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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고민하기에 앞서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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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동이
댓글 3건 조회 4,947회 작성일 10-10-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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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고민하기에 앞서서
(서프라이즈 / 김경진 / 2010-10-03)


노무현 대통령님은 앞으로 진보와 보수의 역사적 대결이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보에 대한 숱한 정의들이 있으나 이를 논하기에 앞서 그 이전에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진보하고 싶어하는가?’ ‘어떤 사람이 사회를 원칙과 상식이 바로 서는 사회로 이끌어가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진보라는 것은 결국 ‘상상력이 있는 사람’의 몫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울러, 보수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현재의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생활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변화’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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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란 나이를 먹어갈수록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지는 이유도 이런 인식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현재에 대한 만족’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 이 세 가지가 사람을 보수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자는 이 세상을 2% 기득권이 다스리는 매트릭스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가 좋은 것 중에 하나는 2%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이나 사회의 최하층을 구성하는 사람이나 모두 변함없이 한 장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자기 스스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대다수가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정확할 것입니다.

그럼 왜 의지를 갖지 않고 있느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미래를 상상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일은 굉장히 ‘피곤’한 일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이 피곤한 일을 나서서 하는 사람의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 중 하나가 ‘사회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국민의 비율이 의미 있는 정치적 행위를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높다’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는데 언론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비율 또한 우리의 기대만큼 높지 못합니다.

진보운동을 하며 사회를 바꿔보고자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항상 절망하게 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철저하게 소수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말입니다.

군사독재 정권처럼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형태의 인간 본능에 반하는 ‘부정’은 이를 바꿔야 한다는 보편적 다수의 공분을 사기에 적합합니다. 하지만 입으로는 ‘공정한 사회’를 떠들면서 뒤로는 딴 짓을 하는 교묘한 형태의 ‘부정’은 보편적 다수의 공분을 사기에는 너무 피상적입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회를 바꿔보고자 하는 ‘피곤한 진보’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사회를 이루는 거의 반수에 가까운 사람들은 세상사 굴러가는 것에 대한 판단을 자신의 의지를 투영한 자발적인 노력에 의존하지 않고 언론이나 지식인 등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합니다.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아이의 성적을 자랑하거나, 골프를 치거나, 가족 외식을 하거나, 집의 평수를 늘리거나, 주식투자에 성공하거나, 승진을 하거나, 룸살롱에서 여자를 끼고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는 것에 비해 너무나도 ‘재미없고 지루하고 피곤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고라나 네이트 등의 토론 게시판을 들여다보면, 이 사회에 공정성에 대해 불만을 가진 비율이 무척 높다는 ‘착각’을 갖게 되기 매우 쉽습니다. 어느 한 방향의 시각을 가진 논지의 글들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게시판에 ‘이미 사회의 공정성에 대해 불만을 품어버린’ 피해계층이 유독 많이 모여 있어서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진보의 미래에 대해 항시 고민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분들은 이미 진보정치가로서 위상을 정립했거나, 진보정치를 연구하는 것이 직업인 분들이나, 언론 평론가라든가 자신의 일상이 항시 진보에 대한 고민을 가까이 둘 수밖에 없는 분들이거나, 아니면 이미 사회로부터 피해를 입은 피해자이기 쉽다는 생각입니다.

진보의 미래를 꿈꾸는 집단이 사회 지도층으로부터 사회 최하층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져야지 진보정치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결국, 진보사회를 이끌어갈 허리가 될 중간계층(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30~40대 평범한 회사원이 될 수 있겠죠)이 얼마나 진보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자발적인 관심을 쏟는가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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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뿔났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유모차부대

대표적인 사례로, ‘광우병 소고기 파동’을 들 수 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아줌마부대를 광장으로 끌어낸 것은, 본질적으로 이 정부가 ‘부당한 정부’라는 분노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내 아이의 식탁에 광우병 걸린 소고기를 올릴 수 없다’라는 ‘보편적인 모정’에서 촉발한 현상이라고 보는 쪽입니다.

결국, 진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앞서서 ‘변화에 대한 모색’ ‘미래에 대한 상상’을 본능적으로 피곤해하고 귀찮아하는 보편적 다수의 ‘행태’를 깊이 있게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진보를 어떻게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넓은 의미로 진보가 ‘사회의 어떤 방향으로의 변화’를 의도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사람의 비율을 어떻게 늘려갈 수 있느냐에 답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김경진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fp_forum&uid=9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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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님의 댓글

진실 작성일

좋은 글입니다.

진보적인 정치, 그런 사회가 아니면 대다수의 일반 대중이 크게 손해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걸 알면 투표로서 진보적인 사회를 꿈꾸는 출마자를 당선하게 할 힘이 있지요. 당연히 현실적으로 언론에서 그걸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먼저 깬 시민들이 활동하여 진보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한시애틀 또한 그런 운동의 도구로 제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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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닥선님의 댓글

삐닥선 작성일

고민의 진실성이 팍팍 느껴집니다. 글 쓰신분도 옮긴 분도. 하지만 이 분의 글 마지막이 너무나 추상적이군요. 물론 글의 의도함의 강조를 그 부분에서 하시지 않았으니 그럴수 있겠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부분이 아쉽네요. 무언가를 할려고 도모한다면 그 뜻이 먼저 분명함이 훨씬 빠르지 않을까요? 방향을 잡기도 대론 실수를 깨닳는 것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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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이님의 댓글

길동이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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