다 전파를 감지하는 기능을 추가해서 공군과 해군이 모두 전투기 한 대로 탐

지와 레이다 파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진화했습니다. 66년부터 와일드 위즐 임무

에 투입된 미군의 전투기 파일럿들과 북베트남 레이다 조작원들간의 치열한 수싸움이 전

개됩니다. 북베트남의 레이다 조작원들은 미공군이 레이다를 파괴하기 위해 미사일을 발

사하면 즉시 레이다의 전원을 차단해 미사일을 무력화시켰고 그렇게 되면 와일드 위즐임

무를 맡게 된 전투기들은 직접 육안으로 레이다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대공 미사일을 활용

할 수 없는 약점을 이용해 사정없이 폭격을 가해 레이다를 파괴하거나 레이다 시스템이

정지 된 것을 전 공격편대에 알려 안심하고 그 지역을 통과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미

공군과 해군은 적의 레이다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은 전투기를 제식화 했고 아예 와일드

위즐전투기라고 부르게 됩니다)

 

   미 공군과 해군이 하늘에서 예상외로 고전하는 동안 지상에서의 전투는 더욱더 수렁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자생력이 전무했던 남베트남의 부패정권은 무능한데다 최소한의 싸

울 의지조차 없었고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아예 싸움을 미국에게 맡기다시피 하

며 잦은 군부의 쿠테타로 남베트남 공화국의 정세는 혼돈과 무질서가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북베트남 지역의 공습제한 구역을 해제하고

이제까지 공격하지 않았던 SAM 기지와 수도인 하노이까지 공격을 확대하면서 대대적인

폭격작전 롤링선더를 개시합니다. B-52폭격기까지 동원된 이 대규모 폭격으로 북위 17도

이북의 베트남은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고 적지 않는 레이다 기지와 SAM기지가 파괴되면

서 북베트남은 궁지에 몰렸고 결국 66년 크리스마스 무렵 미국과의 협상의사를 타진하

게 됩니다. 그러나 파리에서 진행된 양측의 협상은 서로간의 입장차를 재확인했을 뿐,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그 사이 북베트남은 소련으로부터 미그 21이라는 신형 요격전투기

를 공급받았고 부서진 레이다 기지와 SAM기지를 복구하는 시간을 법니다.

 

   해가 바뀌어 67년 내내 북베트남의 하늘에서 미 공군과 해군은 미그를 사냥하기 위해

고심합니다. 와일드위즐 전법으로 레이더 기지와 SAM기지에 대한 견제가 가능해졌지만,

새로이 등장한 미그 21은 마하 2의 고속과 엄청난 상승속도로 고공에서 날아오는 미 전폭기

들을 요격하기엔 제격이었고 기관포만을 가진 미그 17과는 달리 적외선 열추적 미사일 AA

-2 아톨까지 장착하여 미군에겐 아주 위협적이었습니다. 미그 17이 저공에서 근접선회전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면, 미그 21은 빠르게 상승해 고공에서 일격이탈하는 전법으로 미공

군을 괴롭혔습니다. 두 전투기 모두 전형적인 도그파이팅 전술을 구사했고 이미 도그파이

팅을 구시대의 것으로 치부했던 미 공군력은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미공군이나 해군과 정면대결을 할 능력이 없었던 북베트남의 전투기들

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아니면 직접대결 대신 폭탄을 만재한 미 전폭기(주로 F-105)

에 위협적으로 다가들어 이들 전폭기들이 폭탄을 내버리고 회피해버리도록 하거나 호위하

던 팬텀이나 F-8크루세이더 전투기들이 달려들면 급강하로 회피해버리거나 SAM이나 대공포

의 화망으로 유도하는 식의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게릴라식 전법

으로 북베트남은 최소한의 공군력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미군의 폭격을 방해했던거죠.

근거리와 원거리에서 사용하는 두 종류의 미사일(스패로우,사이드 와인더)로 무장했고

최신예 전자장비로 비가시권하에서의 적기도 탐지 추적 공격이 가능했던 최첨단의 미공군

력은 공중급유기를 비롯한 풍부한 지원 능력에도 불구하고 고전했습니다. 특히나 스패

로우와 사이드 와인더 두 미사일의 명중률이 모두 20%에도 이르지 못할 정도로 저조해

손쉽게 미그 전투기들의 접근을 허용했고 근접하면 이렇다 할 대항 무기가 없었던 둔하

고 커다란 미군의 전폭기들은 쉽게 불리해지면서 후퇴하거나 격추당하곤 했습니다.

 

  원인은 당시의 미사일의 성능데이타들이 주로 온갖 열악한 상황이 모두 부여되는 실

전이 아닌, 원활한 상태에서의 실험상황에서 나온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너무 과

신했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컨대 근거리에서 사용하던 열추적 미사일인 사이드와인

더는 상대의 꼬리방향을 선점하고 상대의 엔진배기구에서 나오는 열을 추적해 발사하는

파이어 앤 포겟 방식의 편리한 미사일이 될 걸로 기대했으나, 기동성이 둔했던 당시의

미군 전투기들은 미그의 꼬리를 붙잡기가 쉽지 않았고 설사 붙잡았다 해도 미그 전투기

들은 사이드와인더의 약점을 이용해 엔진배기구의 열보다 더 뜨거운 태양쪽으로 회피하

거나 급격한 기동을 실시해 손쉽게 따돌렸습니다. 미그 21의 경우, 고속으로 상승해서

대부분 헤드온 상대로 근접해오기 일쑤여서 근접한 상황에서는 사용할수 없었고 더 근본

적으로는 대부분의 공중전이 급격한 움직임으로 인해 중력가속도(G:실생활에서 중력가속

도를 이해하시려면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롤러 코스터가 급격히

내려오면 몸이 아득하게 무거워지는 느낌이 드는데, 바로 그게 중력가속도입니다. 예를

들어 6G의 중력가속도가 걸리면 평소 몸무게 60킬로인 사람은 그 6배인 360킬로로 체감

하게 되는 것이고 이렇기 때문에 공중에서 움직임이 매우 둔해지거나 피가 하체로 쏠려

실신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공중에서의 전투가 어려운 이유도 바로 전투기들이

점점 고속화되면서 중력가속도가 너무 크게 인체에 걸리면서 생기는 문제죠)가 매우 크

게 걸리는 상황(대부분의 공중전에서 파일럿들은 오래 지속할 경우 실신하기 예사인 6G이

상의 중력가속도를 견뎌가며 전투를 치렀습니다)에서 치러지는데 비해 미군의 공대공 미

사일들은 3G이상의 가속도가 기체에 걸리면 제대로 발사를 하기도 어려웠고 설사 조준을

해 발사를 해도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기가 일쑤였습니다. 레이다 유도조준 방식을 택한

원거리 공격용 스패로우의 경우에도 일정시간 이상의 레이더 유도를 지속해야 표적을 고

정하고 발사가 가능했는데, 민첩한 미그 전투기들은 그러기 전에 빠져나가기가 일쑤였

고 무리하게 표적을 레이다로 고정하다가 도리어 뒤에서 달려드는 미그 21의 역습을 허용

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미공군과 해군 파일럿들을 답답하게 했던 현상은 교범이나 훈련

시 숙지했던 내용과는 너무도 다르게 미그전투기들과 근접조우 상황이 너무도 빈발하게

실전에서 발생하는데도 미군의 전투기들에게는 이렇다 할 대응책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조금 구식이 되어가던 마하 1.6 속도의 F-8 크루세이더 전투기들이 4문의 20밀리

기관포를 이용해 훨씬 더 용이하게 미그기를 격추하곤 했으니 말 다한거죠. 요컨대 공중

전상황에서 아무리 속도가 빨라지고 고도가 높아지며 전자장비가 발달해 원거리 초수평선

너머에서의 전투가 가능해졌다고 해도 공중전을 벌이다 보면 서로가 근접하는 상황은 어

쩔수 없이 부지기수로 발생한다는 점이 사실로 확인된 것입니다.

 

   거기에다 로빈 올즈 대령과 같이 2차대전에서 근접공중전을 경험했던 노련한 에이스 출

신들의 중견지휘관들이 우려하고 예상 했던 대로 제트시대 파일럿들에게도 1,2차대전식

근접공중전기술 이른바 개싸움의 기본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도 단단히 한몫했습니다.

결국 미해군은 68년 후일 탐 크루즈가 주연해 히트한 영화제목으로도 유명한 탑건 학교

를 세우고 파일럿들에게 처음부터 다시 1,2차 대전식 공중근접전 기술을 가르칩니다.

미 공군의 교범에도 근접공중전술이 다시 필수로 채택된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기술을 너무 맹신해 기본을 잊고 거들먹거리다 되려 커다란 희생과 망신을 당하고 나서

야 외양간을 고친 셈이었죠. 이후 미해군이 사용한 F-14 톰캣 전투기가 오직 공대공 전

투만을 상정해 설계된 놈이라던가, 월남전 이후 미해공군이 사용해온 F-14,15.16,18 전

투기에 모두 고정무장인 기관포가 탑재된 것이라던가, 스텔스 시대를 연 최첨단 5세대

F-22, F-35전투기에까지도 여전히 고정무장인 기관포를 싣고 있는 이유 역시 베트남전의

뼈아픈 경험과 교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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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나그네님, 귀한 글 또 올려주셨군요.  시간 내어서 찬찬히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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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즐겨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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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님의 댓글

명분 작성일

밤이 늦도록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보면 미국은 평화보다는 전쟁을 훨씬 좋아하는 나라로 보입니다.
명분이 있는 전쟁도 있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전쟁..

도둑이나 강도보다 몇천배 악랄한 짓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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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파시즘에 맞섰던 2차 세계대과 미국 스스로를 위해 싸웠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제외하면
미국의 역사에서 명분 있었던 전쟁은 거의 없었지요. 더구나 전쟁이라는 특성상 자국에서만 벌어지지 않으면 적지 않은 정치경제적 이익을 보기 때문에 미국은 전쟁에 탐닉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게 과하면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것도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고 미국이 요즘 들어 쇠퇴의 기미를 보이는 이유도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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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상님의 댓글

권종상 작성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기술이란 정말 위대한 것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명분과 정치적인 당당함이 없으면 말 그대로 강자의 폭압이 되지요. 오히려 월남전은 미국이라는 골리앗이 베트남이라는 다윗이 던진 돌에 맞아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미국 내부의 민중들로부터 '도덕'이라는 잣대를 새로 꺼내들게 했다는 데서 오히려 미국을 구원한 전쟁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물론 그 군국주의자 넘들은 아직도 변한 게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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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네, 핵심을 찔러주셨습니다. 미국의 현대사에서 미국이 가장 빛났던 순간은 바로 파시즘이라는 독재와 압제에 맞서 세상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냈던 2차대전이었고 그때의 미국은 분명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당당하게 전쟁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월남전의 패배가 미국사회에 남긴 파장은 아직도 계속되지만, 안타깝게도 군사적으로는 이것이 후일의 걸프전에서 남용되기 시작했고 결국 이것이 미국의 아프간 이라크 개입을 낳았다는 점에서 인간은 참으로 역사에서 교훈이나 성찰을 얻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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