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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처녀와 대한민국 청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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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735회 작성일 10-09-2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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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년 김익의 이야기
<밀착취재>조선처녀와 대한민국 청년은 어떻게 만났을까②
newsdaybox_top.gif 2010년 09월 21일 (화) 23:17:55 김양희 기자 btn_sendmail.giftongil@tongilnews.com newsdaybox_dn.gif

리정애와 김익의 결혼에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조선적 처녀와 대한민국 국적의 청년은 지난 9월 9일 혼인신고를 했고, 국적란이 공란으로 이루어지는 등 불안정하지만 그래도 혼인신고는 16일 확인 결과, 성립이 됐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조선적과 대한민국 국적의 부부가 탄생한 만큼, 이들의 만남에 축하를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한 일간지에 이들의 사연이 소개된 후 ‘북에 가서 살아라’, ‘이들이 말하는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이런 식으로 간첩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다’라는 식의 댓글이 수 없이 달려 이들 부부를 가슴 아프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들의 결혼을 두고 조선적 문제를 여론화하기 위한 기획성 이벤트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몸소 실천(?)한 것뿐이다. 왜 신부는 조선적을 버리지 않는지, 그리고 재일동포와 한국인 청년이 어떻게 만나고 사랑을 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는 궁금한 것 투성이다. 이들 부부에게서는 특별한, 그렇지만 다른 연인들과 특별할 것이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들어봤다. 이 밀착 취재는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동포처녀를 사랑한 바보

재일동포 1세라고 불릴 만큼 민요와 한복 등 전통의 옛것을 좋아하는 정애를 아내로 삼았다. 정애는 나를 만나기 전 몇몇 남자들에게서 사랑을 고백 받을 만큼 인기가 많지만 그들은 모두 재일동포이고 ‘조선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떠나갔다. 나도 처음엔 국적 때문에 함께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내에게 국적을 바꾸라고도 했지만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됐다.

하루는 후배 녀석이 “형은 꼭 미련 곰탱이 같아요”라고 한 적이 있는데 녀석의 말대로 나는 미련하게도 동포처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기러기가족도 있는데 살지 못할 게 없다고 쉽게 생각을 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외국인을 아내를 만나는 것보다도 더한 고통과 안타까움을 안고 살아야 함을 뜻하는 것인 줄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결혼식을 20여일 앞두고 있는 이때 남들은 결혼 준비로 정신이 없겠지만 우리는 정애가 어떻게 하면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나와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데 온 신경을 다 쓰고 있다. 혼인신고가 되면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혼인신고는 우리에게 별 의미가 되지 못했다. 정애는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마치고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애는 3개월 여행증명서를 받아 대한민국을 방문한 조선적 동포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3개월마다 일본에 다녀오면 되지 않냐고 한다. 그러나 그 비용과 시간도 부담스럽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상견례를 위해 수차례 고국방문 신청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여행증명서 발급이 거부당했고 ‘3개월 안에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서약서까지 쓰고 8개월 여 만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에 일본으로 돌아가면 언제 다시 한국 땅을 밟을지 모르겠다. 요즘 부쩍 절대 국적을 바꾸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아내와 이대로 영영 헤어질지 모르는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수렵, 어로, 채집이 취미

   
▲ 고3 시절 친구들과 함께. [사진제공-김익]

나는 1975년 1월 경남 울산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 등과 함께 사는 10식구, 대가족이었다. 연년생이었던 여동생 덕분에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라게 됐는데 울산이 도시이긴 했지만 가까운 곳에 들판이고 산이고 강이 있어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할아버지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잠자리채는 다른 아이들이 갖고 있는 약한 잠자리채와는 달리 굵은 철사로 만든 튼튼한 것이어서 각종 곤충들은 물론이고 물고기까지 잡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수렵, 어로, 채집이 취미라고 할 정도로 산과 강에서 뛰어노는 것이 좋았다.

“얼마나 물고기 잡기를 좋아했는지, 초등학교 때 채변검사를 하잖아요. 이때 전교에서 유일하게 ‘간디스토마’라는 회충이 나와 부모님과 양호선생님 손에 이끌려 보건소에 가서 커다란 알약을 받아먹었던 기억이 있어요. 민물고기 회를 먹다가 회충에 걸린 거죠. 앞으로 다시는 민물고기 회를 먹지 않겠다고 선생님과 약속을 했었습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도시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 초등학교 때 삼촌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극장을 가봤을 정도였으나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고는 가정불화로 이어졌고 이때 처음으로 울산을 벗어나 서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고 서울의 대학을 가기위해 지독히도 열심히 공부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한 것은 고3때였는데 밤 12시에 집에 갔다가 아침 7시면 학교에 나와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가 여름부터는 아예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교단에 이불 깔고 자는 등 학교에서 먹고 자며 공부를 했죠. 여름 방학에는 미리 서울지역의 대학교를 탐방해보면서 가고 싶은 학교를 정하고 꿈을 키웠습니다.”

어느 순간 살고 있는 운동권의 삶

어려서부터 집에서 개, 닭, 토끼 등 동물들을 키우며 친근한 터라 축산학을 전공분야로 삼고 1993년 고려대학교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나를 보고 운동권이라고 하는데 처음부터 무슨 사상을 갖고 있다거나 하지 않았다. 노래를 좋아하는 난 기숙사에서 딱히 할 일도 없어 입학을 했을 때 새내기새로배움터에서 선물로 받은 음악테이프를 열심히 들었는데 듣다보니 가사가 와 닿았다. 그 음악테이프는 소위 운동권 노래테이프였다. 그러다가 얼마 후 우리 학교에서 한총련출범식을 한다고 하면서 노래소모임에 들어있는 나는 자연스럽게 한총련문예단으로 무대 한 켠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이때도 정치적으로 별 관심이 없었다.

“1학년 때 한총련출범식문예단을 했다고 하면 대단히 정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 그렇지 못했어요. 한총련출범식도 학교에서 하는 다른 행사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죠. 때문에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은 밤새도록 또 다른 행사에 참여했지만 저는 바로 기숙사에 들어와서 잤어요. 게다가 다음날은 친구의 소개팅을 주선해주고 연결이 안 된 친구와 술을 퍼마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선배의 권유로 8.15행사를 참가하고 1993년 겨울 광운대에서 있었던 정치학교에서의 공부 등으로 자연스럽게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94년에는 김영삼 정권 초기였는데 쌀 수입반대 투쟁이 주류를 이뤘다. 농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높은 관심을 가졌고 이때 일주일여 단식을 했다. 또한 그해 8월 고려대학교에서 김청동(김일성주의청년동맹)사건 이라고 조직사건이 터지면서 보름여동안 학생회 옥상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열심히 살면서 1995년에는 과학생회장을, 1996년에는 단과대 집행부를 맡게 됐고, 그 해 여름, 있었던 연세대 투쟁에서 체포되면서 기소유예를 받는다. 그리고는 탄압이 심해져 사람들이 떠나가는 운동판에서 1997년 ‘나갈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5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총대를 메고 단과대 학생회장에 나가 당선을 했다. 이때는 전국적으로 공안탄압에 의한 한총련 대의원 탈퇴 바람이 불었을 때였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정경대 학생회장과 자연자원대 학생회장인 나만 탈퇴를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해 8.15행사에 참여했다가 체포됐고 이 때 첫 번째 구속이 된다. 함께 체포된 이들은 대부분 다음날 바로 나올 수 있었지만 나는 한총련 대의원이었기 때문이다. 탈퇴를 하면 바로 내보내준다고 했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당시 회유를 하기 위해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면회를 오도록 하고 검사가 학교 선배라고 말도 놓아가면서 탈퇴서를 쓰고 바로 나가라고 했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요. 왜 탈퇴를 하지 않냐고 물었지만 개인적인 탈퇴는 의미가 없고 공권력에 의해 탈퇴를 하는 것은 학생자치권에 대한 침해로 나를 뽑아준 학우들이 탈퇴를 하라면 하지 이런 식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때 집행유예로 나오긴 했지만 3개월 정도 구속을 당했죠.”

운동으로 진로를 정하며 지향이 같은 여성과의 만남을 기대

그러나 이때의 구속기간은 운동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 준 시간이었다. 감옥에서 오히려 평소 바빠서 읽지 못했던 ‘아리랑’, ‘태백산맥’ 등의 책들을 읽으면서 운동으로 진로를 정한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IMF가 터졌고 학내도 어수선했지만 1998년 학교에 조국통일위원회를 만들었다. 1999년에는 서총련에서 일하고 2000년에는 다시 학교에 들어와 조통위 활동을 하고 2002년부터는 한총련 간부를 맡았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수배생활을 하다 2007년 7월 두 번째 구속이 된다. 죄명은 찬양고무죄로 2006년 하반기부터 2007년 초반까지 친북사이트에서 글을 퍼서 운동단체 사이트에 올렸다는 이유에서다.

5개월여의 감옥생활 끝에 2007년 12월 출소하고 2008년 1월 3일 정애를 만났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운동권 남자’가 이상형이라는 정애의 말에 바로 내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1학년 기숙사시절, 여대 기숙사로 전화를 걸어 방팅을 하자고 제안을 하는 등 호기도 부려봤으나 가치관이 달라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그 이후 자연스럽게 운동권 여성들을 만나게 됐다. 대학교 1학년 때 경당을 배우면서 이대 88학번 누나를 잠깐 만났고 이후 1997년 하반기 출소 직후 성신여대 94학번 활동가인 여학생을 만났었다.

“옛날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책이나 잡지에서 봐도 운동을 하면서 연애를 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운동을 하는 삶은 경제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구속과 수배가 반복이 되는 등 행복보다는 고난과 역경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과 나는 맞지 않다고 생각을 했어요. 특히 도시적이고 세련된 느낌과 나는 맞지가 않아 지향이 같은 운동을 하는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정애는 감옥 안에서 양심수후원회가 보내준 월간지 ‘민족21’ 만화에서 처음 접했다.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하는 생각은 얼마나 간절한지, 책을 읽을수록 정애에 대한 호기심은 커졌고, 나가면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출소는 긴 수배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동시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면서 호기심이 가는 여성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아는 후배가 정애를 안다고 해 후배를 졸라 소개를 해달라고 했죠. 10년 가까이 연애를 못하면서 그만큼 난 더욱 간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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