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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예멘> 역사가 우리에개 주는 귀중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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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주청년
댓글 1건 조회 5,184회 작성일 10-09-23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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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예멘:미국이 독재정권 지원하며 간섭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통합정부 파괴”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은 이번에 51번째 <민족통신> 연재글로 "예멘"에 대해 고찰하며 이 나라도 미국이 관여하여 예멘 독재정권을 후원하며 간섭하고 있어 미국의 제국주의 세력은 지구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건드리지 않은 나라가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최근의 예멘 상황에 대해 " 예멘은 두개의 체제가 1990년에 통합한지 4년만에 붕괴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기서도 남북간 대립이 위험수위를 넘어 내란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고 설명하며 그 원인에 대해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오늘 예멘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전문을 게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예멘:미국이 독재정권 지원하며 간섭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통합정부 파괴”



식민통치 128년에 영국은 또 다시 예멘을 남북으로 분단
분단내전으로 화약고된 예멘에 미국은 선전포고
사회주의 남예멘을 함락시킨 무력통일


*글: 유태영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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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유태영 박사
예멘은 아라비아 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나라로 총 면적이 한반도의 약 2.4배 (527,970 평방km) 되지만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지대이고 서쪽 해안지역에 비옥한 농경지역이 있으며 지하자원으로 석유,대리석, 금과 납등이 있다. 인구는 2천 4백만명이며 종교는 이슬람이 절대다수이고 기독교는 1%에 달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 왕에게 시바의 여왕이 희귀하고 값진 선물을 가져왔던 왕국이 바로 예멘이였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옛날의 예멘은 “홍해의 흑진주”로 불리우는 영화의 나라였다. 하지만 오늘의 예멘은 오랜 식민통치로 인하여 아랍권에서 가장 낙후한 나라로 떨어져 있으며 세계에서 최빈국 중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예멘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이기도 하다.

국제무기조사 기관의 발표에 의하면 예멘 전체 국민이 소유하고 있는 총기의 수는 1천 7백만 정으로 성인 1인당 평균 3정의 총기를 보유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한 나라로 분류되고 있다. 최근 4년간의 통계에 의하면 2만 3천건의 총기사용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작은 나라에 하루 평균 16건의 총기사고가 매일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총기사고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사건은 예멘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납치하는 사건이며 다음으로 외국인 사업가들과 관광객들을 납치하는 사건이 계속하여 발생하여 왔다.

실례로 1998년 1월에 주예멘 한국대사관의 한 외교관의 부인과 딸이 교민 1인과 함께 무장한 에멘인에 의하여 납치되는 사건이 있었다. 또 지난해 2009년 3월 15일에는 이른바 “세이윤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하여 한국인 관광객 일행인 18명중에서 폭탄으로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한국정부 관계자와 유족들이 예멘에 갔는데 또 다시 폭탄공격을 받았으나 이번에는 인명 피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예멘의 무장세력이 왜 한국인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한국은 미국이 중동에서 벌리고 있는 침략전쟁에 추종국으로 참가하고 있기 때문으로 진단된다. 게다가 예멘 사람들은 한국이 미국의 1등 추종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데에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것도 아프카니스탄에서 발생된 한국 선교사와 전도단원들의 경우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이 이슬람권에서 테러의 대상이되고 있는 사실이 이제는 먼 나라의 예기가 아니다. 최근에는 또 한국과 이란과으 관계에서도 미국의 추종자세 때문에 중동지역에서 수많은 혜택을 잃어버려야 하는 처지도 한미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미국에 의존적이고, 그리고 흉할 정도로 밀착되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한국인이 이곳에서 골탕먹은 사건들은 최근 몇년사이에 12번이나 발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1]예멘의 간추린 역사


예멘은 3000년 이상된 고대의 풍부하고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다. 전통에 의하면 예멘의 선조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인 욕단의 후손들로서 부족왕국을 이루워 비옥한 계곡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

기원전(BC) 12세기 부터 AD 6세기에 이르기까지 미나 왕국과 사바 왕국이 예멘을 통치했는데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에 향료등의 무역국이되였고 풍부한 농업적 부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시바 여왕(열왕기상 10장)이 솔로몬을 방문하여 향료와 보석을 선물하고 지혜를 배웠다는 옛 역사 이야기는 오래 동안 전해지고 있다.

사바 왕국 이후에 예멘은 카타바, 하미아리트, 아우산, 하드, 라마우트 왕국 그리고 페르시아의 침략 등 여러 왕조시대를 거쳐오다가 7세기에 이르러서 예멘은 이슬람시대의 문호를 열게 되었다.

이슬람 수니파는 예멘의 남부 평야지대를 통치했고 시아파계의 자이드파는 예멘의 북부 고원지대에 자리를 잡고 통치를 헸다. 하지만 9세기에 이르러서 북부의 자이드파의 이맘(Imam)이 라지드 왕조를 창건하고 예멘의 전 지역을 통치했다.

이맘이 창건한 라지드 왕조는 1872년 까지 예멘을 통치하다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하여 정복되여 완전히 패망하고 예멘을 떠나가고 말았다.이맘의 라지드 왕조가 떠나간 후에 예멘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다시 받게 되었는데 이때에 영국은 재빠르게 예멘의 남부지역을 강점하여 예멘의 국토를 남과 북으로 분단해 놓고 통치한다. 예멘의 비극적 운명은 이때부터 시작되였다.

예멘이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를 새로 받기 시작하는 정치적 대변동기에 있어서 영국은 이 기회를 악용하여 재빠르게 행동하여 예멘의 남부 요충지역인 아덴 항구를 영구적으로 탈취했던 것이다. 영국이 아덴항구를 탈취한 이유는 이베리아 반도의 전략적 기지로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이미 아덴 항구를 탈취하고 있었지만 특히 1869년에 수에즈운하가 새로 개통 됨으로 인하여 영국은 남예멘의 아덴항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갈망한 나머지 이곳을 강탈하기 위하여 장기적 점령을 꿈꾸어 왔었다.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와 싸워 승리하자 우선 예멘의 남부지역을 강점하고, 이 나라를 다시 분리해서 통치하기 위하여 제국주의자들이 흔히 써먹던 수법으로 예멘을 남과 북으로 갈라 놓았다. 영국이 예멘의 남부지역을 강점한 사건은 바로 예멘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적 역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마치도 우리 조국반도의 분단역사가 1945년에 미국에 의하여 분단되었던 그러한 상황을 떠 올리게 한다. 다시 말하면 38선이 그어진 사건과 꼭 같은 맥락에서 발생된 것이 예멘의 분단상황이었다.

[2]북 예멘의 독립운동


예멘을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되여 1918년에 50년 동안의 지배를 끝내고 예멘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오스만 투르크가 철수함으로 인하여 예멘은 옛날 이맘 왕정으로 복귀하여 이슬람의 신정정치가 다시 부
활되여 신정혼합정치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남쪽 예멘에서는 딴판이었다. 남예멘은 이미 1839년부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북 예멘에 복귀된 이슬람 왕정과는 전혀 무관한 상태이였다. 남북으로 분단된 두개의 나라로 확실히 자리 매김하여 정면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을 뿐이였다.

그러면 북예멘에서 회복된 이맘 이슬람 왕정은 어떠했는가? 정치적 진로에 있어서 결코 순탄하지 못하고 북 예멘 안에서 항상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물론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태에 발생한 위기라고 볼수 있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구 시대적 이슬람 왕정에 대한 반발로 일어나 <왕당파>와 <개혁파>의 대결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개혁을 원하는 시대적 요구가 크게 작용하여 북 예멘의 정치적 불안을 고조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스만 투르크가 떠나 가고 이슬람 왕정이 다시 회복된지 54주년이 되는 1962년 9월에 북 예멘에서 육군 장교 살레 중령이 주도하는 군부의 쿠테타가 발생하여 왕정은 무너지고 <예멘 아랍공화국>이 새로 창건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미국과 소련은 앞다투어 새로 창건된 북쪽의 <예멘아랍공화국>을 즉시 승인했다. 하지만 영국은 남예멘을 강점하고 있음으로 심통을 부리면서 새로 창건된 북쪽의 <예멘아랍공화국>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부의 쿠테타로 새로 창건된 북쪽의 <예멘아랍공화국>은 또 다시 결코 순탄치못하여 정치상황은 혼란속에 빠졌다. 그래서 군사정변 발생이후 16년 동안에 4명의 대통령이 등장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었던 네명 모두 또 다른 쿠테타 또는 암살로 모두 사라져 버리는 사태가 속출되었다.

그후 1978년 쿠테타의 주동자였던 살레 중령이 대통령이 되였는데 살레 대통령도 두번 이나 암살의 위협을 당했으나 요행히 살아남아 대통령의 임무를 계속해 왔다. 이 때 새로 창건된 북의 <예멘아랍공화국>은 친미 보수적인 군부 정권의 성격을 띄었다. 이 정권의 배후에 미국이 있어 일일이 간섭을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국은 계속되는 북예멘의 내부 혼란을 엉뚱하게 남 예멘의 개입이라는 의혹으로 몰고 갔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남 예멘과 북 예멘이 서로 싸우도록 유도한 셈이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1972년과 1979년에 발생한 북남간의 무력충돌이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이후 북에멘의 살레 대통령은 남예멘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남예멘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영국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려고 의도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영국은 예멘의 분단에 대하여 “병주고 약준다”는 옛 격언을 그대로 행동함으로써 북예멘과 은근히 내통하는 영국의 침략적 근성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3]남 예멘의 독립운동


1839년부터 128년 동안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남예멘에서도 1963년부터 비로서 처음 독립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국은 할 수 없이 남예멘에서 철수를 시작했고 1967년에 심한 폭력사태가 일어난후 남예멘은 1967년 11월 30일에 <남 예멘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 했다.

1970년에 급진적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예멘민주주의인민공화국, PDRY>으로 국명을 정하고 모든 정치활동과 정당활들을 모두 하나로 통합된 단일 정당을 만들어 <예멘 사회주의당,YSP>을 이루게 되었다. 남부 예멘에서 PDRY가 공식적으로 창당이 됨으로써 예멘은 돌이킬 수 없는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예멘인민공화국>은 미국과 단교하는 한편 중국과 소련의 원조를 끌어 들임으로 아랍국가들 중에서 최초의 사회주의국가로 출발했다. 인구는 남예멘 보다 북예멘이 3배나 더 많음으로 군사력에 있어서 북예멘이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

<예멘인민공화국>의 제1대 알샤비 대통령(1967년)과 제2대 알리 대통령(1978)은 남예멘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크게 공헌하지 못하고 불명예로 퇴진 했다. 하지만 남예멘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한 후에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1986년에 발생한 내란이였다. 이 내란의 내막은 온건 우파인 무 함마드 대통령의 세력과 이를 반대하는 강경 좌파인 <예멘사회주의당>의 서기장 이스마일 사이에서 발생한 두 세력간의 권력투쟁에 의한 내란이였다.

온건 우파인 무함마드 대통령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권력을 이용하여 친위 쿠테타를 스스로 일으켰다. 친위 쿠테타를 일으킨 온건파 무함마드 대통령은 처음에는 승리자가 되여 예멘사회주의당의 강경파의 지도자 이스마일 서기장을 비롯하여 4명의 중요한 당간부들을 살해하는데 일단 성공하지만 하지만 후에 분발한 좌파군부의 강력한 반격과 폭격으로 인하여 양측에서 심한 희생자가 발생하고 양측은 장기적 내전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 장기적 내전의 결과로 결국 우파 무함마드 대통령은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정권을 포기하고 북예멘으로 망명 하는 긴급한 사태로 돌변하게 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하여 <예멘사화주의당>의 주요 간부 50여명이 사망했고, 2000명의 당원들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당의 정치국원 알 바이드가 <예멘사회주의당>의 새로운 실권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예멘사회주의당>이 사태를 잘 수습했고 오히려 친위 쿠테타를 일으킨 현직 남예멘의 대통령이 북예멘으로 망명을 하게 된것은 분명히 소련의 긴급대책이 배후에서 도움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내전 당시 소련에 여행중에 있던 남예멘의 아타스 수상은 귀국하여 당의 새로운 서기장으 등장한 알 바이드와 함께 내전 후의 어려운 문제들을 잘 수습해 나갔다. 또한 서방을 배경삼고 있는 북예멘과의 관계를 풀어 나가는데 있어 실질적으로 문제를 잘 처리했으며 미국을 등에 업고 있는 북예멘에 남침에 대한 경계심을 잠시도 늦추지 않고 대비 하고 있었다.

<예멘사회주의당>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알 바이드는 영국식민 통치 때 수도 아덴항구에서 노동운동에 가담하면서 반영독립운동 단체 인 <민족전선>의 창립에 젊은 시절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그는 조직내에서 좌파에 속하는 열성적 당원으로으로 활약을 했다. 그는 조직내에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우파 보수세력을 숙청하는데 언제나 앞장섰다.

알 바이드는 1969년에 영국의 침략자들을 남예멘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독립운동 선봉자였으며 <민족전선>의 반영국 무혈 쿠테타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남예멘이 독립한 후에 정부에 입각하여 외무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남예멘의 지도층으로 부상한 아타스 수상과 바이드 서기장은 여러면에서 남북화해를 위하여 노력하여 북으로 망명한 무함마드 대통령의 우파 추종자들에 대한 관용을 베풀어 주는 화해정책을 시도했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 당시 소련 공산당과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의 영향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어쨋든 남예멘의 통치자들은 과거보다는 통일문제에 긍정적으로 많이 전향 하고 있었다.

1972년 9월과 1979년 2월에 두번째 남북국경선에서 치열한 분쟁이발생하였지만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연맹국들의 적극적인 중재역할에 따라 카이로에서 정상회담이 있었고 두번째 쿠웨이트 정상회담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남과 북은 통일을 향하여 기대를 갖기도 했다.

그리하여 1986년 7월과 1988년 5월에 남예멘의 사회당 서기장 알 바이드와 북예멘 살레 대통령이 리비아 카다피 대통령의 초청으로 트리폴리에서 둘이 함께 만났다.두 지도자는 통일 및 피난민 교환등 여러 실제적인 문제들을 토의하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접촉할 것을 합의했다. 이와 같은 남북간의 잦은 접촉과 함께 상호간의 논의를 진행해 나갔다.

[4]민족통일이 아닌 제도통합


그 결과 1990년 5월 22일에 남예멘과 북예멘 두 제도가 하나로 통합되는 <예멘공화국> 의 창건을 전격적으 선포했다.

그 동안 1962년에<예멘아랍공화국>이 창건되었고, 1963년에 <예멘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남과 북이 각각 분단되어 오다가 28년만에 두 개의 제도가 <예멘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렇게 통합된 <예멘공화국>은 북쪽에 있는 시나를 “시나 행정수도”라 명명하고 남쪽에 대한 보상으로 아덴항을 “아덴경제수도”라 명명하기로 양측은 합의했다. 대통령은 북쪽에서 살레 대통령이 통합예멘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남쪽의 알 바이드 사회당의 서기장이 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이와같은 전격적인 예멘의 제도적 통합에 대하여 세계 동서 양진영의 정치 평론가들의 관찰은 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멘의 전 격적인 제도적 통합은 순전히 시급한 경제적 실리때문에 무작정 이루어진 매우
불안정한 통합이었기 때문이다.

분단된 나라의 통합은 각기 그 지역의 전통과 특수성이 다르기 때문에 통합의 방정식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민족통일의 기본적 원칙>은 (1)민족 화해와 협력 정신에 의한 민족통일, (2)외세의 간섭과 지배가 배제된 자주적 통일, (3)경제적 상부상조 원칙에 입각한 자립경제의 통일이 되어야 그 통합이나 통일이 어느 정도 공고해 질 수가 있었는데 예멘의 경우는 그렇게 진행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예멘의 통합은 졸속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단순히 급박한 경제문제 해결과 석유 자원개발의 시급함 때 문에 급조된 상태에서 통합이 이뤄졌기 때문에 그 후유증은 문제를 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예멘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붕괴를 이유삼아 강자의 논리를 적용하여 무조건 밀어부치기식으로 통합을 강행 했다. 또 남예멘에서는 급변
하고 있는 소련과 동구권의 국제정세에 대한 조바심 때문에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통합을 피동적으로 진행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남예멘에서 석유가 처음 발견된것은 1982년에 남부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으며 그후 네 곳에서 많은 석유매장량을 발견되었다. 남부의 석유 매장량은 북부 예멘보다 3배가 많았다. 하지만 예멘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악조건으로 인하여 다른 아랍석유보유국에 비하여 석유개발이 매우 뒤떨어져 있었다. 통합된 정부가 속히 들어서기만 하면 예멘의 석유산업의 개발이 촉진되여 국가경제의 사활이 달려 있는 중요한 석유산업이 발전될것이라는 벅찬 기대에만 신경썼을 뿐 양측의 통합을 위해서 어떤 점들이 보완되어야 하는 측면에서는 양측 모두 소홀하였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멘의 통합은 그 후 순조롭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양측 통합을 위한 기본적 3대 원칙이 그 통합을 뒷받침 해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후유증은 또 다른 국면을 잉태하게 되었다.

[5]오늘의 <예멘공화국>은 어디로 가는가


1990년 5월 22일에 제도적 통합을 이루었던 <예멘공화국>은 1994년 5월 5일 또 다시 붕괴되는 상황으로 빠져든다. 즉 통합한지 4년만에 붕괴되고 그후에 전면적 내전으로 이어졌다.

양측은 외세에 대한 입장과 자세가 달랐다. 민족정서에 대한 차이점도 있었고, 계층간의 문제, 지역간의 갈등문제 그리고 경제적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들도 붕괴의 요인들로 작용되어 왔다. 외세에 의한 강자의 논리로 밀어부치기식으로 이뤄진 통합이었기 때문에 그 통합은 곧 붕괴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진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 서방 언론들은 예멘통합 후에 살레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튼튼해졌고 미국의 지원으로 장기집권 체제의 기반이 조성되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예멘에 대한 경제지원은 2009년에 4,030만달러에서 2010년에는 6,300만 달러로 증가했다. 그렇지만 이와같은 미국의 막대한 원조는 살레 대통령의 친미정권을 유지하는데 소모될뿐 그러한 원조가 예멘 민중들의 혜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기득권 세력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라는 것은 예멘 국민들에게는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같은 현상은 이승만 정권이 미국의 원조를 받아서 기득권 세력의 배를 채워주는 것과 흡사한 상황이 예멘에도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방언론들의 일방적 보도와는 다른 양상들만 일어나고 있었다. 예멘 통합의 붕괴 이후에 축척 되어온 남북 갈등은 심화되기만 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민중들의 항거는 폭발적이었다. 이들의 폭동과 방화 그리고 대규 데모 사태는 연일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한 군경의 무차별 최루탄 난사와 민중들의 폭동 등으로 예멘 정세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것도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미국을 포함한 서방언론들은 2010년 1월5일자 보도를 통하여 <예멘 3개의 내전 화약고.. 미국의 선전포고로 악화일로>라고 머릿기사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서방언론들은 “미국이 예멘을 상대로 대대적인 대테러전을 확산시킬 조짐이 보인다”고 보도했다. 한편 미국 당국은 이러한 조짐 에대하여 미국의 개입이 오히려 예멘에서 알카에다의 힘만 키운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미국은 지금 예멘에서 실제로 3개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데 북서부에서는 시아파 반군과, 남부에서는 분리운동세력이 살렐 정부군과 싸우고 있고 그 틈을 타 동부에서는 알카에다가 기승을 부리면서 정세를 확장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스웨덴의 소위 테러전문가인 란스토르프는 “이라크에서 싸웠던 예멘 출신 무자 하딘 이슬람전사 2000명이 지금 예멘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뿐만 아니라 소말리아의 반미조직인 알샤바브가 예멘의 반미투쟁을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 당시 예멘 살레 대통령은 알카에다에 대한 공세를 확대하고 있지만 진압 능력은 날이 갈수록 의심스럽다는 국제적 평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예멘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데이비트 뉴튼은 “미국이 공세를 강화하려 한들 오히려 돈을 퍼주고 테러기지를 확산시킨 파키스탄 꼴이 될 수도 있다” 라고 개탄했다.

오늘의 예멘은 부시 미 행정부가 일으킨 예멘전쟁을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전쟁을 장기화 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오바마의 전쟁은 예멘 알카에다의 힘을 키워주는 결과를 낳고 있을 뿐이다. 2009년 크리스마스 시기에 발생한 미 여객기 테러 기도사건에 대하여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미 중부 사령관, CNN등 미국 여론은 온통 예멘에 보복공격에 나설것 같은 전쟁 분위기만을 고조시켰다.

미국의 코네티컷 상원 의원 조지프 리버먼은 미국의 예멘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폭탄적 선언을 했다.

<이라크는 어제의 전쟁이었고, 아프가니스탄은 오늘의 전쟁이라면, 예멘은 바로 내일의 전쟁이 될것이다>

미국은 예멘을 현재에 신중히 고려해야 할 위험지구로 여기고 있다. 미국은 현재 예멘에 알카에다의 훈련소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살레 대통령에게 현지에 맹공격을 하라고 압력을 가해 왔다. 하지만 미국은 살레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미국이 직접 예멘 땅에 폭탄을 마구 투하해 왔다.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트)에 의하면 미국은 2009년 12월 17일에 예멘 아비안 주 마잘라 마을에 공습을 했는데 숨진 55명중 대부분이 민간인이며 여성 14명과 어린이 21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런데 앰네스트가 확인한바에 의하면 미국이 이 공습에 사용한 무기가 악명 높은 <집속탄> 이라는 것이다. 살레 대통령 정권은 미국의 폭격, 그것도 ‘집속탄’을 퍼붓는 행위까지 눈감아 주면서 미국을 두둔해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미국은 이러한 만행을 자행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집속탄 사용금지 협약’을 거부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면서 미국은 한편으로는 호전적 예멘 독재정권을 후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예멘을 글로벌 테러기지라고 비난하고 있어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은 고조되고 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예멘이 1990년에 통합한지 4년만에 붕괴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북간 대립이 위험수위를 넘어 내란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데 그 이유와 윈인은 무엇일까?

양심적인 국제 평론가들은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오늘 예멘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지적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이유 뿐만 아니라 예멘 통합에 임하는 예멘 지도자들과 예멘 국민들의 확고부동한 입장과 자세가 한층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통합이 좋지만 졸속으로 그것도 외세의 필요성에 강요되어 이뤄졌기 때문에 그 통합이 빛을 보지 못하고 또다시 붕괴에 봉착한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필자는 예멘 사태를 고찰하면서 우리 민족의 통합이나 통일도 그 원칙들과 방도가 확고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자들은 독일식 통일도 들먹이는데 우리는 독일식으로 통일할 수 없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한쪽이 다른 한 쪽을 먹는 식의 통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닳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흡수통일도 또는 적화통일도 그것은 곧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런 통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통일은 연방제/연합제 수준에서 양측이 당분간 양측의 제도나 이념을 모두 인정한 기초위에서 연방의회를 통하여 합리적인 방법으로 운영하다가 언젠가 우리 후대들이 양측 서로간의 신뢰와 믿음이 축적되면 그 때 가서 두개의 제도를 하나의 제도로, 결합하는 방법으로 통일을 이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 사이에 체결된 6.15선언과 노무현 사이에 합의된 10.4선언은 바로 그런 통일로 가기 위한 수순을 합리적으로 마련하여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갈 수 있도록 우리 국내외 동포들 모두가 노력해야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예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교훈이다.(끝)



[출처 : 유태영 박사 2010-09-23]

민족통신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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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좋은 글 고맙습니다.  예멘의 형편이 참 안타깝군요.

예멘의 현실에서 우리 민족이 큰 교훈을 얻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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