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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애 여성비전향장기수 25일 운명, 유골은 북으로 송환 추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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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뉴욕사람
댓글 1건 조회 12,348회 작성일 10-09-25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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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애 여성비전향 장기수 25일 새벽 운명

유골은 북의 남편에게 보낼 준비 추진중



[서울=민족통신 종합]비전향 여성장기수 박선애 여사가 25일 새벽2시 심장마비로 운명했다고 자주민보가 이날 부고기사로 보도했다. 향년 83세. 빈소는 동국대학교 일산병원 11호 영안실에 마련되었다. 발인은 27일 오전 10시30분.고인은 특히 한총련을 비롯하여 남녘의 청년학생들이 돌보아 주었으며 존경해 온 인물로 알려졌다.


박선애 여성비전향 장기수 25일 새벽 운명

한총련 비롯 청년학생들이 존경해 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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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선애 여사
[서울=민족통신 종합]비전향 여성장기수 박선애 여사가 25일 새벽2시 심장마비로 운명했다고 자주민보가 이날 부고기사로 보도했다. 향년 83세.

장례위원회는 박선애 선생의 장례를 ‘통일애국열사 박선애 선생 민족통일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27일 밤 8시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각계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고인의 삶을 회고하는 추모제를 열기로 했고, 발인은 28일 오전 8시이며, 영결식을 치른 뒤 9시에 임진각에서 노제를 진행할 예정이다. 빈소는 동국대 일산병원 영안실(1호실)이다.

장례준비위원회는 고인의 유골을 북으로 송환할 계획을 갖고 추진중이다. 2000년 9월 송환된 고 박선애 여사의 남편 윤희보 선생이 북에 생존해 있어 고인의 유골을 화장한 후 북으로 보낼 예정이다.

통일애국열사 박선애 선생 장례위원회 강진구 집행위원장은 “장기적으로 유골을 북에 계신 남편 윤희보 선생께 보낼 예정”이라며 이를 위해 “26일 통일부에 북한주민 접촉신청서를 내고 윤희보 선생을 초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 집행위원장은 “(고인의 유해는) 화장한 뒤 파주나 서울 근교의 절에 (송환될 때까지) 당분간 모실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고인은 특히 한총련을 비롯하여 남녘의 청년학생들이 돌보아 주었으며 존경해 온 인물로 알려졌다.고인은 또 2000년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윤희보 선생의 부인이시며 범민련 서울연합 부의장을 역임했다.

박순애 여사의 발자취


박순애 여사가 걸어 온 길, 그의 발자취는 민족분단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의 양력에서도 나타난다. 1951년 1월 체포, 광주포로수용소 10개월 수용. 1951년 11월 사형구형에 징역 15년 선고를 받고 대구교도소에 수감. 1952년 공주교도소로 이감, 1955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1960년 광주교도소로 이감, 1961년 대전교도소로 이감, 1965년 5월 만기 출소. 1975년 사회안전법으로 재수감, 1979년 출소.

박선애 그는 여성빨치산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20대부터 40대까지의 행적(한겨레신문 2002년 7월1일자 여성해방위해 질긴투쟁 참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7년 전라북도 임실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박선애는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와 좌익활동을 했던 오빠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정치활동에 눈을 떴다. 그에게 정치의 장은 식민지, 분단된 조국을 되찾겠다는 의지와 함께 ‘여성이 놓인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공간이 되었다. “여성이 탄압 받고, 사람 노릇 못하고, 시집살이하고, 어디 가서 떳떳이 말도 못 하고 … 여자와 남자가 이렇게 차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여성해방을 할라고 보니깐 여성해방 전에 조국이 통일되어야 되것다. 나라가 분열된 상태에서는 여성해방 하나를 가지고 해결이 될 수 없다”라며 자신의 빨치산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여성해방’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물론 빨치산 안에서도 성차별은 있었다. 그러나 박선애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빨치산에 가서도 대부분 식사하고 그런 걸 여자들이 하는 걸로 으레히 알아. 나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그랬어. 그러믄 우리는 공부를 못 허잖애. 나는 그런 거 막 싸웠단 말야.” 하지만 그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의 성차별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년단체 조직허는데 가보니까, 사실 지금 청년단체에 여자가 젤 많애, 남자는 아주 쪼금이야. 그런디 간부가 딱 여자 둘이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어, ‘어째 청년단체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간부 선출할 때는 그렇게 인색해? 아직도 여자가 능력이 없다는 거야, 어쩐거야’ 근께 언제든지 말야 중요헌 것은 주도권이야.”

하지만 이와 같은 박선애의 여성해방에 대한 의지도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가족이데올로기 앞에서만큼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2000년 9월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귀환할 때 “내가 아픈 동생과 딸을 놔두고 어떻게 가겠냐”며 남편 윤희보만을 북으로 떠나보내고 자신은 서울에 남아 남은 가족을 돌보고 있다.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 소원이라며 여든이 다 된 나이에도 통일운동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빨치산 박선애. 많은 사람들이 “여성빨치산도 있었어?”라며 반문할 정도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존재다. 하지만 역사의 장면 장면마다 여성들의 질긴 투쟁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듯이 여성빨치산의 치열한 삶과 고민들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길 바란다.

[참조:최기자/여성사연구모임 길밖세상(freechal.com/genderhistory)]

*관련 보도자료---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고인 관련 동영상 보기






*2000년 9월에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윤희보 선생과 평양서 특별대담한 내용 보기

[출처 : 민족통신/자주민보 2010-09-24]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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